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노자가 재즈를 만나다

[24장 까치발의 순간]

by 노용헌

企者不立 跨者不行 (기자불립 과자불행)

自見者不明 自是者不彰 (자현자불명 자시자불창)

自伐者無功 自矜者不長 (자벌자무공 자긍자부장)

其於道也 曰餘食贅行 (기재도야 왈여식췌행)

物或惡之 故有道者不處 (물혹오지 고유도자불처)


“기자불립(企者不立), 과자불행(跨者不行)”, ‘까치발을 하고서는 오래 서 있지 못하고, 가랑이를 한껏 벌려 보폭을 너무 크게 하면 제대로 길을 걸을 수 없다’는 말이다. 노자가 서양 발레(Ballet)를 봤으면 뭐라 했을까. 발끝으로 서있는 발레의 동작은 오래 지속하기는 어렵다. 그렇지만 동작을 연결하는 테크닉으로 본다면, 기자불립(企者不立)을 달리 해석할 수도 있겠다. 사진기자들에게 발돋움을 하거나, 또는 사다리를 이용할 때, 또는 파인더를 보지 않고 손을 들고 찍을 때가 있다. 많은 사진가들이 몰려 있을 때, 뒤에서 피사체를 보기 어려울 때이다. 키가 큰 사람이나, 높은 곳에서 내려다볼 수 있을 때, 시야를 확보하기가 좋다. 아무튼 까치발을 하고서는 오래 서 있지 못한다. 하지만 이러한 상황은 즉흥성과 순간성, 즉각성을 생각해볼 수 있다. 오래 지속할 수는 없지만, 순간적인 재치를 발휘할 수 있기 때문이다.


그리스는 두 가지 시간 개념을 갖고 있다. ‘크로노스(Kronos)’와 ‘카이로스(Kairos)’다. 크로노스는 우리가 흔히 알고 있는 물리적 시간으로 객관적·정량적 시간이다. 반면, 카이로스는 주관적·정성적 시간이다. “하루가 천 년 같고 천 년이 하루 같다”는 것이 곧 카이로스 시간이다. 시간의 개념은 고정적이지 않고 상대적이다. 영어 단어 ‘temporary’란 말이 있다. 시간은 ‘순간적’이고, ‘일시적’이고, ‘덧없다’. 화이트헤드(Alfred North Whitehead)는 ‘고정 불변하는 실재(reality)란 이 세상에 존재하지 않으며, 철학적 개념(또는 안목)만으로 이해되는 우주는 진정한 우주가 아니다’라고 한다. 실재(reality)란 과정(process)이고 존재는 관계라고 본다. 화이트헤드는 향유를 욕구와 대립적인 의미로 사용한다. 모든 존재는 자기형성의 과정 가운데 경험하면서 향유한다는 것이다. 인간은 밥을 먹으면서 예술을 엿본다. 인간은 겨울밤 하염없이 쌓이는 눈을 보면서 추억을 떠올리며 눈물을 흘린다. 그러면서도 향유의 실재성과 과정의 실재성은 상호 직접적인 관련은 없다고 한다. 기자불립(企者不立)을 과정속에서 바라보면 어떻게 보일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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앙리 까르띠에 브레송(Henri Cartier Bresson)은 <결정적 순간Images à la sauvette>(1952)이라는 그의 이론으로 사진가들에게 교과서같이 유명한 사진가이다. 그의 <결정적 순간>(The Decisive Moment)은 자신의 직관과 미학적 구도가 완벽하게 일치된 찰나의 순간이다. 그런 순간을 포착하는 것이 사진예술이 지향해야 할 점이라는 것이다. 그러나 그 순간이란 지속적이기도 하고, 과정속에 나오는 것이 아닐까 싶다. 그는 그 합일의 순간을 포착하기 위해 기다렸다. 그는 <결정적 순간>은 “시각적 사실과 주관적 감정이 완벽한 조화를 이루는 순간”이라고 정의했다. 그에게 “순간(찰나)”은 중요했다.


“나에게 중요한 것은 시간이다. 모든 것에는 ‘영속성이 없다.’ 어떤 것도 영원히 존재하지는 않는다. 순간순간 모든 것은 변하고, 우리의 항해 일지인 보도 사진에는 오직 중요한 순간만이 남는다.”

“나는 위대한 사진을 찍으려 일부러 애쓰지 않는다. 내가 얻은 모든 것이 위대한 사진이다. 유연하게 대처해야 하며, 위로 뛰어올라야 할 때도, 때로는 그 자리에 머물러야 할 때도 있다. 몰두하되 너무 깊게 생각하지 않고 뭔가를 바라지 않아야 한다. 직감과 통찰력, 눈대중이 필요하지만 여기에 특별한 비결은 없다.”

“In photography, the smallest thing can be great subject. The little human detail can become a leitmotive”

-앙리 까르디에 브레송-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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트럼펫 연주자 디지 길레스피(Dizzy Gillespie)는 찰리 파커와 함께 비밥과 모던 재즈의 발전에 중요한 인물이다. 그가 만든 곡의 제목 역시 〈비밥(Bebop)〉이 있다. 비밥은 스윙과 매우 다른 종류의 음악으로 더 어렵고 불규칙적이며 예측불허하다. 스윙이 다분히 춤곡을 위한 단순한 코드 진행이라면, 비밥은 연주자의 독창성이 돋보이는 즉흥적인 하모니와 리듬의 복잡성이 가미되어 있다. 비밥이란 장르의 이름은 스캣으로 노래할 때 나오는 의미 없는 음절들(두 왑 두 왑, 비 밥바 루 왑)에서 유래한 것이다. 스윙이 백인들이 춤을 추기 위해 대규모 빅밴드로 스윙을 연주하고 스윙재즈라고 불리던 것에서 탈피해 비밥은 소규모 밴드로 구성되어 연주자들의 독창성과 즉흥성을 강조하며 흑인들의 반항의 음악인 셈이다. 비밥은 비트 족의 음악이기도 했다. 잭 케루악의 <길 위에서>를 보면 비트족과 비밥의 연관성을 찾을 수 있다. 때문에 비밥은 록과 마찬가지로 청년 문화와 음악이 만난 사례로 꼽히기도 한다. 디지 길레스피의 〈튀니지의 밤 Night in Tunisia〉, 〈만테카 Manteca〉, 〈콘 알마 Con Alma〉, 〈버크의 일 Briks Works〉은 재즈의 고전이 되었다. 구부러진 트럼펫(앉아서 연주했기 때문에 생긴 모양)과 익살스런 무대 매너로 유명했으며, 1979년 회고록 〈To Be or Not To Bop〉이 출판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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Dizzy Gillespie - Be Bop

https://youtu.be/C0wEX1tgyNw?si=E5xK0mSRIpNZCiBB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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