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50장 삶과 죽음]
出生入死 生之徒十有三 (출생입사 생지종십유삼)
死之徒十有三 人之生動之死地者 亦十有三 (사진종심유삼 인지생동지사지자 역십유삼)
夫何故 以其生生之厚 (부하고 이기생생지후)
蓋聞善攝生者 陸行不遇兕虎 入軍不被甲兵 (개문선섭생자 육행불우시호 입군불피갑병)
兕無所投其角 虎無所措其爪 兵無所容其刃 (시무소투기각 호무소조기조 병무소용기인)
夫何故 以其無死地 (부하고 이기무사지)
출생입사(出生入死). 사람은 태어나고 죽음에 이른다. 생존한 사람은 열에 세 명이고(生之徒十有三), 죽음을 맞이한 사람도 열에 세 명이고(死之徒十有三), 위험에 처한 사람도 열에 세 명이다(動之死地者 亦十有三). 생존한 사람은 현재이고, 죽은 자는 과거이고, 죽음에 처한 사람은 미래이다. 사람은 누구나 죽음에 이르게 된다. 인간은 생노병사(生老病死)의 과정을 거친다. 그 과정은 “생성→성장→안정→소멸”의 4단계이다. 인생을 마라톤에 비유하면 마라톤의 골인지점은 죽음이 기다린다. 키에르케고르가 말한 <죽음에 이르는 병>은 절망이다. 우리는 죽음 앞에 모두 절망한다. 인간은 죽음에 대한 불안을 피할 수 없는 존재이다. 노자는 과거의 사람 열에 세 명, 현재의 사람 열에 세 명, 미래의 사람 열에 세 명을 이야기하고 있다. 그러나 여기서 빠진 한 명은 누구일까. 우리는 과거에도 현재에도, 미래에도 초월한 사람은 노자일까.
죽음본능(타나토스)은 무의식에 관해 유명한 프로이트의 개념인데, 무기물의 상태로 되돌아가려는 것을 의미한다. 인간이 죽음본능을 갖는 이유는 비극적 사태나 긴장을 제거하고, 안정을 추구하기 때문이다. 내부의 긴장을 줄이거나, 일정한 상태로 유지하는 것을 의미한다. 이것은 쾌락이라는 생명본능(에로스)과 대립된다. 그리스 신화 속 타나토스(Thanatos)와 에로스(Eros)는 각각 죽음과 생명을 상징하는 강력한 존재들에서 착안하여, 인간의 본능과 행동을 설명하려고 했다. 어쨌든 이러한 이항대립은 삶과 죽음, 파괴와 창조, 의식과 무의식으로 나뉜다. 인간의 이중적 태도와 함께 말이다. 그러나 들뢰즈는 죽음본능은 없다고 보았다. 들뢰즈에 따르면, 프로이트에게 죽음의 본능이 필요했던 이유는, 충동들 간의 어떤 질적인 대립을 필요로 했기 때문이라고 한다. ‘자아를 분열’에 빠뜨리는 개체화는 일종의 죽음충동과 흡사하다. 들뢰즈의 관점에서 사랑과 죽음, 생성과 파괴는 서로 대립적인 것이 아니라 하나의 존재론적 과정 안에서 서로를 필요로 하는 필연적 요소로 작용한다고 보았다. 죽음을 바라보는 시각은 프로이트, 하이데거, 니체(영원회귀), 사르트르, 등 많은 철학자들의 주제이다. 죽음이란 우리 모두에게 다 적용이 된다. 누구도 피해갈수 없다. 예측 불가한 삶에도 그런 불운과 비극은 나에게도 어느 때이고, 다가올 것이다. 최근 영화 <룸 넥스트 도어>(2024)는 죽음을 앞둔 친구와의 여행을 통해 죽음과 타인에 대한 공감과 연민을 다룬다. 영화의 원작은 시그리드 누네즈의 소설 <어떻게 지내요>이다. 죽음을 연구하던 어니스트 베커(Ernest Bdcker)는 말기 암 상태에서 일생의 저작 <죽음의 부정(The Denial of Death)>를 완성한 후 병원에서 삶의 마지막 순간을 보내고 있었다. 이때 인터뷰를 위해 찾아온 편집자 샘 킨(Sam Kean)에서 그는 이렇게 말했다.
“최후의 순간에 저를 찾아오셨군요. 제가 죽음에 대해 쓴 모든 것을 드디어 검증할 때가 되었습니다. 사람이 어떻게 죽는지, 어떤 태도를 취하는지 보여줄 기회가 찾아온 거죠. 제가 과연 존엄하고 인간답게 죽음을 맞이하는지, 죽음에 대해 어떤 생각을 하는지, 어떻게 죽음을 받아들이는지 보여드리겠습니다.”
-나는 친절한 죽음을 원한다 中에서-
“코요테(Coyotes)”라는 제목의 이 사진은 1945년 프레드릭 좀머(Frederick Sommer)가 촬영한 것이다. 이 흑백 이미지는 자연 환경에서 분해되도록 방치된 흩어져 있는 코요테 사체들의 극명하고 다소 충격적인 이미지를 보여준다. 동물들은 다양한 부패 상태에 있으며, 뼈가 드러나 있고 털이 다양한 분리 단계에 있으며, 건조하고 바위처럼 보이는 땅에 흩어져 있다. 이 장면의 구성은 죽음과 부패의 잔인한 현실을 자연 속에서 보는 사람에게 보여주며, 삶의 과도기와 피할 수 없는 시간의 진행을 은유적으로 강조하고 있다.
“All rare things should be lent away and I have borrowed very freely.”
-Frederick Sommer-
세실 테일러는 난해한 전위 재즈연주자이다. 죽음을 우리는 이해하기 어렵듯이, 프리재즈의 자유로움도 사실 이해하기 어려운 측면이 있다. 당황스러울 정도로 파격적인 즉흥 연주(Improvisation)는 기존의 구조(cosmos)에 얽매이지 않는 혼돈의 세계(chaos)를 보여준다. 날것의 감정과 표현을 숨기지 않는다. 기존 재즈의 전통의 해체라는 관점에서 과격하게 보일수도 있겠지만, 새로운 음악으로의 전환을 예고한다. 1950년대 후반, 프리(Free) 재즈라는 용어로 독특한 장르를 탄생시켰다. 이러한 무형식성이야말로 프리 재즈의 가장 큰 특징이다. 프리 재즈의 대표적인 곡들에는, 오넷 콜먼(Ornette Coleman)의 ‘Lonely Woman’, 존 콜트레인(John Coltrane)의 ‘Ascension’, 앨버트 아일러(Albert Ayler)의 ‘Spiritual Unity’, 세실 테일러(Cecil Taylor)의 ‘Bulbs’, 아치 쉐프(Archie Shepp)의 ‘The Magic of Ju-Ju’등이 있다.
Cecil Taylor - Free Improvisation #3
https://youtu.be/EstPgi4eMe4?si=wTeqOH-xpQiyn0T9