Italo Calvino
봄이 오면, 수십만 명의 도시 주민들은, 일요일마다 가죽 케이스를 그들의 어깨에 메고 외출한다. 그리고 그들은 서로 사진을 찍는다. 그들은 불룩한 사냥 가방을 든 사냥꾼처럼 행복하게 돌아온다; 그들은 현상시킨 사진(picture)을 보기 위해, 달콤한 불안감으로, 며칠을 보낸다(암실에서 연금술적인 조작의 미묘한 즐거움을 더하고, 가족 구성원의 침입을 금지하며, 콧구멍에 강한 산성 냄새를 즐기는 열망으로). 그들이 눈앞에 사진을 가지고 있을 때 비로소 그들이 보낸 하루를 실체적으로 소유하는 것처럼 보이고, 그제서야 비로소 산의 계곡, 들통(pail)과 함께 아이의 움직임, 아내의 다리에 반짝이는 햇빛이 있었던 것과 더 이상 의심할 수 없는 것의 비가역성(irrevocability)을 띠게 된다. 다른 모든 것은 믿어지지 않는 기억의 그림자에 빠져들 수 있다.
사진가가 아닌, 안토니노 파라기(Antonino Paraggi)는 많은 그의 친구들과 동료들을 보고, 점점 더 고립감을 느꼈다. 매주 그는 필터의 감도(sensitivity)나 필름 감광도(DIN)에 대한 담론을 칭찬하는 사람들의 대화가 어제까지, 그들이 공유되고 있다고 확신하며, 고백했던 또 다른 사람의 목소리, 그가 보기에는 너무 흥미롭지 않고, 놀라움이 부족해 보이는 활동에 대한 비꼬는 발언에 의해, 부풀어 오른다는 것을 발견했다.
안토니노 파라기(Antonino Paraggi)는 전문적으로, 제작사의 유통 부서에서 임원직을 맡았지만, 그의 진정한 열정은 크고 작은 시사 문제에 대해 그의 친구들에게 논평하는 것이었으며, 세부 사항의 격론에서 일반적인 원인의 실마리를 풀어내는 것이었다; 요컨대, 그는 정신적 태도로 철학자였으며, 자신의 경험에서 가장 멀리 떨어진 사건들조차도 그 중요성을 파악하는 데 모든 철저함을 바쳤다. 이제 그는 사진적(photographic) 인간의 본질에 있는 무언가가 그를 회피하고 있다고 느꼈고, 새로운 숙련자들이 만든 비밀스러운 매력은 렌즈에 대한 아마추어의 대열에 계속 합류하고, 기술적이고 예술적 기술의 진보를 자랑하는 사람들도 있고, 반대로 구입했던 카메라의 능력(efficiency)에 모든 공을 돌렸고, 그것은 서투른 손으로 조작해도 걸작을 만들 수 있는 능력(그것들에 따르면)이 있었다(그들이 자신의 것을 선언한 것처럼, 기계 장치의 미덕을 확대하는 것을 목표로 하는 자부심이 있는 곳마다, 주관적인 재능은 비례하는 굴욕을 받아들였다). 안토니노 파라기(Antonino Paraggi)는 만족의 한 가지 동기나 다른 동기나 결정적이지 않다는 것을 이해했다: 비밀은 다른 곳에 있다는 것이다.
그가 사적인 불만의 원인을 발견하기 위해 사진을 조사한 것은 —무언가에서 소외감을 느끼는 어떤 사람처럼— 어느 정도는 안토니노(Antonino)가 자신을 친구들과 그를 분리시키는 또 다른, 더 명확한, 과정을 고려할 필요가 없도록 하기 위한, 속임수였다고 말할 수밖에 없다. 이런 일이 벌어지고 있었다: 그의 또래 지인들은, 모두 결혼을 했고, 잇따라, 가정을 꾸리고 있었고, 안토니노(Antonino)는 독신으로 남아 있었다. 그러나, 두 현상(phenomena) 사이에는 의심할 여지없이 연관성이 있었다, 왜냐하면 렌즈에 대한 열정이 종종 부권(父權, fatherhood)의 부차적인 효과로서 자연스럽고, 사실상 생리적인(physiological) 방식으로 발전하기 때문이다. 부모가 아이를 세상에 데려온 후, 가장 먼저 느끼는 본능 중 하나는, 아이를 사진으로 찍는 것이다. 성장 속도를 고려할 때, 아이를 자주 사진으로 찍는 것이 필요하고, 왜냐하면 생후 6개월 된 아기보다 더 덧없고 기억에 남지 않는 것은 없기 때문이다, 곧 삭제되었다가 8개월 중 하나로 대체되고, 그 다음에는 1년 중 하나로 대체된다; 부모의 눈에는, 세 아이가 도달했을 수도 있는 모든 완벽함이, 네 살짜리 아이의 완벽함에 의해 파괴되는 것을 막을 수 없다. 사진 앨범은 여전히 이 모든 덧없는 완벽함들이 저장되고 병치된 유일한 장소로 남아 있으며, 각각은 비교할 수 없는 절대적임(absoluteness)을 추구한다. 흑백이나 풀 컬러 슬라이드의 부동성(immobility)을 줄이기 위해 시선에서 그 자식(offspring)를 프레임하기 위한 새로운 부모들의 열정 속에서, 비-사진가이자 비-어버이(procreator)인 안토니노(Antonino)는 주로 그 검은 도구 속에 숨어 있는 광기를 향한 경쟁의 한 단계를 목격했다. 하지만 도상(圖像)학-가족-광기(狂氣)의 연결에 대한 그의 성찰은 요약적이고 억제되었다: 그렇지 않았다면 그는 실제로 가장 큰 위험을 감수하는 사람이 독신인, 그 자신이라는 것을 깨달았을 것이다.
안토니노(Antonino)의 친구들 사이에서는, 주말을 교외에서 보내는 것이 관례였고, 한 그룹에서, 이 전통은 많은 친구들에게 학생 시절로 거슬러 올라가며, 그들의 여자 친구들, 그들의 아내와 자녀들, 뿐만 아니라 유모와 가정교사들, 그리고 경우에 따라서는 시댁(in-law) 식구들과 새로운 남녀 친구들까지 포함되도록 확장되었다. 그러나 그들의 습관이 계속되고, 함께 모이는 것이, 결코 사라지지 않았기 때문에, 안토니노(Antonino)는 세월이 지나도 아무것도 변하지 않았고, 그들이 여전히 유일하게 살아남은 독신자로 남아 있는 가족 집단이 아니라, 옛날의 젊은 남녀 그룹이라고 가장할 수 있었다.
바다나 산으로 떠나는 여행에서, 가족 그룹이나 다세대(multi-family) 사진 촬영을 위한 시간이 되면, 외부인에게 카메라 버튼을 원하는 방향으로 누를 수 있는, 아마도 지나가는 사람의 도움을 요청하는 경우가, 점점 더 많아졌다. 이런 경우에, 안토니노(Antonino)는 그의 서비스를 거절할 수 없었다: 그는 아버지나 어머니의 손에서 카메라를 가져다가, 두 번째 줄에 있는 그나 그녀의 자리를 차지하기 위해 달려가, 두 개의 다른 사람 머리 사이에 그의 머리를 앞으로 내밀거나, 작은 머리들 사이에 웅크리고 있었다; 그리고 안토니노(Antonino)는, 이 사용을 위해 모든 힘을 손가락에 집중하며, 누르곤 했다.
처음에는, 그의 팔이 어색하게 뻣뻣해지면 렌즈가 배의 돛대나 뾰족한 꼭대기를 잡거나 조부모님, 삼촌, 이모를 빼기 위해 더 방향을 바꿀 것이다. 그는 일부러 이런 짓을 했다는 비난을 받았고, 무례한 농담을 했다는 비난을 받았다. 그것은 사실이 아니었다: 그의 의도는 집단적인 소망의 유순한 도구로 그의 손가락을 사용하는 것뿐만 아니라, 일시적인 특권의 지위를 이용하여 사진가와 그들의 행동의 중요성에 대한 것으로서의 그의 피사체 모두에게 경고하는 것이었다. 그의 손가락 끝이 나머지 사람들과 바라던 대로의 분리 조건에 도달하자마자, 그는 자신의 이론을 합리적인 담론으로 자유롭게 전달할 수 있었고, 동시에 잘 구성된 작은 그룹들을 프레이밍할 수 있었다.(몇 번의 우연한 성공은 그가 뷰파인더와 노출계를 가지고 무심함과 확신을 주기에 충분했었다.)
‘... 왜냐하면 일단 시작한 후에는’, 그는 ‘당신이 멈춰야 할 이유가 없다’라고 설유(說諭)할 것이다. 우리에게 아름답게 보이기 때문에 촬영되는 현실(reality)과 촬영된 것이기 때문에 아름답게 보이는 현실 사이의 경계는 매우 좁다. 피엘루카(Pierluca)가 모래성을 쌓고 있다고 해서 당신이 사진을 찍으면, 성이 무너져서 그가 울고 있을 때 사진을 찍지 않을 이유가 없고, 그런 다음 유모(nurse)가 모래 속에서 조개껍데기를 찾는 것을 도와주며 그를 위로해 준다. 당신이 무언가를 말하려고 하는 순간, ‘아, 정말 아름다워요! 우리는 그것을 찍어야 해요!’, 당신은 이미 사진에 담기지 않은 모든 것이 마치 존재하지 않았던 것처럼, 사라졌다고 생각하는 사람의 관점에 가까워지고, 따라서 실제로 살아있기 위해서, 당신은 가능한 한 많이 사진을 찍어야 하며, 가능한 한 많이 당신이 사진을 찍으려면 가능한 한 가장 사진에 담기 쉬운 방식으로 살거나, 그렇지 않으면 당신의 삶의 매 순간을 사진에 담아야 한다고 생각한다.
‘첫 번째 과정은 어리석음으로 이어지고; 두 번째 과정은 광기로 이어진다.’
‘당신은 열광적이고 어리석은 사람이다’, 그의 친구들은 그에게, ‘그리고 게다가 귀찮은 사람이에요.’라고 말하곤 했다.
‘그의 눈 앞을 지나가는 모든 것을 포착하고 싶은 사람을 위해’, 안토니노(Antonino)는 설명한다, 아무도 더 이상 그의 말을 듣지 않더라도, ‘그가 아침에 눈을 뜨는 순간부터 잠자리에 드는 순간까지, 적어도 1분에 한 장 이상의 사진을 찍는 것만이 유일한 일관된 행동 방식이다. 이렇게 하면 노출된 필름 롤이 아무것도 빼놓지 않고, 우리 시대의 충실한 일기를 표현할 수 있다. 만일 내가 사진을 찍기 시작하면, 내가 정신을 잃더라도, 그것을 통해 이 장면을 볼 수 있다. 하지만 나머지 사람들은 여전히 선택을 고집한다. 어떤 종류의 선택일까요? 목가적인(idyllic) 의미에서, 사과하고 위로하며, 자연, 조국, 가족과 평화롭게 지내는 선택이다. 당신의 선택은 사진뿐만 아니라; 삶의 선택이기 때문에, 극적인 갈등, 일단의 모순, 의지, 열정, 혐오의 강한 긴장을 받아들이지 않게 한다. 그래서 당신은 광기(madness)에서 자신을 구하고 있다고 생각하지만, 당신은 둔감함으로 평범함(mediocrity)에 빠져들고 있다.’
누군가의 전 시누이인, 비체(Bice)라는 소녀와, 다른 누군가의 전 비서인, 리디아(Lydia)라는 소녀가 파도 사이에서 공놀이를 하는 동안 그에게 사진을 찍어달라고 부탁했다. 그는 동의했지만, 그 동안 그는 스냅샷과 반대되는 이론을 세웠기 때문에, 두 친구들에게 충실하게 표현했다:
‘두 소녀가 하루의 이동식 연속체에서 이 시간적 조각들, 즉 1초의 두께를 자르게 만든 이유는 무엇인가요? 공을 앞뒤로 던지면서, 당신은 현재에 살고 있지만, 그 프레임의 운율(scansion)이 당신의 행동 사이에 삽입되는 순간 더 이상 게임의 즐거움이 아니라, 오히려, 미래에 다시 자신을 볼 수 있다는 것, 즉 20년 후 색이 바랜 판지(cardboard) 위에서 자신을 재발견하는 것(현대 프린팅 방법이 변하지 않더라도, 감정적으로 색이 바래져 있다)을 일으킨다. 자발적이고, 자연스러우며, 생생한 스냅샷에 대한 취향은 자발성을 죽이고, 현재를 멀어지게 한다. 촬영된 현실(reality)은 그저께 사진을 찍더라도, 즉시 향수를 불러일으키는 특성, 기념적인 속성을 띠며, 시간의 날개를 타고 기쁨이 사라진다. 그리고 당신이 사진을 찍기 위해 사는 삶은 이미, 최초에, 그 자체를 기념하는 것이다. 스냅샷이 포즈를 취한 초상화보다 더 진실하다고 믿는 것은 편견이다 ...’.
그래서, 안토니노(Antonino)는 두 소녀가 물속에서 이리저리 뛰어다녔고, 그들의 놀이의 움직임에 초점을 맞추기 위해, 태양이 물 위에서 반짝이는 눈부신 빛을 사진에서 차단했다고 말한다. 공을 잡기 위한 몸싸움에서, 물에 잠긴 다른 소녀에게, 몸을 던지던 비체(Bice)는, 파도 위를 날아다니며, 클로즈업으로 뒤에서 그녀와 함께 찍혔다. 안토니노(Antonino)는 이 각도(angle)를 잃지 않기 위해, 카메라를 들고 물속으로 다시 몸을 던져, 거의 익사할 뻔했다.
‘그들은 모두 잘 나왔고, 이건 정말 대단해요’, 그들은 며칠 후에, 서로의 증거를 빼앗으며 댓글을 달았다. 그들은 사진 가게에서 만나기로 약속했다. ‘좋아요; 우리 중 몇 명을 더 데리고 와야 해요’.
안토니노(Antonino)는 19세기와 마찬가지로, 그들의 사회적 지위와 성격을 나타내는 태도로, 포즈를 취한 주체(subject)들에게 돌아갈 필요가 있다는 결론에 도달했다. 그의 반사진(antiphotographic) 반론(polemic)은 블랙박스(black box) 안에서만 행할 수 있었고, 한 종류의 사진을 다른 것과 비교할 수 있었다.
‘저 오래된 박스 카메라(box camera) 중 하나를 갖고 싶어요,’ 그는 여자 친구들에게 말했다, ‘삼각대에 올려놓는 그런 종류의 카메라를 갖고 싶어요. 아직 그것을 구할 수 있을까요?’
‘흠, 아마도 고물상에서...’, ‘보러 가자.’
소녀들은 이 신기한 물건을 구하러 다니는 것이 재미있다고 생각했다; 그들은 함께 벼룩시장을 샅샅이 뒤지고, 오래된 거리 사진가들에게 질문한 후, 그들의 은신처(lair)까지 따라갔다. 그 공동묘지의 물건들에는 더 이상 사용할 수 없는 나무 기둥, 칸막이, 배경막, 쇠퇴한 풍경들이 놓여 있다; 모든 것들은 안토니노(Antonino)가 구입한, 오래된 사진가의 스튜디오를 떠올리게 한다. 결국 그는 벌브(bulb)를 꼭 쥐고, 박스 카메라를 잡는 데 성공했다. 그것은 완벽하게 작동하는 것 같았다. 안토니노(Antonino)도 다양한 감광판(plate)을 구입했다. 소녀들이 그를 도와주었고, 그는 아파트 방에 스튜디오를 마련했고, 그 방에는 현대적인 스포트라이트(spotlight) 두 개를 제외하고는, 모두 구식 장비를 갖추고 있었다.
이제 그는 만족했다. ‘여기서부터 시작해야 한다.’라고 그는 소녀들에게 설명했다. ‘우리 조부모님들이 포즈를 취하는 방식, 그룹을 어떻게 배치할지를 결정하는 관습 속에는 사회적 의미, 관습, 취향, 문화가 있었다. 공식 사진이나 결혼, 가족, 학교 그룹 중 하나는, 각 역할이나 기관이 얼마나 진지하고 중요한지뿐만 아니라, 그들이 모두 거짓이거나 강요된, 권위주의적이고 위계적인지를 전달했다. 이것이 요점이다: 우리 각자가 자신 안에 품고 있는, 그리고 오늘날 우리가 숨기고 있는, 세상과의 관계를 명시하고, 무의식적으로 만드는 것, 그리고 이런 식으로 사라졌다고 믿는 것이다, 반면에...’
‘당신은 누구를 위해 포즈를 취하고 싶으신가요?’
‘내일 두 분이 오시면, 제가 말씀드리는 방식으로 사진을 몇 장 찍어 드릴께요’.
‘이를테면, 마음속 깊은 곳에 무엇이 있나요?’ 리디아가, 갑자기 의심스러워하며 물었다.
스튜디오가 모두 갖춰진, 지금에서야, 그녀는 모든 것이 불길하고, 위협적인 분위기로 가득 차 있다는 것을 알게 되었다. ‘우리가 와서 당신의 모델이 될 거라고 생각한다면, 당신은 꿈을 꾸고 있는 것이다!’
비체(Bice)는 그녀와 함께 킥킥 웃었지만, 다음 날 그녀는 혼자서 안토니노(Antonino)의 아파트로 돌아왔다. 그녀는 소매와 주머니 가장자리에 채색된 자수가 있는 흰색 린네르(linen) 드레스를 입고 있었다. 그녀의 머리카락이 갈라져 그녀의 관자놀이 위로 모였다. 그녀는 약간 장난스럽게 웃으며, 고개를 한쪽으로 숙였다. 안토니노(Antonino)는 그녀를 들여보내면서, 그녀의 진정한 성격을 정의하는 특징이 무엇인지 알아보기 위해 —약간 수줍음이 많고, 아이러니한— 그녀의 태도를 생각해 보았다.
그는 그녀를 큰 안락의자에 앉히고, 카메라와 함께 딸려 있는 검은 천 아래에 그의 머리를 찔러 넣었다. 그것은 뒷벽이 유리로 되어 있는 상자들 중 하나였고, 거기에 마치 감광판 위에 이미 있는 것처럼 이미지가 반영되어 있었고, 희미하게, 약간 우유빛으로 되어 있어, 공간과 시간과의 모든 연결을 끊었다. 안토니노(Antonino)에게는 마치 이전에 비체(Bice)를 본 적이 없는 것 같았다. 그녀는 눈꺼풀을 내리고, 목을 앞으로 쭉 뻗는, 다소 과중한 행동으로 온순했는데, 이는 그녀의 미소가 미소 짓는 행위 이면에 숨겨진 무언가가 있는 것 같았다.
‘저기. 그렇게. 아니요, 조금 더 머리를 앞으로 하세요; 눈을 들어보세요. 아니요, 눈을 내리세요’. 안토니노(Antonino)는 그 카메라 상자(box) 안에서, 그에게 동시에 가장 소중해 보이는 비체(Bice)의 무언가를 찾고자 했었다, 절대적으로.
‘이제 그림자를 드리우고 있다; 빛 속으로 이동하세요. 아니요, 이전보다 더 좋습니다’. 비체(Bice)의 많은 가능한 사진들이 있고 많은 비체(Bice)들의 불가능한 사진들이 있지만, 그가 찾고자 했던 것은 전자와 후자를 모두 포함하는 유일무이한(unique) 사진이었다.
‘널 사진에 담을 수 없어,’ 그의 목소리가 검은 천(hood) 아래에서 억눌리고 불평하며 나타났다. ‘더 이상 널 사진에 담을 수 없어; 널 찍을 수가 없어.’.
그는 천에서 몸을 풀고 다시 몸을 곧게 폈다. 그는 모든 것을 잘못하고 있었다. 그 표정, 억양, 그가 그녀의 얼굴에 포착될 뻔한 요점은 그를 기분, 유머, 심리의 소용돌이(quicksand) 속으로 끌어들인 것이었다: 그 역시, 사라지는 것들의 삶을 찾아가는 사람 중 한 명이었으며, 스냅샷을 찍는 사람들처럼, 도달할 수 없는 것을 사냥하는 사람이었다.
그는 정반대의 길을 따라야 했다: 전통적인 외관, 고정관념, 가면(mask)을 회피하지 않고, 완전히 표면에 있는, 명백하고, 명료(明瞭)한 초상사진을 목표로 삼았다. 가면은 무엇보다도 사회적, 역사적 산물로서, ‘진실(true)’이라고 주장하는 어떤 이미지보다도 진실을 담고 있다; 그것은 점차 드러날 다량의 의미를 지니고 있다. 이것이 바로 안토니노(Antonino)가 스튜디오의 적당한 부스(booth)를 마련하려는 의도가 아니었을까요?
그는 비체(Bice)를 관찰했다. 그는 그녀의 외모의 외부적인 요소부터 시작해야 한다. 비체(Bice)가 옷을 입고 자신을 꾸미는 방식에서, —그가 생각하기를— 당신은 당시의 방식으로 널리 퍼져 있던, 다소 향수를 불러일으키고, 다소 아이러니한 의도를 알아차릴 수 있을 것이고, 이는 30년 전의 유행으로 거슬러 올라가려는 의도였다. 사진은 이 의도를 강조해야 한다: 왜 그는 그것을 생각하지 않았을까요?
안토니노(Antonino)는 테니스 라켓을 찾으러 갔다; 비체(Bice)는 팔 아래 라켓을 들고, 감상적인 엽서 포즈를 취한 채, 칠분신의 초상화(three-quarter) 자세로 일어서야 했다. 안토니노(Antonino)에게, 검은 천 주름 아래에서 본, 비체(Bice)의 이미지는 —호리호리함과 포즈에 대한 적합성, 그리고 포즈가 강조하는 부적절하고 거의 모순적인 측면에서— 매우 흥미로워 보였다. 그는 라켓과 배경의 어떤 요소와 관련하여 다리와 팔의 기하학적 형태를 연구하면서, 그녀의 위치를 여러 번 변경했다.(그의 마음속에 있는 이상적인 엽서에는 테니스 코트의 그물이 있었지만, 너무 많은 것을 요구할 수는 없었고, 안토니노는 탁구대를 준비했다.)
하지만 그는 여전히 안전하다고 느끼지 못했다: 그는 아마도 기억을 찍으려고 했던 것이 아닐까요 —아니면, 기억 속에 떠오르는 희미한 회상의 반향을 찍으려고 했던 것일까요? 그가 현재를 미래의 기억으로 사는 것을 거부한 것은, 나들이(Sunday)의 사진가들처럼, 그가 똑같이 비현실적인 조작을 시도하게 만든 것이 아니었을까요? 즉, 몸을 회상(recollection)에 맡기고, 그의 눈앞의 현재로 대체하는 것일까요?
‘움직여! 막대기처럼 서 있지 마! 라켓을 들어 올려, 젠장! 테니스 치는 척해!’ 갑자기 그는 화가 났다. 그는 포즈를 과장해야만 객관적인 이질감(alienness)을 얻을 수 있다는 것을 깨달았다; 불완전하게 정지된 움직임을 가장해야만 그는 움직이지 않는, 비(非)생물적인 인상을 줄 수 있었다.
비체(Bice)는 그의 명령이 모호해지고 모순되더라도 순종적으로 따랐고, 이는 그녀 자신을 게임에서 제외한다고 선언하는 것이었지만, 이 게임에서 그녀의 것이 아닌, 그녀 자신의 신비로운 것의 예측할 수 없는 움직임을, 어쨌든 암시했다. 안토니노(Antonino)가 지금 비체(Bice)에게 기대했던 것은, 비체(Bice)에게 다리와 팔을 이쪽저쪽으로 올리라고 말하는, 단순한 계획의 수행이 아니라, 그가 요구하는 폭력에 대한 그녀의 반응, 즉 그가 점점 더 그녀에게 영향을 미치도록 강요당하고 있다는 예측할 수 없는 공격적인 대답이었다.
안토니노(Antonino)는 자신이 숨긴 어둠 속에서, 있을 법 하지 않은 테니스 선수가 유리 사각형에 걸러진, 마치 꿈과 같았다고 생각했다: 기억의 깊이에서 오는 존재가, 인식되고 갑자기 예상치 못한 것으로 변하는 꿈과 같았고, 그 변화가 일어나기 전에도 곧 놀라게 했고, 왜냐하면 그것이 무엇으로 변할 수 있는지 알 수 없기 때문이다.
그는 꿈을 찍고 싶었나요? 이 막연한 느낌은 그를 멍청하게 만들었고, 마치 바보처럼, 벌브(bulb)를 손에 들고 방관자(ostrich)의 은신처에 숨겼다; 그동안, 혼자 남겨진 비체(Bice)는, 과장된 테니스 자세로 얼어붙어 백핸드, 드라이브, 라켓을 높이 들어 올리거나 의안(義眼)에서 오는 시선이 마치 공처럼 그녀가 계속해서 뒤로 튕겨 나가며 바닥에 낮추는, 일종의 기괴한(grotesque) 춤을 계속 추었다.
‘그만해, 이게 무슨 말도 안 되는 짓이야? 이건 내가 생각했던 게 아니야’. 안토니노(Antonino)는 천으로 카메라를 덮고 방 안을 왔다 갔다 하기 시작했다.
그 드레스, 테니스, 전쟁 전(戰前)의 의미 등 모든 것이 잘못이었다.... 그녀가 간이 나들이옷(street dress)를 입으면 그가 묘사한 사진을 찍을 수 없다는 것을 인정해야 했다. 여왕들의 공식 사진(official photo)처럼, 어떤 엄숙함, 어떤 화려함이 필요했다. 이브닝 드레스를 입고 나서야 비체(Bice)는 사진의 피사체가 되었고, 피부의 흰색과 천(fabric)의 어둠 사이의 뚜렷한 선(line)을 특징짓는 데콜테옷(decollete)은 보석의 반짝임, 여성의 본질 사이의 경계, 거의 시간에 영향 받지 않고 그녀의 나체에서 거의 비인격적인, 그리고 또 다른 추상, 사회적인 이번에는, 우의(寓意)적인 상(像)의 옷감(drapery)과 같은, 똑같이 비인격적인 역할의 상징으로, 그 드레스가 강조되었다.
그는 비체(Bice)에게 다가가, 목덜미와 가슴 위의 드레스 단추를 풀고, 그녀의 어깨 너머로 흘러내리게 했다. 그는 판지(cardboard)의 흰색에서 얼굴, 목, 드러낸 어깨의 선이 나오고, 나머지는 모두 순백(whiteness)으로 사라지는, 19세기 여성 사진을 떠올렸다.
이것은 그가 지금 원했던 시공간 밖의 초상화였다; 그는 그것이 어떻게 이루어졌는지 확신하지 못했지만, 성공하기로 결심했다. 그는 비체(Bice)에게 스포트라이트를 비추고, 카메라를 가까이 움직였고, 천 주위를 만지작거리며 렌즈의 조리개를 조정했다. 그는 카메라를 들여다보았다. 비체는 벌거벗은 상태였다.
그녀는 드레스를 발 아래로 미끄러뜨렸다; 그 아래에는 아무것도 입지 않았다; 그녀는 한 걸음 앞으로 나아갔다-아니요, 한 걸음 뒤로 물러섰다, 마치 그녀의 온몸이 사진(picture) 속에서 전진하는 것 같았다; 그녀는 카메라 앞에 똑바로 서서, 침착하게, 정면을 바라보며, 마치 혼자 있는 것처럼 서 있었다.
안토니노(Antonino)는 그녀의 모습이 그의 눈에 들어와 전체 시야를 사로잡았고, 캐주얼하고 단편적(斷片的)인 이미지의 흐름에서 벗어나, 한정된 형태로 시간과 공간을 집중시키는 것을 느꼈다. 그리고 마치 이 시각적 놀라움과 감광판(plate)의 인상이 서로 연결된 두 가지 반영(reflex)인 것처럼, 그는 즉시 벌브(bulb)를 누르고, 카메라를 다시 장착한 다음, 스냅 사진을 찍고, 또 다른 감광판을 넣고, 스냅 사진을 찍고, 감광판을 계속해서 바꾸면서 스냅 사진을 찍고, 천에 눌린 채로, ‘저기, 지금, 네, 다시, 이제 괜찮아지고 있어요, 또 하나’라고 (불명확하게) 중얼거리며 말했다.
그의 감광판이 다 떨어졌다. 그는 천(cloth)에서 나왔다. 그는 기뻐했다. 비체(Bice)는 마치 기다렸다는 듯이, 벌거벗은 채로, 그의 앞에 있었다.
‘이제 옷을 입어도 돼요.’ 그는 행복해하면서 말했다, 이미 서두르고 있었다. ‘나가자.’ 그녀는 어리둥절한 표정으로, 그를 바라보았다.
‘이제야 잡았습니다.’라고 그가 말했다. 비체(Bice)가 울음을 터뜨렸다.
안토니노(Antonino)는 이날 자신이 그녀와 사랑에 빠졌다는 것을 깨달았다. 그들은 함께 살기 시작했고, 그는 가장 최신 카메라, 망원 렌즈, 가장 진보된 장비를 구입했다; 그는 암실을 설치했다. 그는 심지어 밤에 잠든 그녀를 촬영하기 위한 장치도 꾸렸다. 비체(Bice)는 플래시에 짜증이 나서, 깨어났을 것이다; 안토니노(Antonino)는 계속해서 그녀가 잠에서 깨어나는 모습, 그에게 화를 내는 모습, 그녀가 베개에 얼굴을 묻고 다시 잠을 찾으려는 모습, 그와 화해하는 모습, 이러한 사진의 침범을 사랑의 행위로 인식하는 모습 등을 스냅샷으로 찍었다.
필름과 증거로 가득 찬 안토니노(Antonino)의 암실에서, 비체(Bice)는 꿀벌통의 벌집에서 수천 마리의 벌들이 밖을 내다보는 동안, 모든 프레임에서 들여다보았지만, 항상 같은 벌(bee)들이었다: 모든 태도, 모든 각도, 모든 옷차림에서, 비체(Bice)는 정체성이 이미지 가루로 파편이 된 채로 포즈를 취하거나 방심한 채 포착됐다.
‘하지만 비체(Bice)에 대한 집착은 무엇일까요? 다른 사진은 찍을 수 없나요?’라는 질문은 그가 친구들과, 그녀로부터 끊임없이 들었던 것이었다.
‘이건 단순히 비체(Bice)만의 문제가 아니야,’ 그가 대답했다. ‘그것은 방법의 문제이다. 사진을 찍기로 결정한 사람이 누구든, 무엇이든 간에, 낮과 밤의 모든 시간에 항상, 독점적으로 사진을 찍어야 한다. 사진은 모든 가능한 이미지를 힘껏 찍을 때만이 의미가 있다’.
하지만 그는 자신에게 가장 중요한 것이 무엇인지 말하지 않았다: 그가 그녀를 지켜보고 있다는 것을 그녀가 몰랐을 때 거리에서 비체(Bice)를 찍었고, 비밀스럽게 렌즈에 담기 위해, 자신이 보이지 않게 할 뿐만 아니라 그녀를 보지 않고, 그의 시선, 어떤 응시도 없는 상태에서, 그녀를 놀라게 할 수 있도록 사진을 찍는 것이었다. 그는 어떤 특별한 것을 발견하고 싶었던 것은 아니었다; 그는 일반적인 의미에서 몹시 마음을 쓰는 사람이 아니었다. 그것은 그가 소유하고 싶었던 내밀한 비체(Bice), 절대적으로 혼자인 비체, 그리고 자신과 다른 모든 사람들의 부재를 전제로 한 존재인 비체였다.
질투(jealousy)로 규정할 수 있든 없든, 어쨌든, 그것은 참기 어려운 열정이었다. 그리고 곧 비체(Bice)는 그를 떠났다.
안토니노(Antonino)는 깊은 우울증에 빠졌다. 그는 일기—당연히, 사진 일기—를 쓰기 시작했다. 카메라를 목에 걸고, 집 안에 틀어박힌 채, 안락의자에 쓰러진, 그는 빈 공간을 응시하며 강박적으로 사진을 찍었다. 그는 비체(Bice)의 부재를 촬영하고 있었다.
그는 사진을 앨범에 모았다: 담배꽁초로 가득 찬 재떨이, 정돈되지 않은 침대, 벽에 젖은 얼룩을 볼 수 있었다. 그는 카메라뿐만 아니라 인간에 의해서도 시각 분야에서 체계적으로 생략된, 사진에 저항하는 세상 모든 것의 카탈로그를 구성하는 아이디어를 얻었다. 모든 주제에 대해 그는 빛과 그림자의 변화를 따라가기 위해, 몇 시간 간격으로 롤 전체를 사용하며, 며칠을 보냈다. 어느 날 그는 방의 완전히 텅 빈 구석에, 라디에이터 파이프(radiator pipe)만 있는 것에 집착하게 되었다: 그는 그 장소(spot)를 계속 촬영하고 싶은 유혹을 받았고, 결국 그것이 그의 삶의 끝까지 지속되었다.
아파트는 완전히 방치되었다; 오래된 신문과 편지들이 바닥에 구겨져 있었고, 그는 그것들을 사진으로 찍었다. 인화지(paper)에 인화(印畵)된 사진들도 촬영되었으며 게다가, 그의 렌즈와 냉담한(distant) 뉴스 사진가들의 것 사이에 간접적인 연관성이 발견되었다. 이러한 사고 다발지점(black spot)을 만들기 위해, 다른 카메라의 렌즈는 경찰의 공격, 불에 탄 자동차, 달리기 선수, 성직자(minister), 피고인(defendant)을 대상으로 했다.
안토니노(Antonino)는 이제 흰 옷(white sheet)에 있는 폭력적인 잉크 반점과, 다양한(mosaic) 망원렌즈(telephoto)로 프레임된 국내의 사물들을 묘사하는 데 특별한 즐거움을 느꼈다. 그의 부동성(immobility)에서 그는 군중의 움직임, 유혈 사태, 눈물, 축제, 범죄, 패션의 풍습, 공식 의식의 기만성(falsity)을 따라 움직이는, 뉴스 사진기자의 삶을 부러워하는 것을 발견하고 놀랐다; 뉴스 사진기자는 사회의 극단적인 순간들, 가장 부유하고 가장 가난한 순간들을 기록하며, 그럼에도 불구하고 매 순간과 모든 곳에서 특별한 순간들을 만들어낸다.
이것은 오직 예외적인 조건만이 의미가 있다는 것을 의미합니까?
안토니노(Antonino)는 스스로에게 물었다. 뉴스 사진기자가 나들이(Sunday) 사진가의 진정한 경쟁자일까요? 그들의 세계는 상호 배타적인가요? 아니면 다른 세계에 의미를 부여하나요?
이와 같이 생각이 미치자, 그는 그의 열정의 몇 달 동안 쌓인 비체(Bice)와 함께한 사진들이나 비체 없이 찍은 사진들을 찢어버리기 시작했다, 벽에 걸린 시험 인화(proof)들의 조각들을 갈기갈기 찢고, 네거티브 필름의 셀룰로이드를 가위로 싹둑 잘라내어, 슬라이드를 잽싸게 도려냈고, 신문지 위에 이 꼼꼼한 파괴의 흔적을 바닥에 펼쳐놓았다.
아마도 사실, 그는 전체 사진이, 대량 학살과 대관식(戴冠式)을 배경으로 한, 개인 이미지 조각들의 더미라고 생각했을 것이다.
그는 신문의 모서리를 커다란 묶음으로 접어서 쓰레기통에 버리려고 했지만, 먼저 그것을 사진 찍고 싶었다. 그는 서로 다른 신문사의 사진 두 장을 선명하게 볼 수 있도록 가장자리를 배열했는데, 우연히 묶음에 들어 있던 사진 두 장이 서로 맞아떨어졌다. 실제로 그는 찢어진 확대 조각인, 반짝이는 두꺼운 종이(pasteboard)가 두드러지도록 꾸러미(package)를 조금 다시 열었다. 그는 스포트라이트(spotlight)를 비추었다; 그는 그의 사진에서 반쯤 구겨지고 찢어진 이미지를 인식할 수 있기를 원했고, 동시에 그것들의 우연한 비(非)현실성, 잉크로 더럽혀진 그림자로 느낄 수 있기를 원했고, 게다가 동시에 그것들이 의미를 지닌 대상(object)으로서의 구체성(concreteness), 즉 그것들을 쫓아내려는 주의(attention)에 집착하는 힘을 느낄 수 있기를 원했다.
이 모든 것을 하나의 사진으로 담기 위해서 그는 특별한 기술을 습득해야 했지만, 그제서야 안토니노(Antonino)는 사진 촬영을 그만두게 되었다. 모든 가능성을 다 소진한, 그가 완전히 돌아서고 있던 순간에 안토니노(Antonino)는 자신이 남은 유일한 코스—아니면, 오히려, 그동안 모호하게 찾으려 했던 진정한 코스가, 사진 촬영뿐이라는 것을 깨달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