광화문에서 #101

나는?

by 노용헌

내가 아닙니다. 재판장님, 죽은 이가 나의 입으로 말합니다. 여기 서 있는 건 내가 아니고, 들어 올려지는 팔은 나의 팔이 아니고, 하얗게 세어 버린 건 나의 머리카락이 아니며, 내가 저지른 일이, 내가 저지른 일이 아닙니다.

당신들은 그걸 이해할 수 없습니다. 당신들은 지금 말하는 이가 살아 있는 사람이라고, 한 인간이라고 생각할 것입니다. 기껏해야 미친놈이거나. 나는 미치지 않았습니다. 미치지는 않았을 겁니다. 그러나 나는 십 년 동안 땅속에 누워 있고, 나의 팔다리는 썩었습니다. 나의 뼈는 잿빛 가루가 되었고, 나의 숨은 --나는 더이상 숨을 쉬지 않습니다. 모든 것이 침묵합니다. 모든 것이 다 지나갔어요. 나는 땅속에, 베르됭을 눈앞에 두고 누워 있고, 저 위에는 두오몽의 잔해들이 흩어져 있습니다. 버려진 무덤들, 버려진 땅, 버려진 시체들 위로 바람이 붑니다. 그곳에 가서, 모래를 파내고 왼쪽으로 큰 유탄의 흔적을 헤집어 보세요. 거기에 물이 있습니다. 아마도 진흙이 부드러워졌을 겁니다. 두려워할 필요는 없습니다. 전쟁은 이제 없습니다. 폭탄도 날아들지 않고, 당신 몸을 갈기갈기 찢어 흩뿌리지 않습니다. 비명도 울려 퍼지지 않고, 팔다리가 공중으로 날아다니지도 않습니다. 피도, 찢어진 몸도 없습니다. 고요합니다. 모든 것이, 마침내, 거기서 몸을 숙이세요. 흙을 조금 치워 보세요. 그러면 당신은 찾을 겁니다-- 나를, 그래요, 뼈와 두개골과 재와 나의 이름을. 나의 이름이 아니지만, 나의 이름이기도 한 그것을, 나의 것이 아니라 다른 이의 것임에도 이제 나에게로 온 나의 운명을, 나 자신의 운명인 듯 숨이 막힐 듯 한 그것을.

나의 입이 아닌 입, 나의 혀가 아닌 혀로 그것을 어떻게 이야기해야 할까요? 나 자신도 믿을 수 없는 것을 당신이 어떻게 믿을 수 있을까요? 하지만 그랬습니다. 그건 그렇게 벌어졌고, 현실이었으며, 다른 날들과 다름없는 날이었습니다. 아니, 다른 날들과 같지는 않았습니다. 바쉬 대위가 우리에게 혁명이라고, 뮌헨과 베를린에서 혁명이 일어났다고 말했으니까요. 전쟁이 끝났다고, 사 년 만에 끝났다고 했습니다. 더이상 폭탄도, 죽음도, 진창도, 강제도, 법도, 무기도 강박도 없다고 했습니다. 모든 것이 와해되고, 모든 것이 해체되고, 새로운 시대, 새로운 삶이 시작되었다고 말입니다.


-페터 플람, 나?, P9-1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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