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광화문에서 #107

예술이 무기일까?

by 노용헌

"예술이 무기일까?" 그가 내게 물었다. 그 '무기'라는 말은 참으로 경멸적이었고, 그 자체가 무기였다. '예술은 모든 것에 대해 올바른 입장을 취해야 할까? 예술이 좋은 것들의 옹호자야? 이걸 다 누구에게 배웠지? 예술이 슬로건이라고 누구한테 배웠어? 누가 너한테 예술은 '민중'을 위한 거라고 가르친 거야? 예술은 예술을 위해 존재하는 거야. 그렇지 않으면 누군가의 관심을 끌 만한 예술은 나오지 않아. 심각한 작품을 쓰려는 동기가 뭐지, 주커먼 군? 물가 억제에 반대하는 적을 무력화시키려고? 심각한 작품을 쓰는 동기는 심각한 작품을 쓰는 것 그 자체야. 사회에 반항하고 싶어? 그렇다면 내가 방법을 알려주지. 잘 쓰는 거야. 잃어버린 대의에 헌신하고 싶어? 그렇다면 노동자계급을 위해 싸우지마. 그들은 잘 해나갈 테니까. 플리머스 같은 항구에는 노동자들이 차고 넘칠 거야. 노동자는 우리 모두를 정복할 거고, 그들의 어리석음에서 이 속물적 나라의 문화적 운명을 가득 채울 구정물이 쏟아져나올 거야. 이 나라에 곧 노동자와 농민의 정부보다 훨씬 더 끔찍한 게 생겨날 거야. 바로 노동자와 농민의 문화지. 잃어버린 대의를 위해 싸우고 싶나? 그렇다면 말을 위해 싸워. 거창한 말이 아니라, 감격적인 말이 아니라, 이걸 찬성이라고 저걸 반대하는 말이 아니라, 네가 짓밟히고 억압받는 자들의 편에 선 훌륭하고 자비로운 사람이라는 걸 존경스러운 사람들에게 떠벌리고 광고하는 말이 아니라, 형벌처럼 미국에서 살아가는 교양 있는 소수에게 네가 말의 편이라는 걸 알리는 말을 위해 싸우라고! 네가 쓴 이 각본은 쓰레기야. 끔찍해. 정말 화가 나. 조악하고, 유치하고, 멍청하고, 선동만 있는 헛소리야. 말로 세상을 모호하게 만들고 있어. 예술가의 미덕을 입증하려는 욕망보다 예술에 더 사악한 영향을 끼치는 건 없어. 이상주의의 끔찍한 유혹이라고! 넌 너의 이상주의, 너의 미덕을 완전히 정복해야 할 뿐 아니라 너의 사악함도 정복해야 해. 애초에 너로 하여금 글을 쓰게 만든 것, 너의 분노, 너의 정치적 동기, 너의 슬픔, 너의 사람, 이 모든 걸 미적으로 정복해야 하는 거야! 처음부터 설교하고 자기 입장을 내세우면, 처음부터 우월한 관점을 들이대면 예술가로서 무가치하고 한심한 존재가 되고 말아. 왜 이런 선언문을 쓰지? 주위를 둘러보고 '충격' 받아서? 주위를 둘러보고 '감동'을 먹어서? 사람들은 자신의 느낌을 너무 쉽게 포기하고 거짓 느낌을 꾸며내. 무엇이든 즉석에서 느끼고 싶어하는데, '충격'과 '감동'이 가장 느끼기 쉬운 거야. 가장 멍청하기도 하고, 드문 경우가 있긴 하지만, 주커먼 군, 충격은 항상 가짜야. 선언문, 예술은 절대 선언문의 수단이 아냐! 너의 사랑스러운 쓰레기를 여기서 치워주면 고맙겠군."


-필립 로스, 나는 공산주의자와 결혼했다, P366~36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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