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에드워드 키블 채터턴의 <덩케르크>

영화 <덩케르크> 2017년

by 노용헌

2017년 7월에 개봉한 크리스토퍼 놀란 감독의 전쟁 영화. 제2차 세계 대전 중 일어난 덩케르크 철수작전을 소재로 한다.

영화 덩케르크 32.jpg

운명적인 다이나모 작전(Operation Dynamo, 덩케르크 철수 작전)을 앞두고 의회에서 처칠이 한 연설이다. 전례 없는 위기에 처한 상황 속에서 비장함과 절박감, 어떠한 희망도 보이지 않지만 여전히 포기하지 않는 위대한 정치가로서의 강한 의지가 80년 가까이 지난 지금도 읽는 이의 심금을 울린다. 그의 진정 어린 호소에 영국 국민이라면 누가 움직이지 않았을 것이며 누가 국가의 위기에 무관심할 수 있었을까.

그 시절 영국이 처한 상황은 500여 년 전 스페인 무적함대가 영국 침공을 위협한 이래 그야말로 공전의 위기였다. 오랫동안 ‘해가지지 않는 나라’라고 불리며 여전히 전 세계의 1/4을 지배하고 있다는 사실도 아무런 의미가 없었다. 5월 26일부터 시작된 덩케르크 철수 작전이 제2차세계대전을 통틀어 그야말로 극적인 장면이 된 것은 단순히 전시 프로파간다의 결과물이 아니라 그만큼 연합군에게 위기의 순간이었기 때문이다. 현대 전쟁사상 이에 비견될 만한 작전은 아마 1950년 12월 15일 미 제10군단의 흥남 철수 작전 정도가 아닐까 싶다. (P8)

영화 덩케르크 27.jpg

당시 룬트슈테트 원수가 지휘하는 독일 A집단군 주력은 북상하여 칼레, 덩케르크 등 북부 프랑스 대서양 연안의 여러 항구를 목표로 파죽지세로 전진하면서 포위망을 점차 좁혀나가고 있었다. 또한 동쪽에서는 보크 원수가 지휘하는 B집단군 역시 서진하여 포위망을 더욱 강화하였다. 영국 원정군 사령관 고트 장군은 프랑스 군의 총체적인 와해, 사기의 붕괴, 파죽지세로 밀고 오는 독일군을 저지할 방법이 없다는 등 5월 19일 처칠에게 해상 철수를 건의하고 있었으며, 영국 해군은 그보다 5일 전인 5월 14일부터 이미 유사시를 대비해 철수에 필요한 각종 선박 징발과 철수 작전을 준비하고 있었다. 그만큼 상황이 급박했음에도 히틀러는 왜 이 시점에서 멈추라는 명령을 내렸던 것인가, 이는 흔히 제2차세계대전의 10대 미스터리 중 하나로 꼽히기도 한다. 그만큼 상식 밖의 명령이었기 때문이었다.

여기에 대해 히틀러가 영국과 싸울 생각이 없었기에 일부러 명예롭게 항복할 기회를 주려고 하였다는 등, 공군만으로도 충분히 괴멸시킬 수 있다는 괴링의 허풍 탓이라는 등 별별 주장이 있지만 대부분 추론일 뿐 근거는 없다. 또한 독일군의 병참 문제와 피로가 극에 달해 있었기에 히틀러의 명령이 없었다 해도 과연 연합군을 돌파하고 덩케르크에 도착할 수 있었을지 의문을 제기하는 사람도 있다. 하지만 당시 상황을 볼 때, 이미 패닉 상태에 빠져 있던 연합군이 국지적인 저항을 할 수는 있었겠지만 완전히 고립된 상태에서 독일군을 막아낸다는 것은 현실적으로 불가능한 일이었다. (P14-15)

영화 덩케르크 23.jpg

언론 기사와 직접 철수 작전에 관여했던 지휘관들과의 인터뷰를 바탕으로 당시의 상황을 면밀히 좇아서 사실적으로 묘사하였다. 그래서 이 이야기의 진실은 의심의 여지 없이 명백하고, 시간이 흘러도 훼손되지 않을 것이다. 덩케르크 철수 작전은 상선과 그 종사원들이 국가에 공헌한 가장 위대한 사례다. (P23-24)


1940년 5월 10일 03시 30분, 독일 항공기가 헤이그의 병영을 기습 폭격함으로써 현대 유럽 문명사에서 가장 거대하고도 긴박한 드라마의 막이 올랐다. 불과 두 시간 전에 800명의 네덜란드 병사들이 야간 훈련을 마치고 돌아와 휴식을 취하고 있었다. 따라서 그들 대부분은 잠자는 동안 독일의 폭격을 받고 목숨을 잃었다.

동시에 나치는 네덜란드의 비행장을 파괴했고, 이어서 대규모 수송기 편대가 메서슈미트 BF-109 전투기대의 호위를 받으며 헤이그 인근에 공수부대를 낙하시켰다. 한편 하늘에서는 하인켈 비행기들이 항복을 권하는 전단을 뿌렸다. “저항해도 소용없다. 너희는 이미 포위됐다.” 무자비한 침입자들은 이렇게 말했다.

저지대 국가를 침공하기 바로 전날, 독일은 네덜란드의 중립성과 자유를 존중하겠다고 공식적으로 선언한 바 있었다. 그런 뻔뻔함은 인정사정없는 잔혹함만큼이나 독일의 전형적인 작태였다. 완벽하게 조직되어 파죽지세로 돌진하는 기계화부대, 스파이와 반역자들의 악마적인 협력에 이르기까지 독일군이 그들의 의지를 수행하는 데에는 별다른 어려움이 없었다. (P25-26)

영화 덩케르크 19.jpg

네덜란드가 연합군에 지원한 상선들도 매우 유용했다. 연간 300만 톤 규모의 네덜란드 해운은 프랑스의 그것에 버금가는 수준이었다. 네덜란드는 제1차세계대전 당시의 손실을 감안하더라도 180척의 원양어선과 250척의 연안무역선을 보유하고 있었다. 영국 해운부가 영국 수출품 운송과 원자재 및 식료품 수입을 위하여 네덜란드와 맺은 용선 계약의 규모는 대략 100만 톤에 달했다. 더구나 이 수치는 독일군의 유보트와 공중 폭격 및 포격에 대비해 호위선단을 꾸린 경우만 계산한 것이다.

그 결과, 히틀러는 지상군을 동원하여 여러 도시와 영토를 함락했으나 네덜란드 상선이 무역 항로를 따라 항해하는 것을 방해하지도 못했고 태평양과 인도양에서 통상적으로 활동하는 상선을 공격할 수도 없었다. 그런 목적을 이루기 위해서는 뛰어난 해군력이 필요했지만 히틀러에겐 그것이 없었다. (P38)

영화 덩케르크 33.jpg

사실 그 지역에 배치된 가믈랭 장군 예하 부대는 수적으로 너무 적었던 반면 방어 범위는 지나치게 넓었다. 가믈랭의 최정예 부대는 마지노선의 측면에서 벨기에로 진격하고 있었다. 뫼즈강의 방어 태세가 취약할수록, 적군의 입장에서는 상대적으로 침투가 쉬웠을 것이다. 게다가 프랑스군이 주요 교량들의 파괴를 게을리 하는 등 믿기 어려운 실책을 범하는 불운까지 더해졌다.

바로 이 때문에 독일군 전투기에 이어 기갑사단이 훈련이 부족한 병사와 자질이 부족한 장교로 구성된 프랑스 부대를 손쉽게 패주시키고 코라프 장군의 군대를 혼란에 빠뜨렸다. 뿐만 아니라 독일군은 중단 없이 항전이 계속되어야 할 연합군 방어선에 치명적인 구멍을 만들어놓았다. 기습작전, 나치의 대규모 기계화부대와 항공기가 유기적으로 협공하는 새로운 전술, 공수부대의 침투(벨기에에서 가장 견고한 리에주 요새까지 함락시킨)에 따른 프랑스군의 후방 교란, 가짜 뉴스의 교묘한 유포, 전화를 통한 비공식적 명령 하달로 야기된 주먹구구식의 철군에 이르기까지 온갖 이유로 촉발된 대재앙에서 프랑스는 도저히 회복할 수 없었다. 5월 14일은 역사상 가장 중요한 날 중에 하나다. 프랑스의 근대적 발전이 정점에 달한 동시에 가파른 추락의 시발점이 되었기 때문이다. (P45)

영화 덩케르크 11.jpg

독일군이 당면한 목표는 북쪽 전선의 연합군을 포위하고 괴멸시키는 것이었다. 따라서 독일군 전투기들은 영국군이 보급품과 군수품을 조달받던 거점 항구 덩케르크를 이미 5월 22일부터 폭격하기 시작했다. 그리고 5월 23일 나치는 블로뉴 외곽에 주둔하던 연합군과 교전을 벌였다. 다음날 연합군 수비 병력은 덩케르크 항구에서 퇴각해야 했다. 또한 독일군 경보병 부대가 연합군의 후방에서 신속하고도 맹렬하게 진격하면서 칼레 외곽까지 밀어붙였다. 한마디로 독일군은 거점 항구들을 고립시킴으로써 그 무엇으로도 북쪽 연합군의 완벽한 전멸을 막을 수 없다며 의기양양해 있었다. 영국, 프랑스, 벨기에의 병사들은 죽거나 포로로 잡힐 운명에 처했다.

영국군이 투르크앵으로부터 퇴각 명령을 받은 것은 5월 27일이었으나, 프랑스군과 피난민이 도로를 가득 메운 바람에 영국 원정군의 주력이 퓌른(Furnes) 인근에 도착한 것은 5월 29일이었다. 퓌른에서는 수비대가 영국 원정군이 덩케르크로 철수하는 것을 막으려고 압박해 오는 독일군에 맞서 이 도시의 운하 남쪽을 지키고 있었다. 교전은 치열했고 많은 사상자는 불가피하였다. 손에 땀을 쥐는 시간이 흐른 뒤 수비대는 퓌른을 포기하고 6월 1일 이른 시간에 벨기에 북부의 바닷가 마을 드판으로 퇴각했다. (P47-48)


역사상 가장 긴박했던 2주, 그것은 거대한 드라마였고 인간의 목숨을 건 도박이었다. 그때의 패주는 승리로, 요컨대 도저히 극복할 수 없는 난관이 승리로 바뀌었다. 그 불가능을 가능케 한 것은 군민이 하나가 되어 나섰던 영국의 극한 노력이었다. (P53)

영화 덩케르크 10.jpg

상황이 다급해지고 긴장감이 높아졌으나 여전히 출항 명령은 떨어지지 않았다. 시시각각 불안감이 조여들었고, 인간과 선박의 생명은 불확실하게 연명되고 있었다. 어느 쪽이 먼저일까? 출항 아니면 포탄?

드디어 그 순간이 왔다.

“출항 준비, 앞으로! 전진!”

엔진이 작동했고, 항구 입구를 지나 빠른 조류 속으로 뛰어든 ‘벤로어스’호는 속력을 높였다. 방파제를 막 지났을 때 독일군의 손에 넘어간 해안 포대가 증기선을 향해 맹렬히 포화를 퍼부었다. 상황이 나빴다. 해도를 펼쳐 든 적군은 ‘벤로어스’호가 방파제를 지나면서 해안과 수평이 되어 선체의 측면을 더없이 쉬운 표적으로 드러낼 것을 알고 있었다.

그렇다면 ‘벤로어스’호가 직선항로를 택하면 되지 않을까?

증기선의 크기에 비해 수심이 얕았고 설상가상으로 그때는 물이 빠지는 간조기였다. 포탄의 물기둥은 점점 가까이 떨어지는데 상황은 진퇴양난이었다. 앞에는 얕은 수심, 뒤에는 나치!

“상황을 판단해보면, 포격에 노출되는 위험을 무릅쓰고라도 모래톱을 건너는 편이 더 안전해.” 용감한 선장이 말했다. (P65)

영화 덩케르크 09.jpg

요새와 부두를 향한 적군의 포격이 재개되었고, 급강하 폭격기들이 교대로 쉬지 않고 출격했다. 영국군 진지는 도살장으로 바뀌었고 무시무시한 화마가 도시 전역을 휩쓸었다. 지옥의 문이 열린 것이다. 17시를 앞두고 요새의 프랑스군은 항복하기에 이르렀다. (P67)


칼레 전투는 영국 원정군을 고립시키려던 독일군 2개 기갑사단을 막아냄으로써 가장 값진 성과를 거두었다. 바로 이 일요일에 덩케르크의 위대한 철수 작전이 시작되었다. 칼레에서는 단 한 명도 헛되이 죽지 않은 것이다.

수비대의 심각한 상태가 영국 남부의 한 비행장에 전달된 것은 일요일 밤이었다. 보고에 따르면 물과 탄약이 절실했다. 무엇보다도 물이 시급했다.

비행기 20대가 폭탄 대신 원통형 용기를 각각 2개씩 싣고 월요일 새벽에 창공으로 날아올랐다. 원통형 용기마다 목마른 병사들을 위한 물이 약 40리터씩 담겨 있었다. (P68)


“여러분은 지옥으로 가는 겁니다. 폭탄과 기관총 공격을 받게 될 겁니다.” (P86)

영화 덩케르크 08.jpg

독일군이 해안 쪽으로 진격하기 직전, 연합군이 의지할 수 있는 항구가 아직 5개 남아 있었다. 그 항구들을 통하여 프랑스와 저지대 국가들에 보급품을 공급할 수 있다는 기대도 아직 남아 있었다. 그 5개 항구는 제이브뤼허, 오스탕드, 덩케르크, 칼레, 블로뉴였다. 제이브뤼허가 적절한 시점에 콘크리트로 채운 폐색선을 수장함으로써 효과적으로 봉쇄된 것은 이미 언급했다. 요컨대 브뤼주 운하의 갑문 개폐장치를 파괴했고 갑문 접근수역은 메워졌다.

지금까지 오스탕드가 다급히 버려지고 칼레와 블로뉴가 완강한 저항 끝에 독일군의 수중에 들어가기까지의 과정, 그 결과 덩케르크만이 위기에 봉착한 영국 원정군이 생환할 수 있는 관문으로 남았다는 것을 살펴보았다. 선택된 해변은 덩케르크에서 동쪽으로 프랑스 최북단의 작은 마을인 브레이듄스(Bray Dunes)를 지나 드판 방면으로 13~14킬로미터 펼쳐져 있다. 브레이듄스에서 멀지 않은 곳에 쥐트코트 마을이 있는데, 곧 언급할 쥐트코트 패스(Zuydcoote Pass)는 이 마을 명칭에서 유래한다. 쥐트코트 패스는 (선박들이 대가를 치르고 알게 됐듯이) 변화무쌍하기 때문에 만조기를 기다리는 것이 상책이다. 게다가 밤에는 특히 물살이 강해서 항로에서 벗어나지 않도록 주의해야 한다. (P93-94)

영화 덩케르크 07.jpg

5월 26일 일요일 램지 사령관의 지휘하에 33만 5000명 이상의 철군 작전이 막을 올렸을 때, 사령관은 물론 어느 누구도 그날 수많은 사람들이 기도한 것처럼 작전이 대성공으로 끝나리라고는 기대하지 않았다. 모든 가용 선박들이 20명 이상의 해군 장교 및 180명가량의 수병들과 함께 도버에서 출항했다. 그들은 (적어도 공식적으로는) 자신들이 어떤 임무를 띠고 가는지 몰랐으나, 덩케르크로 가는 도중에 많은 폭격을 받으면서 앞으로 무슨 일이 벌어질 것인지 짐작했다. 이 대담한 작전의 전반적인 통제는 실제적으로 다이나모 룸(The Dynamo Room)에서 이루어졌고, 작전의 명칭도 여기서 따왔다. 다이나모 룸은 정확히 말해서 도버성의 지하 터널에 있는 아주 분주한 비밀 작전실로, 이곳에 있는 전화기 일곱 대는 쉬지 않고 울렸으며 16명의 인력이 상시 근무를 하고 있었다.

48시간 안에 최대한 많은 병사를 구조해 영국으로 돌아온다는 것이 애초 작전의 핵심이었고, 노르웨이 해상에서 그런 작전을 경험해본 데니 선장은 사실상 성공하기 어려울 것이라는 현실적인 생각을 하고 있었다. 그런데 이틀이 지나면서 상황이 크게 호전되기 시작했고, 작전은 예상했던 것보다 훨씬 더 큰 대형 쇼로 바뀌었다. 구조 규모는 병사의 10퍼센트가 아니라 수만, 수십만이었다. 게다가 영국 원정군뿐 아니라 다수의 프랑스 병사들도 포함되었다. (P97-98)

영화 덩케르크 31.jpg

“작전이 절정에 달한 날 6만 6000명이 덩케르크에서 철수했지만 우리 측 선박의 손실도 컸습니다.” 훗날 램지 중장은 이렇게 말했다. 독일군이 칼레 해역을 지나가는 직선 항로에 포격을 시작하자 영국군은 새로운 항로를 선택해야 했고 그 결과 120킬로미터의 항로가 280킬로미터로 연장되었다. 독일군이 또다시 새 항로로 포격 지점을 옮기자 영국군은 세 번째 항로, 즉 소해정을 선두로 모래톱을 건너는 항로를 찾아냈다.

블로뉴에서의 철군은 17시 30분에서 다음날 03시 사이에 효율적으로 작전을 펼친 영국 구축함 6척을 통해 이루어졌다. 독일군의 맹폭에도 불구하고, 함교에 있다가 저격당한 소함대 함장의 전사에도 불구하고 구축함들은 병사 4600명을 구조해냈다. 군대는 저항이 불가능한 마지막 순간까지, 독일군 해안 포대의 포격에 영국 선박들이 극한 위험에 처할 때까지 장렬하게 칼레를 사수했다. (P99-100)

영화 덩케르크 06.jpg

그리하여 6월 3일 월요일 동트기 전, 영국 원정군의 마지막 병사까지 거의 다 승선했다. 부상자 500명만 따로 병원선 한 척에 승선했는데, 불행히도 독일군의 야만스러운 폭격에 침몰하고 말았다. 그렇게 마지막을 향해 가는 과정은 긴장된 순간이었고 전율의 시간이었다. 물이 막 빠지기 시작했을 때 프랑스 국적의 증기선 ‘루앙’호가 덩케르크 서쪽의 모래톱 위로 좌초하는 불운을 겪었다. ‘루앙’호를 다시 띄우려는 시도들은 실패했고, 결국 간조기에 그것은 움직이지 못하는 애석한 정물화로 남았다.

그러나 만조기가 돌아오자 ‘루앙’호는 모래톱을 빠져나와 도버에 도착했다.

독일군의 공세가 거세지고 그에 대한 반격도 강력하게 전개되면서 많은 프랑스군이 승선 직전에 물러나야 했다. 6월 3일의 구조선들이 인원을 다 채우지 못하고 덩케르크를 떠난 이유는 그 때문이었다. 그러나 02시 45분에 프랑스군은 다시 부두로 나오기 시작했다. 상쾌한 북풍이 불어오는 맑고 화창한 하늘이 대단원의 막을 내려다보고 있었다. 항구엔 프랑스 어선과 소형 선박들이 밀집하여 상대적으로 큰 선박들과 뒤엉키는 등 혼전 양상을 보였다. 마지막 순간까지 덩케르크항을 책임졌던 프랑스의 용맹한 제독 아브리알은 영국으로 떠나는 마지막 선박에 승선했고, 그 배는 03시 직후에 출항했다. 그로부터 10분 후, 폐색선들이 도착하여 한동안 독일군의 이용을 막기 위한 덩케르크항 불능화 작전에 돌입했다.

해안에 남아 있는 선박은 거의 없었다. 그래도 진격해 온 독일군은 부두를 향해 기관총을 난사했다. 역사상 가장 위대한 철수 작전은 그렇게 끝났다. 그리고 지치고 고된 몸으로 영국에 돌아간 병사들, 그들은 또다른 작전을 위하여 재편성될 수 있었다. (P109-110)

영화 덩케르크 35.jpg

인간의 본성이 명백한 것에는 좀처럼 감화를 받지 않는다는 게 이상하지 않은가? 우리는 주변에 있는 것들을 고마움 없이 취하곤 한다. 우리의 생존에 필수불가결한 것들을 별다른 고마움도 없이 받아들이는 것이다. 영국민으로서 영국 해군에 대한 채무의식을 느끼면서도, 음식과 생필품을 가정까지 가져다주는 상선에 고마워하는 데엔 몹시 인색했다. 별다른 무장도 하지 않은 이 상선들은 기뢰와 잠수함들의 숨은 위협을 지나, 포탄과 폭탄과 총탄 사이를 달려서 적군의 공포에 굴복하지 않고 바다를 건너왔다.

제1차세계대전 당시 식권과 고기 없는 날의 도입만으로도 보통 사람들은 식품과 생필품이 위험한 경로를 통해 들어온다는 점을 기억했고, 그후로는 상선의 역할에 새로이 존경심이 생겨났고 이에 대체로 공감하는 분위기가 지속되어왔다. 그러나 그마저도 심흘수선의 원양 화물선에만 해당되는 얘기였다. 덩케르크가 대중에게 상기시킨 석은 영국의 민간 선박이 얼마나 방대하고 세분화되어 있는지, 증기기관이나 내연기관으로 움직이는 소형 선박들이 해안을 오르내리고 아일랜드해와 영국해협을 건너 행하는 교역이 얼마나 큰 규모인지였다.

구조된 병사들 모두 이 작은 선박들에게 더없이 깊은 고마움을 간직할 것이다. 그러나 모든 이들을, 특히 해군과 육군을 놀라게 만든 것은 평화를 누리다 갑자기 전쟁의 가장 혹독한 시련을 감당하기 위하여 소집된 항해자들의 비범한 적응력이었다. (P131-132)

영화 덩케르크 05.jpg

어떤 사람들이 늘 모험에 말려드는 것처럼, 장소들 중에도 그런 곳이 있다. 덩케르크는 수 세기 동안 단순한 전장의 일부가 아니라 그 이상의 일을 겪었다. 550년 전에는 영국에 의해 불탔고 나중에는 스페인에 의해, 그다음에는 프랑스에 의해 그렇게 됐다. 듄 전투 이후 덩케르크는 영국의 소유가 되었다가 나중에 찰스 2세가 프랑스에 되팔았다. 대부분의 사람들은 여전히 플랑드르 말을 사용했고, 제1차세계대전 동안에는 영불 연합군의 해군 기지로서 밤마다 독일군의 폭격을 받았다.

그래서 사람들은 덩케르크가 제2차세계대전에서 예전처럼 화염과 격전의 한복판으로 빠져들었다고 해도 그리 놀라지 않았다. ‘덩케르크’라는 명칭이 유래했다는 모래언덕의 가장자리 덤불이 또다시 역사의 배경이 될 수밖에 없었다는 데 놀라는 사람도 없었다.

머릿속에 그림을 그려보고 싶다면, 덩케르크에 앞과 뒤가 있다고 생각해보라. 앞에는 다소 단조롭지만 분주한 항구가 있다. 도크 크레인, 운하, 들고 나는 화물선과 프랑스인들이 유독 성가셔한다는 뱃고동 소리. (P145-146)

영화 덩케르크 24.jpg

유람선이라니? 이런 명칭은 얼마나 아이러니한가! 이 배들이 만들어진 목적과 실제 성과의 극명한 대조라니! 평소 6월이면 즐거운 여행객들에게 휴식과 여흥을 주던 선박들이 예정된 운명 앞에서 불안에 시달리던 숱한 병사들을 구출해냈으니 말이다!

임무를 다한 선원과 해군들은 너무도 지친 나머지 말조차 제대로 할 수 없었고, 일부는 곯아떨어져 25시간 동안 인사불성이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한 선박회사는 다시 가서 더 많은 병사를 데려오고픈 간절함에 해군의 지시를 기다리지 않고 자사의 선박을 출항시키기도 했다. (P189)

영화 덩케르크 04.jpg

구조작업에 투입된 선박들은 처음부터 끝까지 위험에 첩첩이 포위된 것과 같았다. 용케 기뢰를 피한다 해도 해안 포열에서 포탄이 날아왔다. 운이 좋거나 민첩하다면 포탄까지 피할 수 있으나, 그다음은 급강하 폭격기다. 작은 선박들조차 손상을 입고 심지어 침몰하기도 했다는 건 놀랍지 않다. 상대적으로 큰 선박은 공습으로부터 살아남은 예가 극소수였다. 간담이 서늘해지는 위험 없이 임무를 수행한 선박은 단 한 척도 없었다. (P217)


덩케르크와 도버는 연락선으로 네 시간이면 닿을 정도로 가깝다. 그러니 도버에서 칼레, 뉴헤이븐에서 디에프, 포크스턴에서 불로뉴 또는 홀리헤드에서 아일랜드까지 빠르게 오가는 철도 연락선 같은 선박들이 영국 원정군의 철수 작전에 제격이었다는 점은 쉽게 이해가 될 것이다.

공간, 속도, 적절한 흘수선이 필수조건이었다. 이 조건을 완벽하게 만족시키는 21노트의 도버-칼레 우편선은 해군 작전에 이상적인 선박이었다. 이것은 실전에서 입증되었다. 구축함 한 척이 최대 1200명의 병사를 발 디딜 틈 없이 실상 서서 잠을 잘 정도로 빽빽하게 태워야 했던 반면, 도버-칼레 철도 연락선은 평균 2000명 이상을 승선시켰고 횟수가 거듭될수록 승선 인원도 늘어갔다. (P227-228)

영화 덩케르크 02.jpg

템스강과 다운스 지역에는 제2차세계대전 이전까지 간헐적으로 덩케르크 해역으로 항해했던 예인선들이 주요 활동 무대였다. 그래서 이 거대한 철수 작전의 부름을 받았을 때 예인선들은 이미 최적의 조건을 갖추고 있었다. 덩케르크 방파제 사이의 공간은 웬만한 선박이 도저히 접근할 수 없을 정도로 수심이 낮아서 수많은 병사들을 승선시키기가 불가능했다. 그러나 이 작은 예인선들은 템스강의 조류 상황이 어떻든 간에 험하고 어려운 곳까지 두루 운항하는 데 이미 익숙했다.

형태를 막론하고 모든 예인선들이 필요했던 이유는 두 가지다. 남동 해안 전체가 영국의 전장에 포함되었기 때문이고, 진격 중인 히틀러가 영국해협을 사이에 두고 영국과 마주보는 프랑스 해안의 항구들을 점령하려 혈안이 되었기 때문이다. 그래서 덩케르크 위기 동안 선박 운항에 필요한 예인선의 지원이 어느 때보다도 절실했다. 덩케르크 철수 작전이 한창일 무렵 템스강에는 예인선의 모습이 보이지 않을 정도였다. 아무튼 징발된 예인선의 수가 상당히 많았다는 것은 사실이다. 6장에서 다룬 예인선들 외에도 유명한 ‘선Ⅲ’, ‘선Ⅳ’, ‘선Ⅶ’, ‘선Ⅷ’, ‘선Ⅹ’, ‘선ⅩⅤ’, ‘페어플레이Ⅰ’, ‘콘테스트’를 추가해야겠다. 이 예인선들은 재정적, 전략적으로 막대한 가치를 지닌 선대를 대표했다.

그러나 예인선과 관련해서 가장 놀라운 것은 그 선박들이 즉각 작전에 투입될 수 있게 준비가 되어 있었다는 점이다.

6월 1일 H.R. 콜 선장은 예인선 ‘선 시리즈 중 한 척을 타고 구명보트 20척을 예항하여 템스강에서 램즈게이트로 향했다. 램즈게이트에서 그와 선원들은 해협을 건너 덩케르크에서 병사들을 구조해보고 싶지 않느냐는 질문을 받았고, 그 자리에서 그렇게 하기로 지원했다. 이번에는 노 젓는 보트 2척과 모터보트 1척을 예항하여 야간 항로에 올랐다. 콜 선장은 우선 덩케르크 외항에 계류하면서 보트 3척을 해변으로 보내 영국 병사 40명을 실어 왔다. 그러자 한 해군 장교가 콜 선장에게 이렇게 물었다.

“덩케르크에 자주 와봤습니까?”

“몇 번 정도요. 제1차세계대전 동안 내륙수상운송청(Inland Water Transportation)에서 일한 적이 있거든요.”

그것으로 충분했다. 예인선은 닻을 올리고 부두 끝에 평행 접안한 뒤, 프랑스와 벨기에 장병 50명을(벨기에 중령 한 명을 포함하여) 추가로 승선시켰다. 예인선은 곧 회항했고, 총 200명 이상의 장병들을 영국으로 데려왔다. (P309-310)


그 혼란스러운 시기에는 적과 동지를 구분하기가 불가능했다. 영국의 소형 증기선 한 척이 사람들을 가득 싣고 회항을 준비하는 중이었다. 대부분 프랑스 부상병들이었으나 그중에는 평범해 보이는 이방인 10여 명이 섞여 있었다. 실상 그들은 프랑스 군복을 입고 변장한 독일군이었다. (P322)

영화 덩케르크 03.jpg

그 증기선에 승선한 병사 한 명이 선의를 품고 굵은 밧줄을 잡아당기던 선원 하나를 돕기 시작했다. 그런데 갑자기 선교 쪽에서 우레 같은 목소리가 쩌렁쩌렁 울렸다.

“이봐, 너!”

병사는 그 목소리가 자신을 향한 것임을 알아챘다. 선장 모자를 쓴 늙은 남자가 고함을 지르고 있었다.

“그 밧줄 놓지 못해.” 선장이 성을 내며 말했다. “내 선원들은 모두 자기 배를 몰 줄 아는 사람들이야. 너는 이리 와서 빌어먹을 총이나 잡아. 그게 네가 할 일이야.”

그 병사는 전우 몇 명과 함께 선장의 말대로 기관총을 잡고 나치 폭격기들을 상대했다.

증기선이 영국해협 중간에 왔을 때, 병사는 용기를 내서 그 선장에 대해 물었다.

“아까 자네를 혼쭐낸 사람? 아! 괜찮은 분이야. 다만 육지 사람들이 끼어드는 걸 싫어하지. 예순일곱 살이야. 그래도 아직 팔팔해.”

“그 말이 맞는 것 같습니다.”

“무서운 게 없는 분이야..... 그런데 혹시 저분 몰라? 얼마 전엔 스페인 내전에도 잠시 관여한 적이 있지. 지금은 날마다 덩케르크를 오가고, 아무튼 편히 있게나?”

“저분 성함이?”

“존스. ‘포테이토’ 존스 선장. 석 달 전에 독일군 전투기가 저 양반의 어깨를 박살냈지만 그래도 바다를 떠날 수 없나봐.”

독일군이 해안 포대에서 공세의 수위를 높이면서 상황이 꼬이기 시작했다. 칼레를 지나는 직선 항로를 이용할 수 없게 됐다. 해도에서 새로운 항로를 찾긴 했으나 그 항로 역시 위험해 포기되었고, 세 번째 항로는 소해정들이 모래톱을 지나 부표를 놓음으로써 안전함이 입증되었다. 주간 공습 때문에 철수 작전이 야간으로 국한되고 선박의 속력을 15노트 이하로 제한한 이후에도, 여전히 밤과 새벽 사이에 병사 3만 명을 철수시킬 가능성이 남아 있었다. (P325-326)

영화 덩케르크 01.jpg

그럼에도 덩케르크 해변은 마지막까지 비극과 비야로 가득했다. 그중에도 가장 용감한 이야기는 이미 한 차례 무공 십자훈장을 받은 바 있던 씩씩한 종군 신부 T.M. 렝에 대한 것이다. 렝 신부는 소속 부대가 영국으로 떠난 후에도 덩케르크에 남아서 살인적인 독일군 폭격기들의 패악 속에 부상자를 돌보고 사망자를 묻어주었다. 마침내 영국으로 돌아온 그는 무공을 더해 떳떳하게 십자훈장에 한 줄을 더 그었다.

그렇게 덩케르크의 위대한 드라마는 막을 내렸고, 33만 8000명의 병사가 적군이 지켜보는 가운데 구조되었다. 독일 군대가 얼마나 뛰어난지는 부인할 수 없을 것이다. 타의 추종을 불허하는 잔악함과 야만성. 놀라우리만큼 기계화된 학살의 추진력, 극악한 염탐과 반역에 이르기까지.

그러나 역사는 언제나 덩케르크를 육해공의 영웅들이 이루어낸 기적과 연관 지을 것이다. (P353)


6월 4일 전쟁성은 연합군의 철수 작전이 성공적으로 끝났다고 발표하면서 ‘역사상 가장 어려운 작전 중 하나였다’고 말했다. 해군성 또한 덩케르크 철수 작전에 대해 ‘해군 역사상 가장 광범위하고 어려운 합동작전’이었다고 밝혔다. 두 부처의 진술은 조금도 과장된 부분이 없다. (P381)

영화 덩케르크 17.jpg


keyword
매거진의 이전글트루먼 카포트의 <인 콜드 블러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