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광화문에서 #112

'소심한'과 '멀리 떨어진 곳' 사이에서

by 노용헌

'소심한'과 '멀리 떨어진 곳' 사이에서


젊은 화가의 이름은 데이비드 한드. 손에 조그만 사전을 쥔 채 가을 늦더위 햇살의 연약한 온기 속에서 소심한(timid)과 멀리 떨어진 곳(timbuktu) 사이에 자리잡은 단어의 정의를 읽고 또 읽었다. '지속적이거나 연속적인 실존에 관한 일반 개념, 관계, 혹은 사실'.

데이비드는 초조하게, 기다린 손가락으로 사전을 탁 덮었다. 그가 찾아본 단어는 시간(time)이었다. 그는 시간을 이해하고, 시간에 저항하고, 시간을 물리치고 싶어서 몸살이 날 지경이었다. 앞으로 나아가기 위해서가 아니라 뒤로 돌아가기 위해, 아내 저넷과 함께 했던 순간으로, 시간이 휩쓸어가버린 그 순간으로 되돌아가기 위해. (P10)


데이비드는 고개를 끄덕였다. 농부의 말을 예상하며 그가 적어준 쪽지를 아직 가지고 있었다. 한 시간 전, 겨우 목소리를 낼 만큼 기운을 차린 농부는 쪽지 내용과 거의 똑같이 말했다. 데이비드는 큰 목소리로 그 쪽지를 되풀이해 읽었다. "내 인생 전체가 파노라마처럼 눈앞으로 지나갔어요."

"정말 진부한 이야기 아닌가?" 닥터 보일이 다시 잔을 채우며 말했다.

"그게 사실이 아니라는 건 어떻게 알 수 있죠?"

닥터 보일이 한심하다는 듯 한숨을 내쉬었다. "자네처럼 똑똑한 사람에게 그 이유를 말해줄 사람이 꼭 필요한가?" 그가 눈썹을 추켜세웠다. "만약 그의 인생이 그의 눈앞을 주욱 지나갔다면, 그것을 본 건 그의 뇌일세. 모든 사람이 그렇게 사물을 보니까. 그의 심장이 펌프질을 멈추면 혈액이 뇌로 전달되지 못해. 뇌는 혈액이 없으면 일을 못하니, 그의 뇌도 작동할 수 없었겠지. 따라서 눈앞을 지나가는 인생드라마를 관람할 수 없었을 거야. 자아, 큐이디(QED), 쿼드 에럿 데먼 스트랜덤(quod erat demonstrandum), 로마 혹은 자네의 고등학교 기하학 수업에서 듣던 것처럼, 증명되어야 할 것이 증명되었다네." 그가 자리에서 일어났다. "얼음을 더 가져오지." 그는 아주 조금씩 흔들리는 걸음으로 콧노래를 부르며 집 뒤쪽의 부엌으로 들어갔다.

데이비드는 일어나서 기지개를 켰다. 그리고 불타는 장작의 열기와 텅 빈 위장, 빠르게 들이켠 하이볼이 함께 술수를 부려 그를 몹시 취하게 만들었다는 사실을 알아챘다. 기분이 들떴다. 엄청나게 행복하다기보다는 현명해진 느낌이었다. 몽롱한 가운데 이제 시간보다 한 수 앞설 때가 왔다는, 시간을 초월할 때가, 자신이 원하는 과거의 어느 지점으로든 갈 때가 되었다는 느낌이 들었다. (P17-19)


-커트 보니것, 멍청이의 포트폴리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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