영화 <색/계> 2007년
2007년에 개봉한 이안 감독의 스파이-애정 영화. 양조위(이모청 역)와 탕웨이(왕자즈 역)가 주연을 맡았으며, 특히 탕웨이의 출세작이기도 하다. 대만, 홍콩과 미국의 합작 영화이다. 원작은 대만계 미국인 장아이링(張愛玲)이 1979년에 실화를 바탕으로 쓴 동명의 단편소설이며, 노출 장면이 상당하지만 역사적 흐름에 휘말린 개인의 미묘한 심리를 세밀하게 묘사한 수작이다. 베니스 영화제에서 황금사자상을 수상했다.
정핑루(鄭蘋茹, 정평여)는 중화민국의 간첩으로 장아이링(张爱玲, 장애령)의 소설 『색, 계(色,戒)』의 모티브가 되었다. 정핑루는 중국 저장성(浙江省, 절강성)에서 법조인의 딸로 태어났는데 아버지 정웨(郑钺, 정월)는 쑨원(孫文, 손문)과 함께 혁명운동을 했던 국민당의 원로였다.
그녀의 어머니는 일본인 기무라 하나코(木村花子)로 중국 문화에 매료되어 이름도 중국식으로 바꾸었는데 그녀는 어머니의 영향으로 일본어가 유창했다. 정핑루의 집안은 민족주의적이라서 만주사변과 상하이사변이 발생하자 그녀는 어린 나이에 항일 시위에 나서기도 했다.
한낮인데도 마작 탁자 위에 불이 환하게 켜져 있어 패를 섞을 때마다 다이아몬드 반지들이 반짝반짝 빛났다. 네 귀퉁이를 탁자 다리에 팽팽하게 묶어 놓은 하얀 탁자보는 눈부실 정도로 새하였다. 강렬한 빛과 그림자의 대비로 지아즈의 가슴 굴곡이 선명하게 드러났고, 얼굴 역시 무정한 불빛에 고스란히 노출되었다. 살짝 좁은 이마와 들쭉날쭉한 헤어라인마저 왜인지는 몰라도 아름다운 육각형 얼굴에 우아한 느낌을 더해 주는 듯했다. 얼굴은 옅게 화장했지만 정교한 조각 같은 얇은 입술만큼은 붉은색 립스틱을 발라 요염하고 촉촉해 보였다. 귀밑머리를 느슨하게 올려 고정하고 뒤쪽 머리카락은 어깨까지 늘어뜨렸다. 소매 없는 강청색의 물결무늬 치파오는 무릎까지 내려왔으며 둥근 깃이 양복처럼 1센디미터 남짓 올라와 있었다. 옷깃에 꽂은 브로치는 사파이어 주변에 작은 다이아몬드를 박은 ‘단추’ 같은 귀걸이와 세트였다.
지아즈의 양옆에 앉은 두 부인은 검은색 모직 망토를 입었는데 겉깃 아래쪽에 묵직한 이중 금줄을 걸어 옷깃을 여몄다. 전쟁 때문에 외부와 단절되면서 상하이에서는 상하이만의 패션이 유행했다. 피점령지에서는 금값이 천정부지로 올라 그렇게 굵은 금줄은 상상을 초월할 만큼 비쌌으니 외투에 단추 대용으로 사용하면 촌스럽거나 저속하지 않게 자신의 부를 과시하며 돌아다닐 수 있었다. 그래서 망토와 금줄은 왕징웨이 정부의 관료 부인들 사이에서 제복처럼 유행하고 있었다. 혹은 여전히 충칭의 영향을 받아 검은색 외투를 장엄하고 대범하게 여기는지도 몰랐다. (P9-10)
이 선생이 웃으며 대꾸했다. “10캐럿이 넘는 반지라니 비둘기알도 아니고, 다이아몬드도 결국 돌이잖아. 손에 끼면 무거워서 패를 돌리기도 힘들 거라고.”
지아즈는 마작 탁자가 정말 반지 전시대 같다고 생각했다. 자기만 다이아몬드 반지가 없어 비취반지를 끼고 있었다. 진작 알았으면 반지를 아예 끼지 않아 비웃음을 피했을 터였다. 정말로 그녀를 얕잡아 보는 눈치였다.
이 부인이 “사 주지도 않으면서 그런 소리나 하다니!”라고 말하면서 5통 패를 냈다. 그러자 마 부인 맞은편의 망토를 입은 부인이 촤르륵 패를 내보였다. 순간 웃음과 탄식, 원망의 소리가 터져 나오면서 대화가 끊어졌다. (P14)
톈진 키스링에서 일했던 첫 번째 중국인 직원이 차린 카페라고 이 선생이 알려 주었다. 이 카페를 고른 이유는 아는 사람을 만날 확률이 거의 없는 데다 교통 요지이다 보니 설령 아는 사람을 만나도 별 상관 없어서가 확실했다. 이런 곳이 외진 곳보다 수상한 일을 벌인다는 의심을 덜 살 터였다.
앞에 놓인 커피가 다 식었건만 자동차는 오지 않았다. 지난 번에 차를 타고 아파트에 간 뒤에도 이 선생은 거의 한 시간이 지나서야 도착했다. 그렇지 않아도 부족하다는 중국인의 시간관념은 관료가 되면 절정에 이르는 모양이었다. 이제 더 기다리다가는 상점이 문을 닫을 판이었다.
이 선생이 “오늘은 기념할 만한 날이지. 반지를 사 줄 테니 직접 골라. 오늘 너무 늦지 않았으면 내가 데려갔을 텐데.”라고 말했다. 처음 밖에서 만났을 때였다. 두 번째 만났을 때는 훨씬 더 촉박해 반지 이야기를 꺼내지 못했다. 당연히 기회를 놓칠 수는 없었다. 이 선생이 오늘 잊어버려서 에둘러 상기시켜야 한다면 너무 품위 없고 속물스러워 보이지 않을까? 다른 남자라면 그렇게 받아들일 게 뻔했다. 하지만 이 선생 같은 능구렁이는 그녀처럼 젊은 여자가 사오십 대의 땅딸막한 남자에게 반했다고 착각할 리 없었다. 돈 때문이 아니라면 오히려 의심할 터였다. 장신구는 언제나 여자들의 약점이었다. 더군다나 지아즈는 밀거래를 하러 온 게 아니던가. 그 김에 부수입을 올리는 것은 얼마든지 가능한 상황이었다. 이 선생 본인도 비밀 정보원이라 의심스럽지 않은 상황에서조차 온갖 가능성을 염두에 두며 꼬리를 감추었다. 어떻게든 그의 신뢰를 얻어야 했다. 지금까지는 이 선생이 지정한 장소에서 만났어도 오늘은 그녀가 지정한 장소로 데려가야 하기 때문이었다. (P19-20)
지아즈는 콤팩트 거울을 보며 화장을 고쳤다. 사실 늦는다고 이 선생이 직접 온다는 보장은 없었다. 신선함이 떨어져 시큰둥해진 건 아닐까 걱정스러웠다. 오늘 성공하지 못하면 앞으로는 기회가 없을지도 몰랐다.
또 시계를 쳐다보았다. 종아리에서 나간 스타킹 올이 천천히 위로 올라오듯이 실패했다는 예감이 서늘하게 밀려왔다.
대각선 맞은편에 앉은 장삼 차림의 남자가 지아즈를 유심히 보았다. 역시 혼자 와서 신문을 읽고 있었다. 지아즈보다 먼저 왔으니 미행했을 리는 없었다. 그녀가 무슨 일로 왔는지 남자는 짐작도 못 할 터였다. 그녀가 착용한 보석이 진짜인지 아닌지 살피는 듯도 했다. 댄서 같지는 않은데 배우라기에도 생소한 얼굴이라고 생각하는지도 몰랐다. (P21)
지아즈는 반지를 스탠드 불빛에 이리저리 비추어 보았다. 어두운 베란다에 앉아 있으니 뒤쪽의 밝은 진열창과 유리문은 은막이고 흑백 액션 영화가 상영되는 듯했다. 그녀는 피 흘리는 장면을 잘 보지 못했고 첩자가 고문당하는 장면은 더더욱 몸서리쳤다. 어렸을 때부터 싫어해 그런 장면이 나오면 관람석에서 몸을 돌려 아래쪽을 바라보곤 했다.
“6캐럿입니다. 끼워 보세요.” 주인이 말했다.
한가한 밀실이 꽤 그럴듯하게 느껴졌다. 벽 아래에 기대어 놓은 커다란 거울에 지아즈의 발이 비쳐 모란 꽃밭 속에 있는 듯했다. 진귀한 보물을 우연히 발견하는 건 천일야화 속 시장에서나 가능했다. 지아즈는 핑크 다이아몬드를 손가락에 끼고 이리저리 살펴보았다. 손톱의 장밋빛 매니큐어보다 덜 붉고 크기도 작았지만 반짝반짝 별처럼 빛나는 데다 신비한 붉은색을 띠고 있었다. 잠시만 쓸 수 있는 무대 소품에 불과하다는 게 안타까웠다.
“어때?” 이 선생이 또 물었다.
“당신 생각은요?”
“난 이쪽으로 문외한이야. 당신이 좋으면 그만이지.” (P35)
“권력은 일종의 최음제”라는 영어 표현이 있는데 지아즈는 그게 맞는지 아닌지 알 수 없었다. 완전히 수동적인 상태에 놓여서였다.
“남자 마음은 위장을 통해 얻는다.”라는 속담도 있었다. 남자는 먹는 것을 좋아해 요리 잘하는 여자에게 쉽게 넘어간다는 뜻이었다. 그걸 비틀어 “여자 마음은 질을 통해 얻는다.”라고 말한 사람도 있었다. 중화민국 초기 영어에 능통한 어느 학자였는데, 이름은 잊었어도 중국의 일부다처를 옹호하는 유명한 그의 말은 기억했다. “찻주전자에는 찻잔이 몇 개씩 딸리는 법이지, 하나만 있는 경우가 어디 있나?”라고 했다.
여자의 마음에 대해 유명한 학자가 그런 저속한 말을 했다고는 믿기지 않았다. 지아즈는 그 말 자체도 믿지 않았다. 남자한테 돈을 대는 늙은 기녀나 방탕한 과부가 아니고서야 가당하기나 하겠나 싶었다. 지아즈 자신만 해도 원래 량룬성을 싫어했는데 더 싫어졌을 뿐이 아니던가?
물론 상황이 다를 수도 있었다. 량룬성은 줄곧 밉상이었고 자신감도 없는 데다 늘 지아즈 앞에서 열등감을 느끼고 두려워하기까지 했다.
그렇다면 설마 내가 이 선생을 사랑하게 된 걸까? 지아즈는 아니라고 믿었지만 그렇다고 딱 잘라 부인할 수도 없었다. (P37)
이 사람이 정말로 나를 사랑하는구나. 갑자기 밀려드는 생각에 지아즈는 심장이 덜컥 내려앉으며 무언가 잃어버린 것처럼 허전해졌다.
너무 늦었다.
주인이 확인증을 건네자 이 선생이 주머니에 집어넣었다.
“어서 가요.” 지아즈가 나직하게 말했다.
잠시 멍한 표정을 지었어도 이 선생은 금세 무슨 뜻인지 알아차리고 벌떡 일어나 문 쪽으로 쏜살같이 내달렸다. 입구에 아무도 없었지만 일단 문틀을 꽉 잡았다. 나가자마자 좁고 어두컴컴한 계단을 내려가기 위해 난간을 잡아야 하기 때문이었다. 그가 한 번에 두세 계단씩 뛰어 내려가느라 불규칙적으로 쿵쿵거리는 소리가 울렸다.
늦었다. 지아즈는 너무 늦었다는 것을 알고 있었다. (P39)
지아즈는 서둘러 아래층으로 내려갔다. 점원이 따라와 잠시 머뭇거렸지만 별다른 말은 하지 않았다. 그러나 문밖으로 나왔을 때 지아즈는 가게 안쪽 1층과 2층 사이에서 고함이 오가는 걸 들을 수 있었다.
웬일인지 가게 앞에 삼륜차가 없어 지아즈는 시모로 쪽으로 걸어갔다. 암살 임무를 맡은 자와 지원 인력은 모두 달아났을 터였다. 이 선생이 혼자 그렇게 황망히 뛰쳐나와 차를 타고 달아났으니 발각된 줄 알았을 게 분명했다. 그럼에도 지아즈는 뒷문에서 망을 보던 사람이 상황을 몰라 근처에 남아 있지 않을까 조마조마했다. 사실 부딪힌들 무든 상관이겠는가? 그녀를 의심하면 다가와서 캐물을 리 없었다. 설령 의심해도 자초지종을 알아보기도 전에 무작정 죽일 리 없었다.
지아즈는 날이 아직 어둡지 않은 게 이상했다. 가게에서 얼마나 있었는지 감이 오지 않았다. 인도에 오가는 사람이 많고 도로에는 삼륜차가 줄지어 지나갔지만 빈 차는 없었다. 물 흐르듯 움직이는 차와 거리의 행인들이 유리창 너머에 있는 듯 느껴졌다. 가죽 외투와 불룩한 소매의 화려한 옷을 입은 진열창 속 마네킹처럼 볼 수만 있고 닿지는 못하는 존재로 무척 여유로워 보였다. 지아즈는 혼자 바깥에 갇혀 동동거리는 기분이었다. (P40-41)
전부 아내의 잘못이었다. 이번 일은 아내가 사람을 잘못 사귄 탓이 아니겠는가? 그런데 생각해 보면 또 경이로웠다. 이번 미인계는 이 년 전 홍콩에서 시작되어 주도면밀하게 짜였다. 결정적인 순간에 미인이 마음을 바꾸어 그를 놓아주었을 뿐이었다. 그녀는 정말로 그를 사랑하는 사람이자 평생 처음으로 만난 지기였다. 중년에 이런 만남이 있을 줄은 상상도 하지 못했다.
사실 그는 그녀를 곁에 남겨 둘 수 있었다. “첩자는 결국 한통속”이라는 말이 있지 않던가? 더군다나 그녀는 학생에 불과했다. 그들 무리 속에서 충칭 첩자 하나만 놓쳤을 뿐이고, 그게 유일하게 아쉬운 점이었다. 그놈은 핑안 극장에서 영화를 절반쯤 보고 나왔다가 암살이 실패했음을 알고는 다시 극장으로 들어갔다. 그리고 거리가 봉쇄되었을 때 입장권 반쪽을 내보이며 무사히 빠져나갔다. 놈이 담배를 꺼낼 때 입장권이 딸려 나오자 잘 챙기는 모습을 그놈과 함께 손을 쓰려면 애송이가 보았다. 지원 차량을 이용하지 않기로 사전에 합의했기 때문에 혼자 극장으로 돌아갔던 게 틀림없었다. 그 애송이들은 심문할 때 쓴맛을 조금 보여 주자 전부 털어놓았다.
이 선생은 아내 뒤에 서서 패를 보다가 담배를 끄고 차를 한 모금 마셨다. 아직도 뜨거웠다. 일찍 잠자리에 들고 싶었지만 너무 피곤해서인지 신경이 계속 곤두서고 전혀 졸리지 않았다. 정말 피곤한 하루였다. 전화기 옆에서 내내 소식을 기다리느라 저녁 식사조차 제대로 못 했다. 위험에서 벗어나자마자 그는 전화를 걸어 그 일대를 봉쇄시켰다. 일망타진한 뒤에는 저녁 10시가 되기도 전에 전부 총살해 버렸다.
그녀는 죽기 전에 틀림없이 그를 원망했을 터였다. 하지만 독하지 않으면 대장부가 아니라고 했다. 독한 남자가 아니었다면 그녀 역시 그를 사랑했을 리 없었다. (P43-45)
1979년에 박표한 <색, 계>는 첫 번째 남편 후란청에게서 들은 이야기를 기반으로 썼다고 전해진다. 1940년대에 왕징웨이 친일 정부의 특무부장인 딩모춘(丁默邨)을 국민당 정보원 정핑루(鄭蘋如)가 암살하려다 실패한 사건이 있었다. 물론 <색, 계>는 그 사건을 객관적으로 다루는 게 아니라 그 안에서 펼쳐지는 감정의 변화에 초점을 맞추고 있다. 항일 구국 운동 같은 거대한 목표가 아니라 사랑(色)과 금기(戒) 사이에서 방황하는 한 여인의 내면세계에 주목한다는 뜻이다. 흥미롭게도 소설에서 이 선생은 왕지아즈를 죽이지만 현실에서 딩모춘은 정핑루를 살려 주었고, 나중에 암살 미수 사건을 알게 된 딩모춘의 아내가 정핑루를 죽였다고 한다.
왕지아즈는 연극 공연을 하다 항일 운동에 뛰어들고 친일파 이 선생을 암살하기 위한 미인계의 주인공으로 발탁된다. 열정과 동지애에 휘둘려 위태로운 현실에 발을 들여놓았건만 갈수록 왕지아즈는 동지라고 믿었던 사람들로부터 의무만 강요받는다고 느낀다. 결국 왕지아즈는 자신을 진정으로 알아주는 사람은 이 선생뿐이라고 생각해 암살 당일 함정임을 알려주고 자신은 죽음을 맞는다. (P28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