루스 웨어의 <우먼 인 캐빈 10>

영화 <우먼 인 캐빈 10> 2025년

by 노용헌

‘우먼 인 캐빈10’은 여행 취재를 위해 호화 크루즈에 승선한 기자가 늦은 밤 한 승객이 바다로 던져지는 것을 목격하면서 벌어지는 일을 그린 스릴러 영화다. 2016년 출간 직후 뉴욕타임스 베스트셀러에 오른 동명 소설(작가 루스 웨어)을 원작으로 하는 작품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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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스라치게 놀라 잠에서 깨어났다. 여기가 어디지? 한참 만에 정신을 차리고 보니 요란하게 들리는 이 소리는 꿈이 아닌 현실이었다.

캄캄한 방 안이 꿈에서처럼 습기로 축축했다. 몸을 일으켜 앉자 서늘한 바람이 뺨을 스쳤다. 소리는 욕실에서 들리고 있었다.

오슬오슬 몸을 떨며 침대에서 내려왔다. 욕실 문은 닫혀 있었다. 하지만 가까이 다가갈수록 소리는 점점 커졌고 심장도 빠르게 뛰었다.

용기를 그러모아 문을 벌컥 열어젖혔다. 샤워기 물소리로 가득한 좁은 욕실로 들어가 스위치를 더듬어 찾았다. 욕실에 빛이 쏟아지는 순간, 무언가가 보였다.

습기 찬 거울 위에서 손바닥만 한 글씨가 이렇게 말하고 있었다.

참견하지 마. (P9)


무슨 일이 생겼다는 첫 번째 징조.

자다 일어나니 고양이가 어둠 속에서 내 얼굴을 앞발로 툭툭 치고 있었다. 델릴라가 내 방에 들어와 있다니, 녀석은 밤에 주방에서 잠을 자는데.... 내가 간밤에 깜박하고 주방 문을 닫지 않은 모양이다. 술독에 빠져 집에 들어온 벌인가.

“저리 가.”

내 짜증 섞인 말에도 불구하고 델릴라는 야옹거리며 머리를 들이밀었다. 베개에 얼굴을 묻으려 했지만 녀석은 자꾸 내 귀에 머리를 문질렀다. 결국은 돌아누우며 매몰차게 침대 밖으로 쫓아낼 수밖에 없었다.

델릴라는 불만스러운 소리를 내며 바닥으로 뛰어내렸다. 머리 위로 이불을 뒤집어썼다. 하지만 델릴라가 발톱을 세워 문 아래쪽을 박박 긁자 문이 문틀에 부딪히는 소리가 이불 너머로도 똑똑히 들렸다.

문이 닫혀 있다는 뜻인데.

심장이 터질 것같이 뛰기 시작했다. 내가 일어나 앉자 델릴라는 침대로 뛰어 올라왔다. 녀석을 붙잡아 움직이지 못하게 끌어안고 어둠 속으로 귀를 기울였다.

주방 문은 깜박하고 닫지 않았을지도 모른다. 어쩌면 제대로 닫지 않아 열렸을 수도 있다. 그런데 집 구조가 희한해서 침실 문만큼은 안에서 밖으로 열린다. 델릴라가 방에 들어와 문을 닫았을 리는 없다.

그렇다면..... 누군가 ‘다른 사람’이 있다. (P12-13)


자초지종을 설명하면서도 실제보다 살을 붙여서 재미있는 이야기처럼 들려주었다. 손톱 줄로 어떻게 자물쇠를 갉았는지 길게 묘사했을 뿐, 장갑 낀 범인에 관해서는 이야기하지 않았다. 공포에 사로잡혀 손끝 하나 움직이지 못했다는 말도, 생생한 기억이 자꾸만 떠올라 겁이 난다는 말도 하지 않았다.

“웬일이니! 지금은 괜찮은 거야?”

잡음이 섞였지만 수화기 반대편에서 경악하는 목소리가 똑똑히 들렸다.

“응, 그럭저럭. 출근은 못 할 것 같아. 집을 치워야 해서.”

사실 그렇게 어지럽지는 않았다. 놈은 강도치고는 아주 깔끔하게 일을 했다.

“로, 정말 고생했겠다. 그럼 이번 노던 라이츠 취재는 다른 사람에게 넘길까?”

무슨 말인지 잠깐 어리둥절하다가 기억해냈다. 맞다, 오로라 보리알리스호. 노르웨이 피오르 해안(빙하의 침식으로 만들어진 골짜기에 바닷물이 들어와서 생긴 좁고 긴 만)을 한 바퀴 도는 초호화 부티크 크루즈선이다. 아직도 꽤 얼떨떨하지만 운 좋게도 나는 오로라호의 첫 항해에 참여하는 소수의 기자단에 이름을 올리는 영광을 차지했다.

굉장한 특권이었다. 여행잡지 기자라고는 해도 평소 내 업무는 보도자료 내용을 자르고 붙여 넣는 일, 혹은 상사인 로완이 호화 여행지에 쓴 기사를 보내면 그에 맞는 사진을 찾는 일 따위였다. 이번 여행도 원래는 로완이 담당이었지만, 그녀는 이 일을 맡은 직후 임신 체질이 아니라는 사실을 알게 되었다(입덧이 정말 심하단다). 그래서 크루즈라는 커다란 선물이 내게 떨어졌다. 책임이 무거웠지만 엄청난 기회이기도 했다. 이번 결정은 로완이 나를 신뢰한다는 의미와 다름없다. 경력이 더 많은 기자에게 부탁할 수 있었는데도 로완은 나를 선택했다. 잘해낸다면 로완의 출산휴가 동안 그녀를 대체할 사람을 뽑을 때 크게 유리할 것이다. 어쩌면 승진을 시켜주겠다는 오랜 약속을 이번에야말로 지키지 않을까?

여행의 시작은 이번 주말이었다. 정확히는 일요일. 이틀 후면 출발해야 한다.

“싫은데, 손 뗄 생각 전혀 없어. 난 괜찮아.”

나 자신도 놀랄 만큼 단호한 대답이 나왔다.

“정말이야? 여권은 어쩌고?”

“방에 있어서 안 뺏겼어.”

하느님, 감사합니다.

“확실해? 쉽게 볼 일이 아니야. 너도 너지만 우리 잡지 입장에서도 큰일이라고. 자신 없으면 굳이 네가....”

젠이 걱정하는 투로 재차 확인했다.

“자신 있어. 정말이야. 꼭 하고 싶어. 젠.” 말을 잘랐다. 천금 같은 기회를 놓치고 싶지 않았다. 여기서 물러나면 다시는 이런 기회를 잡지 못할 것이다. (P25-27)


배의 앞쪽에는 커다란 스위트룸이 네 개 있고 뒤쪽에는 작은 선실 여섯 개가 말발굽 형태로 배치되었다. 선실마다 방 번호가 있는데 중앙 복도를 중심으로 한쪽은 홀수, 반대쪽은 짝수이다. 1호실은 뱃머리 끝에 있고 9호실과 10호실은 곡선으로 된 선미에 나란히 붙었다. 스위트룸은 VIP의 몫일 테니 나는 작은 선실에 묵게 되겠지. 평면도에 치수가 없어 실제 크기가 어느 정도인지 짐작할 수는 없지만 영국해협을 건널 때 타봤던 몇몇 페리 같지는 않기를 바랐다. 선실이 창문도 없이 좁아터져서 폐소공포증을 불러일으켰던 그 배들을 떠올리면 이맛살이 찌푸려진다. 그런 곳에서 닷새를 보내고 싶지는 않다. 이런 크루즈 선이라면 훨씬 널찍하겠지?

선실 크기를 사진으로 확인할 수 있기를 바라며 페이지를 더 넘겼지만 선실 사진 대신 하얀 천을 깔고 스칸디나비아의 별미로 화려하게 장식한 테이블 사진만 볼 수 있었다. 오로라호의 주방장은 노마(덴마크의 최고급 레스토랑)와 엘불리(스페인의 최고급 레스토랑)에서 수련을 받았다고 한다. 하품을 하고 손바닥으로 양 눈을 꾹 눌렀다. 피곤해서 눈이 뻑뻑했고 어젯밤부터 겪은 일들을 생각하니 다시금 마음이 무거웠다. (P52-5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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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사는 오로라호의 승선 통로 앞에서 나를 내려주었다. 배와 연결된 철제 다리에서 오로라호를 바라보자 내가 제대로 찾아온 것인지 믿을 수가 없었다. 보도자료에 나온 사진과 비슷하기는 했다. 지문 하나, 바닷물 한 방울 묻지 않은 커다란 유리창이 햇빛을 반사했고 흰색 선체는 오늘 아침에 페인트칠을 마친 것처럼 번쩍거렸다. 그런데.... 보도자료 사진으로는 크기를 짐작할 수 없었지만 실제로 본 오로라호는 너무 작았다. 크루즈선이라기보다는 큼직한 요트에 더 가까웠다. 보도자료에서 ‘부티크’라는 말을 왜 그렇게 강조했는지 알 것 같았다. 그리스 섬들을 오가는 요트도 이 배보다는 더 크다. 보도자료에서 언급한 시설들(오로라호의 까다로운 승객들에게는 도서관, 일광욕실, 스파, 사우나, 칵테일 라운지 등등이 꼭 필요하단다)이 이렇게 작은 배에 다 들어 있다고? 믿을 수 없다. 아담하고 반질반질 광택이 나는 선체는 묘하게 장난감 같았다. 좁은 철제 다리에 발을 디디자 갑자기 어떤 이미지가 떠올랐다. 내 상상 속에서 오로라호는 작고 완벽한 형태로 유리병 안에 갇힌 비현실적인 배였다. 배를 향해 한 걸음씩 다가갈 때마다 나도 따라서 작아지는 듯했다. 망원경을 거꾸로 들고 보는 것처럼 기분이 이상했다. 현기증이 일어났는지 머리가 어지러웠다. (P54)


욕실 문 뒤에 걸려 있던 목욕 가운을 서둘러 입고 떨리는 숨을 깊이 들이마셨다.

그렇게는 살지 않아.

욕실 문을 열었다. 심장이 어찌나 빠르게 뛰는지 정신이 아득해졌다.

두려워하지 말자.

선실은 비어 있었다. 아무것도 없었다. 걱정과는 달리 문도 이중으로 잠겨 있었고 체인까지 걸린 채였다. 누가 들어왔을 리는 없었다. 그 소리는 복도에서 났을 것이다. 욕실 문은 배가 움직이는 바람에 자기 무게를 이기지 못하고 저절로 닫힌 것이 분명하다.

다시 문의 체인을 확인하자 두꺼운 추가 손바닥에 묵직하고 단단하게 느껴졌다. 그제야 안심하고 후들거리는 다리로 침대까지 간신히 걸어가 누웠다. 억눌린 아드레날린 때문에 심장이 계속해서 빠르게 뛰었다. 누워서 맥박이 정상으로 돌아오기를 기다렸다.

주다의 어깨에 얼굴을 묻는 상상을 하자 눈물이 나올 것 같았다. 이를 악물고 울음을 삼켰다. 주다가 이 모든 문제를 다 해결해주지는 않는다. 특히 문제가 약해빠진 나 자신과 공황 발작이라면 더더욱.

‘아무 일도 없었어. 아무 일도 없었던 거야.’

숨을 가쁘게 쉬며 그 말을 되뇌다 보니 조금씩 흥분이 가라앉았다. 아무일도 없었다. 지금도, 그때도, 나를 해친 사람은 절대 없다고.

술이 간절했다.

미니바 안에는 미니어처 진, 위스키, 보드카 대여섯 병, 그리고 토닉, 얼음이 있었다. 컵에 얼음을 담고 여전히 떨리는 손으로 미니어처 진 몇 병을 따서 잔에 부었다. 토닉 워터까지 섞은 후 단숨에 들이켰다. (P68-6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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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럴 수가.... 머리 스카프를 쓴 여자는 그 무리에 속한 사람들과 대조적으로 아파 보였다. 눈 색깔과 어울리는 헐렁한 회색 실크 기모노는 이브닝드레스도 아니고 가운도 아니었다. 실크스카프를 두른 민 머리와 밀랍처럼 창백한 피부가 여기서도 보였다. 상대적으로 지나치게 건강해 보이는 사람들 틈에서 그녀는 눈에 띄게 핼쑥했다. 내가 지금 무례할 만큼 그녀를 빤히 쳐다보고 있다는 사실을 깨닫고 시선을 떨구었다.

“투병 중이야. 유방암. 꽤 심했었나 봐.”

벤이 내 마음을 읽었는지 불필요하게 덧붙였다.

“몇 살이야?”

“서른도 안 됐을 걸. 아무튼, 남편보다는 어려.”

벤이 잔을 비우고 웨이터를 부르려고 고개를 돌린 사이, 다시 그녀를 바라보았다. 인터넷에서 본 사진과 같은 사람이라고는 전혀 생각할 수 없었다. 창백한 안색 때문인지, 헐렁한 실크 드레스 때문인지는 몰라도 나이가 더 들어 보였고 풍성했던 아름다운 금발이 사라져서 완전히 다른 사람으로 보였다.

왜 집에 누워 있지 않고 여기까지 왔을까? 물론 여기에 오지 못할 이유도 없었다. 살날이 얼마 안 남아서 여생을 최대한 즐기고 싶은 건지도 모르지. 그래서 이런 생각을 하고 있을 수도 있다. 회색 드레스를 입은 저 여자가 자기를 안쓰러운 눈으로 보지 말고 신경 쓰지 않았으면 좋겠다고. 나는 함부로 추측해도 미안하지 않을 사람을 찾아 다시 주위를 두리번거렸다. (P85)


“그리고 이 지역의 자연은 눈부시게 아름다우니까요. 핀란드의 넓은 숲과 스웨덴의 군도, 제 아내의 고향인 노르웨이의 장엄한 피오르 해안이 있지요. 하지만 제가 생각하는 스칸디나비아 자연의 절경은 땅이 아닌 하늘, 넓고도 불가사의하게 맑은 하늘입니다. 많은 사람은 스칸디나비아의 겨울을 대표하는 아름다움을 하늘에서 발견합니다. 북극광인 오로라 보리알리스 말이지요. 자연을 예측할 수는 없지만 이번 여행을 통해 여러분께서 북극광의 찬란한 아름다움을 만끽하시기를 바랍니다. 누구나 죽기 전에 꼭 한 번은 오로라를 봐야 합니다. 자, 신사 숙녀 여러분. 이제 잔을 들고 오로라 보리알리스호의 첫 항해를 위해 건배합시다. 같은 이름을 가진 오로라 보리알리스의 아름다움도 영원히 시들지 않기를.”

“오로라 보리알리스를 위하여.”

모두 리처드 불머를 따라 합창하고 잔을 비웠다. 알코올이 온몸으로 퍼지며 감각을 무디게 했다. 계속해서 쑤시던 뺨의 통증도 가라않았다.

“가지, 로. 우리도 일 좀 하면서 수다를 떨어보자고.” (P87-88)


책장을 한 장 넘겼다. 그때, 갑자기 어디선가 낯선 소리가 들렸다. 엔진 소리와 파도가 철썩이는 소리 때문에 알아듣기 힘들었지만, 종이와 종이가 마찰하는 소리에 묻힐 정도로 작은 소리였지만….

옆 선실 베란다 문이 천천히 열리고 있었다.

숨을 죽이고 소리에 귀를 기울였다.

물이 튀었다.

작게 첨벙 튀는 소리가 아니었다.

아니, 이것은 보통 소리가 아니었다.

사람의 몸이 수면에 부딪힐 때 나는 그런 소리이다. (P114-11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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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무 생각도 할 수 없었다.

곧바로 베란다로 달려 나가 미닫이문을 활짝 열고 난간을 잡았다. 파도가 넘실대는 바다에서 어떤 물건, 아니 어떤 사람의 흔적을 필사적으로 찾았다. 배의 창문에서 쏟아지는 밝은 불빛이 굴절되어 검은 수면을 장식했다. 바닷속에 있는 것을 포착하기란 불가능에 가까울 정도로 어두웠지만, 파도가 솟아오르는 순간 무언가 보였다.

하얀 형체, 아니 여자의 손 같은 모양이었다.

하지만 이내 소용돌이를 남기며 수면 아래로 가라앉았다.

옆 선실 베란다로 고개를 돌렸다. 두 선실 사이에는 사생활 보호용 칸막이가 있어 안이 잘 보이지 않았지만 두 가지 사실을 알 수 있었다.

첫째, 옆 베란다의 유리 난간에 얼룩이 있었다. 검고 미끌미끌해 보이는 얼룩. 그 얼룩은 피와 무척이나 비슷했다.

그리고..... 두 번째 사실을 깨달은 순간, 배가 땅기고 속이 뒤집혔다. 누구인지 몰라도 거기 서서 배 밖으로 시체를 던진 사람은 내가 멍청하게 베란다로 돌진하는 모습을 놓쳤을 리 없다. 내가 베란다로 달려오는 동안 범인은 옆 선실 베란다에 서 있었을 것이다. 베란다 문이 시끄럽게 열리는 소리를 들었을 것이다. 내 얼굴을 보았을지도 모른다.

얼른 방으로 들어와 몸을 감추고 베란다 문을 닫았다. 선실 문이 이중으로 잠금이 되어 있는지 확인하고 방범용 체인까지 걸었다. 심장이 마구 뛰었지만 머리는 침착했다. 이렇게 침착한 정신은 실로 오랜만이었다.

그래. 실제로 위험한 상황인데도 잘 대처하고 있어.

문을 단단히 잠그고 다시 베란다로 달려가 창문을 있는 힘을 다해 꽉 잠갔다. 그런 다음 침대 옆에 놓인 전화기를 들고 떨리는 손으로 0번을 눌러 교환원을 연결했다.

“여보세요? 무슨 일이시죠. 블랙록 님?”

노래를 부르는 듯한 목소리가 들렸다. 어떻게 전화한 사람이 나란 것을 알지? 당황해서 잠깐 머리가 텅 비었지만 이내 이성을 찾았다. 데스크 전화기에 당연히 내 선실 번호가 뜰 것이다. 그러니까 나라는 사실을 알지. 한밤중에 내 선실에서 전화할 사람이 나 말고 누가 있겠어?

“여...... 여보세요!”

간신히 대답했다. 떨리긴 했지만 침착해야 했다.

“담당 승무원 칼라입니다. 블랙록 님. 무엇을 도와드릴까요? 괜찮으세요?”

“아니, 아니요. 괜찮지 않아요. 저......”

이 말이 얼마나 우스꽝스럽게 들릴지 생각하니 말문이 막혔다.

“블랙록 님?”

“방금....... 방금 살인 사건을 목격한 것 같아요.”

침을 꿀꺽 삼켰다.

“어머니 세상에. 지금은 안전하신가요. 블랙록 님?”

칼라는 충격을 받은 목소리로 말을 하더니 다른 언어로 무슨 말인가 했다.

내가 안전한가? 선실 문을 쳐다보았다. 이중으로 잠갔고 체인도 걸어서 이만하면 아무도 들어오지 못할 것이다.

“네, 네. 그런 것 같아요. 현장은 옆 선실이었어요. 10호. 팔름그랜실 말이에요. 어..... 어떤 사람이 배 밖으로 시체를 던졌어요.” (P120-12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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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베란다 유리 난간에는 피가 묻어 있었어요.”

내가 덧붙이자 닐손이 입을 꾹 다물고 베란다 문을 향해 고개를 까딱했다.

“이 베란다 말입니까?”

“피요? 아뇨. 옆 선실에요.”

“보여주실 수 있나요?”

구개를 끄덕이며 다시 벨트를 조였다.

바깥으로 나가자 바람이 강하게 불어 몹시 추웠다. 덩치 큰 닐손이 곁에 있어서인지 좁은 베란다가 더 비좁게 느껴졌지만 한편으로는 그가 있어서 안심되었다. 혼자서 베란다로 나갈 용기는 없었다.

“저기예요. 저기, 가서 보면 무슨 말인지 알 거예요.”

내 베란다와 10호실 베란다를 분리하는 칸막이를 가리켰다. 칸막이 너머를 보던 닐손은 살짝 인상을 쓰며 고개를 돌렸다.

“말씀하신 피는 안 보입니다. 어디인지 알려주시겠어요?”

“무슨 소리예요? 유리 전체에 피가 다 묻었는데.”

그를 밀고 지나가 유리를 들여다보았다. 심장이 빠르게 뛰었다. 살인자가 그곳에 있지 않다는 것은 알고 있었다. 얼굴에 주먹이 날아오거나 귀 옆으로 총알이 스치는 일은 없을 것이다. 하지만 자꾸 반대편에 무엇이 있을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들었고, 칸막이를 들여다보는 것이 소름 끼칠 정도로 겁이 났다.

그곳에는...... 정말 아무것도 없었다.

숨어 있다가 순식간에 덤벼들 살인자도, 얼룩진 피도 없었다. 유리 난간은 달빛을 받아 깨끗하게 반짝였다. 닐손을 돌아보았다. 내 얼굴은 보나 마나 충격으로 딱딱하게 굳어 있겠지. 적당한 말은 찾지 못해 고개를 흔들자 닐손이 푸른 눈으로 안쓰럽게 나를 바라보았다. 그 시선 때문에 너무나 화가 나서 더 크게 말했다.

“저기 있었어요. 그 사람이 닦은 게 분명해요.”

“그 사람이라고요?”

“살인자요! 당연히 미친 살인범이죠!”

“흥분하실 필요는 없습니다. 블랙록 님.” (P124-126)


“그렇군요. 하지만 블랙록 님, 죄송하지만 이것이 무엇을 증명하는지는 모르겠습니다. 오늘 다른 사람에게 마스카라를 빌렸다는 사실 말고는......”

“무엇을 증명하느냐고요? 그 여자가 정말 저기 있었다는 사실이죠! 그 여자가 존재했다는 사실이요!”

“네, 손님께서 어떤 여자를 봤다는 사실은 증명하지만.....”

“나한테 뭘 더 원하는 거죠? 난 지금 내가 무엇을 봤고, 무엇을 들었는지 다 말했어요. 저 선실에 여자가 있었고 사라졌다고도 말했어요. 승객 명단을 봐요. 승객이 사라졌단 말이에요. 걱정이 안 돼요?”

“저기는 빈 선실입니다.”

나는 고함을 지르다가 내게 친절을 베풀고 있다는 듯 지나치게 차분하게 말하는 닐손의 표정을 보고는 흥분을 가라앉혔다.

“나도 알아요. 지금까지 계속 그 말을 하고 있잖아요.”

“아니요. 제 말은 이런 뜻입니다. 블랙록 님. 10호실은 계속 비어 있었어요. 승객이 타지 않았습니다. 처음부터 아무도 없었어요.” (P12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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잠이 들 리 없었다. 심장이 뛰고 피가 끓었다. 화도 났고 긴장도 풀리지 않았다. 이유는 확실하지 않았다. 어둡고 새까만 북해에 표류하는 여자의 시신을 절대 찾지 못할까 봐? 아니면 그보다 더 사소하고 치사한 이유 때문일까? 닐손이 나를 믿지 않아서?

‘닐손이 맞을지도 몰라.’

머릿속의 얄미운 목소리가 작게 속삭였다. 나의 여러 가지 모습이 눈앞을 스쳤다. 바람에 문이 닫혔다고 샤워를 하다 주저앉았고 존재하지도 않는 침입자로부터 스스로를 보호하려다가 주다를 공격했다.

‘확실해? 너는 별로 믿을 만한 목격자가 아니잖아 정확히 무슨 장면을 본 거야?’

유리 난간에 묻은 피, 그리고 사라진 여자.

어떻게 된 일인지 밝혀내야 했다.

조명을 끄고 이불을 덮었지만 잠은 오지 않았다. 옆으로 누워 바다를 내다보았다. 폭풍우도 견디는 선체 너머에서 고요한 바다가 너울지고 있었다.

그리고...... 이 배에는 살인자가 있다.

그 사실을 아는 사람은 나뿐이다. (P134)


“혹시 생각나는 사람이 있나요? 제 설명과 일치하는 사람이 하나라도 없을까요?”

“글쎄요. 보시다시피 제 머리도 검은색이죠. 하지만 저는 아니었으니 잘 모르겠네요. 하니가 검은 머리이고 비르기타도.....”

“벌써 만났어요. 그 사람들은 아니에요. 다른 사람은 없나요? 청소부? 선원?”

“아...... 아니요. 선원 중에 그런 사람은 없어요. 직원 중에 에바도 있지만 나이가 너무 많고요. 주방 사람들은 만나보셨어요?”

“........ 그만하죠.”

악몽이 끝도 없이 반복되고 있었다. 이 사람 저 사람에게 질문할수록 검은 머리 여자의 기억은 어렴풋이 흐려져 물처럼 손가락 사이로 빠져나갔다. 만나본 사람들 중에는 내 기억과 비슷한 여자도 있었지만 완전히 일치하지는 않았다. 머릿속의 이미지를 붙잡고 있기가 점점 힘들었다.

그 여자에게는 분명한 특징이 있다. 다시 본다면 한눈에 알아볼 수 있다. 얼굴은 아니다. 예쁘장했지만 평범한 편이었다. 머리카락이나 핑크 플로이드 티셔츠도 아니다. 날카로운 눈으로 복도를 보던 표정. 내 얼굴을 보고 놀란 표정에는 활기와 생동감이 넘쳤다.

정말로 그 여자가 죽었을까?

그녀가 죽지 않았다면 남은 가능성은 하나뿐이다.

내가 미쳐가고 있는 것이다. 어느 쪽이 더 나은지 모르겠다. (P154)


좁은 선실 안을 다시 서성이며 어젯밤 일을 떠올리자 몇 개의 장면 , 소리, 두려움이 머릿속을 가득 채웠다. 누군가 침입했다는 느낌을 떨칠 수가 없었다. 누군가 내 선실에 들어왔다. 내가 닐손과 다니느라 바쁘다는 사실을 알고 이곳으로 와 내 소지품을 뒤지고 유일한 증거를 가져갔다.

대체 누가 열쇠에 접근할 수 있지? 이보나? 칼라? 요세프?

노크 소리에 황급히 문을 열었다. 문밖에는 신경질과 피로가 불편하게 섞인 닐손이 곰처럼 서 있었다. 나만큼 심하지는 않지만 눈 밑에 다크서클이 생기고 있었다.

“누가 마스카라를 가져갔어요.”

내가 다시 말하자 닐손이 고개를 끄덕였다. (P174)


내가 왜 약을 먹어야 살 수 있는지, 그 이유가 문서로 기록되어 있지는 않다. 유복한 어린 시절을 보냈고 부모님은 나를 애지중지 키웠다. 나를 때리거나 괴롭힌 사람도 없었고 성적도 늘 A만 받았다. 내게는 사랑과 응원뿐이었다. 그런데 그것만으로는 부족했던 모양이다.

내 친구 에린은 모든 사람의 내면에 악마가 있다고 말한다. 내가 쓸모없는 사람이라고, 이번 승진에서 제외되거나 시험을 잘 보지 못하면 내가 정말로 가치 없는 껍데기일 뿐이라고 이 세상에 알려질 것이라 속삭이는 목소리가 있다고 한다. 그 말이 정말인지도 모르겠다. 내 안에 있는 악마의 목소리는 조금 더 큰 것뿐일지도.

사실은 그렇게 간단하지 않다. 대학을 졸업한 후 우울증에 빠졌다. 원인은 시험이나 자존감이 아니었다. 그보다 더 기이한 무엇이었고 내 병은 약이 아니면 치료할 방법이 없었다.

인지 행동요법, 상담, 심리 치료..... 무엇도 약과 같은 효과를 내지는 못했다. 친구인 리지는 약으로 감정을 제어한다는 사실이 무섭다고 했다. 내 본질을 바꿀 수 있는 약을 먹는다는 것이 두렵다고. 그렇지만 내게는 약을 먹는 것이 화장하는 것과 비슷했다. 변장이 아니라 내 원초적인 모습을 감추고 나를 더 나답게 만들었다. 나를 최고의 모습으로 만들어주었다.

벤은 그런 화장을 하지 않은 나를 본 적이 있다. 그 후 나를 떠났다. 그 사실에 한동안 화가 났지만 그를 원망할 수 없었다. 스물다섯 살이 된 그해의 나는 아주 끔찍했으니까. 나를 떠날 수만 있다면 나라도 기꺼이 그렇게 했을 것이다.

그러나 지금은 그때보다 더, 벤을 용서할 수 없다. (P180-18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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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무것도 할 수 없었다. 거울 위에 쓰인 글자에서 물이 떨어지는 것을 바라보며 서 있을 뿐이었다. 심장이 하도 빠르게 뛰어 토할 것만 같았다. 이명이 울렸고 겁에 질린 짐승처럼 흐느끼는 소리가 들렸다. 공포와 고통 사이의 금찍한 소리였다. 절반만 남은 이성으로 알아낸 그 소리의 근원지는, 바로 나였다.

방이 빙글빙글 돌고 벽이 좁아지기 시작했다. 나는 공황 발작을 일으키고 있었다. 안전한 곳으로 가지 않으면 기절할 것이다. 반은 기다시피 침대로 걸어가 태아의 자세로 웅크리고 누어 호흡을 늦추려 했다. 인지 행동요법을 가르치던 코치의 말을 떠올렸다.

‘침착하게 의식적으로 숨을 쉬어요, 로. 점진적으로 근육을 이완합니다. 한 번에 근육 하나씩 긴장을 풀어요. 침착하게 숨을 쉬고..... 의식적으로 긴장을 풀어요. 침착하게...... 의식적으로. 의식적으로..... 그리고 침착하게.’

당시에도 그 방법으로는 발작을 가라앉히지 못했는데, 정말로 두려운 일이 생긴 지금은 오죽할까.

‘침착하게.... 의식적으로.....’

머릿속으로 코치의 방정맞고 으스대는 고음을 떠올렸고 곧 분노가 생기며 마음이 조금 가라앉았다. 겁에 질려 가빠지던 호흡을 늦출 만큼 분노는 나를 강하게 만들었다. 간신히 일어나 젖은 머리를 뒤로 넘기고 전화기를 찾았다. 전화기는 포장된 마사지용 진흙과 나란히 계산대에 있었다. 손이 떨리고 마른 진흙이 붙어 있어 0번을 누르기도 힘들었지만 간신히 전화기를 들었다.

“안녕하세요. 어떻게 도와드릴까요?”

아무 말도 하지 못하고 다이얼 위에 손가락을 올린 채 가만히 앉아 있었다. 그리고 전화기를 내려놓았다.

메시지가 사라졌다.

내가 앉은 침대에서 샤워실 거울을 볼 수 있었다. 샤워기를 끄고 환풍기가 돌아가자 증기가 전부 사라졌다. ‘참견’에 있는 받침 두 개에서 물줄기가 몇 가닥 흘러내릴 뿐이었다.

닐손은 이번에도, 내 말을 믿을 리 없었다. (P204-205)

뒤쪽 선실로 가는 복도를 황급히 지나며 모퉁이를 돌다 벤과 말 그대로 충돌했다. 벤이 내 팔을 붙잡았지만 부딪힌 힘에 숨이 턱 막혔다.

“로! 너 때문에 온 동네를 찾아다녔어.”

“알아, 스파에서는 뭘 하고 있었던 거야?”

“방금 내 말 못 들었어? 너를 찾아다녔다니까.”

순진무구한 표정으로 나를 보는 벤을 빤히 쳐다보았다. 검은색 수염 위로 보이는 눈에는 다급한 기색이 역력했다. 과연 그를 믿을 수 있을까? 도저히 모르겠다. 몇 년 전이라면 그를 속속들이 다 안다고 말했을 것이다. 그가 나를 떠나는 바로 그 순간까지도 그렇게 믿었으니까. 하지만 지금은 다른 사람은 고사하고 나 자신도 믿을 수 없다.

“내 처치실에 들어왔었어?”

불쑥 질문을 던지자 벤은 잠시 혼란스러워 보였다.

“뭐? 아니, 그럴 리가 있냐. 진흙 마사지를 받고 있다며, 함부로 들어가면 싫어할 거 아냐. 울라라는 여자를 찾으라던데 찾을 수가 없어서 방문 아래로 쪽지를 넣고 다시 나왔어.”

“쪽지는 못 봤어.”

“어쨌든 나는 남겼어. 무슨 일 있었어?”

가슴 속에 있는 짜증과 두려움이 폭발할 것만 같았다. 벤이 진실을 말하는지 어떻게 알 수 있을까? 하긴, 거울에 메시지를 쓴 사람이 벤이라면 쪽지를 남겼다는 거짓말을 할 이유는 없다. 벤이 정말로 쪽지를 남겼고 내가 당황해서 미처 못 봤는지도 모른다.

“다른 사람이 메시지를 써놓고 갔어. 내가 마사지를 받는 동안 옆에 붙은 샤워실 거울에 ‘참견하지 마’라고 썼단 말이야.”

“뭐야? 정말이야?” (P213-214)


아처는 적어도 알리바이가 있다. 물론 따지고 보면 그 알리바이는 벤의 증언일 뿐이다. 벤도 그럴싸하게 변명을 하고 있지만 내게 거짓말을 했다. 콜에게 듣지 않았다면 벤이 선실을 나갔다는 사실을 평생 몰랐을 것이다.

하지만 벤이라니, 벤? 그럴 리가 없다. 이 배에서 믿을 사람이 있다면 벤이어야 했다. 그렇지 않나?

이제는 나도 모르겠다.

빵 가장자리까지 다 삼킨 후 냅킨으로 손가락을 닦았다. 발밑에서 배가 이리저리 흔들거렸다. 식사하는 동안 해무가 스멀스멀 들어와 선실을 어둡게 만들었다. 전등을 켜고 휴대전화를 확인했다. 아직, 아무것도 없다. 누구든 메일을 보냈기를 바라는 헛된 희망으로 다시 접속했다. ‘연결 실패’ 알림이 떴을 때는 두려움과 안도감이 섞여 속이 울렁거렸다. 주다가 아직까지 연락을 안 한 거면 어쩌지? 하지만 단지 그 사실만이 두려운 것은 아니었다. 인터넷이 끊긴 지 오래될수록 누군가 일부러 연결을 차단하고 있다는 생각이 강하게 들었고, 그것이 정말 두려웠다. (P227-22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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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팔름그렌실 말이죠? 그 방은 비어 있다고 생각했는데요. 솔베르그가 취소하지 않았나요?”

불머는 이야기가 어디로 흘러가는지 이해하지 못하고 인상을 찌푸렸지만 나는 주변 사람들을 둘러보며 이야기를 계속했다.

“베란다로 나가서 소리가 난 쪽을 봤어요. 아무도 보이지 않았지만 유리 난간에 핏자국이 있었고요.”

“세상에, 꼭 소설에 나오는 이야기 같군. 계속해봐요. 이야기가 어떻게 전개되는지 궁금해 죽겠으니까.”

라스는 의심을 숨기려 하지 않고 히죽이죽 웃으며 빈정거렸다. 일부러 평정심을 잃게 해서 내 이야기에 흠집을 내려는 것일까? 아니면 원래 이런 태도를 보이는 사람인가? 알 수 없었다.

“보안팀장이 10호실로 들여보내줬어요. 하지만 선실은 비어 있었어요. 그리고 피가 묻었던 유리는......”

나는 목소리에 힘을 주어 속사포처럼 불머에게 설명했다.

그 순간, 어디서 툭 소리가 나더니 무엇인가 물에 빠지는 소리가 들렸다.

하던 말을 멈추었다. 우리는 욕조 밖으로 손을 뻗고 있는 콜을 돌아보았다. 연한 나무 갑판 위로 피가 뚝뚝 떨어지고 있었다.

“괜찮아요. 괜찮을 겁니다. 미안해, 리처드. 어쩌다 그랬는지 모르겠지만 샴페인을 넘어뜨려서....”

콜이 불안하게 말하며 손바닥을 펼쳐 피로 물든 유리 조각을 내보였다.

“엄마야!”

클로이가 침을 삼키고 눈을 꽉 감았다. 그녀의 얼굴에 핏기가 싹 가셨다.

“세상에, 콜.....”

불머가 잔을 내려놓고 욕조에서 몸을 일으켜 벤치에 쌓여 있던 흰색 가운을 집어 들었다. 그는 잠시 아무 말 없이 갑판으로 피를 흘리는 콜의 손을 냉정하게 바라보더니 기절하기 직전인 클로이를 바라보았다. 그런 다음 수술실에서 명령을 내리는 의사처럼 주문했다.

“콜, 제발 그 유리는 내려놔. 내가 울라를 불러서 치우라고 할게. 라스, 클로이 좀 데려가서 눕혀줘요. 얼굴이 하얗게 질렸어요. 필요하다면 신경안정제도 먹이고요. 에바에게 부탁하면 약을 가져다줄 겁니다. 그리고 블랙록 씨....”

불머가 나를 돌아보았다. 그는 가운 허리띠를 두르며 신중하게 말을 골랐다.

“블랙록 씨, 가서 레스토랑에 앉아 계세요. 여기 난장판을 해결하고 나서 그날 어떤 장면을 봤는지 같이 이야기해봅시다.” (P236-237)


고집스럽게 화장을 계속했다. 클로이에게 빌린 마스카라를 칠하며 욕실 거울을 보던 중, 15년 전 대학에서 언론 공부를 시작한 분노에 찬 이상주의자 소녀와 마주했다. 범죄 사건을 취재하는 기자가 되어 세상을 바꾸겠다는 꿈이 있던 소녀. 그 아이는 공과금을 내기 위해 <벨로시티>에서 여행기를 쓰는 길로 빠졌고 어느새 그 일을 즐기게 되었다. 심지어 여행기자가 누릴 수 있는 특혜를 선망하며 로완처럼 자신의 잡지사를 운영하는 꿈을 꾸기 시작했다. 그래도 괜찮았다. 이런 기사를 쓰는 것이 부끄럽지 않았으니까. 사람들 대부분이 그렇듯 나도 내가 할수 있는 일을 택했고 최선을 다하려고 했다. 그렇지만, 지금 밖으로 나가서 내 앞에 있는 이야기를 조사할 용기가 없다면 거울 속의 이 소녀와 어떻게 눈을 맞출 수 있겠는가?

내가 존경했던 모든 여성 종군기자들을 생각했다. 부패 정권을 폭로하고 정보 제공자를 보호하기 위해 감옥에 가고 진실을 얻기 위해 자기 목숨을 건 사람들을 생각했다. 마사 겔흔(미국의 작가이자 저널리스티며 헤밍웨이의 세 번째 부인)이라면 범인의 ‘참견하지 마’라는 명령을 순순히 따를까? 케이트 에디(종군기자로 유명한 영국의 저널리스트)가 무엇을 발견할지 두렵다고 호텔 방에 숨어만 있겠냐고.

‘참견하지 마.’

거울에 적혀 있던 그 글자는 뇌리에 각인되어 잇다. 립글로스로 화장을 마우리한 후 거울에 입김을 불어 한 단어를 썼다. ‘싫어’라고.

욕실을 나와 구두를 신는 동안 작지만 이기적인 마음은 이렇게 속삭였다. 사람들 사이에 있을 때가 가장 안전하다고. 증인으로 가득한 곳에서 나를 해칠 사람은 아무도 없다고. 그때, 누군가 문을 두드렸다.

“누구세요?”

“칼라입니다. 블랙록 님.” (P248-249)


린드그렌 라운지로 올라가는 길에 칼라와의 대화를 되새기며 그 의미를 이해해보려 했다. 칼라는 선실에서 누군가를 본 것일까? 아니면 누가 있었다고 추측하는 것일까? 내가 안쓰러운 마음과 내 말이 진실일 경우 벌어질 일에 대한 두려움 사이에서 갈등하는 것일까?

육지와 가까워졌으므로 이제는 되지 않을까 싶은 생각에 라운지 밖에 서서 휴대전화를 슬쩍 확인해보았지만 아직 신호는 없었다. 핸드백에 휴대전화를 도로 넣는데 커밀라 리드먼이 미끄러지듯 다가와 내 가방을 가리키며 말했다.

“보관해드릴까요, 블랙록 님?”

“아니요, 괜찮아요.” (P25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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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구멍으로 불빛이 새어나가면 내가 문 앞에 서서 문구멍에 덮인 뚜껑을 열었다는 사실을 들킬 것이다. 문구멍을 손바닥으로 덮은 채 작은 금속 뚜껑을 옆으로 젖혔다. 창문으로 희뿌옇게 들어오는 새벽 여명을 감추려 문구멍에 얼굴을 가까이 가져가고 나서야 손가락을 치우고 렌즈를 내다보았다. 누구인지 감이 잡히지 않았다. 기것해야 닐손이겠지, 아니면 벤 하워드, 불머를 봤다 해도 놀라지는 않았을 것이다.

하지만 그 사람이 실제로 문밖에 서 있으리라고는 전혀 예상하지 못했다. 그 여자였다.

10호실의 사라진 여자.

그녀가 아무 일도 없었던 것처럼 태연하게 서 있었다.

배를 주먹으로 한 대 맞은 것처럼 숨을 쉴 수 없었고 한동안은 움직이지도 못했다.

이 여자가 살아 있다. 내가 틀렸다. 닐손이 옳았다.

여자가 뒤를 돌아 복도를 걷기 시작했다. 직원 숙소로 가는 출입문 방향이었다. 그 여자를 잡아야 했다. 문이 닫히기 전에 반드시, 나는 황급히 체인과 걸쇠를 풀고 선실 문을 활짝 열었다.

“이봐요! 저기, 여보세요. 기다려요! 나랑 이야기 좀 해요!”

여자는 멈추지 않았다. 뒤를 힐끗 돌아보지도 않았다. 그녀는 아래층 갑판으로 가는 문 앞에 서서 비밀번호를 입력했다. 멈춰 서서 생각할 겨를도 없었다. 이번만큼은 그녀가 흔적도 없이 사라지게 가만둘 수 없었다. 무작정 달렸다.

반밖에 따라가지 못했을 때 여자는 이미 아래층 갑판 아래로 내려가고 있었다. 닫히려는 문 끝을 겨우 붙잡았다. 문이 닫히며 문틈에 낀 손가락이 아프게 짓눌렸다. 문을 비집어 열고 몸을 날렸다.

계단 위 전구가 나가서 내부는 암흑이었다. 나중에서야 전구를 일부러 뺐을지도 모르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등 뒤로 문이 획 닫혔고 내려가는 계단이 어디 있는지 알아내기 위해 가만히 서서 위치를 확인했다.

그때, 그 일이 일어났다.

뒤에서 튀어나온 손이 내 머리카락을 낚아챘고 다른 손은 내 팔을 등 뒤로 꺾었다. 어둠 속에서 우리의 팔다리가 뒤엉켰다. 찰나의 순간, 나는 두려움으로 숨을 헐떡이며 손을 허우적거렸다. 상대방의 살에 손톱을 박고 반대편 손으로는 내 머리카락을 강하게 움켜쥔 가느다란 손을 붙잡으려 했다. 그럴수록 머리카락을 잡아당기는 힘은 더 강해졌다. 손은 내 머리를 고통스럽게 뒤로 꺾은 후 잠겨 있는 문을 향해 내 머리를 거칠게 밀었다. 철제 문틀에 내 머리뼈가 우지끈 부딪혔다.

내 기억은 거기서 끝났다. (P275-276)

두통과 배의 엔진 소리에 지쳐서 나도 모르게 잠이 든 모양이다. 딸깍하는 소리에 잠에서 깨 벌떡 일어나다가 침대 위쪽에 머리를 부딪혔다. 머리를 감싸 쥐고 신음했다. 귀가 멍하고 뒷골이 울렸다.

너무 고통스러워 가만히 누워 눈을 꽉 감았다. 마침내 고통이 잦아 들었다. 옆으로 돌아누워 눈을 천천히 뜨고 흐릿한 형광등 불빛에 눈을 찡그렸다.

바닥에 쟁반과 유리잔이 있었다. 주스 같았다. 오렌지 주스처럼 생기고 오렌지 주스 냄새가 났지만 차마 마실 수 없었다. 힘겹게 일어나서 작은 욕실 문을 열고 세면대에 주스를 버렸다. 수도꼭지를 틀어 잔을 물로 채웠다. 미지근한 물에서는 퀴퀴한 냄새가 났지만 너무 목이 말라서 더한 것도 마실 수 있을 것 같았다. 단버넹 들이켜고 한 번 더 컵을 채워 천천히 홀짝이며 침대로 돌아왔다.

머리가 너무 아파서 진통제가 간절했다. 단순히 두통만이 아니라 몸 상태가 최악이었다. (P28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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꿈에서 본 여자의 모습을 지울 수 없어 손이 떨렸다. 살가죽을 벗은 축축한 형체가 나를 향해 기어왔다. 나를 붙잡으려 했다.

내가 무슨 짓을 한 거지? 대체 왜 그랬던 걸까? 나는 증거를 찾으며 계속 사건에 다가가고 입 다물기를 거부했다. 스스로 표적이 된 셈이다. 그 선실에서 일어난 일에 침묵하기를 거부한 죄로. 그런데...... 무엇이 진실이란 말인가?

숨 막히는 어둠 속에서 손으로 눈을 꾹 누르며 상황을 이해하려 했다. 여자는 살아 있다. 내가 무엇을 들었든, 무엇을 봤다고 생각하든, 그때 살인은 일어나지 않았다. 여자는 내내 배에 있었을 것이다. 출항한 후 내가 여기에 갇힐 때까지, 배는 멈춘 적이 없다. 육지에 가까이 간 적도 없다. 그 여자는 대체 누구이기에 배에 숨어 있었을까?

지끈거리는 두통을 무시하고 논리적으로 생각했다. 승무원 중 하나일까? 실제로 그녀는 직원용 출입문을 드나들 수 있었다. 닐손은 내가 뒤에 서 있는 동안 비밀번호를 눌렀고 번호판을 가리려고 하지도 않았다. 그 말은 마음만 먹으면 승무원이 번호를 누르는 동안 뒤에서 비밀번호를 알아낼 수 있다는 것이다. 그쯤은 애들 장난처럼 쉽게 할 수 있다. 그 문을 열고 갑판 아래로 내려오면..... 그다음부터 닫힌 문은 거희 없다.

하지만 여자는 빈 선실에 들어갔다. 그러려면 그 문만 열리도록 설정된 승객용 카드키가 있거나 모든 선실 문에 적용되는 직원용 마스터키가 있어야 한다. 아래쪽 갑판으로 내려겼을 때 청소부들은 비좁은 우리 같은 곳에서 생활하고 있었다. 겁에 질린 얼굴로 나를 보다 문을 닫던 여자의 모습이 떠올랐다. 마스터키를 얼마에 팔까? 100크로네? 1,000크로네? 아니, 굳이 살 필요도 없었을 것이다. 미리 카드키를 복사했을 수도 있다. 칼라를 생각했다. 그녀는 그런 일이 실제로 있다고, 누군가 친구에게 선실을 빌려줬을 수 있다고 말했다. 카드키를 훔치는 방법도 있다. 인터넷을 뒤지면 파는 곳을 찾을 수도 있을 것이다. 그런 전자자물쇠가 어떻게 작동하는지 모르지만 직원이 관여된 일이 아닐 가능성도 있다. (P290-291)


“잘 있어.”

그 말을 남기고 돌아서던 여자의 시선이 화장실 문 뒤에 붙은 작은 거울에 꽂혔다.

“아이씨, 얼굴에 피 묻었잖아. 왜 진작 말 안 했어? 그쪽이 날 공격했다는 사실을 들키면.....”

여자는 화장실로 들어가 세수를 했다. 하지만 여자가 물로 씻어낸 것은 피만이 아니었다. 화장실에서 나오는 모습을 보고 나는 그 자리에 얼어붙었다. 별것 아닌 행동 하나로 그녀의 정체가 드러났다. 여자는 피를 씻으며 양쪽 눈썹까지 깨끗하게 지웠다. 눈썹과 머리카락이 없어 해골처럼 보이는 얼굴은 어디에서도 알아볼 수 있었다.

10호실의 여자.

그녀는 바로 앤 불머였다. (P306)


다만 살인은 일어나지 않았다. 그런데 그 사실이 자꾸 의심이 된다. 믿기지가 않는다. 왜 그런 것일까.

왜긴 왜야. 내가 지금 여기 갇혀 있기 때문이지. 그 말은 내가 본 것이 무엇이든, 선실에서 무슨 일이 일어났든, 그것을 트론헤임 경찰에게 말하면 안 된다는 뜻이다. 무슨 일이 있었을까? 말할 수 없을 정도로 위험한 일이 분명했다. 밀수일까? 밖에 있는 공범자에게 밀수품을 던졌나?

‘다음은 너야. 멍청한 년.’

머릿속의 목소리가 말했다. 머리에 전기 충격을 준 것처럼 갑자기 깊은 바다로 추락하는 내 모습이 떠올랐다. 얼굴을 찡그리고 이를 악물며 끈적거리는 감자를 또 한 입 먹었다. 배가 들썩거리자 뱃속에서 메스꺼움이 일었다.

나는 어떻게 될까? 가능성은 두 가지뿐이다. 어느 시점에 나를 풀어준다. 아니면 나를 죽인다. 첫 번째는 가능성이 적어 보인다. 나는 너무 많은 것을 안다. 앤의 정체 즉, 그녀가 연기하는 것만큼 아프지 않다는 사실을 안다. 내가 나가서 납치, 감금, 상해를 주장하게 두지는 않겠지. 그렇지만 내가 이 모든 것을 말한다고 해도 누가 나를 믿을까?

뺨을 어루만졌다. 여자가 나를 문틀로 찍어 생긴 상처 위로 피딱지가 남아 있었다. 갑자기 내가 더럽게 느껴졌다. 먼지와 땀과 피를 뒤집어쓰고 있었다. 지금까지의 행동으로 판단하건대 앤은 몇 시간 후에나 돌아올 것이다. (P31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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두 명의 앤.

두 명의 여자.

눈과 어울리는 회색 실크 가운.

눈을 뜨고 침대 아래로 다리를 내렸다.

내 어리석음에 신음이 나왔다. 당연하잖아..... 너무도 당연한 거잖아. 겁에 질려 공황 상태에 빠지고 머리가 아파서 반쯤 죽은 상태가 아니었다면 진작 알아차렸을까? 어떻게 생각을 못 했지?

앤은 두 명이다.

앤 불머는 죽었다. 우리가 영국을 떠난 그날 밤 이후로, 그리고 핑크 플로이드 티셔츠를 입은 여자는 멀쩡히 살아서 앤 행세를 하고 있는 것이다.

비슷한 키, 비슷한 몸무게, 똑같이 튀어나온 광대뼈..... 다른 것은 눈 색깔뿐이다. 그들은 갓 만난 여자의 특징을 사람들이 기억하지 못할 것이라 생각하고 위험을 감수했다. 이번 여행 전에 앤을 만난 승객은 없다. 불머는 콜에게 앤의 사진을 찍지 말라는 말까지 했다! 이제야 이유를 알았다. 자기 모습에 자신감이 떨어진 아내를 보호하기 위해서가 아니다. 이후에 아내의 가족과 친구들이 사진ㅇ르 비교하지 못하게 한 조치일 뿐.

눈을 감고 머리카락을 움켜쥐어 아프게 잡아당겼다. 무슨 일이 일어난 것인지 생각하자.

분명히 리처드 불머이다. 그는 어떤 방법으로든 10호실 여자를 배에 몰래 태웠다. 우리가 배에 오르기도 전부터 그녀는 10호실에 있었다. (P313-314)

승객들이 배에서 내리고 있었다.

“도와주세요!”

비명을 지르며 다시 천장을 쳤다. 이제야 플라스틱 천장에 방음 장치가 있어 소리를 흡수한다는 사실을 깨달았다.

“도와줘요! 여기예요! 나 여기 있어요! 배에 있다고요! 아무도 없어요? 제발요! 제발 좀 도와줘요!”

대답은 없다. 숨이 차서 목이 찢어질 것 같고 귓가에 피가 몰렸다.

벽에 손을 댔다. 다리가 내려가 항구에 쿵 떨어지는 소리가 손바닥에 전해졌다. 매점 카트..... 짐..... 떠나는 발소리. 전부 느낄 수 있었다. 하지만 들리지는 않았다. 나는 바다 아래 깊은 곳에 있었고 그들은 수면 위에 있었다. 내가 플라스틱 그릇으로 만드는 희미한 진동은 바람 소리와 갈매기 울음과 승객들의 말소리에 묻힐 것이다.

손에 들고 있던 그릇을 바닥으로 떨어뜨렸다. 그릇이 튀어 올라 얇은 카펫 위에서 회전했다. 침대에 털썩 주저앉아 손으로 머리를 감싸 쥐었다. 무릎에 얼굴을 묻고 흐느껴 울기 시작했다. 두려움과 절망에서 나오는 눈물에 목이 멨다.

두려움을 느끼는 것이 처음은 아니다. 두려워서 기절할 뻔한 적도 있었다. 그러나 이런 절망감은 처음이었다.

얇고 푹 꺼진 매트리스에 무릎을 꿇고 흐느껴 우는 동안 여러 가지 생각이 머리를 스쳐 지나갔다. 신문을 읽는 주다, 혀를 물고 가로세로 퍼즐을 하는 엄마, 일요일이면 엉망으로 콧노래를 부르며 잔디를 깎는 아빠, 한 명만이라도 볼 수 있다면 뭐든 내놓을 수 있었다. 단 한 순간만이라도, 내가 살아 있고 사랑한다고 말할 수 있다면....

소원이 없겠다.

지금 오직 생각할 수 있는 것은 내가 돌아오기를 기다리는 세 사람의 모습뿐이다. 내가 오지 않을 때의 절망감도, 돌아오지 않을 사람을 형벌처럼 평생 기다리고, 또 기다리는 모습이 눈앞에 선했다. (P325-326)


“하지만 확실히 하기 위해 내 머리를 밀어야 한다더라, 그래도....... 그럴 가치가 있었어. 그 사람과 같이 있을 수 있다면.”

캐리는 침을 삼키고 아까보다 조금 천천히 말을 이었다.

“첫째 날 밤에 내가 막 앤 옷을 입고 있을 때였어. 리처드가 선실로 달려오는 거야. 제정신이 아니었어. 앤이 우리 사이를 알고 미쳐 날뛰며 달려들었대. 리처드는 방어를 하려고 그녀를 밀쳤고 그 여자는 비틀거리다 커피 테이블에 머리를 부딪혔다고 했어. 의식을 차리게 하려고 했는데..... 그랬더니..... 그 여자는 이미 죽어 있었대. 나는 어떻게 해야 할지 알 수 없었어. 경찰이 수사한다면 내가 배에 몰래 탄 사실이 드러날 테고, 리처드가 앤을 말리려다 그랬다는 말을 아무도 믿지 않을 거랬어. 우리 둘 다 기소될 거라고. 그이는 계획범죄의 살인자가 되고 나는 방조자가 된댔어. 내가 앤으로 변장했다는 사실까지 다 밝혀진대. 콜이 앤 옷을 입은 내 사진을 찍었다고. 그래서 내게..... 나더러 앤의 시체를 배 밖으로 던지고 계획대로 마저 하라고 설득했어. 그 여자가 베르겐에서 실종되면 우리까지 조사할 일이 없다고, 하지만 이렇게 될 줄은 정말 몰랐단 말이야!” (P344)


오로라호는 피오르 해안 한 곳에 깊숙이 들어와 있었다. 바위로 된 계곡 측면이 사방에서 보였고 아래의 물은 어둡고 잔잔하게 헤아릴 수 없을 만큼 깊었다. 저 멀리 작은 마을의 불빛이 보였고, 정박한 배는 잔잔한 수면에 불을 밝혔다. 그 위로 모든 것은 별이었다. 밝고 하얀 별은 정말 아름다웠다. 캐리를 생각했다. 저 아래 갇혀서 덫에 걸린 짐승처럼 피를 흘리고 있는..... 제발, 하느님, 누군가 캐리를 발견하게 해주세요. 캐리에게 무슨 일이 일어난다고 생각하면 참을 수 없었다. 그녀의 미친 계획을 방조하고 아래에 가둔 것은 나 자신이었다.

무력하게 몸을 떨며 불머가 잠들기를 기다렸다. 그는 쉽게 잠들지 않았다. 조명은 약간 어두워졌지만 텔레비전에서는 계속 밝은 빛을 내뿜었다. 휙휙 전환되는 화면은 방 안을 푸른색과 녹색으로 물들이다가 갑자기 검은색이 끼어들었다. 다시 다른 발로 무게를 옮기고 얼음장 같은 손을 겨드랑이에 꼈다. 그가 텔레비전 앞에서 잠들면 어떡하지? 잠들었다는 사실을 내가 알 수 있을까? 불머가 깊은 잠에 빠진다 해도 살인자가 있는 방에 들어가 불과 몇 센티미터 거리에서 까치발을 하고 지나갈 용기가 있을지 모르겠다.

그렇다면 대책은? 캐리를 찾으러 갈 때까지 기다려?

그때 무슨 소리가 들렸다. 심장이 멎는 것 같더니 아까보다 두 배는 더 빨리 뛰기 시작했다. 배가 시동을 걸고 있었다. (P370-37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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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러니까...... 블랙 록 양이시죠?”

그는 내 성이 두 단어인 것처럼 발음했다. 고개를 끄덕였다.

“이해가 안 되는군요. 야간 매니저에게 설명을 듣기는 했습니다만, 앤 불머의 신용카드는 어떻게 갖고 계시죠? 불머 부부는 우리 호텔에 자주 묵어서 잘 알고 있습니다. 친구분이신가요?”

손으로 얼굴을 감쌌다. 그렇게 하면 밀려드는 피로감을 억누를 수 있을 것만 같았다.

“저는...... 이야기가 길어요. 부탁인데, 전화 한 통 써도 될까요? 경찰에 연락을 해야 해요.”

물이 뚝뚝 떨어지고 지친 몸으로 윤이 나는 체크인 데스크에 서 있는 동안 결심을 했다. 캐리에게 약속했지만 경찰에 신고를 해야만 그녀를 구할 수 있었다. 그것이 유일한 방법이었다. 불머는 절대 캐리를 살려두지 않을 것이다. 캐리는 너무 많은 것을 알았고, 너무 많은 것을 망쳤다. 머리를 쌀 스카프가 없으니 앤인 척을 할 수 없고, 캐리의 여권이 없어 캐리 행세를 하지도 못했다. 둘 다 바다 깊이 빠뜨려 잃어버렸기 때문이었다. 남은 것은 앤의 지갑뿐이었다. 사다리를 기어올라 물 밖으로 나오는 동안에도 지갑은 레깅스 주머니에 기적처럼 남아 있었다.

“그럼요.”

에릭이 안쓰러운 표정으로 말했다. (P380)


앤, 리처드 불머, 캐리 이야기를 몇 번이고 되풀이했다. 말을 할 때마다 나조차도 이 이야기가 믿기지 않았다.

“가서 도와주세요. 캐리 말이에요. 배를 쫓아가야 해요.”

영국 대사관 직원과 경찰이 서로 눈빛을 주고받았다. 경찰이 노르웨이어로 무슨 말을 했다. 문득 깨달았다. 무엇인지 몰라도 좋지 않은 소식을 숨기고 있었다.

“왜요? 무슨 일이에요? 뭐가 잘못됐나요?”

“경찰이 시신 두 구를 발견했습니다. 하나는 월요일 아침에 어선에서 건졌고, 두 번째는 월요일 늦게 경찰 잠수부가 발견했습니다.”

대사관 직원의 목소리는 거북하게 딱딱했다. 손으로 눈을 마구 비볐다. 짓눌렸던 눈꺼풀 안쪽에서 불꽃이 튀었다. 깊이 심호흡을 했다. 고개를 들었다.

“다 말해주세요. 알아야겠어요.”

“잠수부가 발견한 시신은 남성이었습니다. 관자놀이에 총을 맞았고 경찰은 사인을 자살이라고 생각하고 있습니다. 신분증은 없었지만 리처드 불머의 시신이라고 추측하고 있어요. 오로라호의 승무원들이 실종신고를 했기 때문이에요.”

“그리고..... 다른 시신은요?”

침을 꿀꺽 삼켰다.

“두 번째는 여자였습니다. 마르고 머리카락을 짧게 깎은 여자요. 경찰이 부검할 예정이지만 현재까지 발견된 사실을 종합하면 익사한 것 같습니다. 블랙록 씨? 괜찮으세요? 블랙록 씨? 누가 티슈 좀 건네주겠어요? 울지 마세요, 블랙록 씨. 이제 무사합니다.”

그가 어찌할 바를 모르고 불안하게 주위를 둘러보았다. 아무 말도 할 수 없었다. 그의 말은 너무 끔찍했다. 나는 무사했다. 하지만 캐리는 아니었다. 불머가 자살을 했다니 마음이 놓여야 했지만 전혀 그렇지 않았다. 그저 가만히 앉아 울기만 했다. 캐리가 내게 했던 짓, 그리고 나를 위해 한 행동을 전부 생각했다. 옳고 그름과 상관없이, 캐리는 목숨으로 대가를 치렀다. 내가 느려서 그녀를 구하지 못했을 뿐이다. (P396-397)

영화 우먼 인 캐빈 14.jpg

텔레비전 화면에서 눈을 뗄 수 없었다. 한 남자가 나를 노려보고 있었다.

불머였다.

그는 나와 눈을 맞추고 한쪽 입꼬리를 씩 올려 미소를 지었다. 잠깐은 내가 환각에 빠졌다고 생각했다. 주다를 부르려고 숨을 들이마셨다. 악몽처럼 화면 밖으로 나를 빤히 쳐다보는 저 얼굴을 주다도 볼 수 있는지 물어보려 했다. 그 순간 화면이 뉴스 아나운서로 바뀌었고 그제야 상황을 파악했다. 불머가 죽었다는 뉴스 보도였다.

“영국 사업가이자 귀족인 리처드 불머 경의 사망에 관한 속보입니다. 문제 많은 노던 라이츠 그룹의 최대 주주였던 불머 경이 노르웨이 근해에서 시신으로 발견되었습니다. 본인이 소유한 호화 크루즈 선인 오로라호에서 실종되었다는 신고가 들어온 지 불과 몇 시간 만의 일입니다.”

화면은 다시 전환되었다. 이번에는 불머가 단상에 서서 연설을 하는 모습이었다. 입술이 움직였지만 아나운서가 영상 위로 뉴스를 진행할 수 있도록 연설하는 소리는 잘 들리지 않았다. 카메라가 그의 얼굴을 비치자 나도 모르게 볼륨을 낮추고 소파에서 내려와 그의 얼굴과 몇 센티미터도 떨어지지 않은 곳에 무릎을 꿇고 앉았다.

연설이 끝나자 불머는 허리를 숙여 인사를 했고 카메라는 그의 얼굴을 클로즈업했다. 불머가 화면 너머로 나를 바라보며 특유의 찡긋하는 윙크를 보냈다. 속이 뒤틀리고 소름이 돋았다. 그의 망령을 내 인생에서 완전히 쫓아내려고 떨리는 손으로 리모컨을 들었다. 그때 카메라가 청중석으로 방향을 바꾸었다. 첫째 줄에서 웃으며 박수치는 여자를 보자 ‘전원’ 버튼을 누르려다 말고 동작을 멈추었다. 눈부시게 아름다운 여자였다. 짙은 금발을 물결처럼 길게 늘어뜨렸고 광대뼈는 사과처럼 톡 튀어나왔다. 어디서 봤더라. 생각이 나지 않았다. 그러다..... 깨달았다.

앤이었다. 남편인 불머가 그녀를 처리하기 전의 앤은 젊고 아름답고 살아 있었다. 박수를 보내던 앤이 카메라가 자기를 찍고 있다는 사실을 알아차린 듯 렌즈를 바라보았다. 상상인지 모르겠지만 그 눈빛에는 알 수 없는 느낌이 있었다. 그녀의 표정은 어쩐지 슬퍼 보였고 어딘가에 갇혀 두려워하는 느낌이 들었다. 하지만 이내 더 활짝 웃으며 고개를 치켜드는 모습을 보자 알 수 있었다. 그녀는 절대 굴복하지 않을 여자였다. 마지막까지 포기하지 않고 맞서 싸울 여자였다.

화면이 아나운서로 다시 바뀐 후에는 텔레비전을 끄고 소파에 앉았다. 담요로 몸을 감싸고 벽으로 고개를 돌렸다. 주방에서 주다가 차를 만드는 소리가 들려왔다. (P400-401)

영화 우먼 인 캐빈 08.jpg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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