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4. 사진에서의 여백-빈 공간
동양예술에서 미학은 기운생동(氣韻生動)과 여백의 미라고 말할 수 있다. 동양의 예술적 표현은 ‘표현할 대상’과 ‘표현된 대상’을 서로 구분하지 않았고, 표현된 대상과 대상 뒤에 숨어 있는 내용을 표현하고자 했던 것이다. 대상의 외형과 내재적인 정신의 합일은 작가와 대상간의 소통에 있다. 그것이 바로 형상을 초월한 '상외지상(象外之象)', '미외지미(味外之味)'를 추구하기 때문이다.
동양화에서는 예부터 여백을 화면에 두루 퍼져 있는 기(氣)의 표상으로 여겼다. 중국의 초기(10세기) 산수화가들은 ‘산수의 기상(山水氣象)’을 묘사하고자 여백을 두었다. 여백은 광(光)과 기(氣)를 의미한다. 북송北宋의 사대부들(蘇東坡를 중심으로)이 시화일치론(詩畵一致論)을 제창하였는데, 그림 가운데 여백은 시정과 여운을 양성하는 훌륭한 수단이었다.
사상적으로 보았을 때, 여백은 노자의 무의 쓰임을 중시하는 사상에서 나온 것이라고 할 수 있다. 노자는 일찍이 눈에 보이지 않는 무의 쓰임을 강조했다. 흙으로 그릇을 만들지만 그 진정한 쓸모는 흙이 만들어내는 무의 공간에 있다는 이야기는 실로 놀라운 안목이 아닌가? 이처럼 동양화의 특징 중 하나가 여백의 미라는 것은 널리 알려진 사실이다. 그림에 있어서 여백이 노장철학이나 심오한 정신적 깨달음을 표현하려는 의미를 떠나서 작가는 아마도 작품으로부터 자유를 불러일으키게 한다. 보는 이로 하여금 그 자유로움을 만끽하며 상상을 불러일으키게 한다. 여백이란 이처럼 화면속의 형상이 자유롭고 생명감 넘치게 만드는 요소일 것이다.
추사秋史 김정희의 걸작 <세한도歲寒圖>는 적막한 이념의 공간을 보여준다. 하얀 종이 위에 조그만 오두막집 하나, 오두막을 둘러싼 소나무 네 그루가 전부이다. 제주도 귀양살이를 하고 있는 김정희의 마음이 그림 속에 잘 표현되고 있다. 화려하고 사실적인 그림이 아니라 울퉁불퉁하고 거친 선 표현과 텅 빈 여백이 많은 공간은 그의 마음을 짐작하기에 충분하다. 여기서 여백은 살아 있는 공간이다.
" 겨울이 오고난 뒤에야 소나무와 잣나무가
늦게 시드는 것을 안다( 歲寒 然後,知 松栢之 後凋) "
회화는 덧셈이고, 사진은 뺄셈이다. 완벽한 구도를 가져야 한다는 것이 일반적인 견해이지만, 오히려 여백을 두고 촬영하는 것 또한 틀린 것이 아니다. 앙리 까르띠에 브레송의 구도는 완벽하고, 많은 사진가들의 완벽한 프레임을 모방하여 촬영하기도 한다. 그러나 아놀드 뉴먼의 경우는 사진에서 약간의 여백을 두고 촬영한 이후에 프레임을 구성하기도 했다. 여백은 기술적인 면도 있지만 사각 화면 안에서의 꽉 찬 프레임이 주는 답답함에서 벗어나 숨통을 열어주는 구도, 생각의 지평을 열어준다.
아놀드 뉴먼
프레임을 구성하는 데 있어서 주요한 요소는 형상과 배경이다. 주제로서의 형상은 배경이 있기 때문에 존재한다. 배경이 없다면 형상 자체로서 존재의미는 사라질 것이다. 마치 그릇이란 형상은 내용물을 담을 공간이 있기 때문에 존재의 의미가 있는 것처럼, 배경은 형상이 존재하기 위해서 필요한 공간이 된다. 우리 눈은 형상에 집중하게 된다. 그리고 또한 그 형상이 어떠한 공간에 위치하고 있는지, 어떤 관계를 가지고 있는지, 주변을 살펴보게 된다. 여백은 그러한 공간에 대한 고찰이다.
비어있으나 충만한 형태(형상)는 공간을 애써 꽉 채우지 않아도, 감상자와의 소통을 불러일으킨다. 인위적인 기교를 배제한 미완성의 미적구도이다. 완벽하게 정제된 구도에서 벗어나 비계획적이고 오히려 애써 꾸미려 하지 않는 미완성의 구도인 것이다. 완벽한 구도를 가지기 위해서 형상과 관계되지 않는 요소를 빼내기 위한 뺄셈이 아니라, 여백은 버림의 미학이다.
'그러므로 깨달은 자는 빛나지 않으려 하기 때문에 빛나고,
자신을 돌보지 않기 때문에 존경받으며,
자신을 위해 아무것도 원치 않기 때문에 성공을 거두고,
내세우지 않기 때문에 권력이 있고,
대항하지 않기 때문에 그 누구도 그에게 맞서지 않는다.' - 버림의 미학을 강조한 노자의 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