넬리 라슨의 <패싱>

영화 <패싱Passing> 2021년

by 노용헌

할렘 르네상스를 대표하는 작가이자 흑인 여성 최초로 구겐하임 펠로우십을 수상한 넬라 라슨의 <패싱>은 1920년대 뉴욕 맨해튼의 할렘을 배경으로, 백인과 흑인 사회 어디에도 소속되지 못했던 밝은 피부색을 지닌 흑인 여성들의 모습을 생생하게 담아낸 수작이다. 인종뿐 아니라 젠더, 계급 등 다층적인 맥락에서 자신의 정체성을 탐구하며 삶의 방향을 정하는 인물들을 세밀하게 들여다보는 소설로, 20세기 말 섹슈얼리티와 인종에 대한 연구가 활발해지며 재조명받았다. 토니 모리슨의 소설 <빌러비드Beloved>의 노예 가족의 이야기와, 스파이크 리 감독의 영화 <똑바로 살아라>(Do the Right Thing)와 <말콤 X>(Malcolm X)와는 또 다른 메시지를 전달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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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도시의 무더운 여름날, 백인으로 보일 만큼 밝은 피부를 가진 아이린은 백인 전용 호텔의 스카이라운지에서 학창시절의 친구인 클레어와 우연히 마주친다. 고아가 되어 시카고 서쪽의 백인 거주지역으로 떠난 후 연락이 끊어졌던 클레어 켄드리는 몰라보게 당당하고 화려한 모습으로 나타나 아이린의 호기심을 자극한다. 혼혈로 태어나 부모로부터 상아색 피부와 밝은 금발을 물려받은 클레어는 아이린이 금기처럼 여기는 ‘인종 패싱’ 즉 ‘백인 행세’를 하며 살아가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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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실을 말하자면, 그녀는 궁금했다. 클레어 켄드리에게 묻고 싶은 것들이 있었다. 그녀는 ‘패싱’이라는 위험한 일에 대해 알고 싶었다. 익숙하고 친근했던 모든 것을 끊어내고, 아마 전적으로 낯설지는 않더라도 분명 전적으로 우호적이지는 않을 다른 환경에서 새로운 기회를 얻으려는 시도에 대해. 예를 들면 출신 배경은 어떻게 설명하나. 그리고 다른 흑인들과 만날 때는 어떤 기분인가. 그러나 그녀는 물어볼 수 없었다. 묻는 맥락이나 말투가 무례하지 않으면서도, 너무 솔직하게 호기심을 드러내지 않는 질문을 하나도 생각해내지 못했다.

아이린의 바람과 망설임을 알아차리기라도 한 듯 클레어는 신중하게 말했다. “린, 난 말이야, 어째서 더 많은 유색인 소녀들, 너와 마거릿 해머 그리고 에스터 도슨 같은 소녀들이, 아니 더 많은 사람이 결코 ‘백인 행세’를 하지 않는지 궁금했어. 그건 정말 너무나 쉬운 일이거든, 그런 유형에 속한다면 조그만 용기를 내면 되는데.”

“배경은 어쩌고? 내 말은, 가족 말이야. 어느 날 갑자기 생판 모르는 사람들 사이에 나타나서 두 팔 벌려 너를 환영해달라고 할 순 없을 것 아냐, 안 그래?”

“거의 그런 식이야.” 클레어는 단호하게 말했다. “넌 놀랄 거야. 린, 그게 우리보다 백인들 사이에서 훨씬 쉽다는 걸 알면. 백인들 숫자가 훨씬 많아서 그런 건지, 자기들은 안전하니까 신경쓰지 않는 건지 나도 잘 모르겠더라.”

아이린은 쉽게 믿기지 않았다. “그러니까, 네가 어디서 왔는지 설명할 필요가 없었단 말이야? 어떻게 그럴 수가.”

<넬라 라슨, 패싱, P34-3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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흑인의 피가 한 방울만 섞여도 흑인이라는 ‘한 방울의 법칙one-drop rule, ODR'과 노예제 시절의 잔재인 린치의 공포가 엄연히 존재하는 일상에서 패싱은 그것이 가능한 사람들에게는 공포스러운 죽음의 위협을 피하고 백인의 혜택을 나눠 갖는 편리한 수단이 될 수 있었다. 애초에 백인 행세(White passing)가 불가능했던 단일 혈통의 흑인들과 달리 ’물라토‘라고 불리던 흑백 혼혈, 다민족 혈통의 혼혈인들은 한층 더 복잡한 정체성의 혼란에 부딪혔고, 이 시기의 패싱 인구는 폭발적으로 증가했다. 할렘에 거주하던 흑인들 사이에서는 피부색의 등급에 따라 패싱이 가능한 경우와 불가능한 경우를 도표화한 색조표까지 등장할 만큼 패싱에 대한 일반의 관심도 높아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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특권과 차별을 초래하는 세상의 수많은 경계 지대에서 피부색을 떠나 특권과 차별은 현재진행형이다. 기득권을 가지고 있는 사람들과 소수자들은 항상 소외되어 왔고, 지금도 차별과 부당한 대우는 없어지지 않기 때문이다. 영화는 흑백영화이다. 흑백이기 때문에 유색인의 색상은 사라지고, 흑과 백의 모습은 오히려 비슷해 보인다. 인종을 숨겼던 두 여성의 심리를 흑백의 영상으로 상상해 볼 수 있다. 겉모습이든 속마음이든 얼마든지 숨길 순 있겠지만, 두 여성의 심리에는 욕망이 숨겨져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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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브라이언, 난 당신이 테드와 주니어에게 린치에 대해 말하지 않으면 좋겠어. 저녁식사 때 그런 얘기를 꺼내는 건 정말 용납 못하겠어. 아이들이 더 자란 후에도, 그런 끔찍한 일들을 경험할 시간은 충분해.”

“당신 생각은 완전히 틀렸어! 당신 결정대로 저애들이 이 빌어먹을 나라에 살아야 한다면, 어떤 일들이 자신들을 기다리고 있는지 한시라도 빨리 알아낼수록 좋은 거야. 더 일찍 알수록, 더 잘 대비할 수 있는 거라고.”

“내 생각은 달라. 나는 아이들이 어린 시절을 행복하게 보내고 가급적 그런 일들은 몰랐으면 해.”

“아주 훌륭하시군.” 브라이언의 빈정대는 대답이었다. “진짜 아주 훌륭해. 완벽한 대비야. 하지만 그게 되려나?”

“분명히, 당신이 맡은 부분만 잘해준다면.”

“헛소리! 아이린 당신도 나만큼 잘 알고 있잖아. 그럴 수 없다는 걸. ‘깜둥이’라는 단어와 그 의미를 아이들이 알지 못하도록 우리가 그렇게 애써봤지만 무슨 소용이 있었어? 아이들이 스스로 찾아냈잖아? 그것도 어떻게? 누군가 주니어를 더러운 깜둥이라고 불렀기 때문이었지.”

“그래도 인종문제에 대해 아이들에게 얘기하지 않는 게 좋아. 난 용납 못해.”

그들은 서로를 노려보았다.

“잘 들어, 아이린, 아이들은 그런 문제들을 알아야 해. 그게 나중이든 지금이든 마찬가지야.”

“아니, 그렇지 않아!” 화가 나서 눈물이 떨어지려는 것을 참으며 아이린이 고집했다.

브라이언이 고함쳤다. “난 이해를 못하겠어, 당신처럼 자칭 지적인 사람이 그렇게 바보 같은 소리를 할 수 있다니.” 그는 이해하기 어렵고 짜증스럽다는 듯 그녀를 바라보았다.

“바보 같다고!” 그녀가 소리를 질렀다. “내 아들들이 행복하길 바라는 게 바보 같아?” 그녀의 입술이 떨렸다.

<넬라 라슨, 패싱, P140-14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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