수잔 손택의 '타인의 고통'
케빈 카터(Kevin Carter)의 이 사진은 1993년 3월에 뉴욕 타임즈에 실렸고 1994년 퓰리처상을 수상하고 유명세를 탔다. 문제는 죽어가는 소녀를 구하지 않고 사진을 찍은 케빈 카터에게 화살이 돌아갔다. 무책임하다. 소녀를 구하지 않고 사진을 찍을 수가 있는냐는 등 비난이 쏟아졌다. 비난에 괴로워하던 케빈 카터는 3개월 뒤 자살하고 만다. 사실 케빈 카터는 이 소녀를 구했다. 급식센터로 가던 도중에 만난 소녀를 보고 사진을 찍으려는 도중 그녀가 죽기만을 기다리던 독수리가 있었던 것이다. 카터 역시 사진 몇 장 찍고 나서는 독수리를 쫓아냈다. 그러나 이 사진을 본 많은 독자들은 그에게 비난과 저주를 퍼부었다.
스티븐 실버 감독의 영화 <뱅뱅클럽>은 남아프리카의 ‘아파르트헤이트’ 정권 시절의 분쟁 시기에 현지에서 사진기자로 활동했던 실존 인물들의 이야기를 바탕으로 한 영화다. 네명의 포토저널리스트 케빈 카터, 그렉 마리노비치, 켄 오스터브룩, 주앙 실바의 사진기자의 고뇌를 엿볼 수 있다.
“그게.....”
“독수리는 쫓아냈나요?”
“그랬죠. 사진을 찍고 나서요.”
“아이는 도와줬나요?”
“직접 돕지는 않았어요”
“아이를 그냥 놔뒀나요?”
“사진작가가 할 일은 아니죠.”
“사진작가는 아이를 도울 의무가 없나요?”
“사진작가로서 수단에 갔고 난 최고의 사진을 찍었어요.”
“아이부터 구하셨어야죠.”
최고의 사진을 두고 찬사를 받을 것이라 짐작하고 여유있는 태도로 설명하던 케빈은 사진 속의 아이를 구하지 않았다는 비판에 혼란스러워하며, 인터뷰는 종료된다.
사진기자는 과연 타인의 고통을 어떻게 전달해야 하는가라는 질문은 여전히 숙제로 남아있다. 많은 이들에게 현장의 참혹함을 전달해야 하는지? 아니면 윤리적 태도를 가질 것인지? 사진속에 담긴 고통은 사진을 담은 자와 무관한 것인지? 객관적인 3자로서 사건에 개입해서는 되는 것인지 아닌지? 타인의 고통에서 우리는 방관자인가?
“고통받는 육체가 찍힌 사진을 보려는 욕망은 나체가 찍힌 사진을 보려는 욕망만큼이나 격렬한 것이다.” - 수잔 손택, <타인의 고통>
날이면 날마다 끊임없이 폭력의 이미지가 쏟아져 나오는 현대 사회에 들어와 이미지의 성격 자체는 사람들의 “신경을 거슬리고, 소란을 불러 일으켜야 하며, 눈을 번쩍 뜨이게” 만드는 쪽으로 뒤바뀌어 버렸다. “쉴새없이 이미지가 자신을 드러내는 상황, 한줌의 이미지들이 반복해서 자신을 과잉 노출하는 이 상황을 그밖에 다른 어떤 방법으로 돌파할 수 있겠는가?”라고 손택은 반문한다.
케빈과 같은 상황은 사실 보도사진에서 많이 볼 수 있다. 예를 들면, 사이공에서 베트콩을 즉결처분하는 에디 애덤스(Eddie Adams)의 사진, 이한열열사의 최루탄에 맞아 쓰러지는 장면, 백남기농민의 물대포를 맞고 쓰러지는 장면 등에서처럼, 보도 사진은 그 이미지의 충격성은 글의 전달보다 백배로 강하다.
1. 먼저 사진을 찍는다.
2. 아이를 구한다.
타인의 고통을 바라보는 관람자들. 그들은 모두 타자이다. 얼마나 공감을 할지. 타자로서 타인을 다루는 사진기자 또는 사진작가들의 작업이 비난을 감수하면서까지 촬영해야 하는 이유, 진실을 보여주는 적절한 방법인 것인지, 너무도 주관적이고 다양한 관점에서 해석될 수 있는 복잡하고도 까다로운 문제이다. 사진가와 피사체와 관계, 소통과 전달이라는 측면에서 관점은 달라진다.
“당면한 문제가 타인의 고통에 눈을 돌리는 것이라면, 더 이상 ‘우리’라는 말을 당연시해서는 안 된다. 이 충격적인 사진들을 보고 있는 ‘우리’란 도대체 누구를 말하는 것일까? ‘우리’라는 말은 약소국이나 자신의 생명을 걸고 있는 국가 없는 사람들을 지지하는 사람들이 아니라, 타국에서 벌어지고 있는 비열한 전쟁에 명목상 관심을 보이는 척하는 사람들(훨씬 더 수가 많은 유권자들)만 포함하는 경향이 있다.” - 수잔 손택, <타인의 고통>
“(우리의 선한 의도에도 불구하고) 연민은 어느 정도 뻔뻔한 (그렇지 않다면 부적절한) 반응일지도 모른다.” - 수잔 손택, <타인의 고통>