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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노용헌 Jan 03. 2023

메리 셸리의 <프랑켄슈타인>

영화 <프랑켄슈타인> 2011년

<프랑켄슈타인의 괴물의 괴물, 프랑켄슈타인>(2019), <프랑켄슈타인>(2015), <빅터 프랑켄슈타인>(2015), <프랑켄슈타인: 불멸의 영웅>(2014), <프랑켄슈타인>(2007), <프랑켄슈타인>(1994), <프랑켄슈타인>(1993), <프랑켄슈타인>(1984)     

1931년 발표된 영화 <프랑켄슈타인>에서 보리스 칼로프가 분한 괴물의 강렬한 이미지 덕분일 것이다. <프랑켄슈타인>만큼 20세기 대중문화사에서 무한 재생산된 원작소설도 드물다. 영화, 연극, 만화, 텔레비전 드라마 등 다양한 장르에서 그 소재가 무수히 차용되었고, 아이작 아시모프의 <아이, 로봇>, 카렐 차페크의 <R. U. R.> 등의 과학소설은 물론, <블레이드 러너>, <터미네이터> 등 유명 영화 역시 <프랑켄슈타인>의 영향을 받았다.     

어머니는 조용히 숨을 거두었다. 어머니의 얼굴에는 심지어 죽음 속에서도 애정이 깃들어 있었다. 어떻게도 보상할 수 없는 끔찍한 불행에 세상에서 가장 사랑하는 이를 잃은 사람들의 심정이 어떠했는지 굳이 묘사할 필요는 없으리라. 영혼에 드리워진 그 어마어마한 공허감, 그리고 표정에 떠오른 절망감을. 어머니가, 날마다 얼굴을 볼 수 있던, 마치 우리 자신의 일부 같았던 어머니가 영원히 떠나버리고 말았다는 사실을 우리가 마음으로 납득하기까지는 참으로 오랜 시간이 필요했다. 사랑하는 그 눈의 밝은 빛이 영원히 꺼져버렸고, 그토록 친숙한, 우리 귀에 너무나 익숙한 목소리가 숨이 죽어, 영영 들을 수 없게 되어버렸다는 사실을 실감하기까지, 이런 것들이 첫날의 기억이다. 하지만 시간이 흐르면서 참담한 현실이 뚜렷하게 드러나면 그제야 진짜로 비탄의 쓰디쓴 설움이 시작된다. 하지만 그 무자비한 손길에 사랑하는 이를 잃지 않은 사람이 세상에 어디 있단 말인가? 세상 누구나 느꼈을 슬픔, 그리고 반드시 느껴야만 할 슬픔을 굳이 내가 묘사할 필요가 있겠는가? 결국 때가 되면 비탄은 필연이라기보다 일종의 자기만족이 된다. 그리고 신성모독일지 모르지만, 입가에 서린 웃음이 사라지지 않는 날이 온다. 어머니는 돌아가셨지만, 우리에겐 여전히 수행해야 할 의무가 있었다. 남은 사람들과 함께 일상을 살아가면서, 약탈자의 손길에 잡히지 않은 사람이 남아 있으니 그나마 우리는 행운이라고 생각하는 법을 터득했다.

<메리 셀리, 프랑켄슈타인, P53-54>     


그때는 무심함을 죄악으로 간주하고 내게 잘못을 묻는 아버지가 부당하다고 생각했었다. 하지만 이제는 내게 비난의 여지가 없지는 않다고 보았던 아버지가 옳았다고 확신한다. 완벽한 인간은 언제나 차분하고 평온한 마음을 유지해야 하고, 정념이나 찰나의 욕망에 휘둘려 마음의 평정을 깨뜨려서는 안 된다. 지식의 추구가 이 법칙의 예외가 된다고는 생각지 않는다. 지금 매진하고 있는 공부가 사랑하는 마음을 약하게 하고 어떤 연금술로도 합성할 수 없는 소박한 즐거움을 아끼는 취향을 망가뜨리려 한다면, 그 공부는 분명 불법적이며 인간의 정신에 맞지 않는 것이다. 이 법칙이 항상 준수되었다면, 그리하여 어느 한 사람도 가족의 애정이 주는 평온을 깨뜨리는 목적을 추구하지 않았다면, 그리스는 노예국가로 전락하지 않았을 것이다. 카이사르는 나라를 삼키겠다는 야욕을 갖지 않았을 것이요, 아메리카는 좀더 서서히 발견되어 멕시코와 페루 제국은 파멸을 맞지 않았을 것이다.  (P68-69)     

[프랑케슈타인은 과학소설인가? 공포소설인가?]

이 대재앙 앞에서 느낀 감정을 어떻게 형용할 수 있을까. 혹은 무한한 수고와 정성을 들여 빚어낸 그 한심하기 짝이 없는 괴물을 어떻게 묘사해야 할까. 사지는 비율을 맞추어 제작되었고, 생김생김 역시 아름다운 것으로 선택했다. 아름다움이라니! 하느님. 맙소사! 그 누런 살갗은 그 아래 비치는 근육과 혈관을 제대로 가리지도 못했다.l 윤기가 자르르 흐르는 흑발은 출렁거렸고 이빨은 진주처럼 희었지만, 이런 화려한 외모는 허여멀건 눈구멍과 별로 색깔 차이가 없는 희번득거리는 두 둔, 쭈글쭈글한 얼굴 살갗, 그리고 일자로 다움 시커먼 입술과 대조되어 오히려 더 끔찍해 보일 뿐이었다.

살면서 일어나는 다양한 우연들도 사람의 감정만큼 변덕스럽지는 않다. 나는 생명 없는 육신에 숨을 불어넣겠다는 열망으로 거의 2년 가까운 세월을 온전히 바쳤다. 이 목적을 위해 휴식도 건강도 다 포기했다. 상식적인 수준을 훨씬 뛰어넘는 열정으로 갈망하고 또 갈망했다. 하지만 다 끝나고 난 지금, 아름다웠던 꿈은 사라지고 숨막히는 공포와 혐오만이 내 심장을 가득 채우는 것이었다. 내가 창조해낸 존재의 면면을 차마 견디지 못하고 실험실에서 뛰쳐나와 오랫동안 침실을 서성였지만, 도저히 마음을 진정하고 잠을 이룰 수가 없었다. (P71-72)      

[과학자의 윤리. 과학자의 실험이 잘못 되었을 경우, 과학자는 책임이 없는 것인가]     

이럴 때마다 쓰디쓴 통곡을 터뜨렸다. 오로지 가족들의 마음에 위로와 행복을 줄 수 있도록 평화가 내 마음에 찾아오기를 빌었다. 하지만 그럴 리 없었다. 회한이 마지막 희망의 불까지 꺼버렸다. 난 돌이킬 수 없는 악행들을 초래한 장본인이었다. 내가 창조한 괴물이 무슨 새로운 악행을 저지르지나 않을까 날마다 두려움에 시달리며 살았다. 이게 다가 아니라 놈은 앞으로도 엄청난 범죄를 저지를 것이며 가공할 파괴력으로 과거의 추억을 거의 다 지워버릴 거라는 막연한 예감이 들었다.  (P121)     


광막한 안개가 계곡을 따라 흐르는 강물에서 피어나 맞은편 산들을 두터운 화환처럼 휘감고 산봉우리들을 모두 짙은 구름에 숨기고 있는데, 어두운 하늘에서는 폭우가 쏟아지고 있어서, 주위를 에워싼 풍광에 우수를 한층 더하고 있었다. 아! 어째서 인간은 짐승보다 훨씬 우월한 감수성을 가졌다고 자랑하는 것일까? 그로인해 훨씬 더 유약하고 의존적인 존재가 될 뿐인데. 우리의 욕망이 굶주림, 갈증, 그리고 성욕에 국한되었다면, 거의 완전한 자유를 만끽하는 존재였을지 모른다. 하지만 우리는 바람 한줄기, 우연한 한마디, 아니면 그 말로 전달되는 풍경 하나하나에 흔들리지 않는가.   

  

우리는 쉰다. 꿈은 잠의 독을 푸는 힘을 지녔다.

우리는 일어난다. 방황하는 생각 하나에 하루가 오염된다.

우리는 느끼고, 사고하고, 추론한다. 웃거나 흐느낀다.

어리석은 괴로움을 껴안거나, 근심을 쫓아버린다.

똑같다. 기쁨이든 슬픔이든,

내 떠나는 길은 여전히 자유로우니.

인간의 어제는 결코 내일과 같지 않으리니,

변하지 않고 남는 것은 무상뿐!

<메리 셀리, 프랑켄슈타인, P129>     

그런데 나는 무엇이었던가? 내 탄생과 창조주에 대해 나는 아는 바가 전혀 없었다. 그러나 돈도, 친구도, 사유재산도 전혀 없다는 건 잘 알고 있었다. 게다가 흉악하게 일그러진 추한 외모를 하고 있었다. 심지어 사람과 같은 본성을 갖고 있지도 않았다. 그런데 사람들보다 훨씬 더 민첩했고, 더 형편없는 식사를 먹고도 견딜 수 있었다. 지독한 열기와 후위를 견디고도 몸이 덜 상했다. 키는 사람보다 훨씬 더 컸다. 주위를 둘러봐도 나 같은 존재는 보지도 듣지도 못했다. 그렇다면 나는 지상의 한 점 얼룩 같은 괴물일까? 모든 사람들이 도망치고, 모든 사람들이 내치는?

이런 생각들이 얼마나 큰 괴로움이었는지는 도저히 말로 표현할 수 없다. 우울한 생각을 쫓아버리려 애썼지만, 앎과 함께 슬픔은 커져만 갔다. 오, 차라리 내가 태어난 숲에 영원히 머물렀다면, 굶주림과 갈증과 열기 외에는 아무 감각도 알지 못했더라면 좋았을 것을!

지식의 본질이란 얼마나 희한한 것인가! 일단 마음을 사로잡으면, 마치 바위에 이끼가 끼듯 들러붙어 떨어지지 않는다. 가끔은 생각과 감정을 모두 떨쳐버렸으면 하고 바라기도 했다. 그러나 고통의 감각을 초월하려면 방법은 단 하나밖에 없다는 걸 알게 되었다. 바로 죽음이었다. 죽음은 내가 두려워하면서도 이해할 수 없는 상태였다. 나는 미덕과 선한 감정을 우러러보고, 오두막집 식구들의 다정한 태도와 쾌활한 성격을 사랑했다. 그러나 그들에게 보이지도 들리지도 않는 곳에서 몰래 훔쳐보는 것 외에는 그들과 교류할 길이 막혀 있었다. 그러다보니 친구들과 함께 살아가는 존재가 되고 싶다는 갈망이 충족되기는커녕 오히려 커져만 갔다. 아가타의 친절한 말, 매력적인 아라비아 여인의 생기 넘치는 미소는 나를 위한 게 아니었다. 노인의 온화한 훈계와 사랑받는 펠릭스의 열띤 대화는 나를 위한 게 아니었다. 비참하고 불행한 괴물!

또다른 깨달음 몇 가지는 내 가슴에 더 깊이 새겨졌다. 나는 남성과 여성의 차이, 아이들의 탄생과 성장에 대해서도 들어 알게 되었다. 아버지가 갓난아기의 미소에 얼마나 무조건적으로 기뻐하는지, 아이가 좀더 자라면 활기차게 뛰어나오는 그 모습에 얼마나 행복해하는지. 그 고귀한 임무에 어머니의 삶과 관심이 얼마나 집중되어 있으며, 아이의 마음이 어떻게 지식을 확장하고 얻어나가는지를 배웠고, 형제, 자매, 그리고 한 인간을 다른 인간과 상호 유대로 묶어주는 다양한 인간관계들에 대해 알게 되었다.

그러나 내 친구들과 친척들은 어디에 있는가? 내 유년기를 지켜본 아버지도 없으며, 미소와 부드러운 손길로 나를 축복해준 어머니도 없다. 있다 한들 전생의 내 삶은 이제 시커먼 얼룩, 아무것도 분간할 수 없는 시커먼 빈 공간이 되어버렸다. 기억이 나는 첫 순간부터 이미 나는 그때와 똑같은 키와 덩치였다. 그때까지 나를 닮은 존재도, 나와 관계가 있다고 주장하는 사람도 만나본 적이 없었다. 나는 무엇일까? 그 질문이 또다시 튀어나왔지만, 대답이라고는 신음뿐이었다.  (P160-161)    

       

나는 무엇일까? 어디서 왔을까? 내 목적지는 어디일까? 이런 질문들이 끝없이 떠올랐지만 해답을 찾을 길이 없었다. (P172)     


<실낙원>은 전혀 다르고 훨씬 심오한 감정을 일깨워주었다. 나는 우연히 습득한 다른 책들과 마찬가지로 그 책을 실제 역사로 읽었다. 전능한 신이 피조물들과 싸우는 장면은 가능한 모든 경이와 외경심을 일깨우는 힘이 있었다. 나와 비슷한 점이 두드러졌기 때문에, 몇가지 정황들을 나 자신의 처지와 비교하곤 했다. 아담과 마찬가지로 나 역시 기존의 어떤 존재와도 무관하게 창조되었다. 그러나 그의 상황은 모든 면에서 나와 달랐다. 신의 손에서 나온 아담은 완벽한 피조물이었다. 조물주의 특별한 보살핌을 받는, 행복하고 번영을 누리는 존재였다. 더욱 탁월한 본성을 지닌 존재들과 대화를 나누고 지식을 전수받는 특권을 누렸다. 그러나 나는 비참하고 무기력하고 외로웠다. 나는 사탄이 내 처지에 더 잘 맞는다고 생각했다. 사탄과 마찬가지로, 내 보호자들의 행복을 바라볼 때면 쓰디쓴 질투의 덩어리가 내 안에서 치밀었기 때문이다. (P173-174)     


'친절한 분들이지요. 세상에서 가장 훌륭한 사람들입니다. 그러나 불행하게도 저에 대해 편견을 가지고 있습니다. 저는 선한 품성을 지니고 있고, 지금까지 아무 해도 끼치지 않았으며, 어떤 면에서는 도움을 주기도 했지요. 그러나 치명적인 편견이 그들의 눈을 가리고 있어서, 다정하고 친절한 친구를 보아야 하는데 혐오스러운 괴물만 볼 뿐이랍니다.‘

‘그건 진정 불행한 일이로군요. 그러나 정말 당신 탓이 아니라면 진실을 알려줄 수는 없습니까?’

‘바로 그 일을 하려고 합니다. 그리고 바로 그러기 위해 나를 사로잡는 무수한 공포심을 극복해야 했습니다. 이 친구들을 나는 깊이 사랑합니다. 그들은 알지 못하지만 몇 달 동안 날마다 그들을 위해 친절을 베풀어왔습니다. 그러나 그들은 내가 해를 끼치려 한다고 믿고 있어서, 그 편견을 제가 뛰어넘어야 한답니다.’

‘친구들이 어디 살고 있나요?’

‘이 근처입니다.’    (P179)     

나는 외롭고 불행하다. 사람들은 나와 어울리지 않을 것이다. 그러나 나처럼 기형이고 추악한 존재라면 날 거부하지 않을 것이다. 내 반려자는 나와 똑같은 종족이고 같은 결함을 가져야만 한다. 당신은 바로 이런 존재를 창조해 내야 한다. (P192)     


인간이 나를 경멸로 대하는데 내가 인간을 존중해야 하는가? 상처가 아니라 친절을 서로 나누며 나와 함께 살아간다면, 나도 그렇게 받아들여준 은혜에 감격해 눈물을 흘리며 어떤 식으로든 도움이 되려 할 것이다. 그러나 그런 건 있을 수 없는 일이다. 인간의 감각은 우리의 공존을 가로막는 넘을 수 없는 장벽이다. 그렇다고 비굴한 노예의 굴종을 택하지는 않을 것이다. 내가 받은 상처를 복수로 돌려줄 테다. 사랑을 불러일으킬 수 없다면 공포의 근원이 될 테다. 누구보다 나의 창조주인, 그렇기에 내 숙적인 당신에게 영영 꺼지지 않는 증오를 다짐하겠다. 조심하라. 내가 당신의 파멸을 초래할 테고, 이 복수는 당신이 세상에 태어난 날을 저주할 정도로 황폐해지기 전에는 결코 끝나지 않을 테니. (p194)    

 

그런데 지금, 숙적이 내 손에 당장이라도 잡힐 것만 같은 이때, 내 모든 희망은 갑자기 꺼져버렸고 어느 때보다도 막막하게 놈의 자취를 놓치고 말았다. 해빙소리가 들렸다. 해빙이 이루어지는 우레 같은 소리가 점점 더 불길하고 끔찍하게 들려왔고, 발밑에서는 물이 요동치고 불어 오르기 시작했다. 애써 전진했지만 아무 소용도 없었다. 바람이 거세지고, 바다가 포효했다. 그리고 지진처럼 엄청남 충격과 함께 빙하가 쩍 쪼개져 어마어마한 굉음을 내며 갈라졌다. 사태는 곧 끝났지만, 몇 분후 나와 원수 사이에 바다의 격랑이 휘몰아치더니 나는 산산조각으로 흩어진 유빙 위에서 표류하는 신세가 되었다. 유빙은 시시각각 작아지며 참혹한 죽음을 예고했다.  (P282)     


타락한 천사가 사악한 악마가 되는 법이다. 하지만 심지어 신과 인간의 원수에게조차 외로움을 함께할 친구와 동료가 있다. 나는 철저히 혼자다. (P300)  


이전 15화 펄 벅의 <대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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