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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노용헌 Dec 30. 2022

펄 벅의 <대지>

영화 <대지The Good Earth> 1937년

펄 벅의 소설 <대지>는 가난한 농군 왕룽의 결혼으로 시작하여 3대(왕룽-왕후-왕옌)에 걸친 가족의 이야기이다. 1부 <대지>, 2부 <아들들>, 3부 <분열된 집안>으로 3부작으로 이루어져 있다. 3대가 가족사를 다룬 소설로는 이사벨 아옌데의 <영혼의 집>과, 사쿠라바 가즈키의 <아카쿠치바 전설>, 염상섭의 <삼대>라는 소설이 있다.     

 

[1부 대지]     

‘저희들이 아무리 그래도 내 땅은 빼앗아갈 수 없어. 나는 힘들여 일해서 농사지은 곡식을 팔아 남들이 빼앗아갈 수 없는 땅으로 바꿔 두었다. 내가 돈을 가지고 있었더라면 그들은 그것을 뺏어갔을 것이다. 또 그 돈으로 물건을 사두었더라도 남김없이 뺏어갔을 것이다. 나에겐 아직 땅이 있다. 땅은 나의 것이다.’

<펄 벅, 대지1, P71>     


“죽어도 내 땅은 못 팔겠소!" 그는 소리질렀다. “밭의 흙을 파서 아이들을 먹이고 그러다가 죽으면 그 땅에 묻겠소. 나나 내 아내나 늙은 아버지나 모두 사는 날까지 우리가 태어난 이 땅에서 죽으면 그만이오.”

그는 목을 놓아 울었다. 분노는 금세 바람처럼 사라지고 그는 몸을 떨며 서서 울었다. 성내 사람들은 웃음을 머금고 서 있었고 그들 사이에 섞여 숙부도 꿈쩍도 않고 서 있었다. 그들은 왕룽이 한 말을 헛소리라고 여기고, 왕룽의 노여움이 가시기를 기다리는 것이었다.

이때 갑자기 오란이 문간에 나타나, 마치 이런 일이 날마다 있었던 것처럼 여느 때와 다름없는 목소리로 그들에게 말했다. 

“땅은 정말 안 팔겠소. 그걸 팔았다가는 우리가 남쪽에서 돌아왔을 때 농사지을 것이 없어지니까. 밥상하고 침대 두 개, 그리고 의자 네 개와 가마솥까지는 팔겠소. 하지만 갈퀴, 괭이, 쟁기는 안 팔겠소. 땅도 안 팔겠소.”  (p80)     


안위성(安徽省)은 강소성(江蘇省)이 아니다. 왕룽이 태어난 안휘에는 말소리가 느리고 깊으며 목구멍에서 울려나온다. 그런데 그들이 오늘 살고 있는 이 강소의 도시에서는 입술로, 혀끝으로 말을 끊어서 뱉어내듯이 말했다. 또 그의 밭에서는 1년에 두 번 벼와 보리 추수를 하고 그 밖에 약간의 옥수수와 콩이나 마늘을 지어서 꽤 한가했는데, 이곳 도시 주변의 밭에서는 벼농사 이외의 온갖 채소를 빨리 키워 내느라고 1년 내내 인분(人糞)을 내기에 바빴다.  (p94)    

  

왕룽은 공자묘 모퉁이에서 한 젊은이가 군중에게 연설하는 것을 들은 적이 있었다. 거기서는 누구든지 용기만 있으면 나서서 연설할 수 있었다. 청년은 중국이 혁명을 해야 하며 모든 외국 놈들을 쫓아내어야 한다고 열변을 쏟았다. 왕룽은 그 청년이 그렇게 격렬하게 배격하는 외국 놈이란 바로 자기같이 북쪽에서 온 사람들을 가리키는 것이라 생각하고 가슴이 철렁해 몰래 도망쳤다. 또 다른 날 다른 청년이 연설하는 것을 들었는데 -이 도시에는 연설하는 청년이 많았다- 그 청년은 거리 모퉁이에 모인 사람들에게 중국 인민은 단결해야 하며 현실에 눈을 떠야 한다고 외쳤다. 왕룽은 중국인이라고 해도 자기 일처럼 생각되지는 않았다.  (p95)    

   

“자, 이것으로 아이들에는 할 만큼 했다. 저 백치아이만은 헝겊조각이나 갖고 양지 쪽에서 놀게 둘 수밖에 없지만 말이다. 막내놈은 밭에서 일하게 하고 공부는 시키지 말자. 글자를 아는 놈은 둘이면 충분하니까.”

하나는 학자, 하나는 상인, 하나는 농부, 이렇게 세 아들을 둔 것을 그는 자랑스럽게 여겼다. 그는 만족해서 그 이상 아이들 생각을 않기로 했다. 하지만 그의 의지와는 상관없이, 이 아이들을 낳아 준 여자의 일이 마음에서 떠나지를 않았다.   (p202-203)     

  

“이 땅과 저 땅을 팔아서 둘이 공평하게 나눕시다. 형님 몫은 내가 고리로 빌리지요. 철로가 개통됐으니 해안까지 쌀을 보내면, 나는......”

노인의 귀에 들어온 것은 이 ‘땅을 판다’는 말뿐이었다. 그는 큰 소리로 외쳤다. 너무도 큰 노여움 때문에 목소리가 갈라지고 떨리는 것을 막을 수가 없었다.

“뭐라고! 땅을 팔겠다고? 이 변변치 못한 게으름뱅이 놈들아!”

그는 숨이 막혀 쓰러질 것 같았다. 아들들이 부축해서 일으키자 그는 울기 시작했다.

형제는 아버지를 달래며 말했다.

“아닙니다, 아닙니다. 땅은 팔지 않습니다.”

“땅을 팔기 시작하면, 집안은 끝장이야.” 그는 띄엄띄엄 말했다. “우리는 땅에서 태어났어. 그리고 다시 땅으로 돌아가야만 한다. 땅을 갖고 있으면 살아갈 수 있다. 땅은 누구에게도 뺏기지 않는다....”

노인은 뺨을 타고 흐른 눈물 자국이 허옇게 나는데도 그대로 내버려두었다. 그는 몸을 굽혀 흙을 한 웅큼 움켜쥐고는, 그것을 꼭 쥔 채 중얼거렸다.

“만일 땅을 파는 날에는 그것이 마지막이다.”   (p284-285)      

[2부 아들들]     

왕후가 꿈꾸는 군벌의 거두를 토벌하기 위해 종부군이 출동하는 일이 있었기 때문이다. 아직 준비고 갖추어져 있지 않았으므로 정부군과 싸워서는 승산이 없었다. 그러나 그는 사실 장군도 정부군도 그다지 두려워하지 않았다. 요즈음 노장군은 화를 냈다가도 곧 잊어버리기 때문에 추격군을 보내지 않을 것이고, 정부군 쪽도 옛 왕조가 멸망하고 그에 대신할 새 왕조가 아직 세워지지 않은 시기였기 때문에 국가의 힘이 약해서, 각지에서 비적이 판을 치고 군벌이 패권을 다투는데도 그들을 억제할 방법도 없었기 때문이다.   

<펄 벅, 대지1, P381>     


“형제 여러분! 내가 어떤 인간인가를 이야기하겠다. 나는 여러분과 같은 비천한 태생이다. 나의 아버지는 밭을 갈았다. 나는 그 땅에서 태어났다. 그러나 나에게는 땅을 가는 것 이상의 천명이 있었다. 나는 소년 시절 집을 떠났다. 그리고 노장군 아래서 혁명군의 한 병사가 되었다.

형제 여러분! 나는 처음에 부패한 통치자를 치는 고귀한 싸움을 꿈꾸고 있었다. 노장군이 대의를 위한 싸움이라고 부르짖었기 때문이다. 그런데 노장군은 너무나 쉽사리 승리를 얻었다. 그리고 우리들이 아는 대로의 인간이 돼버렸다. 나는 이제 그런 인간을 모실 수는 없다. 그가 지휘하는 혁명은 내가 꿈꾼 것 같은 성과를 가져오지 못했다. 시대는 부패의 극에 달해 모든 인간이 사리사욕을 위해서만 싸우고 있다. 그것을 보고 나는 천명을 느꼈다. 노장군 아래에서 봉급도 받지 못하면서 초조함 속에서 허송세월을 보내고 있는 여러분을 불러 모아, 우리들 스스로가 부패가 없는 천지를 개척해 나가는 것이 우리들에게 주어진 천명이다. 이제 새삼스럽게 말할 것까지도 없지만 올바른 통치자는 한 사람도 없다. 통치자는 인자한 아버지가 아이들을 대하는 것처럼 민중을 다루어야 한다. 그런데도 민중은 통치자의 잔악과 압제에 울고 있다. 예부터 민중은 이런 상태였다. 5백 년 전에도 정의에 불타는 용감한 사람들이 한 무리가 되어 부귀를 멸하고 가난한 자들을 지키기 위해서 싸운 일이 있다. 우리들도 그 뒤를 따라야 한다. 용감하고 정의로운 사람들이여! 나는 여러분에게 호소한다. 내가 가는 길을 따르라! 우리들은 삶과 죽음을 함께 하기로 맹세하자!”   (p384-385)   

   

“우리들은 비적과는 다르다. 나는 비적 두목이 아니다. 내가 열려는 길은 단지 나 자신이 출세하기 위한 길이 아니다. 우리들은 정정당당한 수단과 무용으로써 승리를 거두는 거다. 민중을 약탈하는 짓은 하지 않는다. 너희들도 필요한 것이 있으면 사거라. 대금은 내가 치르겠다. 급료는 다달이 꼭꼭 준다. 돈으로 자유로이 할 수 있는 여자 말고는 절대로 손을 내밀지 마라. 아무래도 참을 수가 없을 때만 몸을 파는 여자와 놀아라. 그러나 덮어놓고 사지는 마라. 무서운 병균이 있는 여자를 만나 죽을 병을 얻으면 큰일이니 조심하여라. 만약 나의 부하 중에 정숙한 유부녀나 처녀를 범하는 자가 있으면 용서하지 않겠다. 변명을 들을 필요도 없이 내 손으로 죽이겠다.”   (p392)      


“제가 숨는 데는 그 오래된 흙벽집이 좋을 것 같습니다. 그리로 가겠습니다. 만일 그들이 찾으러 와서 저를 발견하더라도 평범한 농부가 되어 있다면 설마 군벌의 아들이라고는 생각지 않겠지요.” 청년은 자기의 이 말에 희미하게 미소지었다. 이런 덧없는 농담으로 아버지의 마음을 달래려고 한 듯했다.

그래도 왕후는 대답하지 않았다. “아버님, 저는 아버님을 택했습니다.” 이렇게 말한 아들의 말뜻을 알 수 없었던 것이다. 왕후는 묵묵히 꼼짝도 하지 않고 있었다. 생애의 고통이 그의 마음을 온통 휘저었다. 오랫동안 짙은 안개 속을 걸어온 사람이 갑자기 훤하게 밝은 곳에 나오듯이 그 순간 왕후는 꿈에서 깼던 것이다. 그는 아들을 바라보았다. 거기 있는 것은 자기가 모르는 청년이었다. 그는 자기 아들에게 꿈을 걸고 그 꿈에 맞도록 아들을 길러 왔다. 그러나, 오늘 여기 서 있는 아들은 자기가 모르는 청년이었다. 평범한 농민이었다! 왕후는 다시 아들을 바라보았다. 그러자 이제는 친숙해진 기묘한 무력감이 다시 마음에 스며드는 것을 깨달았다. 그것은 소년 시절에 그 흙벽집이 감옥처럼 여겨졌을 때 느낀 것과 똑같은 우울한 무력감이었다. 대지에 잠들어 있는 부친이 다시 흙으로 더렵혀진 손을 뻗쳐 그를 붙잡은 것이다. 왕후는 자기 아들을 곁눈질로 바라보며 입에 손을 댄 채 중얼거렸다.

“....... 군벌의 아들이라고는 생각지 않을 거라고!?”     (p675)   

[3부 분열된 집안]

‘아버지는 여태까지 날 사랑한 일이 없다! 자신은 사랑하고 있는 줄 알고 나를 유일한 보배처럼 생각하고는 있지만, 내가 진실로 무엇을 바라고 있는가 한 번도 물어 본 적이 없고, 묻는다 하더라도 내가 하는 말이 자신의 뜻과 다를 때는 거절할 뿐이었으므로, 나는 아버지가 바라는 대로 말하기 위해 언제나 미리 헤아려 보고 입을 열어야 했다. 내게는 자유가 없었다!’  (p682-683)   

   

그렇지만 이러한 이야기로 하여 옌은 여태까지와는 다른 눈으로 조국을 보는 방법을 배웠다. 흙벽집에 있을 때 그는 조국을 그저 광활하고 아름다운 대지로서 보았다. 그는 말하자면 조국의 아름다운 육체를 본 것이다. 그때도 그는 민중이라는 존재를 깊이 느끼지 않았다. 그런데 이 도시 거리에서, 조국의 영혼을 보는 방법을 맹은 가르쳐 준 것이다. 하층 계급이나 노동자에게 가해지는 아무리 사소한 모욕에도 맹은 분노로써 주의를 기울이는데, 옌은 자기보다 나이 어린 청년에 의해서 그러한 것에 주의하는 방법을 배운 것이다. 매우 부유한 사람들이 있는 곳에는 반드시 무척 가난한 사람이 있는 법이다. 거리를 걷노라면 가난한 사람들이 더 눈에 많이 띄었다. 왜냐하면 대부분의 사람들이 가난했기 때문이다. 가장 비참한 것은 눈 멀고 병 들고 더러워질 때로 더러워진, 굶어죽기 직전의 어린아이들이었다. 양쪽에 온갖 상품을 늘어놓은 커다란 상점들이 있고, 머리 위에는 비단 깃발이 나부끼고, 발코니에서는 악단이 음악을 연주하면서 손님을 끌고 있는 화려하고 밝은 거리마다 너절한 거지들이 구슬픈 소리로 구걸을 했다. 보이는 얼굴마다 여위고 흙빛이었으며, 아직 해도 지지 않았는데 손님들을 찾기 위해 매춘부들이 우글거렸다. 

옌은 그러한 모든 것을 보았다. 그리고 마침내 맹보다 더 깊은 상처를 입었다. 맹은 그저 주의(主義)에 봉사하는 인간, 주의를 위해서 무엇이든 이용하지 않고는 못 견디는 인간이었다. 굶주린 사람들이라든가, 외국에 달걀을 수출하는 공장 밖에 내던져진 썩은 달걀을 줍기 위해 몰려드는 빈민들이라든가, 1전짜리 죽을 사서 먹고 있는 빈민들이라든가, 소나 말에게도 무거울 짐을 힘겹게 지고 가는 짐꾼이라든가, 빈민들이 구걸을 하는 데도 못 본 척 시시덕거리는 게으르고 빈들거리는 부자들과 비단을 걸치고 화장을 한 여자들을 볼 때마다 맹의 분노는 폭발하고, 이러한 모든 것에 대한 해결책으로서 그는 언제나 이렇게 부르짖었다.

“우리들의 주의가 승리하지 않으면 이 상태는 절대로 좋아지지 않는다. 절대로 혁명이 필요하다. 우리들은 부르주아를 때려눕히고, 우리들을 탄압하는 외국인들을 쫓아내, 가난한 사람들을 구해주어야 한다. 그러기 위해서는 오직 혁명이 있을 뿐이다. 옌 형, 형은 언제 이 사상을 인정하고 우리들의 주의에 참가해 줄 참이야? 우리는 형이 필요해. 조국은 우리 모두를 필요로 하고 있는 거야!”

맹은 노기에 불타는 눈초리를 옌에게 돌렸다. 그 눈길은 옌이 약속할 때까지는 돌리지 않을 기세였다. 

그러나 옌은 약속할 수가 없었다. 그는 그 주의가 무서웠다. 결국 그것은 그가 도망쳐 온 바로 그 주의와 같은 것이 아닌가.

게다가 옌은 병폐를 해결하는 주의라는 이야기를 전혀 믿을 수 없었으며, 맹처럼 부자라면 누구든 격렬하게 미워할 수도 없었다. 뚱뚱하게 살찐 부자들의 몸뚱이, 손가락에 낀 반지, 모피로 안을 댄 외투, 부인들의 귀에 건 보석, 얼굴에 한 화장, 그러한 것들이 모두 맹을 그 주의로 몰아 세웠다. 그런데 옌은 부자의 얼굴이라도 다정한 표정이면 인정하지 않을 수 없었으며, 공단 옷을 입고 있더라도 거지에게 돈을 주는 여자의 눈에서 연민의 빛을 읽을 수도 있었으며, 부자의 입에서 나오든 가난한 사람의 입에서 나오든 그는 웃음소리를 좋아했다. 혹 나쁜 사람으로 알고 있더라도 웃는 사람은 좋았다. 맹은 피부색에 따라서 사람을 사랑하기도 미워하기도 하지만, 옌은 암만 해도 ‘이 사람은 부자니까 악인이다, 이 사람은 가난하니까 선인이다’ 생각할 수는 없었으며, 따라서 그것이 아무리 위대한 주의라도 완전히 그걸 믿을 수는 없었다. 

<펄 벅, 대지2, P751-752>       

  

노교수가 옌이 쓴 논문을 언급하자 메리도 알고 있는 듯 즉각 매우 적절한 질문을 했으므로 옌은 깜짝 놀라 이상하게 생각하며 물었다.

“차오쪼와 워글 같은 고대인에 대해서 질문을 하실 만큼 우리나라 역사를 잘 알고 계시니, 어찌된 일입니까?”

이 물음에 처녀는 겸손하지만, 미소로 눈을 반짝이며 대답했다. 

“저는 중국과는 오래전부터 인연이 있었던 모양이에요. 중국에 대해서는 여러 가지 책을 읽었어요. 차오쪼에 대해서 조금 말씀드려 봐도 괜찮을까요? 그러면 제 지식이 얼마나 보잘것없는가 아시게 될 거예요. 실은 저는 아무것도 몰라요. 하지만 그는 어느 수필에서 농업에 대해서 썼더군요. 예전에 번역된 것을 읽은 기억이 조금 있어요. 이런 구절이었던 것 같아요. <죄는 가난에서 시작되고, 가난은 먹을 것의 부족에서 일어나며, 먹을 것의 부족은 땅을 갈기를 게을리하는 데서 일어난다. 땅을 갈지 않으면 사람은 흙과의 인연을 잃는다. 흙과의 인연이 없으면 사람은 고향을 떠나기 쉬우니, 나는 새나 들짐승과 다를 바 없다. 높은 성, 깊은 못, 엄한 법, 심한 벌도 마음속에 있는 방랑의 기질을 막지 못한다.>”  (p845-846)  

   

“아버님 상태가 더 나빠지셨나요?”

“목덜미의 맥이 손을 갖다댈 때마다 약해지고 있습니다. 새벽녘이 고비일 것 같습니다” 옌은 대답했다.

“그럼, 저도 자지 않을게요.” 그녀는 말했다. “함께 깨어 있기로 해요.”

이 말을 듣자 옌의 심장이 한두 번 크게 고동쳤다. ‘함께’라는 말이 이토록 다정하게 들린 것은 처음인 듯했다. 그러나 그는 뭐라고 말해야 좋을지 몰라 잠자코 흙벽에 기대섰다. 그리고 문간에 서 있는 메이링과 둘이서 무거운 마음으로 달빛 아래 드러난 밭을 바라보았다. 마침 보름달이라 주위가 온통 밝았다. 가만히 밭을 바라보는 동안 둘 사이의 침묵이 차츰 견딜 수 없게 되었다. 옌은 가슴에 불이 붙어 자꾸만 그녀 곁으로 끌려갈 듯했으므로 무언가 평범한 이야기라도 좋으니 말을 하여 그녀의 대답하는 목소리가 듣고 싶어졌다. 그렇게라도 하지 않았다가는 저도 모르게 손을 뻗쳐, 자기를 미워하는 이 여자의 손을 잡을지도 모른다. 그래서 그는 조금 더듬거리며 말했다. 

“참 잘 와주셨습니다. 덕분에 아버지도 훨씬 편해지셨습니다.”

그러자 그녀는 조용하게 대답했다. “도와드릴 수 있어서 기뻐요. 저도 오고 싶었어요.”(p101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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