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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노용헌 Dec 21. 2022

더글라스 케네디의 <빅 픽처>

영화 <빅 픽처The Big Picture> 2010년

케이트 브라이머. 기차가 해리슨 역을 빠져나가는 동안, 나는 나도 모르는 사이에 <배니티 페어>지의 반들반들한 종이를 휙휙 넘기고 있었다. 그 잡지의 ‘자랑거리’ 섹션에 케이트의 기사가 실려 있었다. 에니 레이보비츠가 찍은 케이트의 사진이 한 면의 대부분을 차지하고 있었다. 사진의 배경은 보스니아의 대량 학살 현장, 죽은 지 얼마 되지 않은 시체들이 눈 덮인 풍경 위에 나뒹굴고 있었다. 늘 그렇듯, 멋진 위장복을 입은 케이트는 ‘용감한 여성’의 표상답게 카메라를 노려보고 있었다.     


위험천만한 보스니아의 전장을 누비며 용기 있는 여성의 매력을 선보인 CNN의 케이트 브라이머. 

“훌륭한 종군기자가 되기 위한 비결은 뭘까요?”

CNN의 케이트 브라이머가 스스로 묻고 답한다.

“두 가지가 있습니다. 끝없는 열정.... 그리고 몸을 숨겨야 할 때를 아는 것.”

CNN의 수장 테드 터너가 케이트에 대해 말한다. 

“케이트 브라이머는 요즘 가장 눈부시게 활약하는 텔레비전 종군기자입니다.”

테드 터너와 제인 폰다 부부는 몬태나 별장에 케이트 브라이머를 두 차례나 초대했다. ABC 앵커 피터 제닝스와 프랑스 영화감독 뤽 베송 등 지적이고 매력적인 남자들과 염문을 뿌린 바 있는 케이트는 간단없이 세계 분쟁 지역을 돌아다니고 있다. 케이트는 벨파스트의 암흑가에서 강렬한 보도를 통해 처음으로 이름을 알렸고, 알제에서는 저격수의 총알을 가까스로 피했고, 이제 전쟁으로 황폐한 보스니아에서 불꽃 튀기는 감동적인 보도로 에미상을 노리고 있다.

“최악의 인간 행동을 목격하지만 늘 참아내야 하는 게 저의 일입니다.” 케이트 브라이머는 사라예보에서 지지직대는 전화로 말했다.

“저에게 가장 힘든 건 살육의 현장을 너무 많이 본 까닭에 냉소적이 되는 것입니다. 저는 늘 냉소적이 될 수 있는 유혹에 맞서 싸우고 있습니다. 전쟁을 그냥 눈으로 바라보아선 안 되겠죠. 늘 전쟁의 고통을 마음으로 느껴야만 합니다. 그래서 저는 늘 감정이입의 능력을 점점 합니다. 제 주위에서 세상이 파괴되는 동안 보스니아 사람들과 가슴 아픈 조화를 이루려고 애씁니다.”     


이런 젠장. 거짓말 한 번 거창하네. 퓰리처상 감이야. ‘감정이입의 능력을 점검합니다’라니! ‘가슴 아픈 조화’는 또 뭐야? 설마 진심은 아니겠지?

<더글라스 케네디, 빅 픽처, P27-28>  

   

소설 <빅 픽처>는 미국 뉴욕 주 월가의 변호사 '벤'은 어린 시절부터 사진가가 되기를 간절히 바랐으나 아버지의 반대로 변호사가 되었고, 사진가가 되고 싶지만 꿈을 이루지 못했고, 아내 베스 또한 작가가 되지 못하고, 글은 번번이 출판사로부터 퇴짜를 맞는다. 베스가 이웃집에 사는 사진가 게리와 불륜에 빠졌다는 것을 알게 되고, 그를 우발적으로 살해하고 요트사고로 가장해 사진가 게리의 삶을 살고, 유명해지만 또 다시 비밀을 알게 된 루디와 교통사고로 당하고 다시 다른 사람의 삶을 살게 되는 이야기이다.   

     

월스트리트에 소재한 법률회사 로렌스카메론앤드토마스으 변호사 벤 브래드포드가 실종됐다. 벤 브래드포드는 롱아일랜드 중 몽토크갑 동쪽 28킬로미터 지점에서 폭발한 요트에 타고 있었던 것으로 확인됐다.

요트의 폭발은 월요일 오전 2시30분 직후 몽토크 등대에서 발견되었다. 등대 관리인 제임스 어빈의 말에 따르면, 큰 폭발에 이어서 불이 났다. 신고를 받은 해안경비대가 즉시 출동했지만, 악천후와 어둠으로 구조에 어려움을 겪었다.

해안경비대 대변인 제프리 하트의 발표내용은 다음과 같다. ‘조사한 바에 따르면, 불은 선실에서 시작되어서 빠르게 번졌다. 현재로서는 아무것도 단정할 수 없지만 사고로 추정된다.’

사고 요트는 블루칩 호라고 명명된 전장 9미터의 요트로, 윌스트리트 주식중개인 빌 하틀리 씨의 소유다. 빌 하틀리 씨와 벤 브래드포드씨는 막역한 친구 사이로 알려졌다.

빌 하틀리 씨는 경찰의 조사에 응해 이렇게 증언했다. ‘며칠 요트를 쓰라고 빌려주었다. 벤은 배를 잘 몰았고, 배에 탑재된 안전 장비는 아무런 이상이 없었다. 벤은 담배도 피우지 않는다. 가스스토브에서 음식을 할 때 불이 나지 않았을까? 벤은 배를 버릴 사람도 아니다. 불을 끄려고 애썼을 것이다.’

벤 브래드포드 씨는 코네티컷 주 뉴크로이든에서 두 아이를 둔 가장으로 생활해왔다. 해안경비대는 오늘 아침 잔해 수거 작업을 더 진행할 예정이다.  (p270)    

 

돌로레스는 껌을 씹고 있었다. 그녀가 입고 있는 두꺼운 긴팔 티셔츠에는 색 바랜 마이클 잭슨 사진이 새겨져 있었고, 이유식 자국이 여기저기 묻어 있었다. 나는 그들에게 주유기 사이에서 포즈를 취하라고 했다. 허물어져가는 주유소 건물과 척박한 산이 사진의 배경이었다. 사진을 열두 장쯤 찍고 나서, 기름 값을 내고, 주소를 적은 다음 사진을 보내주겠다고 약속했다. 

마운틴폴스에 돌아오자 막 해가 지고 있었다. 암실로 직행해 곧장 작업에 착수했다. 현상한 네거티브필름들을 찬찬히 살피고 나서 빨간 펜으로 아홉 개의 프레임에 동그라미를 쳤다. 그 사진 아홉 장을 인화해 빨랫줄에 널어 말렸다. 한반중에 암실을 나와 스크램블드에그와 값싼 캘리포니아 와인 두 잔으로 저녁을 때웠다.

암실로 돌아와 다시 맘에 안 드는 네 장의 사진을 버렸다. 그러나 다섯 장은 제법 만족스러웠다. 바에서 찍은 노인의 얼굴 주름이 강렬한 인상을 풍겼다. 온갖 세상일에 지친 무뚝뚝하고 주름진 얼굴, 상점 안의 몽롱한 분위기도 배경으로 썩 잘 어울렸다. 인물을 돋보이게 하는 배경이었다. 미국 서부의 산간 지방에서 찍은 이미지라는 걸 단박에 알 수 있었고, 이른 아침부터 술을 마시는 지친 인간의 얼굴 표정이 사실적으로 담겨 있었다.  (p314-315)     

루디는 사진을 들고 거실로 나와 소파에 누웠다. 나는 주방에서 롤링록 두 병을 꺼내 한 병을 루디에게 주고, 맞은편 안락의자에 털썩 주저앉았다. 루디는 맥주를 마시며 내가 찍은 사진을 찬찬히 살폈다. 

내가 마침내 물었다.

“어때요?”

루디가 고개를 들었다. 

“내 의견을 듣고 싶어요?”

“예, 뭐.”

루디는 한참동안 아무 말이 없었다.

“솔직히 말하자면 아주 좋아요.”

“정말요?”

“몬태나 사람들 얼굴을 이렇게 잘 표현한 사진은 처음 봤소.”

“진심이죠?”

“이 사진들을 보기 전에 내가 한 말들은 죄다 헛소리요. 이 사진들은 정말 대단해. 이 얼굴을 보고 있으면, 내 고향 몬태나 사람들이라는 생각이 절로 들어요. 이 사진들이 왜 좋은지 알아요? 댁이 예술가인척하지 않았기 때문이오. 서부 사람은 으레 그럴 것이라는 편견을 조금도 개입시키지 않고 그냥 있는 그대로를 찍었기 때문이오. 그것도 인물의 표정을 아주 제대로 포착했어.”

루디가 말을 멈췄다가 비웃는 듯한 미소를 지었다. 

“당신, 사진가가 맞긴 맞군요.”   (p327-328)     


나는 후지컬러로 필름을 바꿨다. 소방관들이 불을 향해 물을 내뿜었다. 나이 든 소방관의 클로즈업된 얼굴을 아주 멋지게 찍을 수 있었다. 나이 든 소방관의 굳은 얼굴은 화염에 붉게 물들었고, 화염을 바라보는 눈길에는 놀라고 당황한 기색이 그대로 묻어나 있었다.

미처 30분도 지나지 않아 필름 아홉 롤을 썼다. 불을 끄는 경비행기는 이제 세 대로 늘었고, 소방차 네 대가 미친 듯이 물을 뿜었다. 열기가 심해 나는 땀에 흠뻑 젖어들었다. 그래도 나는 사진 찍기를 멈추지 않았다. 앤과 내가 죽음에서 간신히 벗어났다는 급박한 상황에 위험까지 더해졌다. 그런 기분이 사진으로 고스란히 전해질 것이다. 종군 사진가가 왜 늘 전장으로 달려가는지 이제야 이해됐다. 죽음에 가까이 가보고 나서야 목전에 임박한 위험이 사진가에게는 더할 수 없이 매력적인 상황이란 걸 알게 되는 것이다. 사진가는 모든 장면을 뷰파인더를 통해 보기 때문에 위험에는 어느 정도 면역이 된다. 카메라가 방패 역할을 하기 때문이다. 카메라 뒤에 있으면 어떤 피해도 입지 않을 듯 느껴진다. 카메라 덕분에 위기 상황에 대한 면책특권을 얻는 것이다.  (p396-397)     


루디가 일하는 모습을 보는 동안 기자는 청소부 같다는 생각이 들었다. 글을 쓰는 사람은 어떤 장면의 세세한 부분들을 모은다. 그 세세한 것들이 한데 모이면 ‘큰 그림’이 완성된다. 사진가는 늘 상황을 제대로 보여줄 수 있는 확실한 영상 하나를 원하지만 작가는 작은 일들을 모아 하나의 이야기를 만든다. 세밀한 묘사가 없는 이야기는 맥없고 심심할 수밖에 없으니 좋은 글을 쓰려면 균형감을 유지해야 한다. 글 전반에 작가 자신의 시각이 담기지 않으면 독자는 작가가 관찰한 바를 전체적으로 조망할 수 없다.  (p404-405)  

     

나는 베스가 매일 아침 <투데이>를 보던 게 기억나 두렵기만 했다.

“사진 한 장인걸, 별 것 아냐.”

“9.11 사건 때 숯 검댕을 칠한 듯 온통 검은 재가 내려앉은 얼굴에 놀라 휘둥그래진 눈을 찍었던 그 인물사진 기억해? 그저 ‘사진 한 장’이었지만 세상의 눈을 온통 사로잡았잖아. 왜 그랬을까? 단 하나의 이미지에 그 끔찍하고 무시무시한 사건의 비극성을 함축했기 때문일 거야. 누구나 공감할 수 있는 이미지니까. 한 장의 이미지로 한 인간이 내포한 고뇌의 깊이를 다 보여줄 때 보도사진은 최고의 힘을 발휘하잖아. 자기가 해낸 일이 바로 그거야. 그래서 모두 자기 사진을 찾는 거지.”  (p412)      

일주일 동안 나는 미국 생활의 자명한 진리 중 하나를 깨닫게 됐다. 일단 인기를 얻으면 어디서나 그 사람을 찾는다. 미국 문화에서 고군분투하는 사람은 늘 무시된다. 고군분투하는 사람은 아무것도 아닌 사람으로 취급되기 일쑤다. 발행인, 잡지 편집자, 제작자, 갤러리 주인, 에이전트들을 설득하려고 필사적으로 애쓰는 사람은 낙오자로 취급될 뿐이다. 성공할 수 있는 길은 각자 찾아내야 하지만, 그 누구도 성공을 이룰 기회를 얻기란 쉽지 않다. 명성을 얻지 못한 사람에게 기회를 줄 사람은 없기 때문이다. 어떤 사람의 재능을 알아볼 수 있는 안목이 있더라도, 자기 판단만 믿고 무명의 인물에게 지원하기란 그리 쉽지 않다.

그런 까닭에 무명은 대부분 계속 무명으로 남는다. 그러다가 문이 열리고 빛이 들어온다. 행운의 밝은 빛에 휩싸인 후로는 갑자기 황금알을 낳는 거위가 되고 반드시 써야 할 인물이 된다. 이제 모두 그 사람만 찾는다. 모두 그 사람에게 전화한다. 성공의 후광이 그 사람을 따라다니기 때문이다.  (p415-416)  

   

“내 탐정 역할이 어때? 아주 대단하지 않아? 나도 내 자신에게 놀랄 지경이더군. 하긴 자네도 대단했지. 벤이 죽은 것으로 꾸미고 환생했으니까. <스탬포드애드버케이트> 지가 전국적으로 읽히는 신문이 아닌 게 천만다행이었겠지. 요트에 있던 시체는 보나마나 게리였을 테고.”

“왜 경찰에 신고하지 않았지?”

“내가 왜 이런 비밀을 누설하겠어? 우리 사이가 이제 끈끈하게 엮일 수 있게 되었는데 내가 그걸 왜 깨겠어? 나는 경찰 끄나풀이 아니야. 몬태나 토박이는 권력에 늘 반기를 들지. 어쨌거나 게리는 자네 부인과 그렇고 그런 사이였고.....”

“아무에게도 알리지 않았단 말이지?”

“난 멕시코에 있는 것으로 되어 있어. 그건 자네도 알잖아?”

“그럼 나에게 뭘 원해?”

“그러고 보니 자넨 변호사처럼 말하는군. 뉴욕 술집에서 술깨나 마셔본 사람일 테니까 ‘보상’이라는 말도 잘 알겠군.”    (p45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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