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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노용헌 Dec 13. 2022

표도르 도스토예프스키의 <카라마조프 가의 형제들>

영화 <카라마조프의 형제들> 1958년

영화 <카라마조프의 형제들The Brothers Karamazov>은 <카사블랑카>를 쓴 필립 G. 엡스타인의 유작이다. 엡스타인은 이 영화가 개봉되기 6년 전에 세상을 떠났다. 리차드 브룩스 감독은 이 영화를 러시아에서 올 로케이션을 하려고 했지만, 냉전의 기운이 가장 엄하게 헐리웃을 뒤덮는 바람에 결국 그는 MGM의 세트장에서 영화를 완성시켜야 했다. 하지만 오래 준비한다고 모든 영화가 흥행에 성공하는 것은 아니다. 이 영화는 MGM에게 막대한 손실을 끼친 영화 중 한 편이다. 아버지와 아들을 연기한 J. 콥과 율 브린너의 나이 차는 고작 9살 차이이다. 그루셴카의 가장 최초 캐스팅은 캐롤 베이커였다. 그리고 장남 드미트리 역도 원래는 말론 브란도가 맡기로 한 거였다고 한다.     

“아니요, 디드로 얘기가 아닙니다. 무엇보다도, 자기 자신에게 거짓말을 하지 마십시오. 자기 자신에게 거짓말을 하고 그 거짓말에 귀를 기울이는 자는 결국 자기 내부에서도, 자기 주위에서도 어떤 진실도 분간하지 못하게 되며, 그리하여 자기 자신도, 타인들도 존경하지 않게 됩니다. 아무도 존경하지 않게 되면 사랑하는 법을 잊어버리게 되고, 사랑이 없는 상태에서 마음껏 즐기고 기분을 풀자니 정욕에, 조잡한 음욕에 빠져 들게 되고 결국 완전히 짐승과 다름없는 죄악의 소굴로 빠져들게 되는 법이니, 이 모든 것이 사람들과 자기 자신에 대한 끊임없는 거짓말에서 비롯되는 것입니다. 스스로에게 거짓말을 하는 사람들은 다른 사람들보다 더 쉽게 화를 낼 수 있습니다. 정말이지 화가 나는 것도 이따금씩 아주 통쾌한 것이지요, 안 그렇습니까? 또한 사람이란, 아무도 자기의 화를 돋우지 않았건만 그저 저 혼자 잔뜩 화가 났노라고 지어내고 멋진 그림을 만들어 내기 위해 장식 삼아 거짓말과 과장을 부풀리고 말꼬리를 물고 늘어져 겨우 콩알 몇 개로 산 하나를 만들었다는 것을 알면서도 - 그 자신이 이 점을 잘 알면서도 그럼에도 스스로 버럭 화를 내는데, 그것도 통쾌할 때까지, 커다란 만족을 얻을 때까지 화를 내서 모욕감에 시달리다가 결국엔 상대방을 진정으로 적대시하기에 이르는 것입니다..... 자, 일어나서 앉으시지요, 정말 부탁입니다, 실은 이것조차도 모두 거짓 시늉이 아닙니까.....”

<표도르 도스토예프스키, 카라마조프 가의 형제들1, P92-93>   

  

표도르 파블로비치 카라마조프의 세 아들, 드미트리, 이반, 알렉세이, 그리고 사생아 스메르쟈코프.  

   

[드미트리] 

하지만 바로 이게 문제야. 즉, 어떻게 내가 대지와 영원히 결합할 것인가? 나는 대지에 입을 맞추지도 않고 대지의 가슴을 열어젖히지도 않아. 아니, 내가 농사꾼이나 양치기가 될 순 없잖니? 이렇게 앞으로 걸어 나가면서도 내가 악취 나는 치욕 속에 빠진 것인지, 아니면 빛과 기쁨 속에 빠진 것인지를 모르겠어. 바로 이게 불행이라니까, 세상의 모든 것이 수수께끼거든! 방탕한 치욕의 심연 속으로 깊이 빠져들 때면(하긴 나한테는 꼭 이런 일만 있었지) 나는 언제나 케레스와 인간을 노래한 이 시를 읽곤 했어. 그 덕택에 내가 개과천선했느냐? 절대 아니올시다! 왜냐면 나는 카라마조프니까. 왜냐면, 어차피 심연 속으로 떨어진다면 차라리 머리를 아래로 처박고 발뒤꿈치를 위로 쳐든 채 곤두박질치는 편이 낫고, 그야말로 이렇게 굴욕적인 자세로 추락하는 것이 만족스럽고, 또 나 같은 놈한테는 이것이 아름다운 일이라고 생각하기 때문이지. 그러니까 바로 이런 치욕 속에서 허덕이며 나는 갑자기 찬송가를 부르기 시작하는 거야. 내가 빌어먹을 놈이고 천한 놈, 야비한 놈이라고 해도, 설사 그렇다 쳐도 나의 하느님을 휘감고 있는 저 옷자락에 입을 맞추면 또 어떠냐. 그와 바로 동시에 악마의 뒤를 따라간다고 해도 어쨌거나 나는 하느님의 아들이니, 주여, 당신을 사랑하며 이 세상을 존재하게 하고 지탱하게 해 주는 기쁨을 느끼옵나이다. (p225)     

나야말로, 동생아, 바로 이 벌레란다. 이건 특별히 나를 두고서 나온 말이야. 그리고 우리 카라마조프는 전부 이런 놈들이지. 천사인 너의 안에도 이 벌레가 살고 있어서 너의 핏속에서 폭풍우를 낳는 거야. 이건 폭풍우야. 정욕은 폭풍우거든, 아니, 폭풍우 이상이지! 아름다움이란 말이다, 섬뜩하고도 끔찍한 것이야! 섬뜩하다 함은 뭐라고 정의 내릴 수 없기 때문이고, 뭐라고 딱히 정의 내릴 수 없다 함은 하느님이 오로지 수수께끼만을 내놨기 때문이지. 여기서 양극단들이 서로 만나고, 여기서 모든 모순들이 함께 살고 있는 거야. 나는, 동생아, 교양이라곤 통 없는 놈이지만 이 점은 많이 생각했어. 비밀이 정말 너무도 많아! 너무도 많은 수수께끼들이 지상의 사람을 짓누르고 있어. 네 깜냥대로 수수께끼를 풀어 보라니, 몸에 물을 적시지 않은 채로 물에 들어갔다 나와 보라는 것과 똑같아. 아름다움이란 정말! 덧붙여 내가 참을 수 없는 건 어떤 사람이, 그것도 고귀한 마음과 드높은 이성을 가진 사람이 마돈나의 이상에서 시작하여 소돔의 이상으로 끝을 맺는다는 거야. 더 끔찍한 것은 영혼 속에 이미 소돔의 이상을 품은 상태에서도 마돈나의 이상을 또한 부정하지 못하여, 그 때문에 죄악을 모르던 젊은 시절처럼 자신의 가슴을 진실로, 진실로 불태운다는 거지. 아니야, 인간이란 넓어, 너무도 넓어, 나는 차라리 축소시켰으면 싶어. 젠장, 도대체 뭐가 뭔지 알게 뭐람. 정말! 이성에겐 치욕으로 여겨지는 것이 마음에겐 완전히 아름다움이니 말이다. 소돔에도 아름다움이 있을까? 믿을 수 있겠니, 아주 많은 사람들에게 있어 아름다움이란 바로 소돔에 도사리고 있다는 것을 - 이 비밀을 너는 알고 있었니? 정말 무서운건 말이지, 아름다움이란 비단 섬뜩한 것일 뿐만 아니라 신비스러운 것이기도 하다는 사실이야. 그러니까 악마와 신이 싸우는데 그 전쟁터가 바로 사람들의 마음속인 거지. 그나저나, 어디가 아픈 사람은 꼭 그 얘기를 하게 마련인가 봐. (p227-228)    

[스메르쟈코프]  

먼저 말을 꺼내는 일도 드물었다. 만약 이런 때에 누가 이 청년을 바라보면서 그가 무엇에 흥미를 느끼고 그의 머릿속에 가장 자주 떠오르는 생각이 무엇인지를 물어보고 싶어졌다면 정말로, 그를 바라보면서는 답을 얻을 수 없었을 터이다. 그런데 이따금씩 집 안에서도, 심지어 마당이나 거리에서도 걸음을 멈추고 서서 생각에 잠긴 채 약 십 분씩이나 그렇게 서 있는 일이 있곤 했다. 관상학자라면 그의 얼굴을 들여다본 뒤 여기에는 어떤 상념도, 어떤 생각도 없으며 그저 어떤 관조만이 있을 뿐이라고 말했을 법하다. 화가 크람스코이의 그림 중에 관조자라는 제목의 훌륭한 그림이 한 점 있다. 겨울의 숲이 묘사되어 있고, 숲속 길에 다 헤진 카프탄을 입고 짚신을 신은 한 농부가 길을 잃은 채 아주 깊은 고독에 잠겨 홀로 서 있는데, 꼭 뭔가를 골똘히 생각하는 듯하지만 실은 생각을 하는 것이 아니라 뭔가를 ‘관조’하고 있는 것이다. 만약 누가 그를 툭 친다면, 그는 꼭 잠에서 깬 양 몸을 부르르 떨면서 상대방을 바라보겠지만, 무슨 영문인지 통 모를 것이다. 사실, 그 즉시 정신을 차리긴 해도 그에게 이렇게 서서 무슨 생각을 하고 있는지 물어본다면 분명히 아무것도 기억하지 못할 것이며, 하지만 그 대신, 분명히 관조하는 동안 받은 인상은 자기의 내부에 감춰 둘 것이다. 그에게 소중한 것은 바로 이 인상들이어서, 분명히 의식도 하지 못하면서 살금살금 인상들을 축적하고 있는 것인데 - 무엇을 위해서, 왜 그러는지도 물론 알지 못하면서 말이다. 어쩌면 수많은 세월 동안 인상들을 축적한 뒤 갑자기 모든 것을 내던지고서 편력 생활과 수도 생활을 위해 예루살렘으로 떠날 수도 있을 것이고, 또 어쩌면 갑자기 고향 마을에 불을 질러 버릴 수도 있을 것이고, 또 어쩌면 이 모든 것이 동시에 일어날 수도 있는 것이다. 민중들 사이에는 이렇게 관조하는 자들이 상당수 있다. 분명히 바로 이런 관조자들 중 하나가 바로 스메르쟈코프이고, 또 분명히 그 역시 거의 목적도 아직 모르면서 자신의 인상들을 탐욕스럽게 축적하고 있는 것이리라. (p266-267)   

     

[이반]   

“신이 정말로 존재한다는 건 이상할 것도, 놀라울 것도 없는 얘기이고, 오히려 정말 놀라운 것은 그런 생각이 -그러니까 신이 반드시 필요하다는 생각이- 인간과 같이 야만스럽고 사악한 동물의 머릿속에 떠오를 수 있었다는 사실인데, 이 생각은 그 정도로 성스럽고 그 정도로 감동적이고 그 정도로 현명하고 그 정도로 인간의 위신을 살려 준다는 거야. 나로 말할 것 같으면, 인간이 신을 창조했느냐, 아니면 신이 인간을 창조했느냐와 같은 문제는 이미 오래전부터 생각하지 않기로 했어. 물론, 나는 이와 관련하여 요즘 러시아의 아이들이 내놓은, 그나마 하나에서 열까지 다 유럽의 가설들로부터 이끌어 낸 온갖 공리들도 손대지 않겠어. 왜냐면 저쪽에선 가설에 불과한 것이 러시아의 아이에겐 곧장 공리가 되거든, 아니, 이건 비단 아이들뿐만 아니라 그들의 교수들한테도 적용되는 건데, 지금 우리 러시아에서는 교수들도 아이들과 다를 바 없을 때가 너무 많거든. 그렇기 때문에 모든 가설들은 다 피하려는 거야. 그렇다면, 지금 너와 나 사이에 놓인 과제는 뭐지? 그 과제란 가능한 한 빨리 너에게 나의 본질을, 다시 말해서 내가 어떤 사람이고 무엇을 믿고 무엇을 희망하는지를 설명하는 것이 아닐까, 그렇지 않니? 그렇기 때문에 나는 솔직담백하게 신을 받아들이노라고 선언하는 거야. 하지만, 아무리 그래도 지적해 둬야 할 것은 있어. 즉, 신이 존재한다면, 그리고 정말로 신이 이 땅을 창조했다면, 우리가 완벽하게 알고 있듯 신은 그 땅을 유클리드 기하학에 따라 창조했을 것이며 또한 인간의 머리는 오직 3차원적 공간에 대한 개념만을 지닌 것으로 창조했겠지. 그런데 전 우주 -혹은 더 광범위하게 말해서 모든 존재가 그저 유클리드 기하학에 따라 창조되었다는 걸 의심하면서 감히, 유클리드에 따르면 어떤 일이 있어도 이 땅에서는 만날 수 없는 두 개의 평행선이 무한대 어딘가에서 만날 수 있으리라는 몽상에 젖은 기하학자들과 철학자들이 있었고 심지어 지금도 있단 말이야, 그것도 가장 탁월한 자들 중에서도 말이야. 얘야, 그래서 나는 심지어 이것조차도 이해할 수 없다면 도대체 어떻게 신에 대해 이해할 수 있겠는가 하는 결론을 내려 버렸지. 나에게는 이런 문제를 풀 능력이 전혀 없음을, 나의 머리는 유클리드적인 것이요 지상의 것임을, 그렇기 때문에 이 세상의 것이 아닌 문제를 해결할 재간이 전혀 없음을 겸손하게 인정하는 거야. 그리고 너한테도 이런 것에 대해서는 아예 생각을 하지 말라고 충고하는 거야, 내 친구 같은 알료샤, 특히 신에 관해서는 더 그래. 신은 존재하는가, 하지 않는가? 이 모든 것은 그저 3차원에 관한 개념만을 갖도록 창조된 머리에는 전혀 맞지 않는 질문들이야. 그래서 나는 신을 기꺼이 받아들일 뿐만 아니라, 덧붙여 우리로서는 도저히 알 길 없는 신의 현명함과 신의 목적도 받아들이고, 우리 모두를 하나로 결합시켜 줄 영원한 조화를 믿고, 또한 우주의 지향점이자 그 자체로 ‘하느님과 함께 계시고’ 그 자체로 곧 하느님이신 말씀을 믿고, 뭐 등등, 겸사겸사 무한성도 믿는다. 이 점에 관해서라면 한도 끝도 없는 말들이 쏟아져 나왔더랬지. 어떻든 내가 길은 잘 들어선 것 같은데 -엉? 자 그럼, 잘 생각해 보렴, 결과적으로 나는 신의 이 세계를 받아들이지 않는 것이며- 비록 신이 존재하는 것을 알고 있다 하더라도 절대로 그것을 인정할 수 없어. 신을 받아들이지 않는다는 것이 아니라, 이 점을 잘 알아 둬, 그가 창조한 세계를, 신의 세계를 받아들이지 않는다는 것, 받아들이는 것에 동의할 수 없다는 거야. 여기서 토를 좀 달아 둘 것이 있어. 즉, 고통이란 것도 결국에 아물어 사라지게 마련임을, 인간들의 모순들이 빚어내는 모욕적인 희극도 전부 애처로운 신기루처럼, 또 원자와 같이 부실하고 미미한 인간의 유클리드적 머리가 만들어 내는 추악한 허상처럼 사라져 버릴 것임을, 끝으로, 이 세계의 피날레에 이르러 영원한 조화의 순간에 뭔가 너무나 귀중한 것이 문득 출현하여 모든 마음들이 그것으로 충만하고 모든 분노가 사그라지고 사람들의 모든 악행들과 그들이 흘린 모든 피가 그로써 충분히 보상될 것임을, 사람들이 겪었던 모든 일을 용서하는 것은 물론이고 그것을 정당화하는 것조차도 충분히 가능해질 것임을 나는 갓난애처럼 확신하고 있어 -하지만, 정말로 모든 것이 이렇게 된다고 할지라도, 그래도 나는 이것을 받아들이지 않고, 받아들이고 싶지 않아! 심지어 평행선들이 서로 만나고 내 눈으로 그것을 보게 될지라도 말이야, 내 눈으로 그걸 보면서, 만났다고 말을 하게 될지언정 그래도 받아들이지는 않을 거야. 자, 바로 이게 나의 본질이야, 알료샤, 바로 이게 나의 테제란 말이다. 이건 내가 너한테 제법 진지한 마음으로 하는 말이야. 우리의 이 대화를 나는 일부러 더할 나위 없이 멍청하게 시작했지만, 결국 내가 고백을 하는 지경에까지 이르고 말았는데, 너한테 필요한 건 사실 오직 이것뿐이니까. 너한테 필요한 건 신에 관한 문제가 아니라, 오직 네가 사랑하는 형이 무엇으로 사는지를 알아내는 것이었을 테지. 그래서 나는 이런 말을 했던 거야.“

이반은 자신의 기나긴 연설을 갑자기 어떤 특별하고 예기치 못한 감정을 담아 끝맺었다.

“그런데 무엇 때문에 ‘더할 나위 없이 멍청하게’ 시작한 거지?” 알료샤가 생각에 잠긴 듯 그를 바라보며 물었다.

“그래, 첫째, 뭐 러시아식으로 하기 위해서랄까. 러시아인들은 이런 주제를 놓고 대화를 나누게 되면 더할 나위 없이 멍청한 방식을 취하거든, 둘째, 또, 멍청하면 멍청할수록 본론에는 더 가까워지는 법이야. 멍청하면 멍청할수록 더욱 더 분명해지는 거고, 멍청함은 간결해서 교활하게 굴 줄 모르지만, 똑똑함은 잔머리를 굴려서 감쪽같이 숨어 버릴 궁리만 하거든. 똑똑함은 비열하기 십상이지만, 멍청함은 솔직담백하고 정직하거든. 나는 사태를 내가 절망하는 것에까지 이르게 했고, 그 때문에 내가 그것을 멍청하게 제시하면 할수록 나에게는 그만큼 더 유리한 거야.”

(p492-496)    

    

“우선은 인간의 고립의 시기가 종말을 고해야만 합니다.” “고립이라니요?” 내가 그에게 묻습니다.

“그 고립이란 지금 곳곳에 만연해 있고 우리 시대에는 특히 그렇지만 이 고립의 시대는 아직 완전한 종말을 고하지는 않았습니다. 왜냐면 지금은 누구나 자신의 얼굴을 가장 많이 부각시키지 못해 안달하고 자신의 내부에서만 삶의 충만함을 경험하고자 하지만, 이 모든 노력의 결과란 사실 삶의 충만함이 아니라 오히려 완전한 자살일 따름이기 때문이며, 자기 존재를 완전히 규정짓는 대신 완전한 고립에 빠져 버리기 때문입니다. 우리 시대에는 모든 사람들이 개개의 단위들로 분리되었고 각자 자신의 동굴 속에 고립되어서 다른 사람에게서 멀어져 몸을 숨기고 자신의 갖고 있는 것도 또 숨기고, 그러다 결국에는 자기도 사람들로부터 내쳐지고 또 자기 스스로도 사람들을 내치게 되는 것이지요. 고립된 채 부를 축적하면서 이제 나는 얼마나 강한가, 생활이 얼마나 안정되었는가 생각하지만, 부를 축적하면 할수록 더더욱 자살과 같은 무기력에 빠져 든다는 것을 이 정신 나간 자는 모르는 겁니다. 그러니까 자기 하나에게만 희망을 거는 것에 익숙해진 채 전체로부터 분리되어 개별적 단위가 되었고 사람들의 도움도, 숫제 사람들과 인류도 믿지 못하도록 자신의 영혼을 길들인 탓에 그저 자신의 돈이나 자기가 손에 넣은 권리가 없어질까 봐 벌벌 떨 뿐이지요. 지금의 인류의 지성은 어딜 가나 참다운 인간 생활을 보장해 주는 것은 고립된 개개인의 노력이 아니라 인류 전체의 통합에 있다는 말을 이해하려 들지 않고 비아냥거릴 따름입니다. 하지만 반드시, 이 무서운 고립도 때가 되면 종말을 고할 것이며 모든 사람들은 서로서로 분리되었던 것이 얼마나 부자연스러운 일이었는지를 일시에 이해할 것입니다.” 

<표도르 도스토예프스키, 카라마조프 가의 형제들2, P54-55>     

 

<카라마조프 가의 형제들The Karamazov Brothers>(2008)는 프라하의 필름 아카데미 FAMU 출신의 페트르 젤렌카 감독이 그의 4번째 장편영화인 카라마죠프가의 형제들을 각색하여 만든 작품으로서 영화의 배경은 폴란드 근교 그라코프의 어느 제철소이다. 영화속의 연극 감독과 배우를 포함한 전 스텝은 전통적인 무대공간에서 벗어나 이 공장에서 실험적인 대안공연을 영화로 담고 있다.    

   

“그 녀석은 나에 대해서, 나의 일에 대해서 기사를 써서 그걸 갖고 문학 판에 나가려고 하는 건데, 이 일로 나를 찾아오는 거라고 제 입으로 말하더군. 뭔가 특정한 사상적 경향성을 지닌 얘기를 원하고 있어. ‘그는 살인을 저지르지 않을 수 없었다. 환경에 잠식당했기 때문이다. 등등, 이런 식이라고 나에게 설명하더군. 사회주의적 색채를 띠게 될 거라고 말했어. 뭐 빌어먹을 놈이라니까. 색채고 나발이고 나는 이러나저러나 아무 상관없어. 동생 이반을 좋아하지 않아. 증오하지, 너도 환영하지 않는 눈치야. 뭐, 그런데도 내가 그 녀석을 쫓아내지 않은 건 똑똑한 놈이라서 그래. 하지만 너무 잘난 체를 한다니까. 나는 그 녀석에게 지금 막 이렇게 말했어. ’카라마조프들은 비열한 놈이 아니라 철학자이다, 왜냐면 진짜 러시아 사람은 모두 철학자이기 때문이다. 네놈은 공부를 하긴 했지만 철학자는 아니다, 네놈은 농노 새끼에 불과하거든‘이라고 그랬더니 아주 표독스럽게 웃더군. 나는 그 녀석에게 드 므이슬리부스(사상의 차이란 논쟁의 대상이 못 된다)라고 말해줬는데, 제법 기가 막힌 농담이지 않니? 최소한 나도 고전주의에 입문은 했다는 거지.” 미챠가 갑자기 홍소를 터뜨렸다.

<표도르 도스토예프스키, 카라마조프 가의 형제들3, P166>       

   

“절대로 사실대로 말해 줘, 절대로 거짓말을 해선 안 돼!” 미챠가 반복했다.

“단 한순간도 형이 살인자라고 믿은 적은 없어.” 알료샤의 가슴속에서는 갑자기 떨리는 목소리로 이런 말이 튀어나왔고 그는 자기 말의 증인으로 하느님을 부르는 듯 오른손을 위로 쳐들었다. 순간, 한없는 행복이 미챠의 얼굴을 환하게 밝혀 주었다.

“고맙다!” 그는 꼭 기절을 했다가 정신이 들어 첫 숨을 내쉬는 것처럼 말꼬리를 길게 빼며 말했다. “나는 지금 네 덕분에 부활한 거야.... 안 믿을지도 모르지만, 사실 지금까지 너한테 이걸 물어보는 것이 두려웠어, 다름 아닌 너, 너한테 말이다! 그럼, 가 봐, 가 보거라! 네가 나한테 내일을 위한 힘을 주었구나. 하느님이 너를 축복해 주시길! 그래, 가 보렴, 이반을 사랑해라!” 미챠에게선 마지막으로 이런 말이 불쑥 튀어나왔다. (p186)     

알료샤는 베개를 가져와 옷도 벗지 않고 그냥 소파에 누웠다. 잠이 들어가면서 미챠와 이반을 위해 기도했다. 이반의 병이 어떤 것인지 차츰 이해되었다. ‘오만한 결단에서 우러나온 고뇌이며 또 심오한 양심이다!’ 형은 하느님을 믿지 않았지만 하느님과 하느님의 진리가 여전히 굴복하려 들지 않았던 형의 마음을 점령한 것이다. 이미 베개를 베고 누워 있는 알료샤의 머릿속에서 이런 생각이 스쳐갔다. ‘그래, 스메르쟈코프가 죽어 버린 이상, 더 이상 아무도 이반의 증언을 믿지 않을 것이다. 하지만 형은 그래도 가서 증언할 것이다!’ 알료샤는 조용히 미소를 지었다. ‘하느님이 승리하실 거야!’라는 생각이 들었다. ‘형은 진리의 빛 속에서 부활하든지, 아니면..... 자기 자신도 믿지 않는 것을 섬겼다는 이유로 자신과 모든 사람들에게 분풀이를 하며 증오 속에서 파멸하든지 하겠지.’ 알료샤는 쓰라린 마음으로 이렇게 덧붙인 뒤 다시금 이반을 위해서 기도했다.  (p309-310)       

“여러분, 우리는 곧 헤어질 겁니다. 내가 두 형님들과 함께할 시간도 이제 얼마 남지 않았습니다. 한 형님은 유형을 떠날 것이고 다른 형님은 죽음을 목전에 두고 있으니까요. 나도 곧 이 도시를 떠날 것이고, 어쩌면 아주 오랫동안 돌아오지 않을 겁니다. 자, 이렇게 우리는 헤어지는 겁니다. 여러분, 하지만 여기, 일류샤의 바윗돌 곁에서 첫째는 일류셰치카를, 둘째는 서로서로를 절대로 잊지 않겠노라고 약속합시다. 그리고 훗날 우리의 인생에서 무슨 일이 일어나든, 또 우리가 앞으로 이십 년 동안이나 서로 만나지 못할지라도 - 어쨌거나 우리가 한 가엾은 소년을 땅에 묻었다는 사실은 기억합시다.” (p550)   

     

“여러분이 명심해야 할 것은, 앞으로의 인생을 위하여 뭔가 훌륭한 추억, 특히 어린 시절 부모님 슬하에 있을 때 갖게 된 추억보다 더 숭고하고 강렬하고 건강하고 유익한 것은 아무것도 없다는 점입니다. 여러분의 교육에 대해 이런저런 말을 많이들 하지만, 바로 이처럼 어린 시절부터 간직해 온 아름답고 성스러운 추억이야말로 그것이 무엇이든 간에 가장 훌륭한 교육이 될 겁니다. 인생에서 그런 추억들을 많이 갖게 된다면 그 사람은 평생토록 구원받은 셈입니다. 심지어 우리에게, 우리의 마음속에 단 하나의 훌륭한 추억이라도 남아 있다면, 그 덕분에 언젠가는 구원을 향해 한 발짝 더 다가가게 될 겁니다. 어쩌면 우리는 훗날 악한 사람이 될지도, 심지어 고약한 행동 앞에서 버텨 낼 힘을 잃을지도, 인간의 눈물을 조롱하게 될지도 모릅니다. 또 아까 콜랴가 ‘모든 사람들을 위해서 고통 받고 싶다’라고 외치긴 했지만 - 바로 이런 사람들을 향한 표독스러운 조롱을 퍼붓게 될지도 모릅니다. 하지만, 물론 그럴 리도 없겠지만, 여하튼 우리가 아무리 사악해질지라도, 우리가 일류샤를 어떻게 땅에 묻었는지, 우리가 최근에 그를 얼마나 사랑했는지, 바로 지금 이 바윗돌 옆에서 다 함께 얼마나 사이좋게 얘기를 나누었는지를 기억한다면, 우리 중 가장 잔인하고 가장 냉소적인 사람조차도, 설령 우리가 그런 사람이 된다고 할지라도 자기가 지금 이 순간 선량하고 훌륭한 사람이었다는 점만은 마음속으로 감히 비웃지 못할 겁니다!” (p551-552)       

알료샤가 계속했다. “하지만 왜 우리가 고약한 사람이 되어야 합니까, 안 그렇습니까, 여러분? 우리는 첫째, 그 무엇보다도 선량하게 살고, 둘째 성실하게 살아갑시다. 그 다음으론 절대로 서로서로를 잊지 맙시다. 이 점을 나는 또다시 반복하는 바입니다. 내 이름을 걸고서 약속하건대, 여러분, 여러분 중 단 한명도 나는 잊지 않겠습니다. 지금, 현재 나를 바라보고 있는 여러분의 얼굴 하나하나를 삼십 년이 지나더라도 기억할 것입니다.” (p55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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