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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노용헌 Feb 14. 2023

알렉시예비치의 <전쟁은 여자의 얼굴을 하지 않았다>

영화 <빈폴Beanpole> 2019년

영화 <빈폴>의 각본과 연출을 맡은 칸테미르 발라고프 감독은 스베틀라나 알렉시예비치의 책 「전쟁은 여자의 얼굴을 하지 않았다」에서 영화의 영감을 받았다고 한다. 벨라루스의 여성 저널리스트이자 작가인 스베틀라나 알렉시예비치는, 「체르노빌의 목소리: 미래의 연대기」와 함께 그녀의 대표작으로 꼽히는 「전쟁은 여자의 얼굴을 하지 않았다」는 전쟁 회고담에서 철저히 배제되어 온 여성들의 이야기를 담아냈다. 제2차 세계대전 직후 전쟁으로 폐허가 된 도시에서 살아남기 위해 삶의 희망을 찾아 나서는 두 여인을 담은 영화 <빈폴>은 제72회 칸영화제 주목할 만한 시선에 초청되어 국제영화비평가연맹(FIPRESCI)상과 감독상을 수상하였고, 로테르담 국제영화제를 비롯해 부산 국제영화제에서도 상영됐으며 팜스프링스 국제영화제 작품상, 몬트리올 영화제 작품상, 2019비엔날레 심사위원 스탠다드상, 사할린 국제영화제 여우주연상 및 대상, 토리노 영화제 여우주연상 및 특별언급상, 아시안퍼시픽 스크린어워즈 각본상 및 촬영상 등을 수상한 바 있다.  

   

그때 나는 ‘죽음이란 무엇일까’ 생각하기 시작했다..... 죽음에 대한 생각을 떨칠 수가 없었고 어느새 죽음은 나에게 삶의 중요한 비밀이 되었다.

우리에게는 그 두렵고 비밀스러운 세계가 모든 것의 출발점이었다. 우크라이나 출신인 외할아버지는 전쟁터에서 전사해 헝가리 땅 어딘가에 묻혔고, 친할머니는 빨치산으로 활동하다가 티푸스로 돌아가셨다. 할머니의 두 아들은 군대에서 복무하다가 전쟁이 발발한 지 한 달 만에 행방불명이 되었다. 할머니의 세 아들 중 한 명만 살아 돌아왔다. 바로 우리 아버지이다. 먼 일가친척들 중에서 열한 명이나 되는 친척들이 아이들과 함께 산 채로 독일군에게 불태워졌다... <중략>

우리는 전쟁이 없는 세상을 알지 못했다. 전쟁의 세상이 우리가 아는 유일한 세상이었고, 전쟁의 사람들이 우리가 아는 유일한 사람들이었다. 나는 지금도 다른 세상이나 다른 세상의 사람들을 알지 못한다. 그런데 다른 세상, 다른 세상 사람들은 정말 존재하기나 했던 걸까?  (P14)   

  

전쟁이 끝난 뒤 내 어릴 적 시골마을은 여자들의 세상이었다. 여자들의 마을. 남자 목소리를 나는 기억하지 못한다. 그때의 풍경은, 마을 여자들이 전쟁을 이야기하고, 흐느껴 울고, 흐느끼듯 노래하던 모습으로 내 기억 속에 남아 있다.

학교 도서관의 책은 절반이 전쟁에 관한 것이었다. 마을 도서관도, 아버지가 책을 빌리러 자주 들르곤 하셨던 구청 도서관도 마찬가지였다. 이제 나는 그 이유를 안다. 정말 우연일까? 우리는 끊임없이 전쟁을 하거나 전쟁을 준비했다. 다들 어떻게 전쟁을 치러냈는지 이야기했다. 우리는 한 번도 다른 삶을 살아본 적이 없었고, 어쩌면 다르게 사는 법을 몰랐던 것인지도 모른다. 다른 세상, 다른 방식의 삶을 상상조차 할 수 없는 우리는, 언젠가 다르게 사는 법을 오랫동안 배워야 할지도 모르겠다.  (P15)   

  

우리는 전쟁에 대한 모든 것을 ‘남자의 목소리’를 통해 알았다. 우리는 모두 ‘남자’가 이해하는 전쟁, ‘남자’가 느끼는 전쟁에 사로잡혀 있다. ‘남자’들의 언어로 쓰인 전쟁. 여자들은 침묵한다. 나를 제외한 그 누구도 할머니의 이야기를 묻지 않았다. 나의 엄마 이야기도. 심지어 전쟁터에 나갔던 여자들조차 알려 들지 않았다. 우연히 전쟁 이야기가 시작되더라도, 그건 ‘남자’들의 전쟁이야기이지 ‘여자’들의 전쟁은 아니다.  (P17)  

   

사람들은 나에게 회상은 역사도 문학도 아니라고 말한다. 회상은 예술로 승화되지 못한 추레한 인생의 한 모습일 뿐이라고. 이야기의 사원을 쌓아갈 원료들, 그건 언제나 넘쳐난다. 도처에 이 벽돌들이 굴러다닌다. 벽돌이 사원은 아니지 않느냐고? 하지만 나에게는 전혀 그렇지 않다..... 바로 그곳, 따스한 사람의 목소리, 과거가 생생히 반추되는 그 목소리 속에 원초적인 삶의 기쁨이 감춰져 있고 누구도 피해갈 수 없는 삶의 비극이 담겨 있다. 삶의 혼돈과 욕망이. 삶의 유일함과 불가해함이. 목소리 속에 이 모든 것들이 다듬어지지 않은 날것 그대로의 모습으로 남아 있다. 진짜 원본들이.

나는 우리의 감정들로 사원을 세운다..... 우리의 염원과 환멸로. 동경들로. 존재했지만 언제 슬그머니 사라져버릴지 모르는 것들로.    (P26)     

밤에 누워 있는데 문득 이런 생각이 드는 거야. ‘어쩌면 옥사나는 적이 아닐까? 혹시 스파이? 어떡하면 좋지?’ 그리고 이틀 후에 옥사나는 전투에 나갔다가 목숨을 잃었어. 남은 가족이 아무도 없어서 전사통지서도 보내지 못했지....

이 일에 대해선 다들 조심스럽게 말문을 연다. 그것도 어쩌다 한 번씩. 이들은 여전히 스탈린이 걸어놓은 최면과 공포에 사로잡혀 있으며 여전히 과거의 믿음을 붙잡고 있다. 자신들이 과거에 사랑했던 것들을 놓지 못하고 있다. 전쟁터에서의 용기와 의식의 용기, 둘은 분명 성질이 다른 별개의 것이다. 하지만 나는 이 둘이 같은 것이라고 생각했다.  (P35)     


나에겐 나만의 전쟁이 있었다.... 나는 나의 여주인공들과 긴 여정을 지나왔다. 나도 그네들처럼 오랫동안 우리의 승리가 두 얼굴을 가졌다는 사실을 믿지 못했다. 하나는 아주 멋진 얼굴, 다른 하나는 무시무시한 얼굴. 하지만 둘 다 흉측한 상처투성이라 봐줄 수가 없다. “육탄전에서는 상대방을 죽일 때 상대의 눈을 보게 돼. 그건 폭탄을 떨어뜨리거나 참호에 숨어서 총을 쏘는 것과는 다른 일이지.” 그네들이 들려준 말이다. 

어떤 사람의 이야기를 듣는 것, 그가 사람을 죽이고 죽어간 이야기를 듣는 것은 상대의 눈을 바라보는 것과 같다.....   (P59-60)     

나를 이 집으로 이끈 건, ‘얼마 전 민스크에 있는 ‘돌격대’라는 이름의 도로장비 생산공장에서 선임회계원 마리야 이바노브나 모로조바의 은퇴식이 있었다‘는, 지역 일간지에 난 짤막한 기사였다. 그 기사에는 그녀가 전쟁중에 저격병이었으며 무공훈장을 11개나 받았다고 쓰여 있었다. 그녀의 총에 죽어나간 적병의 수만 75명이라고도 했다. 이 여인이 전쟁 때 맡았던 일과 현재의 평온한 직업을 일치시키는 건 어려운 일이었다. 신문에 실린 그녀의 사진을 봐도 그랬다. 아무리 봐도 평범한 보통 여인네였다. 

...... 길게 땋은 머리칼을 화관처럼 머리에 빙 두른, 자그마한 체구의 여인이 두 손으로 얼굴을 감싼 채 커다란 안락의자에 앉아 있었다.

---- 아니, 아니, 말 안 할 거야. 나보고 다시 그때로 돌아가라고? 난 못해.... 아직도 전쟁영화라면 고개를 돌리는걸. 그때 나는 애였어. 꿈꾸고 자라고, 자라고 꿈꾸고 한창 그럴 때였지. 그런데 갑자기 전쟁이 난거야. 난 당신에게 딱한 마음이 들어. 내 이야기가 어떤 건지 나는 아니까.... 정말 그걸 알아야겠어? 딸같이 생각돼서 물어보는 거야......

당연히 나의 방문은 그녀를 놀라게 했다.

---- 그걸 왜 나한테 물어? 우리 남편한테 물어봐. 그 양반은 전쟁 이야기를 좋아하니까. 오죽하면 지휘관들, 장군들 이름은 물론 부대번호까지 전부 기억하고 있을까. 나는 생각도 안 나는데. 나는 내가 겪은 일만 기억나. 내가 겪은 전쟁만. 주위에 아무리 사람이 많아도 결국 사람은 혼자야. 왜냐하면 사람은 언제나 홀로 죽음을 대면해야 하거든. 나는 그 끔찍한 외로움을 알지.

그녀는 녹음기를 치워달라고 부탁했다.

---- 당신 눈을 보고 이야기해야 하는데 녹음기 있으니 신경쓰여. 

하지만 잠시 후 그녀는 녹음기에 대해 완전히 잊어버렸다.....     (P64-65)   

  

그 장교가 세 번째로 우리 시야에 들어왔어. 나타났다 싶으면 사라지고 또 나타났다 싶으면 안 보이는 게, 정말 한순간이더라고. 결국 그를 쏘기로 마음먹었지. 그래서 마음을 다지는데, 갑자기 이런 생각이 드는 거야. ‘사람이잖아. 비록 적이지만 저자도 사람이야.’ 그러자 손이 덜덜 떨리고, 온몸에 전율이 흐르면서 오한이 나기 시작했어. 무섭고..... 가끔 꿈속에서 그 느낌이 되살아나. 말하는 지금 이 순간도 그렇고.... 널빤지를 표적 삼아 연습만 하다가 진짜 살아있는 사람을 쏴야 하니, 왜 안 그렇겠어. 나는 조준렌즈를 통해 그 장교를 보고 있었어. 아주 잘 보이더군, 바로 앞에 있는 것처럼.... 그러자 마음속에서 뭔가가 저항을 하는데.... ‘쏘아선 안 된다’고 뭔가가 나를 말렸어. 다시 망설였지. 하지만 곧 마음을 다잡고 방아쇠를 당겼어.... 장교는 두 팔을 내저으며 그 자리에 고꾸라졌어. 그 사람이 죽었는지 살았는지, 나는 몰라. 그렇게 맞히고 나니까 총을 쏘기 전보다 더 떨리고, ‘내가 사람을 죽였다’는 공포가 밀려들었어. 하지만 나는 곧 그 일에 익숙해져야만 했지. 그래.... 한마디로 끔찍했어! 결코 못 잊을 거야....   (P72-73)     


전쟁이 몇 년 동안 있었지? 4년. 그래, 참 길기도 했네.... 그런데 그 4년 동안 꽃이고 새고 전혀 본 기억이 없어. 당연히 꽃도 피고 새도 울었을 텐데, 그래, 그래..... 참 이상한 일이지? 그런데 정말 전쟁영화에 색이 있을 수 있을까? 전쟁은 모든 게 검은색이야. 오로지 피만 다를 뿐, 피만 붉은색이지.....    (P83)     

“역사는 앞으로도 수백 년은 더 ‘그건 대체 무엇이었을까?’라며 고민하겠지. 대체 어떤 사람들이었을까? 어디에서 왔을까? 상상을 한번해 봐. 임신한 여자가 지뢰를 안고 가는 장면을.... 체르노바는 당연히 아이를 기다렸지.... 삶을 사랑했고 또 살고 싶어 했어. 당연히 두려워도 했지. 하지만 그럼에도 그녀는 그 길을 갔어.... 스탈린을 위해서가 아니라 바로 우리 아이들을 위해서. 우리 아이들의 미래를 위해서. 그녀는 무릎을 꿇어가며 살아야 하는 삶은 거부했어. 적에게 굴종하는 삶 따위는..... 어쩌면 그때 우린 눈이 멀었던 건지도 몰라. 그리고 그때 우리가 많은 것을 놓치고 보지 못했다는 사실도 부인하지 않겠어. 하지만 우리는 눈이 멀었으면서도 동시에 순수했어. 우리는 두 개의 세상, 두 개의 인생을 사는 사람들이라는 것, 당신은 그걸 꼭 알아야 해.....”  

베라 세르게예브나 로바놉스카야, 빨치산 간호병          (P133)     

녹음기는 사람의 말을 녹음하고 어조도 그대로 담아낸다. 짧은 침묵, 울음소리, 망연자실해하는 소리까지도. 나는 이야기란 게 원래 시간이 지나 글로 옮겨질 때보다 말로 뱉어질 때 훨씬 더 많은 의미를 내포한다는 사실을 잘 안다. 말할 때 그 사람의 눈빛과 팔의 움직임을 ‘녹음하지’ 못하는 게 늘 안타깝다. 대화하는 동안 드러나는 그들의 삶, 즉 그들 본래의 삶과 그들 각자의 삶을, 그들의 ‘텍스트들’을 녹음하지 못하는게 안타깝다.

---- ‘우리 집엔 두 개의 전쟁이 산다....’ 정확한 말이오.....

사울 겐리호비치가 대화에 끼어든다.

---- 전쟁을 회상하다보니 집사람에겐 집사람만의 전쟁이, 나에겐 나만의 전쟁이 있다는 생각이 드는군요. 우리 집사람이 당신에게 들려준 고향집 이야기나 줄을 서서 집에 갔다 온 동료의 냄새를 맡았다고 한 이야기는, 나도 그 비슷한 일이 있었던 같소. 하지만 기억은 안 나요.... 있는 듯 없는 듯 지나가버려서.... 그때만 해도 그런 건 사소한 일이라고 여겼으니까. 실없는 소리이기도 했지. 해군모자에 대한 이야기도 있는데 집사람이 깜박한 모양이오. 여보, 어떻게 그걸 잊어버린 거야?    (P196-197)     

나의 가장 가까운 혈육. 유일한 내 피붙이 우리 아버지. 나는 전선으로 보내달라고 청을 넣었어. ‘아버지의 원수를 갚고 싶어요. 우리 아버지의 죽음에 대한 대가를 치르게 할 거예요.’ 놈들을 죽이고 싶었어.... 총을 쏘고 싶었어.... 나는 포병대에서 통신이 얼마나 중요한지 잘 알면서도 결심을 바꾸지 않았어. 전화기로는 총을 쏠 수 없으니까.... 나는 연대장에게 보고서를 올렸어. 거절당했지. 그래서 이번에는 다짜고짜 사단장에게 보고서를 올렸어. 붉은 군대의 대령이 우리 부대를 방문해 전원 정렬을 시키더니 물었어, ‘지금 이 자리에 포병 지휘관이 되고 싶다고 한 사람 있나?’ 내가 대열에서 나와 섰지. 보아하니, 웬 여자애가 부러질 것처럼 가느다란 목에 총탄이 일흔한 발이나 장착된 무겁디무거운 자동소총을 메고 있는 거야. 한눈에 봐도 애처롭기 짝이 없었는지 대령이 웃음을 짓더군. 그리고 두 번째로 물었어. ‘그래, 원하는 게 뭔가?’ 대답했지. ‘총을 쏘고 싶습니다.’ 그때 대령이 속으로 무슨 생각을 했는지는 나도 몰라. 한참을 말없이 있더라고. 한마디도 안 하고. 그러다가 갑자기 휙 몸을 돌려서 가버리는 거야. ‘그래, 이번에도 거절이구나’ 생각했지. 그런데 곧 지휘관이 달려왔어. 대령님이 허락했다면서.....

당신은 이게 이해가 돼? 지금은 이해할 수 있는 일일까? 당신이 나를 이해해줬으면 좋겠어.... 적개심이 없으면 총을 쏘지 못해. 그건 전쟁이었지. 사냥이 아니었어. 정치 수업시간에 읽었던 일리야 예렌부르크의 ‘놈들을 죽여라!’라는 글이 기억나. 몇 번을 만나더라도 만나는 대로 독일군을 죽여 없애라는 유명한 글이지. 당시엔 모두 그 글을 읽었어. 외우고 다닐 정도였지. 그 글은 내 마음을 사로잡았고, 나는 전쟁 내내 가방 안에 그 글과 아버지의 ‘전사통지서’를 넣고 다녔어.... 쏠 거야! 총을 쏠 거야! 나는 복수해야만 했어.....  (P214-215)     

30년이 지나서야.... 모임에 초대도 하고.... 처음에 우리는 과거를 숨기며 살았어. 훈장도 내놓지 못했지. 남자들은 자랑스럽게 내놓고 다녔지만 우리는 그러지 못했어. 남자들은 전쟁에 다녀왔기 때문에 승리자요. 영웅이요. 누군가의 약혼자였지만, 우리는 다른 시선을 받아야 했지. 완전히 다른 시선.... 당신한테 말하는데, 우리는 승리를 빼앗겼어. 우리의 승리를 평범한 여자의 행복과 조금씩 맞바꾸며 살아야 했다고. 남자들은 승리를 우리와 나누지 않았어. 분하고 억울했지.... 이해할 수가 없었어.... 전선에서는 남자들이 우리를 존중했고 항상 보호해줬는데. 그런데 이 평온한 세상에서는 남자들의 그런 모습을 더 이상 볼 수가 없는 거야. 퇴각하다가 땅바닥에 누워 쉴 때면 우리에게 자기들 외투를 벗어주고 본인들은 얇디얇은 군복만 입고 버티던 남자들이었는데. ‘우리 소녀병사들.... 우리 소녀병사들부터 덮어줘야지....’ 그러면서. 어디선가 솜이나 붕대 조각 같은 것을 구해와서 가만히 ‘자, 받아, 필요할 거야.....’라며 건네주기도 했어. 수하리 하나라도 있으면 같이 나눠 먹었지. 전선에서 남자들은 따뜻하고 선량했어. 다른 모습은 본 적이 없어. 그런 건 아예 알지도 못했지. 그런데 전쟁이 끝나고 나서는? 차라리 아무 말 않겠어.... 아무 말도....    (P221)     

“무엇이 기억나느냐.... 가장 기억에 남는 게 뭐냐고? 정적이야. 중상자들이 입원해 있던 중환자실의 그 죽음 같은 고요함이 가장 기억에 남아. 치명상을 입은 병사들.... 그들은 서로 대화를 하지 않았어. 의료진을 부르지도 않았고. 많은 이들이 의식불명 상태였지. 그저 누워서 침묵했어. 생각에 잠겨 있었지. 소리쳐 이름을 불러도 듣지 못했지. 대체 무슨 생각들을 하고 있었을까?”     (P246-247)     


미샤는 양다리와 오른팔을 절단하고 왼팔 하나만 남아 있었어요. 두 다리를 거의 엉덩이 있는 데까지 잘라냈죠. 그래서 의족을 하는 것도 불가능했어요. 사람들이 미샤를 휠체어에 태우고 다녔어요. 특별히 미샤를 위해 높은 휠체어를 만들어 거기에 태우고 다닌 거예요. 휠체어를 밀 수 있는 사람은 다 미샤를 밀고 다녔어요. 많은 사람들이 병원을 찾아와 환자들을 돌봐줬어요. 특히 미샤처럼 중증장애인들에게 더 많은 관심을 기울였죠. 여자들도 오고 학생들도 왔어요. 어린아이들도 오고. 미샤는 사람들 팔에 안겨 다녔지만 풀이 죽거나 자신의 처지를 비관하지 않았어요. 그토록 삶을 원했던 거죠! 미샤가 그때 열아홉이었으니까 사실 앞으로 살아갈 날이 창창했죠. 미샤한테 가족이 있었는지는 기억나지 않아요. 하지만 미샤는 세상이 자신을 불행 속에 버려두지 않을 걸 알았죠. 그리고 세상이 자신을 잊지 않을 거라고 믿었죠. 비록 전쟁이 우리 땅에서 일어났고, 그 때문에 모든 게 파괴되고 부서졌지만 말이에요. 우리가 마을들을 탈환하고 보면 정말 다 타버리고 재만 한가득이었어요. 사람들에게 남은 건 땅밖에 없었죠. 땅이 전부였어요.

언니도 나도 의사의 길을 포기했어요. 전쟁 전에는 의사를 꿈꿨는데 말이에요. 우리는 원하기만 하면 입학시험을 치지 않고 바로 의과대학에 입학할 수 있었어요. 우리한텐 참전용사로서의 특권이 있었거든요. 하지만 사람들이 고통 속에 몸부림치며 죽어가는 모습을 너무도 많이 봤기 때문에 더 이상은 볼 수가 없었어요. 상상만 해도 싫었어요. 그래서 이미 30년이 흐른 뒤였는데도 딸아이가 그렇게 가고 싶어 하는 의과대학을 단념시켰어요. 수십 년이 흘렀지만.... 지금도 눈을 감으면 보여요... 어느 봄날.....    (P294-295)    

  

아버지는 진즉 돌아가셨지만 나는 여전히 아버지를 사랑해. 나는 우리 아버지 같은 사람들을 두고 스탈린을 믿은 어리석은 사람들이니 눈이 먼 사람들이니 하는 말 따위는 믿지 않아. 그들은 오히려 스탈린을 두려워했어. 레닌의 사상을 믿었지. 스탈린을 믿은 게 아니야. 다들 그랬어. 진심으로 하는 말인데, 그들은 선량하고 정직한 사람들이었어. 스탈린이나 레닌을 믿은 게 아니라 공산주의 사상을 믿었지. 나중에 사람들이 이름 붙인 것처럼 인간의 얼굴을 한 사회주의를 믿은 거야. 모든 사람들을 위한 행복. 한 사람 한 사람을 위한 행복. 바로 그걸 믿었어.   (P317)   

  

우리는 애를 참 많이 썼어..... ‘여자들이 그렇지 뭐!’라는 소리를 듣지 않으려고. 그리고 우리가 남자들 못지 않다는 걸 보여주기 위해 남자들보다 더 많이 노력해야 했어. 하지만 남자병사들은 오랫동안 우리를 깔봤고 아주 거만하게 굴었어. ‘여자들이 무슨 전쟁을 한다고.....’라는 식이었어. 그렇다고 우리가 어떻게 남자가 되겠어? 그럴 순 없는 거지. 우리 생각은 하나였어. ‘우리는 원래 남자와는 다르게 태어났다. 생물학적으로 다른 존재다.....’   (P356-357)     


엄마가 즐겨 쓰시던 속담이 생각나. 엄마는 ‘총알은 바보고 운명은 악당이다’라는 말을 자주 하셨어. 안 좋은 일이 생길 때마다 그 속담을 인용하셨지. 총알 한 개와 사람 한 명이 있다고 칠 때, 총알은 저 좋은 데로 날아가버리면 그만이지만, 사람은 운명의 손아귀에 휘둘린다면서. 이리 까불리고 저리 까불리고. 사람은 깃털과 같아. 작고도 작은 참새깃털. 결코 자신의 미래를 알 수가 없지. 그럴 능력이 주어지지 않았으니까.....    (P427)     

그리고 마침내 찾아온 승리.....

예전엔 그네들에게 삶이란 평화와 전쟁으로 나뉘는 것이었다면, 이제 그네들에게 삶은 전쟁과 승리로 나뉜다.

또다시 두 개의 다른 세상, 두 개의 다른 삶이다. 기껏 증오하는 법을 익혔는데 다시 사랑하는 법을 배워야 했다. 오래전에 잊힌 감정들을, 잊힌 말들을 다시 떠올려야 했다. 

전쟁의 사람이 전쟁의 것이 아닌 사람이 되어야 했다......     (P511)   

  

스탈린그라드전투는 정말 무시무시한 전투였어. 그렇게 끔찍하고 처참한 전투가 또 있을까. ‘심장 하나는 증오를 위해 있고 다른 하나는 사랑을 위해 있다.’ 그건 있을 수 없는 일이지. 사람은 심장이 하나밖에 없으니까. 나는 늘 어떻게 하면 내 심장을 구할 수 있을까 생각했어.

전쟁이 끝나고 나서 나는 오랫동안 하늘을 보기가 두려웠어. 하늘을 향해 고개도 들지 못했지. 갈아엎어놓은 들판을 보는 것도 무서웠어. 그 땅 위로 벌써 떼까마귀들이 유유히 돌아다녔지. 새들은 전쟁을 빨리도 잊더라고.....  

                                                          1978~2004

<스베틀라나 알렉시예비치, 전쟁은 여자의 얼굴을 하지 않았다, P553-55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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