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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노용헌 Mar 09. 2023

올가 토카르추크의 <죽은 이들의 뼈 위로 쟁기를 끌어라

영화 <스푸어spoor> 2017년

<죽은 자의 뼈 위에 쟁기를 끌어라(prowadź swój pług przez kości umarłych)>(2009)는 다소 그로테스크한 제목의 추리소설이다. 체코와 폴란드의 국경에 있는 한 작은 마을에서 정체 모를 생명체에 의해 사냥꾼들이 죽임을 당하는 연쇄 살인 사건을 다룬 작품으로 2017년 토카르추크의 절친한 벗이자 폴란드 영화계의 거장인 아그니에슈카 홀란드(Agnieszka Holland, 1948~) 감독이 원제 <흔적(Pokot)>이라는 영화로 각색하여 베를린 국제 영화제에서 은곰상을 수상하기도 했다. (국내에는 영어 제목인 ‘스푸어(Spoor)’로 알려져 있다.) 토카르추크는 이 작품으로 2019년에 또 한 번 맨부커 인터내셔설 부문 최종 후보에 올랐다. 

    

왕발이 우리에게 남긴 마지막 골칫거리인 그의 시신을 우리가 이렇게 수습해야 한다는 사실, 이것이야말로 우울한 역설이 아닐까. 존중하지도 않았고 싫어했고 관심도 없던 이웃인 우리에게 이런 민폐를 끼치다니.

내 생각에 죽음은 물질의 절멸로 이어져야 한다. 그것이야말로 몸에 가장 적합한 해결책이다. 소멸된 시체는 그들이 생성된 블랙홀로 다시 빨려 들어가야 한다. 영혼은 빛의 속도로 빛을 향해 유랑할 것이다. 만약 ‘영혼’이란 것이 존재한다면 말이다.   (P21)     

나는 조심스럽게 왕발의 발싸개를 풀고 그의 발을 들여다보았다. 경악스러웠다. 발이야말로 우리 몸의 가장 사적이고 은밀한 부위라고 늘 생각해 왔었다. 성기도, 심장이나 뇌도 아니고, 그리 대단치 않음에도 불구하고 항상 과대평가를 받아 온 장기(臟器)도 아닌, 발 말이다. 발에는 인간에 대한 모든 지식이 숨겨져 있다. 우리가 실제로 누구인지, 그리고 우리가 대지와 어떻게 연관되어 있는지에 관해 몸이 보내는 묵직한 신호가 바로 발에서 흘러나온다. 땅을 디딤으로써 우리 몸과 땅을 접촉시키는 바로 그 지점에 모든 비밀이 깃들어 있다. 우리는 물질의 원소들로 이루어진 존재이지만, 동시에 물질로부터 분리된 이질적인 존재라는 비밀. 발은 소켓에 꽂는 우리의 플러그나 마찬가지다. 그런데 지금 저 벌거벗은 발은 왕발의 기원이 여느 인간과는 다르다는 증거를 내게 보여 주었다. 그는 인간이 될 수 없는 존재였다.   (P22)     


나는 사람들을 스키어, 알레르기 환자, 운전자 등 세 그룹으로 나누는 방식이 매우 설득력 있다고 생각한다. 그것은 적절하면서도 직설적인 유형 분류 체계다. 스키어들은 쾌락주의자들이다. 그들은 경사진 비탈을 따라 활강한다. 반면 운전자들은 자신의 손에 운명을 맡기는 편을 선호한다. 덕분에 그들의 척추가 고생하긴 하지만 인생이란 본래 힘겨운 거니까. 반면 알레르기 환자들은 항상 전쟁 중이다. 나는 알레르기 환자임에 틀림없다.   (P68)     

“자신이 보는 것을 의심하는 자는

무엇을 행하든 끝내 믿지 못하리라.

태양과 달이 서로에게 의심을 품으면

둘 다 곧 하늘에서 사라질 것이다.” 

-윌리엄 블레이크의 시 <순수의 전조>에서-     (P70)     


나 또한 직접 보지 않고, 기억에 의존해서 그곳의 지도를 그릴 수 있을 것 같다. 지도에서 우리 고원은 통통한 반달 모양인데, 한쪽은 체코와 우리가 공유하는, 별로 높지도 크지도 않은 ‘은빛 산맥’에 둘러싸여 있다. 반대편 폴란드 영토에는 ‘새하얀 언덕’이 위치하고 있다. 거기에 있는 유일한 촌락이 바로 우리 마을이다. 마을과 읍내는 다른 거주지들과 마찬가지로 북동쪽에 있다. 우리 고원과 크워츠코 계곡의 나머지 지역들은 높이 차이가 별로 나지 않지만, 위에서 내려다보면 우리 동네가 살짝 더 높은 걸 알 수 있다.   (P74)    

 

점성학이란 실습을 통해 익혀야 한다고 나는 늘 믿어 왔다. 그것은 상당 부분 경험에 의존하는 견고한 지식이며 심리학과 마찬가지로 과학적인 지식이다. 주변인 중 몇 명을 면밀하게 관찰해야하며, 그들의 삶에서 구체적인 순간들을 태양계와 일치시켜야 한다. 또한 다양한 사람들과 공통으로 연관된 사건들을 확인하고 분석해야 한다. 그러다 보면 유사한 별자리 패턴이 곧 유사한 사건을 나타낸다는 것을 금세 깨달을 수 있다. 그 순간에 점성학은 시작되는 것이다. 그렇다. 질서는 분명히 존재하며 우리의 손이 닿는 곳에 있다. 별과 행성이 그것을 결정한다면 하늘은 우리 삶의 문양을 만들어 주는 일종의 형판(形板) 같은 것이다. 오랫동안 연구하다 보면, 이곳 지구에서 벌어지는 작은 세부 항목들을 통해 천체에서 일어나는 행성들의 배치를 추측할 수 있게 된다. 오후의 폭풍우, 우체부가 문틈에 밀어 넣은 편지, 욕실의 망가진 전구, 어떤 것도 그 질서를 피할 수 없다. 내게 그것은 술이나 아니면, 짐작건대 인간에게 순수한 희열을 안겨 줄 것 같은, 새로 개발된 마약과도 같다.  (P86-87)        


점성학에 관한 공부는 심지어 죽음의 질서를 발견할 때조차 즐거움을 주었다. 행성의 움직임은 항상 최면을 거는 듯하고, 아름다우며, 멈출 수도 재촉할 수도 없다. 이러한 질서가 ‘나’라는 사람, 그러니까 야니나 두셰이코의 시간과 장소를 초월한다고 생각하는 건 즐거운 일이다. 뭔가에 전적으로 의지할 수 있다는 것은 좋은 일이니까.   (P88-89)     


그 순간 진정한 분노, 감히 말하건대 신성하다고 표현할 수 있는 분노가 내 안에서 솟구쳤다. 펄펄 끓는 듯한 충격이 내 몸 어딘가에서 치밀어 올랐다. 이 에너지는 마치 나를 지상에서 들어 올리는 것처럼 기분 좋게 만들었다. 내 몸의 우주에서 작은 대폭발이 일어났고, 마치 중성자별처럼 내 안에서 불길이 훨훨 타올랐다. 나는 앞으로 뛰어가서 바보 같은 모자를 쓴 그 남자를 밀쳤다. 어찌나 세게 밀었는지, 그가 놀라며 눈 위에 자빠졌다. 콧수염이 그를 도우려고 해서 나는 있는 힘을 다해 콧수염의 어깨도 때리며 공격을 가했다. 그가 고통스러운 신음소리를 냈다. 나는 연약한 소녀가 아니다.  (P95-96)     

“디지오, 동물이 인간에게 복수를 하는 거야.”

디지오는 항상 나를 믿었지만, 이번에는 내 말을 전혀 들으려고 하지 않았다.

“이건 그렇게 괴상한 이야기가 아니야.” 내가 말을 이었다. “동물들은 강하고 지혜로워. 그들이 얼마나 영리한지 우리가 모를 뿐이지. 한때 법정에서 동물들이 재판을 받던 시절도 있었어. 일부는 유죄 판결을 받기도 했고.”   (P113)     


우주에는 아직 타락하지 않은 곳들이 엄연히 존재한다고. 그곳에서 세상은 망가지지 않았고, 에덴동산은 여전히 존재한다고. 거기에서 인류는 어리석고 엄격하기만 한 이성의 법칙이 아니라 마음과 직관의 지배를 받는다. 사람들은 헛소리나 지껄이며, 자기가 이미 아는 것을 뽐내는 데 그치지 않고, 상상력을 발휘하며 놀라운 것들을 창조한다. 국가는 더 이상 개인의 일상을 억압하는 족쇄를 채우지 않고, 사람들이 자신의 희망과 꿈을 실현하도록 돕는다. 개인은 기계처럼 돌아가는 시스템의 톱니바퀴나 특정한 역할 수행자에 머물지 않고, 자유로운 존재로 탈바꿈한다. 이런저런 생각을 하다 보니 이렇게 누워 있는 게 기쁘게 느껴지기도 했다. 

때때로 나는 아픈 사람만이 진정으로 건강하다고 생각한다.   (P124)     

저 멀리 낯익은 여우 한 마리가 보인다. 나는 그를 ‘영사(領事)’라고 불렀는데, 세련되고 예의 바르게 잘 자랐기 때문이다. 영사는 항상 똑같은 길에서 돌아다닌다. 겨울은 그가 지나다니는 경로를 화살표처럼 일직선으로 드러내 보인다. 이 늙은 숫여우는 체코에서 이곳으로 왔다 갔다 하는 게 분명하다. 아마도 국경을 초월한 어떤 용건이 이곳에 있는 모양이다. 영사가 지난번에 자기가 눈 위에 남겼던 흔적을 지우며, 가벼운 발걸음으로 내리막길을 질주하는 모습을 망원경을 통해 지켜보았다. 어딘가에 도사리고 있을 사냥꾼들은 아마도 영사가 이 길을 한 번만 다녀갔다고 생각할 것이다. 나는 마치 오랜 친구를 만난 듯 그를 쳐다보았다. 그런데 이번에는 영사가 인적이 많은 도로에서 벗어나 들판의 경계에 있는 덤불 속으로 불쑥 사라져 버렸다. 그쪽은 사냥꾼의 ‘연단’이 세워진 곳이었다. 거기서 수백 미터 더 가면 또 다른 ‘연단’이 있었다. 과거에 나는 이미 그들과 문제가 있었다. 여우가 내 시야에서 갑자기 사라지고 난 뒤, 딱히 할 일도 없었으므로 나는 뒤를 쫓아서 숲 가장자리를 걸었다.   (P146)     


먹먹한 슬픔과 비탄. 매번 동물이 죽을 때마다 느껴지는 이러한 회한과 애도의 감정은 아마 절대 끝나지 않을 것만 같았다. 하나의 애도가 끝나면, 또 다른 애도가 이어지므로 나는 끊임없이 상중(喪中)이다. 이것이 나의 상태다. 나는 피투성이가 된 눈밭에 무릎을 꿇고 앉아 차갑고 뻣뻣한 어린 멧돼지의 털을 계속 쓰다듬었다.   (P148)       

  

세상은 인간을 위해 만들어진 것이 아님을 절실히 깨닫는다. 인간의 편안함이나 쾌락을 위해서 창조된 건 더더욱 아니다.   (P168)     

오히려 곤충들이 알을 낳고 유충들이 부화하는 터전이라 할 수 있는 목재들이 함부로 베어져 도시로 유출되고 있다는 것이다. 그와 함께 유충들 또한 아무런 흔적이나 단서도 남기지 못한 채 제재소와 목공소로 실려 간다. 그들이 죽어도 주의를 기울이는 사람은 없었다. 그러니 마치 누구도 잘못이 없는 것처럼 여겨졌다. 

“여기 이 숲에는 통나무마다 머리대장의 유충이 가득하답니다. 숲이 개간되면 나무들을 불태우죠. 그들은 애벌레가 잔뜩 든 통나무와 나뭇가지를 불 속에 던지고 있는 겁니다.”

그 순간 나는 모든 억울한 죽음은 만천하에 공개되어야 한다고 생각했다. 비록 곤충의 죽음일지라도 말이다. 아무도 그런 죽음을 알아채지 못하는 것은 부끄러운 일이다. 나는 보로스가 하는 일이 마음에 들었다. 그렇다. 그는 나를 설득했고, 나는 전적으로 그의 편이 되었다.  (P222)     


“자연의 관점에서 볼 때는 그 어떤 생물도 유용하거나 무용하지 않아요. 그것은 그저 사람들이 적용하는 어리석은 구별일 뿐입니다.”   (P223)    

 

“이 지역 전설인데요, 예전에 독일인들이 살던 시절로 거슬러 올라간다더군요. ‘한밤의 궁수’가 어둠을 헤치며 나쁜 사람들을 사냥하면서 벌어지는 이야기예요. 그는 검은 황새를 타고 날아다녔는데, 항상 개들을 데리고 다녔대요. 모두가 그를 두려워해서 밤이면 문을 닫고 빗장을 걸어 잠갔대요. 그러다 하루는 이 지역 출신의 소년, 어떤 사람들은 노바루다나 크워츠코에서 왔다고 하는데요, 아무튼 그 소년이 굴뚝을 향해 크게 소리쳤어요. 자기를 위해 ‘한밤의 궁수’가 사냥을 좀 해 줬으면 좋겠다고요. 그러고 나서 며칠 뒤, 사람 몸뚱이의 4분의 1이 소년과 그 가족의 집 굴뚝으로 떨어졌대요. 그 후 같은 일이 세 번 더 일어났다고 해요. 그제야 소년과 그의 가족은 네 토막을 붙여 전신을 조립해서 시체를 땅에 묻을 수 있었습니다. 그 후 궁수는 다시는 나타나지 않았고, 그의 개들은 이끼로 변했다고 해요.”  (P279)     

시간이 작동하는 건 바로 우리 때문이니까. 이 고통스러운 세상을 행복하고 평화로운 것으로 바꿀 기회 역시 우리에게 있다. 별들은 자력으로 스스로를 가두었기에 우리를 도울 수 없다. 그들은 그저 그물을 디자인할 뿐이다. 그들이 우주의 베틀로 날실을 짜면 우리는 거기에다 우리의 씨실을 엮어야 한다. 문득 흥미로운 가설이 떠올랐다. 어쩌면 별들은 우리가 개를 보는 것과 같은 방식으로 우리를 바라볼지 모른다. 예를 들어, 우리는 때로 개에게 좋은 게 무엇인지 개보다 더 잘 안다. 그래서 그들이 길을 잃지 않도록 가죽끈으로 묶어 놓기도 하고, 쓸데없이 번식하지 않도록 불임 수술을 시키기도 하며, 아플 때는 치료받게 하려고 수의사에게 데려가기도 한다. 하지만 개는 무엇 때문에, 어떤 목적으로, 왜 이런 일이 일어나는지 이해하지 못한다. 그저 우리의 결정을 따를 뿐이다.    (P294)     


인간의 정신은 우리가 진실을 보는 것을 막기 위해 발달된 것이라고 나는 생각한다. 우리로 하여금 그 메커니즘을 직시하지 못하게 하기 위해서 말이다. 정신은 우리 주변에서 무슨 일이 벌어지고 있는지 우리가 절대 이해하지 못하게 만들어 주는 방어 체계다. 우리 뇌의 용량이 어마어마하다지만, 정신의 주된 임무는 정보를 걸러 내는 것이다. 지식의 무게를 모조리 짊어지는 것은 불가능하기 때문이다. 세상의 모든 입자는 고통으로 이루어져 있으므로.   (P310)    

 

하지만 왜 우리는 꼭 유용한 존재여야만 하는가, 대체 누군가에게, 또 무엇에 유용해야 하는가? 세상을 쓸모 있는 것과 쓸모없는 것으로 나누는 것은 과연 누구의 생각이며, 대체 무슨 권리로 그렇게 하는가? 엉겅퀴에게는 생명권이 없는가? 창고의 곡식을 훔쳐 먹는 쥐는 또 어떤가? 꿀벌과 말벌, 잡초와 장미는? 무엇이 더 낫고 무엇이 더 못한지 과연 이성적으로 판단할 수 있을까? 구멍이 많고 휘어진 거목은 사람에게 베이지 않고 수세기 동안 살아남는다. 왜냐하면 그 나무로는 어떤 것도 만들어 낼 수 없기 때문이다. 이러한 본보기는 우리와 같은 사람들에게 용기를 준다. 유용한 것으로부터 얻어 낼 수 있는 이익은 누구나 알지만, 쓸모없는 것으로부터 얻을 수 있는 이익을 아는 사람은 아무도 없다.   (P34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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