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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노용헌 Mar 05. 2023

에벌린 워의 <다시 찾은 브라이즈헤드>

영화 <브라이즈헤드 리비지티드> 2008년

[1부 나도 아르카디아에 있었네] 

“나는 전에 이곳에 있었어.” 내가 말했다. 나는 전에 그곳에 있었다. 첫 방문은 이십 년도 더 전인 6월의 구름 한 점 없는 날, 메도스위트가 배수로에 크림색으로 흐드러지고 여름의 온갖 향기로 공기가 묵직할 때 서배스천과 함께였다. 그때는 유난히도 해가 쨍한 날이었으며, 나는 수차례, 다양한 심기로 그곳에 있었음에도 다시 찾은 지금 내 마음이 회상한 것은 그 첫 방문이었다. 

그날도 나는 목적지를 모르는 채 왔다. 그때는 에이츠 위크였다. 옥스퍼드는(급속도로 물살이 밀려 들어와 이제 침몰하고 말소되어 라이오네스와 같이 돌이킬 수 없는), 옥스퍼드는 그 나날들에는 아직 애쿼틴트 판화의 도시였다. 옥스퍼드의 널찍하고 조용한 길거리에서 사람들은 뉴먼 추기경 시절의 모습처럼 걷고 말했다. (P39-40)     

“아버지, 저 당장 떠나야 해요.”

“그러니?”

“제 절친한 친구가, 걔가 끔찍한 사고를 당했어요. 당장 걔한테 가 봐야 해요. 헤이터가 지금 제 짐을 싸고 있어요. 반 시간 뒤에 기차가 있고요.”

내가 아버지에게 그 전보를 보여 줬는데, 내용인즉 그저 이랬다. “심히 다침 즉시 올 것 서배스천”

“이런.” 아버지가 말했다. “네가 속상한 일을 당하다니 안됐구나. 그런데 이 전갈을 읽자니 네가 생각하는 모양인 만큼 심각한 사고였으리라 말하지는 못하겠구나. 그랬다면 환자 본인이 서명할 리는 없을 테니 말이다. 물론 그럼에도 그 친구가 의식은 멀쩡하지만 눈이 멀었다든가 척추가 부러져서 반신마비가 되었다거나 할 수도 있겠지. 정확히 왜 네 존재가 그렇게 필요한 거냐? 너는 의학 지식이 전혀 없잖느냐. 성직에 있는 것도 아니고. 유산이라도 바라는 거냐?”

“말씀드렸잖아요, 절친한 친구라고.”   (P128)     

청춘의 나른함이여, 그 얼마나 고유한 정수(精髓)인가! 그 얼마나 황급하게,l 얼마나 회복 불가하게 사라지는가! 활력, 후한 애정, 환상, 절망, 그 모든 청춘의 인습적인 특성들은, 나른함만 빼고 전부는, 삶을 살아가며 우리에게 찾아왔다가 떠나간다. 이런 것들은 삶 자체의 일부분이지만 나른함은, 아직 지치지 않은 힘줄의 이완이자 외따로이 이기적인 마음은, 그것은 오직 청춘에게만 속하고 청춘과 함께 스러진다. 어쩌면 연옥의 아방궁에서 영웅들은 지복 직관(至福直觀)의 상실에 대하여 그러한 보상을 얼마간 누리는지도 모른다. 어쩌면 지복 직관 자체가 이 비천한 경험과 먼 친인척 관계일는지도 모른다. 나는 좌우간 브라이즈헤드에서 보낸 그 나른한 나날들에 거의 낙원에 있다고 믿었다.   (P137)      

   

“내가 영국인과 독일인의 그런 로맨틱한 우정에 관해 알지. 라틴계 사람들의 경우와는 달라. 난 그런 관계가 정말 좋다고 생각해. 너무 오래가지만 않으면.”

카라가 너무도 태연하고 무미건조하게 말한 터라 나는 그 말을 불쾌하게 받을 수 없었지만 그렇다고 대답할 말을 찾지도 못했다. 카라는 대답을 기대하지 않는다는 듯 다만 계속 손을 놀렸고, 이따금 곁에 놓인 반짇고리 속의 실크 천과 맞춰 보느라 바느질을 멈췄다.

“그런 건 그 의미를 채 알기도 전에 아이들에게 찾아오는 유의 사랑이야. 영국에서는 거의 성인이 다 됐을 때 찾아오지. 나는 그게 좋은 것 같아. 여자보다는 다른 남자한테 그런 사랑을 품는 게 낫잖아. 알겠지만 알렉스는 여자한테, 자기 아내에게 그런 사랑을 품었으니, 그 사람이 나를 사랑하는 것 같아?”

“참. 아주머니, 제일 난처한 질문들만 하시네요. 제가 어떻게 알겠습니까? 그러려니 하는 거지.....”

“사랑하지 않아. 아주 요만큼도. 그러면 그 사람이 왜 나랑 지내느냐고? 왜냐하면 말이야, 내가 레이디 마치멘으로부터 보호해 주니까. 그이는 그 여자를 증오해. 아니, 그이가 그녀를 얼마나 증오하는지 찰스는 감도 못 잡을 거야. 찰스는 그이가 너무도 잔잔한 영국 신사라고 생각하겠지. 향락에 약간 물렸고, 열정도 다 죽었고, 그저 편안하게 걱정거리가 없기를 바라며, 태양을 따르고, 어떤 남자도 혼자서는 할 수 없는 한 가지를 해결하기 위해 나를 데리고 있는 주인 나리 정도라고. 아니, 그 사람은 증오의 활화산이야. 그이는 그 여자와 같은 공기도 마실 수 없어. 그 여자 집이라는 이유만으로 영국에는 발도 들이지 않을 거고, 서배스천이 그녀의 아들이라 그 애랑 있어도 좀처럼 행복할 수가 없어. 근데 그런 서배스천도 그 여자를 증오하지.”   (P175-176)        

[2부 등져 버린 브라이즈헤드] 

그 경계의 빛에 얼어 버린 나는 그에 관해서는 아무것도 묻지 않고, 대신에 내 가을과 겨울에 관해서만 말해 주었다. 생루이섬의 내 방과 미술 학교, 또 나이 많은 선생들이 얼마나 좋았고 학생들은 얼마나 못됐는가를 말해 주었다.

“걔네는 루브르 근처에는 절대 가지도 않아.” 내가 말했다.

“아니, 간대 봤자 다만 걔들이 읽는 어이없는 비평지 하나에서 그달의 미학 이론과 들어맞는 거장을 갑자기 ‘발견’했기 때문인 거야. 걔네 중 절반은 피카비아 같이 대중적으로 확 떠 보려고 혈안이 돼 있고, 나머지 절반은 말 그대로 <보그>에 광고 삽화나 그리거나 밤무대를 장식하면서 먹고살 마음밖에 없어. 이 와중에 선생들은 아직도 학생들한테 들라크루아 같이 그리도록 가르친다니까.”

“찰스.” 코딜리아가 말했다. “현대 미술은 다 헛소리지?”

“개소리지.”

“아, 정말 다행이다. 내가 우리 학교 수녀님 한 분이랑 말싸움을 했는데 그 수녀님이 우리가 이해하지 못하는 건 따지고 비난하면 안 된다고 했거든. 이제 그 수녀님한테 진짜 화가가 직접 인정해 줬다고 하면서 콧대 좀 꺾어야겠다.”   (P257)     

“다시는 돌아가지 않겠다.” 내가 속으로 말했다.

문이, 옥스퍼드에서 추구하고 찾아냈던 담장의 낮은 문이 닫혔다. 이제는 열어 봐도 마법의 정원은 발견하지 못하리라.

나는 해저의 햇빛이 들지 않는 산호 궁전들과 너울거리는 해초 숲에서의 오랜 포로 생활을 마감하고 해수면으로, 평범한 한낮의 햇살과 신선한 바다 공기로 올라왔다.

나는 등지고 떠났다. 무엇을? 청춘을? 청년기를? 로맨스를? 이것들의 마술 도구, ‘젊은 마술사 세트’를, 제자리에 놓인 흑단 마술 지팡이 옆으로 현혹하는 당구공들, 두 겹으로 접히는 페니 동전, 잡아당겨 속이 빈 양초로 둔갑시킬 수 있는 깃털 꽃송이들이 담긴 그 조촐한 상자를.

“나는 환상을 등지고 떠났다.” 내가 속으로 말했다. “이제부터는 삼차원의 세계에서 살아가리라, 내 오감에 의지해.”

그 이래로 나는 그런 세계는 없다는 것을 알게 되었지만, 그때 차가 방향을 틀어 저택이 보이지 않게 되었을 무렵에는 그런 세계가 찾을 필요도 없이 저 길 끝에 다다르면 온통 주변에 펼쳐져 있으리라 생각했다.

그리하여 나는 파리로, 그곳에서 사귄 친구들과 형성한 습관으로 돌아갔다. 브라이즈헤드 소식은 더 이상 듣지 못하리라 생각했지만 인생에 그렇게 칼 같은 이별은 별로 없었다.  (P283)     

“아직도 날 개종하려고 하는 거야, 코딜리아?” 

“아, 아니야. 그것도 다 끝났어. 아빠가 가톨릭교도가 되었을 때 뭐라고 말했는지 알아? 엄마가 언젠가 말해 줬거든. 아빠가 엄마한테 이렇게 말했대. ‘당신은 내 가족을 선대의 신앙으로 회귀시켰소.’ 하여튼 젠체해. 가톨릭교는 사람들을 각기 다른 방향으로 데려간다니까. 아무튼 가족들이 썩 집에 붙어 있지는 않았지? 아빠도 떠났고 서배스천도 떠났고 줄리아도 떠났으니. 하지만 하느님께서는 가족들이 오래도록 떠나 있도록 두시진 않을 거야. 서배스천이 처음으로 술에 취했던 날 저녁에 엄마가 읽어 주신 이야기를 오빠가 기억할는지 모르겠네. 그 안 좋았던 저녁에 말이야. ‘브라운 신부님’이 이런 식의 말을 했어. ‘내가 그에게(도둑 말이야) 걸어 둔 눈에 띄지 않는 갈고리와 눈에 보이지 않는 끈은 참 길어서 그가 땅끝까지 헤매도록 놔두면서도 실만 잡아당기면 언제든 데려올 수 있다네.’”

우리는 그녀의 어머니 얘기를 거의 입에 올리지 않았다. 우리가 이야기를 나누는 내내 코딜리아는 게걸스레 먹었다. 한 번은 코딜리아가 말했다.   (P364-365)        

[3부 실만 잡아당기면 언제든] 

처음에 줄리아는 아이 하나를 원했으나 일 년 뒤에 그게 가능하려면 수술이 필요하다는 사실을 알았다. 그 무렵 렉스와 줄리아는 사랑이 바닥난 터였으나 그럼에도 렉스는 기어코 자기 아이를 가지고자 했고, 끝내 줄리아가 승낙하여 낳자 사산이었다. 

“렉스는 한 번도 내게 고의로 박정하게 대한 적이 없었어.” 줄리아가 말했다. “단지 그 사람은 진짜 인간이 아닌 것뿐이야. 그 사람은 단지 한 인간의 고도로 발달된 몇 가지 기능일뿐이고, 나머지 부분은 그냥 존재하지 않아. 우리가 신혼여행에서 런던으로 돌아온 지 두 달 만에 그가 아직도 브랜디 챔피언과 연락하는 사이였다는 걸 알고 내가 왜 그렇게 상처받았는지 그 사람은 이해하지 못하더라.”

“나는 실리아가 외도한다는 걸 알았을 때 반가웠어.” 내가 말했다. “이젠 아내를 싫어해도 괜찮다는 느낌이 들어서.”

“걔가 그랬어? 오빠는 걔를 싫어하고? 반갑네, 나도 걔 별로 안 좋아하는데. 근데 걔랑 왜 결혼했어?”

“육체적 끌림. 야망. 그 사람이 화가에게 이상적인 아내라는 데 모두가 동의하잖아. 서배스천을 그리는 외로움.”

“오빠를 사랑했지?”

“그럼 사랑했지. 서배스천은 전조였어.”

줄리아는 알아들었다.   (P419)     

“그렇게나 별로야?”

앤서니가 목소리를 낮춰 후벼 파듯 속삭였다. “자기, 우리 이 선량하고 단순한 사람들 앞에서 너의 자그마한 속임수를 폭로하지는 말자.”(그가 마지막 남은 군중을 작당모의하는 듯한 눈빛으로 흘끗거렸다) “우리 저 사람들의 순진한 기쁨을 망치지는 말자고. 우리 둘은, 너랑 나는 이게 다 끄-끄-끔직한 조-조-졸작이라는 걸 알잖아. 우리 감식가들의 비위를 상하게 하기 전에 나가자. 내가 여기서 꽤 가까운 퇴폐적인 작은 바를 알거든. 우리 거기 가서 너의 다른 노-노-노획품들 얘기를 해보자고.”

나를 소생시키려면 과거로부터의 이 목소리가 필요했다.   (P439-440)     

‘죄악 속에 산다’라는 건 내가 미국에 갔을 때 했던 것처럼 그저 잘못하는 게 아니야. 잘못하고, 잘못이라는 걸 알고, 그만두고, 잊어버리는 거. 그들 말은 그런 게 아니야. 브라이디의 1페니어치는 그런 게 아니야. 브라이디는 활자 그대로의 뜻을 말하는 거야.

죄악 속에 산다라는 건, 언제나 똑같이 죄악과 함께, 조심스레 보살펴지고 세상으로부터 보호되는 모자란 아이처럼 산다는 것. ‘가엾은 줄리아’ 사람들은 말하지. ‘쟤는 나갈 수 없어. 자기 죄악을 감당해야 하거든. 죄악이 계속 살아 있다니 안됐어’라고들 하지. ‘하지만 죄악이 너무 강력해. 저런 아이들은 항상 저렇거든. 줄리아는 자기의 작고 미친 죄악에 너무 물러.’  (P468)     

“서배스천은 전조였어.”

“그거 폭풍우 속에서 했던 말이지. 그 후로 생각해 봤어. 어쩌면 나도 전조일 뿐은 아닌가 하고.”

‘어쩌면’ 그녀의 말들이 아직 한 줄기의 담배 연기처럼 우리 사이의 허공에 걸려 있을 때 나는 이런 생각이 들었다. 연기처럼 자취도 없이 흩어져 사라질 생각이. ‘어쩌면 우리네 사랑은 모두가 다만 전조와 상징일지 모른다. 다른 이들이 우리보다 앞서 밟아 간 지친 길을 죽 따라 문설주와 포석 위에 휘갈겨 쓰인 나그네의 언어일지 모른다. 어쩌면 너와 나는 예표(豫表)이며 이따금 둘 사이에 떨어지는 이 슬픔은, 우리가 탐구하다가 서로가 상대의 안으로 너머로 비집고 나아갈 때, 항상 우리보다 한두 걸음 앞서 길모퉁이를 도는 그림자가 간혹 가다 언뜻 보일 때 느끼는 낙담에서 솟아나는 것일지 모른다.’   (P494)   

  

‘건축가들은 자신들의 작품이 전락하여 어떻게 쓰일지 알지 못했다. 그들은 옛 성의 석재들로 새 집을 지었다. 해해연년, 대대손손 그들은 집을 보강하고 증축했다. 해해연년 대정원에서 어마어마한 양의 목재가 무르익어 갔다. 그러다가 급작스레 서리가 닥치고 ‘후퍼’의 시대가 도래했다. 이에 저택은 황량해지고 작품은 전부 영락했다. 아, 그렇듯 붐비던 도성이 이렇게 쓸쓸해지다니. 헛되고 헛되다. 세상만사 헛되다.’    (P564-565)   

  

“미국인은 여섯 명도 이해하지 못할 것 같습니다.”

애벌린 워는 <다시 찾은 브라이즈헤드>를 집필하면서 이 작품이 영국식 저택과 학창 시절, 종교를 다루는 소설이기에 미국에서 대중적인 성공을 거두지 못하리라 예상하면서 출판 에이전트에게 위와 같이 편지를 보냈다. 그러나 바로 이 작품이 미국에서 막대한 성공을 거둠으로써 애벌린 워는 대중적인 명성을 떨치게 되었다. 이 작품은 1981년에 영국의 그라나다 텔레비전에서 11부작 드라마(제레미 아이언스, 앤서니 앤드루스 출연)로도 방영되었으며, 최근까지도 인기가 식지 않아 2008년에 영화(매슈 구드, 벤 휘쇼 출연)로도 제작되었다. 드라마와 영화로 제작되면서 더욱 널리 알려진 <다시 찾은 브라이즈헤드>는 1945년 6월에 독자들에게 처음 선보여졌다가 1959년 작가가 손을 봐 개정판이 나왔다.   (P567-56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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