영화 빔 벤더스 감독 <페널티 킥 앞에 선 골키퍼의 불안> 1972년
이전에 꽤 유명한 골키퍼였던 요제프 블로흐는 건축 공사장에서 조립공으로 일하고 있었는데, 아침에 일하러 가서는 자신이 해고되었음을 알게 되었다. 일꾼들이 모여 있는 대기실의 문을 열고 들어갔을 때, 마침 오전 새참을 먹고 있던 현장감독이 그를 힐끗 올려다보는 순간 그는 그것을 해고 표시로 이해하고 공사장을 떠났다. (P9)
그녀는 자기가 이야기한 모든 것에 그가 끼어드는 것을 거부하면서도 그의 이야기에는 거침없이 끼어들었는데, 그는 그것을 불쾌하게 여겼다.
그사이 몇 번 그렇고 그런 대화가 오갔다. 그가 질문하면 그녀가 대답했고, 그녀가 질문하면 그가 당연한 대답을 했다. “저 비행기가 제트기인가요?” --- “아니요, 프로펠러 비행기요.” --- “당신 어디 사세요?” --- “2구에요.” 자칫하다 그곳에서 싸웠던 이야기도 할 뻔했다.
그러나 모든 것이 점점 더 그를 불쾌하게 만들었다. 그가 대답하려고 하면 그녀는 그가 무슨 말을 하려고 했는지 이미 다 알고 있다는 듯 지레짐작했기 때문에 그는 입을 닫아 버렸다. 그녀는 안정을 찾지 못하고 방안을 이리저리 서성거렸다. 할 일을 찾기도 했고 가끔은 어색하게 웃기도 했다. 그녀는 일어서서 침대로 가 누웠다. 그는 그 여자 곁에 앉았다. “오늘 일하러 가지 않으세요?” 하고 그녀가 물었다.
갑자기 그는 그녀의 목을 졸랐다. 너무 세게 졸랐기 때문에 장난이라고는 생각할 수 없었다. 바깥 복도에서 사람 목소리가 들렸다. 그는 공포심으로 숨이 막힐 것 같았다. 그는 그녀의 코에서 무엇인가가 흐르는 것을 느꼈다. 그녀가 신음 소리를 냈다. 마침내 그는 어디선가 딱 하고 부딪히는 소리를 들었다. 울퉁불퉁한 들길에서 갑자기 돌멩이 하나가 굴러떨어져 아래에 있는 자동차를 때리는 소리 같았다. 그녀의 침이 리놀륨 바닥으로 흘러 떨어졌다.
불안감이 너무 커서 그는 곧 피곤해졌다. 바닥에 누웠지만 잠을 잘 수도, 머리를 쳐들 수도 없었다. 누군가가 바깥에서 얇은 천으로 문손잡이를 치는 소리가 들렸다. 그는 귀를 기울였다. 아무 소리도 들을 수 없었다. 그래서 그는 좀 잤다. (P23-24)
그는 수영장으로 나가는 울타리 문을 통과할 수 없었다. 문은 닫혀 있었다. “수영장이 폐쇄된 모양이군.”하고 블로흐는 말했다.
친절하게 말하고 있던 순경들은 무언가 전혀 다르게 이야기하는 것같이 여겨졌다. 그들은 ‘가시오(Geh weg)'나 ‘명심하시오(beherzigen)' 같은 단어들을 의도적으로 틀리게 ‘인도(人道, Gehweg)'나 ‘베허 씨네 염소(Becher-Ziegen)'로 표현했고, 마찬가지로 ‘정당함을 증명하다(rechtfertigen)'란 단어를 ‘제때에 준비된(zur rechten Zeit fertig)'으로, ‘신분을 증명하다(ausweisen)'란 단어를 ‘하얗게 칠하다(ausweiben)'로 의도적으로 잘못 말했던 것이다. 농부 베허 씨의 염소들이 아직 개장이 안된 수영장으로 밀고 들어가 모든 것을, 심지어 수영장 커피숍의 벽마저 더럽혀 놓아서 공간을 다시 하얗게 칠하는 바람에 수영장이 제때에 완성되지 못했다는 이야기를 순경들이 그에게 하는 데는 도대체 무슨 뜻이 있는 걸까? 그런 까닭에 문을 닫아 놓았으니 인도에 서 있으란 말인가? 순경들이 떠나면서 일상적인 인사말도 하지 않은 것은 그를 조롱하려고 그랬거나 아니면 무엇인가를 말하고자 하는 암시 같기도 했다. (P41-42)
나뭇잎들은 물 위를 아주 느리게 떠 다녀서 눈이 화끈거릴 때까지 눈썹을 깜박거리지 않고 쳐다보았다. 눈썹을 깜박거리면 눈썹의 움직임을 잎들의 움직임과 착각하지 않을까 하는 불안감에 꼼짝 않고 쳐다보았던 것이다. 진흙이 풀어진 물에서는 속에 잠긴 나뭇가지의 모습이 전혀 보이지 않았다.
움직이지 않고 물만 똑바로 보고 있던 블로흐의 시야 밖에서 그의 눈길을 끌기 시작한 무엇인가가 있었다. 그는 눈에 무엇이 들어간 것처럼 깜박거리면서 살펴보았으나 아직은 잘 보이지 않았다. 그것은 점차 시야로 들어왔다. 그는 그것이 무엇인지 한참을 알아채지 못한 채 바라보았다. 그가 생각하기로는 흐릿한 점 같았다. 어느 희극 영화에서 누군가 상자를 열어 놓은 채 그 옆에서 계속 수다를 떨다가 갑자기 깜짝 놀라며 수다를 멈추고 상자로 덤벼드는 장면처럼, 다음 순간 블로흐는 자기 발밑을 흐르는 물속에서 어린아이의 시체를 보았다. (P67)
그의 모습은 단정치 못하고 거칠고 조화롭지 않아서 타인의 감정을 상하게 할 뿐이었다. ‘매장해야지!’ 하고 블로흐는 생각했다. ‘포기하고 멀리해야지!’ 그는 스스로를 불쾌한 존재로 생각했다. 그러나 자신의 의식이 너무 강렬해서 그것을 온몸의 촉각으로 감지한다는 것을 깨달았다. 그는 의식이나 사고를 손으로 붙잡을 수 있는, 공격적이고 구체적인 것으로 생각했다. 그는 방어력 없이 저항하지 않고 누워 있었다. 욕지기가 나면서 속이 뒤집히는 기분이었다. 낯선 것은 아니었지만 좀 혐오스러웠다. 그것은 충격이었다. 그 충격으로 그는 이상해져 버렸고 일상에서 벗어나게 되었다. 그는 실제로 그렇게 아무런 가능성도 없이 그곳에 누워 있었다. 비교할 것도 없었다. 자기 자신에 관한 의식만은 너무 강렬해서 불안스러웠다. (P75-76)
블로흐는 객실에 앉아 바깥 거리에서 무슨 일이 일어나는지 살펴보고 있었는데, 잠시 후 갑자기 문장 하나가 떠올랐다. ‘그는 너무 오래 무직 상태로 있었다.’라는 문장이었다. 블로흐는 그 문장이 끝마무리 문장처럼 생각되었기 때문에 어쩌다 그런 방향으로 오게 되었는지 곰곰이 생각해 보았다. 이전에는 무엇이었지? 그렇지! 지금 떠오른 문장처럼 ‘그 슛에 소스라치게 놀란 그는 공이 순식간에 다리 사이로 지나가는 걸 붙잡지 못했다.’라는 이전 문장을 생각했다. 그리고 이 문장 전에는 골문 뒤에서 그를 혼란스럽게 만들었던 사진작가들이 떠올랐다. (P77)
그는 우편배달부와 우체국 여직원이 사정을 잘 알고 있는 것으로 생각되었다. 그는 ‘우체국 여직원과 우편배달부’로 순서를 바꿔 보기도 했다. 화창한 낮에 혐오스러운 언어유희병이 그를 엄습했다. ‘화창한 낮에?’ 그는 어쩐지 이 구절에 사로잡힌 것 같았다. 그 표현은 싫지만 익살스럽게 여겨졌다. 이 문장에 다른 단어들이 쓰였다면, 덜 싫었을까? ‘병’이란 단어를 혼자 중얼거리면서 몇 번 반복해 보면 웃음을 띠게 된다. ‘나는 병에 걸렸다.’ 우습다. ‘나는 아프다.’ 똑같이 우습다. ‘우체국 여직원과 우편배달부’, ‘우편배달부와 우체국 여직원’, ‘우체국 여직원과 우편배달부’. 더할 나위 없는 위트다. (P87-88)
“마주 서 있을 때는.” 하고 세관원은 계속했다. “상대방의 눈을 보는 것이 중요합니다. 그가 달아나기 전에 두 눈이 보는 쪽은 그가 가고자 하는 방향을 암시합니다. 그와 동시에 그의 두 발을 주시하고 있어야 합니다. 어느 쪽 발로 서 있는가? 서 있는 발의 방향으로 뛰어가기 마련이죠. 그러나 속이고 다른 방향으로 달려가려면, 달리기 전에 서 있던 발의 방향을 바꾸어야 하고, 그러려면 시간이 걸리기 때문에 그사이 그를 붙잡을 수 있는 거죠.” 블로흐는 물 흐르는 소리가 들리는 개울로 시선을 돌렸지만, 들여다보지는 않았다. 덤불 속에서 커다란 새 한 마리가 날아갔다. 닭장 속에서 닭들이 발로 바닥을 긁어 대고, 부리로 판자벽을 쪼아 대는 소리가 들렸다. “사실 무슨 규칙 같은 것은 없어요.” 하고 세관원이 말했다. “그가 상대의 반응을 살피듯이, 상대도 그를 똑같이 관찰하기 때문에 늘 불리한 입장입니다. 사람이란 항상 반응하기 마련입니다. 만약 그가 달아나기 시작한다면, 이미 첫발을 뗀 후 곧 방향을 바꿀 것입니다. 그러니까 잘못 서 있었던 셈이 되는 거죠.” (P108-109)
그는 __ 때문에 계속 걸어갔다.
계속 걸어간 이유를 말해야 할까, __하기 위해서라고?
만약 __을 한다면 무슨 목적에서일까? __을 하면서 ‘만약’
이라고 하는 이유를 말해야 할까? __을 할 때까지 그렇게 계
속 걸어갔나? 그는 __을 할 만큼 그렇게 멀리 갔는가?
왜 그는 쫓기는 것처럼 이곳을 걸어가고 있을까? 왜 그가
여기에 서 있는지 이유를 설명해야 할까? 그가 수영장을 지나
갈 때마다 어떤 목적을 가졌단 말인가?
이러한 ‘그래서’, ‘왜냐하면’, ‘하기 위해’ 같은 단어들은 마치 명령하는 말 같아서 사용하지 않고 피하기로 결심했다. (P116-117)
그는 판매업자에게 경기를 관람 할 때, 공격하는 시점에서 처음부터 공격수는 쳐다보지 않고 그가 향하는 골문에 선 골기퍼를 주목해 본 적이 있는지 물어보았다.
“공격수나 공으로부터 시선을 돌려 골키퍼만 바라보는 일은 대단히 어려운 일이죠.” 하고 블로흐는 말했다. “공에서 시선을 돌리는 것은 정말 부자연스러운 일이니까요.” 그는 사람들이 공 대신, 양손을 허벅지에 대고 앞으로 달려 나갔다가 뒤로 뛰어 들어 왔다가 왼쪽으로 오른쪽으로 몸을 움직이면서 자기편 수비수들에게 고함을 지르는 골키퍼를 쳐다보아야 한다고 했다. “그러나 통상적으로 사람들은 골문을 향해 슈팅이 되었을 때에야 비로소 골키퍼를 보게 되죠.”
그들은 사이드라인을 따라 함께 걸어갔다. 블로흐는 선심이 그들 옆으로 뛰어가며 헐떡거리는 소리를 들었다. “골키퍼가 공도 없이, 그러나 공을 기다리면서 이리저리 뛰는 모습을 본다는 것은 우스운 일이지요.” 하고 블로흐가 말했다.
판매업자는 더 이상 골키퍼를 바라볼 수가 없다고 대답했다. 그는 은연중에 공격수들을 바라보고 있었다. 골키퍼를 쳐다보려면 사팔눈이 되어야 할 것 같았다. 말하자면, 누군가가 문을 향해 가고 있을 때, 가고 있는 사람을 보는 게 아니라 문 손잡이를 보는 격이기 때문이다. 골치가 아파서 더 이상 숨을 쉴 수가 없었다.
“우리 모두가 그렇게 습관이 되어 있지만, 그러나 우스운 일이지요.” 하고 블로흐는 말했다.
페널티킥이 선언되었다. 관중들은 골문 뒤로 달려갔다.
“골키퍼는 저쪽 선수가 어느 쪽으로 찰 것인지 숙고하지요.” 하고 블로흐가 말했다. “그가 키커를 잘 안다면 어느 방향을 택할 것인지 짐작할 수 있죠. 그러나 페널티킥을 차는 선수도 골키퍼의 생각을 계산하지 않을 수 없습니다. 그래서 골키퍼는, 오늘은 다른 방향으로 공이 오리라고 다시 생각합니다. 그러나 키커도 골키퍼와 똑같이 생각을 해서 원래 방향대로 차야겠다고 마음을 바꿔 먹겠죠? 이어 계속해서, 또 계속해서.....”
블로흐는 모든 선수들이 차차 페널티에이리어 밖으로 나가는 것을 보았다. 페널티킥을 찰 선수는 슛 지점에 공을 갖다 놓았다. 그런 다음 그도 뒷걸음질로 페널티에어리어 밖으로 나갔다.
“공을 차기 위해 키커가 달려 나오면, 골키퍼는 무의식적으로 슈팅도 되기 전에 이미 키커가 공을 찰 방향으로 몸을 움직이게 됩니다. 그러면 키커는 침착하게 다른 방향으로 공을 차게 됩니다.” 하고 블로흐가 말했다. “골키퍼에게는 한 줄기 지푸라기로 문을 막으려는 것과 똑같아요.”
키커가 맹렬히 달려왔다. 환한 노란색 스웨터를 입은 골키퍼는 꼼짝도 않고 서 있었다. 페널티 키커는 그의 두 손을 향해 공을 찼다. (P119-12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