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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노용헌 Apr 06. 2023

카렌 블릭센의 <아웃 오브 아프리카>

영화 <아웃 오브 아프리카> 1985년

카렌 블릭센(Karen Blixen)은 1885년 덴마크 룽스테드론의 유니테리언파 부르주아 가정에서 태어나 코페나겐, 파리, 로마에서 미술을 공부했다. 1913년 스웨덴인 친척인 브로르본 블렉센피네케 남자과 약혼한 후 함께 케냐로 이주하여 이듬해 결혼해 커피 농장을 차렸다. 그러나 두 사람은 1921년 별거에 들어가 1925년에 이혼한다. 별거 후 케냐에서 알게 된 데니스 핀치해턴과 연인 관계로 발전한다. 1931년 데니스 핀치해턴이 비행기 사고로 사망하고 커피농장까지 파산에 이르자 농장을 처분하고 덴마크로 돌아가 평생을 그곳에서 보낸다. 그녀가 1937년 발표한 <아웃 오브 아프리카>는 작가로서의 명성을 굳히게 해준 작품이다. 17년간의 아프리카 생활에서 겪은 모험과 깨달음을 시적이면서도 담담하고 절제된 필치로 담아내어 뜨거운 관심을 불러일으켰으며, 1985년 시드니 폴락 감독에 의해 로버트 레드포드와 메릴 스트립이 열연했고, 이듬해 아카데미 시상식에서 작품상, 감독상, 각본상을 포함한 7개 부문을 석권했다. 

      

야생과 불규칙성의 땅에서 농작물이 질서 정연하게 심긴 경작지는 너무도 보기가 좋다. 훗날 아프리카의 하늘을 비행하면서 상공에서 내려다본 농장의 모습에 익숙해졌을 때, 나는 회녹색 땅 사이로 너무도 선명한 녹색으로 빛나는 내 커피 플랜테이션에 감탄하며 인간의 정신이 얼마나 기하학적 형태들을 갈망하는지 깨달았다. 나이로비를 둘러싼 모든 지역, 그중에서도 특히 북쪽 지역이 비슷한 형태의 경작지로 이루어져 있는데 그곳 농장주들은 늘 커피를 심고 가꾸고 수확하는 일에 대해 생각하고 이야기하며 밤에 잠자리에 누워서도 커피공장을 개선할 궁리만 한다.   (P16)     

커피 재배는 길고 지루한 일이다. 모든 게 처음 상상했던 대로 이루어지지도 않는다. 젊고 희망에 찬 농장주는 세찬 비를 맞으며 반짝이는 어린 커피나무 묘목이 든 상자들을 묘상으로부터 실어 온다. 농장일꾼이 모두 동원되고 농장주는 일꾼들이 젖은 땅에 줄 맞춰 묘목을 심는 광경을 지켜본다. 그런 다음 덤불에서 꺾은 가지들로 태양을 가려 줄 빽빽한 그늘을 만든다. 그늘은 어린것들의 특권이기 때문이다. 4,5년은 되어야 나무들은 열매를 맺으며 그사이에 가뭄이 들거나 병마가 닥치거나 굵은 잡초가 무성하게 자란다. 특히 블랙잭이란 잡초의 길쭉하고 거친 씨껍질은 옷과 스타킹에 마구 달라붙는다. 어떤 나무들은 잘못 심겨서 원뿌리가 구부러져 꽃이 피자마자 바로 죽는다. 에이커당 6백여 그루의 나무를 심는데 나는 6백 에이커의 땅에 커피 농사를 지었고 내 황소들이 수고에 대한 보상을 기다리며 경작기를 끌고 밭고랑을 따라 수천 킬로미터를 끈기 있게 오갔다. 

커피농장이 눈부시게 아름다운 때가 있다. 우기가 시작되면서 커피나무에 꽃이 피면 6백 에이커가 넘는 땅 위에 안개와 부슬부슬 내리는 빗속에서 마치 분필 가루가 자욱하게 피어오른 듯한 화사한 광경이 연출된다. 커피 꽃은 블랙손 꽃처럼 쌉싸래한 향이 난다. 잘 익은 커피 열매가 밭을 붉게 물들이면 여자들과 <토토>라고 불리는 아이들까지 동원되어 남자들과 함께 커피 열매를 땄고 우마차와 수레가 열매를 강 근처의 공장으로 실어 날랐다. 우리의 커피공장은 제대로 시설을 갖춘 적이 없었지만, 우리가 직접 설계해서 지은 공장이었기에 소중하고 자랑스러웠다.   (P17)     

나는 야생 속에서 갑작스러운 움직임을 자제하는 법을 배웠다. 그곳의 생명체들은 겁이 많고 경계심이 강하며 전혀 예기치 못한 때에 도망치는 재주가 있다. 집에서 키우는 동물은 야생 동물처럼 완전한 정지 상태를 유지할 수 없다. 문명인은 그런 정지 상태를 유지하는 능력을 잃었으며 야생 동물로부터 그것을 배워야만 그들에게 받아들여질 수 있다. 갑작스럽지 않은 부드러운 움직임은 사냥꾼이, 특히 카메라를 든 사냥꾼이 우선적으로 익혀야 할 기술이다. 사냥꾼은 독단적으로 움직여서는 안 되며 주위의 바람과 색깔, 냄새와 하나가 되어 전체의 템포에 따라야 한다. 이따금 같은 동작이 반복적으로 요구되기도 하지만 그 템포에서 벗어나서는 안 된다.   (P24)     

이른 아침에 샴바를 지나다 보면 이따금 자고새 한 마리가 날개가 부러진 것처럼 내 말 앞으로 달려왔는데 개들에게 잡힐까 봐 잔뜩 겁에 질린 모습이었다. 그러나 사실 그 새는 날개가 부러진 것도 개들을 무서워하는 것도 아니었으며 마음만 먹으면 얼마든지 개들을 따돌리고 날아오를 수 있었다. 근처에 있는 새끼들이 발각되지 않도록 시선을 끌기 위해 그런 연극을 하는 것이었다. 원주민도 자고새처럼 우리가 짐작조차 할 수 없는 모종의 심오한 두려움을 감추기 위해 우리를 두려워하는 척 시늉하는 것인지도 모른다. 아니면 결국 그들이 우리 앞에서 보이는 행동은 이상한 장난에 지나지 않으며 그 수줍은 사람들은 우리를 전혀 두려워하지 않는지도 모른다. 원주민들은 백인들에 비해 삶의 위기감이 훨씬 적었다. 나는 사파리 사냥 중에, 아니면 농장에서 극도로 긴장된 순간에 원주민들의 눈빛을 보고 그들과의 거리감을 느끼곤 했는데, 그들은 내가 두려움에 떠는 모습이 의아하기만 한 듯했다. 깊은 물속에 사는 물고기들이 익사에 대한 두려움을 이해하지 못하는 것처럼 그들도 삶 그 자체에, 우리는 결코 도달할 수 없는 그들 고유의 영역 안에 있어서 삶의 위기감을 느끼지 못하는 듯했다. 나는 우리의 첫 조상이 잃은 지식을 그들은 아직 간직하고 있기에 그런 확신을, 헤엄치는 기술을 갖고 있는 것이리라고 생각했다. 신과 악마는 하나이며, 그들의 위엄이 함께 영원하며, 그들이 창조되지 않고 자존하는 두 존재가 아닌 한 존재라는 지식을 우리에게 가르쳐 줄 곳은 대른 대륙이 아닌 아프리카이다. 원주민은 위격들을 혼동하지도, 실체를 나누지도 않는다.   (P27)     

심부름꾼이 달려와 소식을 전했는지 마사이족은 시간이 좀 지난 후에야 나타났다. 은고마 주최자인 키쿠유족은 마사이족 손님들을 맞이하기로 결정하고 심부름꾼을 돌려보내 그 사실을 전하게 한 모양이었다. 과거에 마사이족이 키쿠유족의 은고마에 참석했다가 불미스러운 사건이 많이 벌어졌기에 마사이족이 키쿠유족 은고마에 참석하는 건 법으로 금지되어 있었다. 우리 집 하인들이 내 의자 가까이에 둘러섰고 모두들 춤판 입구를 바라보았다. 이윽고 마사이족이 들어서자 춤이 중단되었다.

마사이족의 젊은 전사 열두 명이었는데 몇 발짝 들어오더니 걸음을 멈추고 기다렸다. 그들은 오른쪽도, 왼쪽도 보지 않았고 불을 향해 시선을 고정한 채 눈을 깜빡거렸다. 알몸에 근사한 머리 장식만 쓰고 무기를 든 모습이었다. 한 전사는 전쟁에 나갈 때 쓰는 사자 가죽 머리 장식을 쓰고 있었다. 무릎부터 발까지 주홍색 줄무늬가 굵직하게 그려져 있어서 마치 피가 흘러내리는 것 같았다. 그들은 고개를 뒤로 젖히고 뻣뻣한 다리로 똑바로 서 있었는데 조용하고 몹시도 엄숙한 그 모습이 정복자 같기도 하고 포로 같기도 했다. 그들은 와서는 안 되는 줄 알면서도 온 것이었다. 둔중한 북소리가 강 건너 마사이족 보호 구역까지 울려 퍼져 젊은 전사들의 마음을 뒤흔들었고 그중 열두명이 그 소리의 부름을 뿌리치지 못한 나머지 이렇게 농장에 찾아온 것이었다. 

키쿠유족 역시 몹시 동요했지만 손님들을 정중히 대했다. 대표 춤꾼이 그들을 맞이하여 춤의 대열로 안내했으며 마사이족 전사들이 깊은 정적 속에서 자리를 잡자 다시금 춤이 시작되었다. 하지만 예전의 그 춤이 아니었고 분위기가 무거웠다. 북이 더 요란하게, 더 빠르게 울렸다. 은고마가 계속 이어졌다면 키쿠유족과 마사이족이 춤꾼으로서의 활력과 기술을 겨루면서 근사한 묘기들을 펼쳤겠지만 그렇게 되지 못했다. 모두가 선의를 갖고 있다 해도 이루어질 수 없는 일이 있는 법이다.    (P154-155)     

데니스는 내겐 매우 소중한 특성을 지니고 있었는데 그건 이야기 듣기를 좋아한다는 점이었다. 나는 피렌체에 흑사병이 돌았던 14세기에 태어났으면 두각을 나타냈을지도 모른다는 생각을 늘 해왔다. 풍조가 바뀌어 유럽에서는 이야기를 듣는 기술이 사라졌다. 글씨를 읽을 줄 모르는 아프리카 원주민들은 아직 듣는 기술을 잃지 않아서, <어떤 남자가 초원을 걸어가다가 한 남자를 만났어>라고 이야기를 시작하면 초원 위의 두 남자를 상상하며 열심히 귀 기울여 들었다. 그러나 백인들은 이야기를 들어야 한다고 느낄 때조차 제대로 집중하지 못했다. 당장 해야 할 일들이 떠올라 안절부절못하거나 잠들어 버렸다. 심심하면 읽을 걸 달래서 어떤 종류의 인쇄물이든, 하다못해 연설문이라도 저녁 내내 엉덩이를 붙이고 읽기에 열중할 수 있는 사람들이라도 마찬가지였다. 그들은 눈으로 감상하는 데 익숙해진 것이다.

데니스는 귀에 의존하여 살았기에 책을 읽는 것보다 듣는 걸 좋아했으며 농장에 찾아오면 이렇게 묻곤 했다. “이야기 들려줄 수 있어요?” 그래서 나는 그가 사파리를 나간 동안 이야기를 많이 지어 놓았다. 저녁이면 그는 난롯가에 쿠션들을 소파처럼 펼쳐 놓고 편안히 자리를 잡았고 내가 셰에라자드라도 된 것처럼 바닥에 책상다리를 하고 앉아서 들려주는 긴 이야기를 처음부터 끝까지 맑은 눈으로 열심히 들었다. 그는 나보다 이야기 내용을 더 잘 파악하고 있어서 등장인물 중 하나가 극적으로 등장할 때 이야기를 중단시키고 이렇게 말하기도 했다. “그 남자는 이야기 시작 부분에서 죽었어요. 하지만 괜찮아요.”   (P203-204)     

나는 데니스 핀치해턴 덕에 농장 생활에서 가장 황홀한 체험을 할 수 있었는데 그건 아프리카 하늘을 나는 일이었다. 도로가 없거나 거의 없고 초원에 착륙이 가능한 곳에서는 비행이 삶에서 지극히 중요한 요소가 될 수 있으며 하나의 세계를 열어 준다. 데니스가 자신의 경비행기를 가져왔고 우리 집에서 겨우 몇 분 거리에 있는 초원에 착륙이 가능하여 우리는 거의 날마다 비행을 즐겼다. 

아프리카 고원 지대의 하늘 위로 높이 올라가면 굉장한 경치를 감상할 수 있다. 빛과 색채의 오묘한 결합과 변화, 햇살 환한 초록의 땅위에 걸린 무지개, 거대한 수직 구름, 사나운 검은 폭풍, 이 모든 것이 주위를 감싸고 질주하며 춤춘다. 사선으로 거세게 휘몰아치는 빗줄기가 공중을 하얗게 채운다. 비행의 체험을 제대로 표현하려면 기존의 어휘로는 부족하고 새로운 말을 만들어야만 한다. 그레이트 리프트 밸리와 수스와 화산, 롱고노트 화산 위를 날 때는 멀리 달 저편에 있는 땅을 여행하고 있는 것이다. 때로는 초원의 동물들이 보일 정도로 저공비행을 하기도 하는데 신이 처음 동물들을 창조해 놓고 아담에게 이름을 붙이도록 맡기기 전에 느꼈을 법한 그런 감정에 젖게 된다.

그러나 우리를 행복하게 하는 건 경치가 아니라 활동이며 비행하는 사람의 기쁨과 영광은 비행 그 자체이다. 도시 사람들은 모든 움직임이 일차원에 한정되어 있고 줄에 묶여 조종당하기라도 하듯 정해진 선을 따라 걷는 슬픈 고난과 예속의 삶을 산다. 그러다 들판이나 숲을 거닐게 되면 선이 평면이라는 이차원으로 바뀌며 그것은 노예들에게 프랑스 혁명과도 같은 멋진 해방을 의미한다. 하지만 하늘을 날면 삼차원이라는 완전한 자유를 누리게 되는 것이며 향수병에 시달리던 우리의 가슴은 오랜 유배 생활과 갈망 끝에 우주의 품으로 뛰어든다. 중력과 시간의 법칙이.     

삶의 초록 숲에서 

길든 짐승들처럼 노니네. 아무도 모르지

그것들이 얼마나 온순해질 수 있는지!     

나는 비행기를 타고 하늘로 올라가 아래를 내려다보며 땅으로부터 자유로움을 느낄 때마다 위대한 발견을 한 듯한 기분이 들었다. <그래, 바로 이거였어. 이제 난 모든 걸 이해할 수 있어.>     (P214-215)     

황소들은 이렇게 생각했을 것이다. <그게 삶이고 세상이다. 삶은 고달프고 고달프다. 하지만 묵묵히 견디는 수밖엔 달리 방도가 없다. 수레를 끌고 비탈길을 내려가는 건 지독한 고역이다. 생사가 달린 일이다. 하지만 어쩔 수 없다.>

수레 주인인 나이로비의 살진 인도인들이 2루피를 들여 브레이크를 달았더라면, 그리고 수레의 짐짝 위에 올라앉은 굼뜬 원주민 청년들이 브레이크를 거는 작은 수고를 마다하지 않았더라면 황소들은 차분히 비탈길을 걸어 내려갈 수 있었을 것이다. 하지만 황소들은 그런 사실을 알지 못한 채 하루하루 험난한 삶과 영웅적이고 필사적인 전투를 하며 살아가야 했다.  (P242)     

데니스가 죽고 일주일이 지난 어느 날 아침에 나는 이상한 일을 겪었다.

나는 침대에 누워 지난 몇 개월 동안 일어난 일들을 생각하며 그 일들의 실체를 이해하려고 애쓰고 있었다. 나는 아무래도 삶의 정상적인 궤도에서 벗어나 절대 빠져서는 안 될 소용돌이에서 허우적거리고 있는 것만 같았다. 내가 걸어가는 곳마다 발밑에서 땅이 꺼지고 하늘에서 별이 쏟아졌다. 나는 그렇게 별이 쏟아지는 광경을 묘사한 신들의 몰락에 관한 시가, 산속 동굴들에서 깊은 한숨을 쉬며 공포로 죽어 가는 난쟁이들에 관한 노래들이 떠올랐다. 그 모든 게 그저 우연의 일치이며 소위 말하는 불운이 겹친 것일 리는 없고 어떤 근본적인 요인이 존재하는 게 분명했다. 제대로 찾아보면 그 일들으 일관성이 분명히 드러날 것이며 그걸 찾아내기만 하면 구원받을 수 있을 터였다. 나는 일어나서 영감을 얻어야겠다고 생각했다.

많은 사람들이 영감을 구하는 걸 불합리한 일로 여긴다. 영감을 얻으려면 특별한 정신 상태가 되어야 하는데 그런 상태에 이른 적이 없는 이들이 많기 때문이다. 그런 특별한 정신 상태에서 영감을 구하면 반드시 답을 얻게 된다. 예를 들어 카드게임을 할 때도 영감을 얻은 자는 행운의 패를 쥐게 되며 코앞에서 그랜드슬램이 자신을 응시하고 있는 걸 본다. 카드게임에도 그랜드슬램이 있는가? 물론이다.

나는 영감을 얻기 위해 밖으로 나가서 하인들 오두막을 향해 발길 닿는 대로 걸었다. 마침 오두막마다 닭들을 내놓아 닭들이 여기저기서 뛰어다니고 있었다. 나는 잠시 멈춰 서서 닭들을 바라보았다.

파씨마의 커다란 흰 수탉이 으스대며 나를 향해 걸어왔다. 그러다 우뚝 멈추더니 고개를 이리 갸웃 저리 갸웃 하면서 볏을 세웠다. 길 건너편 풀숲에서 작은 회색빛 카멜레온 한 마리가 나왔는데 수탉처럼 아침 정찰을 나온 것이었다. 먹잇감을 발견한 수탉은 만족감에 찬 꼬꼬 소리를 내며 곧장 카멜레온에게 다가갔다. 카멜레온은 수탉을 보고 우뚝 멈춰 섰다. 카멜레온은 겁에 질려 있었으나 무척 용감해서 딱 버티고 서서 입을 크게 벌리고 적을 겁주기 위해 몽둥이처럼 생긴 혀를 수탉을 향해 휙 내밀었다. 수탉은 놀란 듯 잠시 주춤하더니 이내 날래고 단호하게 부리를 망치처럼 내리찍어 카멜레온의 혀를 빼 먹었다.

그 둘의 대면은 10초 정도밖에 걸리지 않았다. 나는 파씨마의 수탉을 쫓아 버리고 커다란 돌멩이로 카멜레온을 쳐서 죽였다. 카멜레온은 혀로 곤충을 잡아먹고 살기에 혀가 없이는 살아갈 수 없기 때문이다.

나는 섬뜩하고 무시무시한 사건의 축소판과도 같은 그 광경에 질겁해서 발걸음을 돌려 우리 집 옆의 돌 의자로 가서 앉았다. 나는 거기 한참이나 앉아 있었고 파라가 차를 내왔다. 나는 돌 의자와 테이블만 내려다보며 시선을 들지 못했다. 세상이 너무도 위험한 장소인 것처럼 느껴졌던 것이다.

며칠 동안의 기간을 두고 아주 서서히 나는 자신이 찾던 영적인 응답을 얻었음을 깨달아 갔다. 나는 묘한 방식으로이긴 하지만 심지어 명예로워지고 특별해진 것이기까지 했다. 신은 나 자신보다 더 나의 존엄을 지켜 주었던 것이었으며 달리 어떤 응답을 해줄 수 있었겠는가? 이제 진실로부터 나를 보호해 줄 때가 아니었기에 신은 진실을 알려 달라는 나의 탄원을 못 이기는 척 들어주었다. 신이 나를 향해 큰 소리로 웃었고 은공 언덕의 메아리가 따라 웃었으며 나팔 소리가 울려 퍼지고 수탉들과 카멜레온들이 보이는 가운데서 신이 말씀하셨다. 하하!

나는 그날 아침에 마침 그 자리에 있어서 카멜레온이 고통에 시달리며 서서히 죽어 가지 않아도 되도록 막아 줄 수 있었던 것이 너무도 기뻤다.    (P343-344)     

나는 한데 모여 살겠다는 그들의 결연한 의지에 내심 놀라지 않을 수 없었는데 사실 그들은 농장에서 평화로이 어울려 살지 못했고 서로를 칭찬하는 법이 없었기 때문이다. 그런데 카쎄구, 카니누, 마우게 같은 가축깨나 있다고 거들먹거리는 부자들이 와웨루나 초싸 같은 염소 한 마리 없이 땅버러지 같은 인생을 사는 가난뱅이들과 손을 잡고 찾아와 한마음 한뜻으로 가축을 챙기듯 서로를 챙겼다. 그들은 내게 살 땅뿐 아니라 삶 자체까지 요구하는 듯했다.

원주민들에게서 땅을 빼앗는 건 단순히 땅만을 빼앗는 것이 아니다. 그들의 과거와 뿌리, 정체성까지 빼앗는 것이다. 그들이 보아 왔던 것이나 보게 될 것을 빼앗는 건 어찌 보면 그들의 눈을 빼앗는 것이다. 그것은 문명인보다 원시인의 경우에 더 심하며 동물들의 경우 익숙한 환경 속에서 자신의 정체성을 되찾기 위해 위험과 고난을 무릅쓰고 먼 길을 여행하기도 한다.   (P34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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