안톤 체홉의 <세 자매>

영화 <세 자매> 1970년

by 노용헌

"세월이 흘러 우리가 죽으면 아무도 우리를 기억하지 않겠지. 우리 얼굴, 목소리, 그리고 우리가 몇 사람이었는지 아무도 기억하지 못할 거야. 하지만 지금 우리가 겪는 고통은 후손들을 위한 기쁨으로 변할 것이고, 행복과 평화가 찾아올 거야. 그리고 그날이 오면 현재의 우리에게 고마워하며 기억해 줄 거야. 마샤, 이리나, 우리 인생은 아직 끝나지 않았어. 굳세게 살아가는 거야! 음악이 저렇게 밝고 기쁘게 울려 퍼지는 걸 들으니 조금 더 세월이 흐르면 우리가 무엇 때문에 살고 무엇 때문에 괴로워하는지 알 수 있을 것 같아. 그것만 알 수 있다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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투젠바흐 누가 알겠습니까? 어쩌면 후세 사람들은 존경심을 품고서 우리 시대를 위대한 시대로 기억해줄지도 모르지요. 오늘날엔 고문실도, 사형도, 전쟁도 없지 않습니까. 하지만 여전히 수많은 고통들이 존재하지요!

솔료느이 쯧, 쯧...... 우리 남작님은 철학적 토론을 지나치게 좋아하신단 말씀이야.

투젠바흐 솔료느이, 자넨 상관 말게. (자리를 옮기며) 분위기가 죽잖아.

솔료느이 쯧, 쯧, 쯧......

투젠바흐 (베르쉬닌에게) 우리 시대는 너무나 많은 고통을 목도하고 있지요. 하지만 어찌 보면 이는 그만큼 우리 사회가 일정한 도덕 수준에 이르렀다는 반증이 아닐까요?

베르쉬닌 그야 물론 그렇지요.

체부트이킨 남작, 방금 후세 사람들이 우리 시대를 위대한 시대로 기억할지도 모른다고 했나? 미안하지만 인간은 비천한 존재라네. 어느 시대나 그렇지....... (일어선다) 나란 인간이 얼마나 보잘것없는 존재인지 보게. (P9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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투젠바흐 흐음. 우리가 죽고 난 뒤의 세상에서라면, 사람들은 풍선기구를 타고 하늘을 날아다닐 테죠. 외투 모양도 바뀔 겁니다. 어쩌면 여섯 번째 감각을 발견하여 더욱 발전시킬지도 모르죠. 하지만 그래봤자 인생은 마찬가지일 겁니다. 똑같이 힘들고 신비와 행복으로 가득하겠지요. 그래서 천 년 뒤의 인간 역시 ‘아아, 산다는 건 괴로워’하고 탄식할 겁니다. 그러면서도 여전히 인간은 죽음을 두려워하고 죽기를 원치 않을 겁니다.

베르쉬닌 (잠시 생각하더니) 난 잘 모르겠군요...... 내가 보기에 세상의 모든 것은 조금씩 달라져야 하고, 실제로 우리가 보는 세상은 지금 이 순간에도 달라지고 있습니다. 200년, 300년, 아니 천년이 지나면 -- 시간이 얼마나 걸리느냐는 중요치 않습니다 -- 새롭고 행복한 삶이 찾아올 겁니다. 물론 우리는 그런 인생을 누릴 수 없겠지만, 그러한 삶을 위해 우리는 살고, 노동하고, 또 괴로워하는 것입니다. 네, 우리는 그런 인생을 창조하는 도정에 있습니다. 거기에 우리가 존재하는 의미가 있고, 또 우리의 행복도 있는 겁니다.(마샤가 조용히 웃는다) (P10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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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샤 아아, 지겨워, 지겨워, 지겨워 죽겠어..... (일어났다가 다시 앉으며) 한 가지 생각이 머릿속에서 떠나질 않아..... 정말 속상해 죽겠어요. 너무 답답해서, 얘기라도 해야 살 것 같아. 안드레이 오빠 말이야...... 오빠는 이 집을 은행에 저당 잡혔고, 돈은 몽땅 올케가 챙겼어요. 하지만 이 집은 오빠 한 사람 것이 아니라, 우리 네 사람 모두의 소유라고요! 오빠도 그만한 건 알고 있을텐데. 정신이 바로 박힌 사람이라면.

쿨르이긴 그만 둬, 마샤! 왜 그런 데까지 신경을 쓰는 거지? 안드레이는 여기 저기 빚을 지고 있어. 그래서 그런 거니 그냥 내버려 두는 게 좋아.

마샤 그래도 화가 나 죽겠는걸. (눕는다)

쿨르이긴 우리는 궁색하지 않아. 나는 일하고 있어. 고등학교에 나가고 개인지도도 하고 있어...... 나는 성실한 사람이야. 말하자면, ‘전 재산을 몸에 지니고 다니는’ 사람이랄까.

마샤 뭔가를 바라서 그러는 게 아니에요. 옳지 않은 일이기 때문에 화를 내는 거지. (사이) 이제 가세요, 표도르.

쿨르이긴 (아내에게 키스한다) 피곤할 테니 한 30분이라도 쉬도록 해요. 밖에 앉아서 기다릴 테니까....... 눈 좀 붙이라고...... (걸어가면서) 나는 만족해, 암, 만족하고말고. (나간다)

이리나 안드레이 오빠는 타락했어, 그 여자와 함께 한 뒤부터 무기력해지고 늙어 버렸어! 교수가 된다던 사람이 지금은 마침내 자치구의회의원이 됐다고 으스대고 있으니, 오빠는 의원이고, 프로토포포프는 의장..... 도시 전체가 수군거리며 비웃고 있는데, 오빠 혼자만 아무것도 보지 못하고, 아무것도 모르고 있어.... 아까만 해도 모두 화재 현장으로 달려갔는데, 오빠는 무심하게 자기 방에 앉아 있더라고, 바이올린만 켜면서 아무것도 하질 않아. (신경질적으로) 오, 끔찍해. 너무 끔찍해! (운다) 더 이상 참을 수 없어, 더 이상!....... 못 참겠어, 못 참아! (P133-13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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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리나 (감정을 추스르면서) 아, 난 불행해..... 난 이제 일을 할 수도 없고, 일하지도 않을 거야. 됐어, 충분해! 전신국에서도 일했고, 지금은 시청에서 근무하고 있지만, 내게 맡겨진 일들은 하나같이 다 끔찍해...... 난 벌써 스물세살이고 오랫동안 일해 왔어. 머릿속은 무뎌지고, 몸은 여위고 용모는 추해지고 나이만 먹어 가고 있어. 그 어떤 만족도 느끼지 못하고 시간만 흐르고 있어. 아름답고 참된 삶에서 점점 더 멀어지는 것 같아. 갈수록 깊은 심연 속으로 빠져 들어가고 있어. 난 이제 희망이라곤 없어. 어떻게 내가 살아 있는지, 어떻게 여태껏 자살하지 않았는지 궁금할 정도야......

올가 울지 마, 얘, 울지 마...... 나 역시 괴로워.

이리나 울지 않아, 안 울 거야..... 됐어..... 봐, 이제 안 울잖아, 안 울어. (P13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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페라폰트 안드레이 세르게이치, 서류는 제 것이 아니라 관청의 것입니다. 제가 만들어 낸 것이 아닙니다.

안드레이 오, 모두 다 어디로 가 버렸을까? 나의 과거는 어디로 가 버렸는가? 젊고 쾌활하며 현명했던 그때는, 아름다운 공상과 사색에 젖어 있던 그때는, 나의 현재와 미래가 희망으로 밝게 빛나던 그때는 어디로 갔는가? 어째서 우리는 삶을 시작하자마자 지루하고 칙칙하고 재미없고 게으르며 무관심하고 쓸모없고 불행해지는 것일까..... 우리 도시는 이미 200년이나 존속했고, 오늘날은 10만 명의 주민이 살고 있지만 다 거기서 거기인 사람뿐, 과거든 현재든 단 한 사람의 고행자도, 예술가도, 학자도 없을뿐더러, 조금이라도 질투를 불러일으키거나 닮고 싶은 유명인 한 사람 없어..... 오직 먹고, 마시고, 잠자다가 마침내 죽고 말지.... 또 다른 사람들이 태어나도 똑같이 먹고, 마시고, 잠자고. 권태에 질식당하지 않기 위해서 추악한 거짓 소문과 보드카, 카드놀이, 소송으로 일상을 채우지. 아내는 남편을 속이고, 남편은 거짓말을 하면서, 아무것도 못 본 척, 못 들은 척하지. 이런 끔찍한 천박성은 자식들에게도 나쁜 영향을 미쳐 아이들의 내면에 깃들어 있던 신성한 불꽃을 꺼트려버리지. 그렇게 해서 아이들 역시 똑같이 보잘것없는, 죽은 인간이 되는 거야. 그들의 아버지와 어머니처럼 말이지..... (페라폰트에게 짜증을 내며) 원하는 게 뭐야?

페라폰트 뭐라뇨? 서류에 서명해 주셔야지요.

안드레이 정말 지긋지긋하군. (P15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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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 자매, 서로 바싹 기댄 채 서 있다.

마샤 아, 행진곡 소리! 저 사람들은 우릴 떠나가고, 또 한 사람은 영원히, 영원히 이 세상을 떠나 버렸어. 그리고 우리 인생을 다시 시작하기 위해 우리만 남은 거야...... 우린 살아야 해..... 살아야 해.......

이리나 (올가의 가슴에 머리를 기댄다) 시간이 흐르고 나면 이 모든 게 무엇 때문인지, 무엇을 위해 이런 고통이 있는지, 모두가 알게 될 거야. 그땐 아무런 비밀도 남지 않겠지. 하지만 지금은 살아야 해...... 일을 해야지. 오직 일해야 해! 내일 나는 혼자 떠나. 학교에서 아이들을 가르치고, 그리고 한평생 교직에 내 모든 인생을 바치겠어. 지금은 가을이고 곧 겨울이 오겠지. 눈이 쌓이겠지. 그렇지만 나는 일하고 또 일할 거야......

올가 (두 동생을 꼭 껴안으며) 저토록 밝고 씩씩하게 울려 퍼지는 행진곡 소리를 들으니 살고 싶은 욕망이 솟아오르는구나! 오 하느님! 세월이 흘러 우리도 영원히 사라지고 우리를 기억해 줄 사람도 없겠지. 우리 얼굴도 목소리도 그리고 우리가 몇 사람이었는지도 아무도 기억하지 못할 거야. 하지만 우리의 고통은 우리 뒤에 살게 될 사람들을 위한 기쁨으로 변할 테고, 지상에는 행복과 평화가 찾아올 거야. 그리고 그때가 되면 지금의 우리를 감사의 마음으로 기억해 주겠지. 아, 마샤, 이리나, 우리 인생은 아직 끝나지 않았어. 우린 꿋꿋이 살아가야 돼! 음악이 저렇게도 밝고 기쁘게 울려 퍼지고 있어. 조금만 더 세월이 흐르면 무엇 때문에 우리가 살고 있는지, 무엇 때문에 우리가 괴로워하는지 알게 될 것만 같아...... 그걸 알 수만 있다면, 그걸 알 수만 있다면! (P158-15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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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자신의 무가치함을 인식하는 것은 신이나 지혜, 미(美)나 자연 앞에서이지 사람 앞에서는 아닐 것이다. 사람 앞에서는 자기의 가치를 인식해야만 하는 거란다. 너는 사기꾼이 아니고 정직한 사람이겠지? 그렇다면, 네 안의 정직한 자를 존중해야 해. ‘겸허하다’는 것과 자신의 ‘무가치함’을 인식한다는 것을 혼동해서는 안 돼.”

<안톤 체호프가 사촌 형에게 쓴 편지> (P377-378)


체호프의 4막극 <갈매기>는 1896년 발표해 알렉산드르 극장에서 첫 상연되었다. 연출가가 희곡의 본질을 잘 이해하지 못한 탓으로 초연에서는 실패했으나 1898년 모스크바 예술극장에서 재상연되어 큰 성공을 거두었다.

<갈매기>에서는 체호프의 중기를 채색하는 출구없는 절망과 우울이 배우를 지망했다가 좌절한 니나와 작가지망생 트레플료프를 통해 이야기된다. (P400)


체호프의 마지막 희곡 <세 자매>(1901)와 <벚꽃 동산>(1904)은 모두 모스크바 예술극장을 위해 쓴 것이다. 그는 작품의 예행연습과 공연에 그리 만족하지 않았다. 자신의 희곡이 비극이라기보다는 희극에 가깝다고 거듭 주장했던 그는 때때로 연출가들이 생(生)의 무상과 권태에 한숨 짓는 주인공들을 지나치게 강조하면서 어둡게 다루는 데 대해 불만이 많았다. (P402)


1904년 4월 20일 임종을 2개월쯤 남겨두었을 때, 체호프가 아내 올리가에게 보낸 편지의 한 구절은 체호프라는 작가의 됨됨이를 다시금 보여 준다.

“당신은 인생이 뭐냐고 물었지만, 그것은 당근이 뭐냐고 묻는 것과 같아. 당근이 당근이듯 그 이상은 모르오.” (P41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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