영화 <채털리부인의 연인> 2022년
<채털리부인의 연인>(2015년)
D. H. 로렌스의 마지막 소설이자 20세기를 대표하는 문제작 <채털리 부인의 연인>은, 로렌스가 사망하기 2년 전에 완성한 마지막 장편 소설이다. 오늘날 대부분의 사람들은 <채털리 부인의 연인>을 음락한 호색 문학 또는 에로티시즘의 고전으로 알고 있거나 작가를 성 문학의 대가로 인식한다. 그러나 이 작품에 나오는 성적 묘사들은 성적 흥분을 조장하거나 탐닉을 목적으로 하지 않는다. 오히려 작품 속에서 그려지는 코니와 멜러즈의 관계는 불륜이나 난잡한 성행위를 긍정하는 것이 아니라, 돈과 기계와 차가운 이성이 지배하는 비인간적인 산업 사회 문명 속에서 인간다움을 회복하고자 하는 도덕적 모색 방편으로 추구되고 있다. 어쨌든, 영화는 수많은 아류 000 부인시리즈의 에로물로 알려져 있다.
[1]
우리 시대는 본질적으로 비극적이다. 그래서 우리는 이 시대를 비극적으로 받아들이려 하지 않는다. 큰 격변이 일어났고 우리는 폐허 가운데 서 있다. 우리는 자그마한 보금자리를 새로 짓고 자그마한 희망을 새로 품기 시작하고 있다. 이것은 좀 어려운 일이다. 미래로 나아가는 순탄한 길이 이제는 전혀 없기 때문이다. 하지만 우리는 장애물을 돌아가든지 기어 넘어가든지 한다. 아무리 하늘이 무너진다 해도 살아나가야 하는 것이다.
이것은 콘스턴스 채털 리가 놓인 대략적인 처지였다. 전쟁으로 인해 그녀는 머리 위로 천장이 무너져 내리는 듯한 경험을 했다. 그리고 사람이란 살면서 겪고 알아가야 한다는 것을 깨달았다.
그녀는 클리퍼드 채털리와 1917년에 결혼했는데, 그가 휴가를 받아 한 달간 집에 돌아와 있을 때였다. 그들은 한 달 동안 신혼 생활을 했다. 그런 다음 클리퍼드는 플랜더스로 돌아갔다. 그러고는 여섯 달 뒤에 다시 영국으로 후송되어 왔는데, 부상으로 몸이 바스러지다시피 한 상태였다. 그때 아내 콘스턴스는 스물세 살, 그는 스물아홉 살이었다.
삶을 향한 클리퍼드의 의지는 놀라웠다. 그는 죽지 않았고, 바스러진 몸은 다시 아물어가는 듯했다. 이 년 동안 그는 의사의 치료를 받았다. 그런 뒤 그는 치유되었다는 선고를 듣고 다시 일상생활로 돌아갈 수 있었는데, 다만 허리 아래 하반신은 영원히 마비되었다.
이것이 1920년의 일이었다. 클리퍼드와 콘스턴스는 클리퍼드의 고향. 즉 집안 대대로 살아온 곳인 라그비 저택으로 돌아왔다. 그 사이에 그의 아버지가 세상을 떠나 클리퍼드는 이제 준남작으로 클리퍼드 경(卿)이 되었고, 콘스턴스는 채털리 부인이 되었다. (P7-8)
하지만 이곳 중부 지방과 북부의 산업 지대에서는 넘을 수 없는, 그 사이로 아무런 교류가 일어날 수 없는 심연이 존재했다. ‘넌 네 쪽에 충실해라, 난 내 쪽에 충실할 테니!’ 그것은 공유하는 인간성의 맥박을 괴상하게도 거부하는 행태였다.
물론 마을 사람들은 추상적으로는 클리퍼드와 코니와 교감하는 바가 있었다. 하지만 살과 피로는 양쪽 모두 ‘넌 내 일에 상관 마!’라는 식이었다.
마을 교구의 목사는 예순 살가량의 사람 좋은 노인으로 직분에 충실한 자였는데, 마을의 이 말없는 ‘넌 내 일에 상관 마!’ 주의에 의해 하나의 개인으로서는 아무 실체도 없는 존재로 전락해 있었다. 광부의 아내들은 거의 모두가 감리교파 신자였다. 광부들은 어느 쪽도 아니었다. (P29)
그는 코니에게 편지를 썼는데, 예의 그 애수와 우울에 찬 어조는 여전했고 이따금씩 재치가 담기기도 했으며, 성적 기미를 전혀 풍기지 않는 묘한 애정이 배어 있었다. 일종의 희망 없는 애정을 그녀에게 느끼는 듯이 보였으며, 근본적인 거리감은 그대로 남아 있었다. 그의 마음속 깊은 곳에는 아무런 희망도 없었고, 또 희망이 없기를 원했다. 그는 오히려 희망을 혐오했다. ‘굉장한 희망이 지상을 쓸고 지나갔다. (Une immense esperance a traverse la terre.)'는 말을 그는 어디선가 읽었는데, 이에 대해 그가 덧붙인 논평은 이러했다. ’그리고 그것은 소유할 가치가 있는 모든 것을 깡그리 물속에다 처박아 몰살시켰다.‘ (P62)
“‘서로 마음 맞는 무엇인가로 우리의 가슴을/묶어 연결해 주는 끈은 복되도다.’” 토미 듀크스가 흥얼거리며 말했다. “이 연결해 주는 끈이란 게 무엇인지 궁금해! 바로 지금 여기 있는 우리를 묶어 연결해 주고 있는 끈은 서로간의 정신적 마찰이라 할 수 있지. 이것을 빼면 우리들 사이엔 연결 끈이 정말 빌어먹게도 거의 없는 셈이야. 우리는 각자 찢어져 나가서는 서로에 대해 악의에 찬 말을 내뱉지. 세상의 다른 모든 빌어먹을 지식인들과 마찬가지로 말이야. 사실 그 점에 관한 한 누구나 똑같아. 빌어먹을 놈의 세상 사람들 모두가 다 그러니까 말이야. 그러잖으면 우리는 또, 각자 찢어져 나가서는 서로에 대해 느끼는 악의에 찬 감정을 달콤한 거짓말로 덮어 감추곤 하지. (P77-78)
코니로서 도무지 알 수 없는 일이었다. 클리퍼드는 사람들과 그들의 행동 동기를 약간 해학적으로 분석해 내는 데 정말 뛰어난 솜씨를 보였는데, 결말에 가서 모든 것을 산산조각 난 상태로 끝내는 식이었다. 그러나 그것은 강아지가 소파의 쿠션을 갈가리 물어 찢는 행동과 다소 비슷한 점이 있었다. 다만, 그의 경우 어리고 장난기 넘치는 것이 아니라 묘하게도 나이 먹은 티가 나고 거의 외설스러울 정도로 기발하다는 점이 달랐다. 그것은 기괴했으며 또한 아무것도 아니기도 했다. 코니의 영혼 바닥에서 메아리치며 계속 울리는 느낌은 바로 그것이었다. 그 모든 게 다 공허한 것. 즉 훌륭하게 꾸며 전시한 공허였다. 그러면서 동시에 하나의 전시 행위였다. 전시 행위! 전시 행위! 전시 행위! (P110)
온통 닳아 떨어진 상태였다! 마치 우리의 존재를 형성하고 있는 재료 자체가 값싼 물건으로 되어 있어. 아무것도 남지 않을 정도로 닳아 떨어져나가고 있는 것과도 같았다.
정말로 남아 있는 것이라면 그것은 오직 완고한 극기(克己)적 태도뿐이었다. 그리고 거기에는 일종의 쾌감 같은 것이 있었다. 삶의 공허함을 각 단계마다, 그 각 과정(etape)마다 거치면서 경험해 나가는 바로 그 행위에는 일종의 섬뜩한 만족감이 있었다. “자, 이상 끝!” 마지막 말은 항상 이것이었다. 집, 사랑, 결혼, 마이클리스 등등 모든 경우가 그랬다. “자, 이상 끝!” 그리고 누가 죽을 때 역시 그의 인생에 대한 마지막 말은 그것일 것이다. “자, 이상 끝!” (P134)
그녀는 모든 것을 비유나 말로 바꿔버리는 그에게 화가 났다. 제비꽃은 주노의 눈꺼풀이니, 아네모네는 능욕당하지 않은 신부니 하는 식이었다. 항상 그녀와 살아 있는 삶 사이에 끼어드는 그런 말과 표현을 그녀는 얼마나 혐오하는지! 능욕을 범하는 것이 있다면, 그건 바로 말과 표현이었다. 즉 살아 있는 세상 만물로부터 생명의 수액을 모두 빨아 없애는 그 판에 박힌 말과 표현 구절들이었다.
클리퍼드와의 산책은 별로 즐겁지가 못했다. 그와 코니 사이에는 일종의 긴장 상태가 형성되어 있었다. 서로 모르는 체했지만 긴장감은 분명 흐르고 있었다. 여성적 본능의 온 힘을 다해 코니는 갑자기 그를 밀쳐내고 있었다. 그녀는 그에게서 벗어나고 싶었다. 특히 그의 의식과 그의 말로부터, 그 자신에 대한 강박적 집착, 즉 그 자신과 자신이 지껄이는 말들에 대한 그의 쳇바퀴처럼 끝없는 강박적 집착으로부터 그녀는 벗어나고 싶었다. (P204)
그녀는 무기력하고 완전히 버림받은 느낌이었다. 그녀는 외부로부터 어떤 도움의 손길이라도 받고 싶은 심정이었다. 그러나 넓은 세상 천지에 도움의 손길은 찾을 수 없었다. 사회는 미쳐 제정신이 아니었으므로 끔찍할 뿐이었다.
문명사회는 제정신이 아니었다. 돈과 소위 사랑이란 것에 사회는 아주 광적으로 집착하고 있었다. 그중에서도 돈이 단연 우세한 광증이었다. 개인들은 각기 따로따로 미친 가운데 이 두가지 방식, 즉 돈과 사랑으로 스스로를 주장하며 내세우고 있었다. 가령 마이클리스를 보라! 그의 삶과 행위는 그저 미친 짓일 뿐이다. 그의 사랑도 일종의 미친 짓이었다. 그의 희곡 작품이란 것들 역시 일종의 미친 짓이었다.
그리고 클리퍼드 또한 마찬가지였다. 지껄이는 모든 말들! 써내는 모든 글들! 자기를 내세우려고 맹렬히 애쓰는 모든 짓거리들! 모두 그저 미친 짓에 불과하다. 게다가 그것은 점점 악화되어, 정말로 광증 같은 것이 되어가고 있었다. (P213)
제대로 창조된 소설이 갖는 엄청난 중요성이 존재한다. 그런 소설은 우리의 공감 의식을 자극하여 흐르도록 해주고 그 흐름을 새로운 곳으로 이끌 수 있으며, 또 우리의 공감을 죽은 것들을 피해 멀리 떨어지도록 이끌 수 있다. 그러므로 소설은 제대로 창조되었을 때 삶의 가장 내밀한 부분들을 드러내 보여줄 수 있다. 왜냐하면 예민한 각성의 물결이 밀물과 썰물로 가득 찼다가 빠져나가면서 깨끗이 씻어내고 새롭게 해줄 필요가 있는 곳은 무엇보다도 바로, 삶의 내밀한 열정적 부분이기 때문이다.
그러나 소설 역시 소문과 마찬가지로, 기계적이고 인간 영혼에 무감각한 가짜 공감과 혐오를 자극해 조장할 수 있다. 소설은 사실상 가장 타락한 감정들조차 미화할 수 있는데, 그런 감정이 관습적인 측면에서 ‘깨끗한’ 것일 때 그렇다. 그럴 경우 소설은 소문과 마찬가지로 결국 사악한 영향을 끼치게 되며, 또 소문 이야기와 마찬가지로 그것이 표면상으로는 항상 천사들 편에 서 있기 때문에 오히려 더욱 사악한 영향을 끼친다. (P222-223)
그리고 또다시, 임금을 둘러싼 다툼이 있었다. 유한계급 측에서 살아본 경험이 있는 그는 임금 분규에 어떤 해결을 기대한다는 것이 얼마나 쓸데없는 일인지를 알고 있었다. 죽음 이외엔 어떤 해결책도 있을 수가 없는 문제였다. 유일하게 할 수 있는 일이란 그저 신경 쓰지 않는 것, 임금에 대해 신경 쓰지 않는 것뿐이었다.
하지만 가난하고 살기가 비참해지면, 신경을 쓸 수밖에 없었다. 어쨌든, 임금은 이제 사람들이 유일하게 신경 쓰는 문제가 되었다. 돈에 구애되어 신경 쓰는 것은 커다란 암처럼 온 세상에 퍼져, 모든 계급 개개인들의 마음을 갉아먹고 있었다. 하지만 그는 그렇게 돈에 대해 신경 쓰기를 거부했다.
그렇다면 어떻게 되는 것인가? 돈에 대해 신경 쓰는 것 말고 인생이 우리에게 주는 것이 무엇이 있는가? 아무것도 없었다.
하지만 그는 혼자 있는 데서 오는 미약한 만족감 속에서, 혼자 꿩을 기르며 살아갈 수 있었다. 물론 결국에 가서는 아침 식사 후 사냥 나온 뚱뚱한 신사들의 총에 맞아 죽고 말 꿩들이었다. 따라서 그것은 헛되고 무익한 삶이기도 했다. 정말 무한히 쓸모없는 삶이었다. (P315-316)
테버셜! 이게 바로 테버셜이다! 즐거운 영국. 세익스피어의 영국이라는 곳이다! 천만에! 코니가 이곳에 와서 살게 된 이래 깨닫게 된바, 이곳은 바로 오늘날의 영국이었다. 이곳은 새로운 종류의 인간을, 즉 돈과 사회적, 정치적 측면에 있어서 과도하게 의식적이지만, 자연스럽고 직관적인 측면에 있어서는 죽어버린, 그저 죽었을 따름인, 그런 인간을 만들어내고 있었다. 그들 모두, 반은 죽은 시체인 존재들이었다. 하지만 나머지 반에는 고집스럽고 끔찍한 의식이 있었다. 그 모든 것에는 뭔가 소름 끼치고 음험한 것이 있었다. 그것은 일종의 저승 같은 암흑 세계였다. 그리고 전혀 헤아릴 수가 없었다. 반쯤 죽은 시체가 반응하며 움직이는 것을 우리가 어떻게 이해할 수 있단 말인가? 커다란 화물 트럭에 가득 타고서 매틀록으로 소풍을 가려고 떠나는 셰필드의 제강 노동자들을 보았을 때, 인간 같은 모양을 한 그 괴상하고 뒤틀린 자그마한 존재들을 보았을 때, 코니는 창자가 꺼지는 듯하면서 이런 생각이 들었다. 아, 하나님, 인간은 같은 인간에게 대체 무슨 짓을 한 건가요? 지도자라는 사람들은 동료 인간들에게 대체 무슨 짓을 가해 온 건가요? 그들은 동료 인간들을 인간다움 이하로 전락시켜 버렸나이다! 그래서 이제 인간의 우애라곤 더 이상 존재할 수가 없게 되었나이다! 그저 악몽 같기만 한 세상이 되었습니다. (P339-340)
이제 그 웅장한 엘리자베스 시대 저택들이 헐려가고 있는 참이므로, 조지 왕조의 저택들 역시 사라져가고 있다. 조지 왕조의 완벽한 옛 대저택인 프리칠리조차 바로 지금, 코니가 차로 지나가고 있는 그 순간, 헐리고 있는 중이었다. 보수가 완벽하게 잘 되어 있고, 전쟁 전까지 웨더비 가문이 화려하게 살았던 저택이었다. 그러나 이제는 너무 커서 유지비가 너무 많이 들고, 주변의 고장 풍경과도 어울리지 않는 흉물이 되고 말았다. 상류 계급의 사람들은 돈이 벌리는 과정을 봐야 하는 부담 없이 돈을 쓸 수 있는, 보다 기분 좋은 곳을 찾아 떠나가고 있었다.
이것이 역사라는 것이다. 하나의 영국이 다른 영국을 지워 없앤다. 탄광들은 큰 저택들을 부유하게 해줬다. 그런데 이제 그 탄광들이, 이미 그 전에 시골 오두막집들을 지워 없애버렸던 것처럼, 그 부유한 저택들을 지워 없애고 있는 것이다. 산업 사회의 영국이 농업 사회의 영국을 지워 없애는 것이다. 하나의 의미가 다른 의미를 지워 없앤다. 새로운 영국이 옛 영국을 지워 없앤다. 그리고 그 연쇄는 유기적으로 일어나는 것이 아니라 기계적으로 일어난다. (P347-348)
[2]
“아냐, 그들은 날 미워하지 않아!” 그가 대답했다. “그리고 잘못 생각하지 말라고. 당신이 말하는 그 ‘사람’이라는 말은 그들에게 맞지 않아. 그들은 당신이 이해하지 못하고 또 결코 이해할 수도 없는 동물일 뿐이야. 당신의 착각을 다른 사람들에게 강요하지 마. 하층 노동 대중은 언제나 똑같았고. 또 앞으로도 언제나 똑같을 거야. 그 옛날 네로의 노예들. 그러니까 네로의 광산이나 논밭에서 일했던 노예들은 말이야, 지금 우리 탄광 광부들이나 포드 자동차 공장의 노동자들과 다른 점이 거의 없다고. 그들은 모두 하층 노동 대중으로, 변하지 않는 존재들인 거야. 어떤 한 개인이 좀 특출 나서 그 하층 대중 계급에서 벗어나는 경우가 있긴 하겠지. 하지만 그렇게 하나 둘 벗어나 봤자 하층 때중 전체는 바뀌는 것이 전혀 없다고. 하층 대중은 바뀔 수가 없는 거야. 이것은 바로 사회학의 가장 중요한 사실 중의 하나야. ‘빵과 오락(panem et circenses)' 바로 그것만 있으면 되는 거라고. 그런데 오늘날에는 교육이 오락을 잘못 대체해 버린 거야. 오늘날의 된 문제는 바로 우리가 ’빵과 오락‘이라는 이 프로그램의 오락 부분을 온통 망쳐놓고는 그 대신 약간의 교육으로 하층 대중의 마음에 해독을 끼쳐놓았다는 사실에 있어.” (P48-49)
“인간 세상이 파멸할 운명이라는, 즉 인간 세상이 자신의 더러운 야만성에 의해 스스로 파멸하고 말 운명을 자초하고 있다는 느낌이 들 때, 그럴 때면 난 우리가 식민지 나라로 가는 것조차 안전하게 멀리 피하는 것이 못 된다는 느낌이 들면서 걱정에 휩싸이게 된다오. 설령 달나라로 간다 해도 완전한 피신이 되지 못할 거요. 거기서조차, 뒤를 돌아보면 뭇 별들 가운데서 더럽고 야만적이고 추한 모습의 지구가 보일 것이기 때문이오. 인간에 의해 추하게 더렵혀진 꼴이 말이오. 그럴 때면 난 쓸개라도 삼킨 것처럼 속이 뒤집히면서, 그 어디에도 안전하게 도망칠 곳이 없다는 느낌이 든다오. 하지만 그러다가 기분이 달라지면 난 또다시 모든 걸 잊어버리고 만다오. 그렇지만 지난 백 년의 세월 동안 인간들에게 일어난 일은 정말 치욕스럽기 짝이 없는 것이오. 남자들은 단지 일하는 벌레에 불과하게 되었고 그들의 남자다움과 진정한 삶은 모조리 빼앗기고 말았소. 할 수만 있다면 나는 기계를 이 지상에서 쓸어버리고 산업 시대를 하나의 끔찍한 오류로서 완전히 끝장내버리고 싶소. 하지만 그건 나도 어느 누구도 할 수 없는 일이므로. 난 차라리 가만히 침묵을 지킨 채. 내 자신의 삶이나 살아보려고 애쓰는 게 나을 것이오. 살아갈 만한 인생이 나한테 있는지 의심스럽지만 혹 그런 게 나에게 있다면 말이오.” (P134-135)
그는 놀라워하는 표정으로 그녀를 바라보았다.
“육체적 삶이라는 것은.” 그가 말했다. “그저 동물적 삶에 불과한 거야.”
“하지만 지성만 고도로 발달하고 몸뚱이는 죽은 시체인 삶보다는 훨씬 나아요. 게다가 당신 말은 틀렸어요! 인간의 육체는 이제야 비로소 진정한 생명으로 태어나고 있을 따름이라고요. 육체는 그리스인들에게서 아름다운 불꽃을 한번 깜빡여 보았지만, 그 뒤로 플라톤과 아리스토텔레스가 그걸 밟아 꺼버렸고, 이어 예수가 나타나서는 완전히 끝장내 버리고 말았지요. 하지만 이제 육체는 진정한 생명으로 태어나고 있어요. 정말로 무덤에서 다시 살아나 일어나고 있다고요. 그리고 마침내 아름다운 우주 속에서 아름다운, 그야말로 아름다운 생명으로 피어날 거예요. 인간의 육체는 말이죠.” (P167)
나에게 정말 틀림없는 진실처럼 보이는 것이 있는데, 그게 뭐냐 하면 바로 우리에게 모든 사물의 표면인 것처럼 보이는 이 세계가 사실은 깊은 대양의 밑바닥이라는 것, 즉 이 세상의 모든 나무들은 해저에서 자라는 식물이며, 우리는 비늘옷을 입은 기괴한 해저 동물군으로서 새우처럼 죽은 고기나 먹고사는 존재라는 생각이오. 다만 어쩌다 한번씩 영혼이 우리가 살고 있는 그 헤아릴 길 없는 깊은 심연을 헤치고 헐떡이며 올라가, 진짜 공기가 있는 대기의 표면까지 높이 솟아오르곤 할 뿐이지. 확신컨대, 우리가 평소 숨쉬고 있는 공기란 것은 물이 일종이며, 남자니 여자니 하는 우리 인간들도 일종의 물고기임에 틀림없소.
하지만 때때로 우리의 영혼은 해저의 심연을 휩쓸고 다니다가 문득 솟아올라, 키티웨이크 갈매기처럼 황홀하게 빛 속으로 차고 날아오르곤 하지. 생각하건대, 인류라는 바다 속 밀림에서 동료 인간의 끔직한 해저 인생을 뜯어먹고 사는 것이 바로 우리 인간의 운명인 듯하오. 하지만 우리에겐 또 불멸의 운명이 있는데, 헤엄치며 잡은 먹이를 일단 삼키고 나면, 그곳을 탈출하여 다시 눈부신 대기 속으로 솟아올라, 늙은 대양의 수면으로부터 진정한 빛의 세계로 뛰쳐나오는 것이 바로 그것이라오. 그럴 때 우리는 자신의 영원한 본성을 깨닫게 되는 것이지.
볼턴 부인의 이야기를 들을 때면, 나는 저 아래 심해 속으로, 인간의 비밀을 지닌 물고기가 꿈틀거리며 헤엄치고 있는 바다 밑 저 아래로 뛰어드는 것 같은 느낌이 든다오. 고기를 탐하는 식욕에 이끌려 우리는 한입 가득 먹이를 잡아 물게 되는데, 그러고 나선 다시 위로, 위로 올라가, 짙은 바닷물 속으로부터 맑은 대기 속으로, 축축한 대양으로부터 마른 창공으로 솟아오르는 것이라오. 당신에게는 그런 과정을 모두 다 이야기할 수가 있소. 하지만 볼턴 부인과 함께 있으면, 그저 저 아래로 뛰어들어, 해저 밑바닥의 해초나 창백한 괴물들 사이로 끔찍하게 떨어져 내리는 것 같은 느낌뿐이야. (P239-240)
“사실 나는 군대에서 쉽게 출세할 수도 있었소. 하지만 나는 군대가 마음에 들지 않았소. 비록 병사들을 잘 다룰 수 있었을지라도 그랬소. 병사들은 나를 좋아했고, 또 내가 화가 났을 때면 나를 제법 경외하며 무서워했소. 그렇소. 군대를 죽은 곳으로 만든 것은 바로 어리석고 아귀 같은 지주 출신 고관급들이었소. 그들이 군대를 완전히 바보같이 죽은 곳으로 만들어버린 거요. 난 병사들을 좋아했고, 병사들도 나를 좋아했소. 하지만 이 세상을 지배하는 작자들이 헛소리를 지껄이고 대장 행세를 하면서 오만하고 뻔뻔스럽게 구는 작태를 난 견딜 수가 없었소. 그게 바로 내가 출세할 수 없는 까닭이오. 나는 돈의 뻔뻔스러운 오만을 증오하고, 계급의 뻔뻔스러운 오만을 증오하오. 그러니 이런 세상에서, 한 여자에게 내놓을 만한 게 나한테 뭐가 있겠소?”
“왜 뭔가를 내놓아야 한다는 거죠? 이건 거래가 아니잖아요. 그저 우리가 서로 사랑한다는 것, 그것뿐이잖아요.” 그녀가 말했다.
“아니오. 그렇지 않소! 그것만이 아니오. 산다는 것은 움직이며 앞으로 나아가는 것이오. 내 삶은 제대로 된 통로를 타고 흘러내리지 못할 거요. 그러질 못할 거요. 따라서 나는 혼자 동떨어져 폐수처럼 고여 있는, 그런 존재나 다름없소. 게다가 여자를 삶에 끌어들일 자격이 있으려면. 내 삶은 적어도 내적으로라도 뭔가를 행하고 뭔가를 성취하여, 우리 두 사람 모두를 싱싱하게 유지시켜 줄 수 있어야 하는데, 난 지금 그렇지가 못하오. 남자라면 뭔가 자기 인생의 의미를 여자에게 내보일 수 있어야 하는 법이오. 고립된 삶을 함께 살아야 하는 경우에는, 그리고 그 여자가 진정한 여자인 경우에는 말이오. 나는 그저 당신의 남자 첩(妾)으로만 살 수는 없소.” (P260-261)
젊은이들은 미칠 지경인데, 그것은 바로 쓸 돈이 없기 때문이라오. 그들의 삶은 전부 돈을 쓰는 것에 의존하고 있는데, 지금 그들에게 그 쓸 돈이 한 푼도 없는 것이오. 그게 바로 우리의 문명과 교육의 실체라오. 즉, 돈을 쓰는 것에만 완전히 의존하게끔 대중을 가르치고 길러놓는데, 그러고 나면 돈이 떨어져버리고 마는 거요. 탄광은 요즘 일주일에 이틀 아니면 이틀 반만 일한다오. 심지어 겨울이 와도 전혀 나아질 것 같지가 않소. 이건 곧, 광부 한 사람이 25내지 30실링으로 가족을 부양한다는 걸 뜻하오. 여자들이 제일 미쳐 날뛰고 있소, 하지만 그들이 요즈음 미쳐 날뛰는 것은 그 무엇보다 돈을 쓰지 못하기 때문이라오.
인생을 사는 것과 돈을 쓰는 것이 같지 않다고 사람들에게 말할 수만 있다면 좋겠소! 하지만 소용없는 일이오. 돈을 벌고 쓰는 것 대신에 인생을 사는 법을 사람들이 배워 깨우치기만 한다면, 그들은 25실링으로도 아주 행복하게 생활을 꾸려나갈 수 있을 거요. 남자들이 내가 말한 대로 주홍색 바지를 입고 다닌다면, 그들은 그토록 돈을 중요시하지 않을 것이오. 춤추고 뛰고 깡충거리며, 노래하고 활기차게 걷고 당당하니 멋진 모습이 될 수만 있다면, 그들은 돈이 거의 없어도 잘 지낼 수 있을 거요. 그러곤 여자들을 즐겁게 해주며 또 자신들도 여자들에게서 즐거움을 얻을 수 있을 거요. (P315-316)