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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노용헌 Aug 31. 2023

알프레트 되블린의 <베를린 알렉산더 광장>

영화 <베를린 알렉산더 광장> 2020년

<베를린 알렉산더 광장>은 모든 것을 빼앗겨버린 사람에 관한 오디세이다. 나라, 사랑, 그리고 심지어 몸까지도. 파스빈더 감독의 걸작 이후 <베를린 알렉산더 광장>을 영화화 하는 것은 불가능해 보이지만, 부르한 쿠르바니 감독은 알프레드 되블린의 소설을 완벽하게 현대적으로 각색한다. 때로는 풍부한 색채와 강렬함으로, 혹은 폭력과 성적 묘사를 통해 <베를린 알렉산더 광장>은 2020년의 독일이 1920년대의 독일과 얼마나 유사한지를 보여준다. 아프가니스탄 출신 부르한 쿠르바니 감독의 <베를린 알렉산더 광장>은 최근 몇년 간 독일 최고의 작품 중 하나다.   

  

[1]

이 책은 베를린의 시멘트 공장 노동자이자 운송 노동자였던 프란츠 비버코프에 관한 보고서이다. 그는 과거에 저지른 어떤 일 때문에 형무소 생활을 하고 풀려나 이제 다시 베를린에 돌아와 바르게 살기로 마음먹는다.

처음에는 모든 일이 순조롭다. 그러나 경제적으로는 그런데로 괜찮았지만 외부에서 느닷없이 운명처럼 들이닥치는 알 수 없는 무언가와의 모진 싸움에 휘말린다.

알 수 없는 그 무언가는 세 번씩이나 이 사나이를 덮쳐 인생 계획을 망쳐 놓는다. 그것은 사기와 기만으로 그를 덮친다. 그래도 이 사나이는 다시 벌떡 일어나 꿋꿋하게 버틴다.

이제 그것은 그를 치사하게 발로 차고 두들겨 팬다. 그는 도무지 일어설 수가 없다. 카운트아웃 직전이다. 

결국 그것은 무지막지한 힘으로 그를 때려눕힌다. 

그리하여 끝까지 완강하게 버티던 우리의 선량한 사나이는 길게 뻗어 버린다. 그는 패배를 인정하고 막막한 상태에 빠진다. 완전히 끝장난 것 같다. 

그러나 돌아올 수 없는 최후를 목전에 두고 있던 그는 내가 여기에 기록하지 않은 어떤 방법을 통해 눈을 번쩍 뜬다. 어쩌다 자신의 인생이 그렇게 되었는지 이제 그는 훤히 깨닫는다. 바로 그 자신에게, 그리고 이제 분명해진 사실이지만 그 자신의 인생 계획 자체에 원인이 있었다. 그의 인생 계획은 애당초 별문제 될 것이 없어 보였지만 지금에 와서 보니 그게 아니었다. 전혀 소박하지도 않았고 마땅히 가야 할 길을 간 것도 아니었다. 거만하고 뭘 몰랐으며 뻔뻔스러웠고 게다가 비겁하고 허점투성이였다. 

끔찍하기 그지없던 그의 인생이 이제 나름의 의미를 찾는다. 프란츠 비버코프에게 강제 치료법이 행해진 결과였다. 끝에 가서 우리는 이 사나이가 알렉산더 광장에 다시 서 있는 모습을 본다. 많이 변하고 망가졌지만 그래도 다시 제대로 펴진 모습이다. 

이것을 관찰하고 또 이것에 귀 기울이는 것은 프란츠 비버코프처럼 인간의 모습을 하고 살아가면서, 바로 이 프란츠 비버코프처럼 인생에서 한 조각 버터 식빵 이상의 것을 얻으려는 사람들에게 뭔가 도움이 될 수 있을 것이다.               (P7-8)     

알렉산더 광장, 그루너 가 1번지, 전찻길 옆에 멋진 건물 하나가 있다. 그것은 바로 전과자 갱생 보호소이다. 그곳의 직원들은 프란츠를 살펴보고는 이것저것 질문을 하더니 이렇게 서명한다. 프란츠 비버코프 씨는 우리에게 보호 감독을 요청하였으므로, 우리는 귀하가 일할 자리가 있는지 알아볼 것이고 귀하는 매달 이곳에 나와 주어야 합니다.          (P61)     


이렇게 해서 시멘트 공장 노동자로, 뒤에는 가구 운송 노동자였던 프란츠 비버코프, 즉 거부감을 일으키는 외모에 거칠고 투박한 이 사내가 다시 베를린의 거리에 나타났다. 어느 철물공 집안의 예쁜 처녀를 홀려서 창녀로 만들고 결국에 주먹질로 죽게 만든 그 사내다. 그는 온 세상과 스스로를 향해 앞으로는 바르게 살겠다고 다짐까지 한 터이다. 그리고 실제 수중에 돈이 있는 동안에는 바른 삶을 살았다. 그러나 시간이 흐르자 그 돈도 다 떨어지고 말았다. 그러나 그것이야말로 그가 모든 사람들을 향해 자신이 어떤 놈인지 보여 주려고 기다려 마지않던 순간이었다.                  (P64)     

혁명? 깃발을 내려 기름 봉지에 싸서 옷장에나 집어넣어라. 엄마한테 슬리퍼를 가져다 달라 하고 새빨간 넥타일랑 풀어 버려라. 너희들은 혁명을 늘 입으로만 할 뿐이야. 너희들의 공화국이란 산업 재해에 지나지 않아.

드레스케는 속으로 생각한다. 이 친구 위험한 물건이 되겠어. 리하르트 베르너, 이 풋내기 멍청이가 또 주둥이를 놀리는군. “아마도, 프란츠, 당신은 전쟁을 다시 시작했으면 하는 것 같군요. 전쟁터로 우리 등을 떠밀고 싶어 하는군요. 흥겹게 프랑스를 정복하자! 그래 봤자 당신 바지에 큼직한 구멍이나 생길 뿐이에요.” 프란츠는 생각한다. 원숭이 같은 녀석, 혼혈아, 검둥이들의 천국, 이 녀석은 전쟁을 영화로만 알고 있는 놈이야. 대갈통을 한 방 먹여 꺼꾸러뜨리고 싶군.              (P128)     


그는 읖조린다. “그대 만일, 오, 인간아, 이 세상에서 사나이로 살아가려면, 산파의 손에 의해 이 세상 햇빛을 보기 전에 찬찬히 고민해 보아야 하리라! 이 세상은 고통의 둥지인 것을! 이 시를 지은 시인의 말을 믿으라, 늘 이 맛없는 단단한 음식을 씹고 있는 시인의 말을! 괴테의 <파우스트>에서 슬쩍해온 인용구를 보자. 사람은 무릇 어머니 배 속에 있을 때만 인생이 즐거운 법이다! ....... 훌륭한 아버지 국가가 있어 그대를 아침부터 밤늦게까지 부려 먹나니, 국가는 금지의 법과 조례로 그대를 괴롭히고 고통을 준다. 국가의 첫 번째 계명은 ‘어이, 돈을 내놔!’이고, 두 번째 계명은 ‘주둥이를 닥치고 있어라!’이다. 그렇게 해서 그대는 미명과 어둠 속에서 살아간다. 그리하여 때로 그대는 진득한 불만을 술집에서 맥주나 포도주로 풀어 버리려 하지만 잽싸게 찾아오는 것은 숙취뿐, 그러는 사이 세월은 그대의 문을 두드리고, 머리는 좀이 먹어 시들어 가고, 뼈대는 위험스레 우지끈거리고, 사지는 축 처져 이울어 가고, 알곡은 뇌 속에서 시큼한 냄새를 풍기기 시작하고, 실타래는 점점 더 가늘어진다. 한마디로 그대는 이제 가을이 왔음을 알고 숟가락을 내려놓고 죽어 간다. 이제 나 이렇게 떨며 그대에게 묻는다. 오, 친구여, 인간이란 무엇인가? 인생이란 무엇인가? 우리의 위대한 실러는 이미 이렇게 말하지 않았던가. ‘인생이란 우리 인간이 가진 것 중 최고의 것은 아니다.’ 그러나 나는 이렇게 말하고 싶다. 인생이란 닭장의 사다리일 뿐, 저 위에서 계속해서 아래로 내려가는.”

모두 조용하다. 잠시 사이를 두었다가 프란츠가 말한다. “그래, 이게 바로 그 친구가 지은 시요, 그는 하노버 출신이었지요. 나는 이 시를 지금까지 마음속에 담아 두었소. 어때, 멋지지 않소? 인생을 잘 표현한 것 같은데, 좀 씁쓸하지.”             (P136-137)      

  

그날 저녁엔 그 밖의 다른 일은 없었다. 그러나 프란츠는 이제 프렌츨라우 거리를 전보다 더 자주 찾기 시작했으며 낡은 군복 외투를 걸친 그 사내와 곧 말을 텄다. 괜찮은 친구였다. 다만 말을 심하게 더듬었기 때문에 뭔가 입 밖으로 내려면 시간이 많이 걸렸다. 때문에 그렇게 눈빛이 애절해 보였다. 그러나 감방에 다녀온 경험은 없었다. 다만 전에 정치에 연루되어 한 가스공장을 날려 버리기 일보 직전까지 갔다가 발각된 적이 있었다. 그러나 잡히지는 않았다. “지금은 뭘하고 있소?” “과일 장사 같은 걸 하지요. 그냥 남 장사하는 거 거들어 주는 정도죠. 그것도 여의치 않으면 실업 수당이나 받아먹는 거지요.” 프란츠 비버코프는 이 묘한 녀석들과 관계를 맺게 되었다. 이곳에 오는 대부분의 녀석들은 웃기게도 대부분 ‘과일’ 장사를 하고 있었다. 그러면서도 장사는 제법 잘했다. 얼굴이 삶은 가재처럼 새빨간 그 친구가 물건을 공급했다. 그 친구가 도매상이었던 셈이다. 프란츠는 그 치들에게서 거리를 두었고, 녀석들 역시 그와 거리를 두었다. 그는 그 친구들이 하는 일이 도대체 어떻게 돌아가는 건지 알 수가 없었다. 그는 속으로 이렇게 말했다. 신문팔이나 하자.            (P281-282)     


어느 날 저녁, 군복 외투의 사내는 -- 그의 이름은 라인홀트였다 -- 아주 많은 말을 했다. 아니 더듬대며 많은 말을 했다. 아무튼 평소보다 훨씬 유창하고 빨랐다. 녀석은 여자들 욕을 해 댔다. 프란츠는 배꼽을 쥐고 웃었지만 그 젊은 친구는 여자 일을 심각하게 생각했다. 녀석에게 그런 면이 있을 줄은 전혀 생각지 않은 터였다. 이 녀석도 맛이 갔군, 이곳에 있는 녀석들은 다 맛이 갔어. 저 녀석도 그렇고, 저기 저 녀석도, 제정신인 놈은 아무도 없어, 그 젊은 친구는 맥주 배달하는 트럭 운전사의, 아니, 그 조수의 마누라와 놀아났다. 그 여자는 진작 녀석 때문에 남편을 버리고 집에서 도망쳐 나온 상태였다. 그런데 문제는 지금에 와서는 녀석이 그 여자가 싫어졌다는 것이었다.              (P282)     

“예레미야가 말하기를, 인간을 믿고 육신만을 방패로 삼고 마음은 주에게서 멀어져 있는 자는 저주를 받으리라. 그는 황야에 버려진 자와 다름없어 선한 것이 찾아와도 알아보지 못하거늘. 그는 메마른 땅에, 황야에, 사람이 살지 않는 소금 덩어리 땅에 머물 것이다. 주를 믿고 주를 희망으로 삼는 자는 축복이 있으리라. 축복이 있으리라. 축복이 있으리라. 그는 물가에 심어진 나무와 같아 뿌리를 냇물 속으로 뻗으리라. 더위가 닥쳐도 끄떡없고 잎은 늘 푸르러 가뭄이 드는 해에도 걱정할 것 없으리니 그침 없이 열매를 맺을 것이니라. 이 세상에서 가장 간사한 것이 사람의 마음이니 사악하기 이를 데 없다. 그러니 누가 사람의 마음을 알 수 있겠는가?”

울창한 검은 숲 속의 물이여, 무섭도록 검은 물이여, 너희는 그냥 말없이 조용하구나. 너희는 무섭도록 조용히 있구나. 숲속에 폭풍이 휘몰아쳐 소나무들이 휘어지고 나뭇가지 사이의 거미줄이 찢겨 바람에 흩날려도 너희의 수면은 꼼짝도 않는구나. 그때 너희 검은 물들은 저 움푹한 곳에 고여 있고 거기 나뭇가지들이 떨어진다. 

바람이 숲을 쥐고 흔들어도, 폭풍은 너희들 있는 그 아래까지는 도달하지 못한다. 너희들의 밑바닥에는 용도 없으며, 매머드의 시절은 갔다. 그곳엔 우리를 깜짝 놀라게 할 그 무엇도 없다. 너희의 안에서는 식물들은 썩어가고, 물고기와 달팽이들만이 움직인다. 그 이상의 것은 없다. 그러나 설사 그렇다 해도, 너희가 물에 지나지 않는다 해도, 너희는 섬뜩하다. 검은 물이여, 무섭도록 조용한 물이여.                      (P316-317)  

   

프란츠는 어두컴컴한 현관에 혼자 서 있다. 온몸이 덜덜 떨린다. 내가 왜 여기 서 있는 거지? 이 자식들이 나를 감쪽같이 속여 넘겼어. 그 개자식은 나한테 주먹까지 날리고, 이놈들이 지금 저 안에서 도둑질을 하고 있어. 도대체 뭘 훔치는 거지? 이 녀석들은 분명 과일 장사하는 놈들은 아니야. 도둑놈들일 뿐이야. 검은 나무들이 쭉 늘어서 있는 가로수 길, 철문, 철문이 닫히면 죄수들은 모두 취침해야 한다. 여름에는 어두워 질 때까지 깨어 있는 것이 허락된다. 이 자식들은 품스가 지휘하는 깡패 집단이야. 도망쳐야 하나, 말아야 하나, 그렇게 해야 하나, 뭘 해야 하나, 녀석들은 나를 이곳으로 유인했어. 도둑놈 새끼들, 나를 여기 서서 망이나 보게 만들다니.              (P336)     

이렇게 태양이 떠오르면 우리는 기뻐하는데, 사실 슬퍼해야 할 일이 아닌가, 태양은 지구보다 30만 배나 크고, 또 얼마나 많은 수와 영이 있는가, 이런 상황에서 우리는 영, 무, 그래, 완전히 무에 지나지 않음을 인정할 수밖에 없는데, 우리 인간이 뭐라고, 그러니 태양이 뜬다고 기뻐하는 일이 얼마나 부질없는 짓인가.

그래도 아름다운 햇빛이 비치면, 희고 강렬한 햇살이 비치면 우리는 기뻐한다. 그리고 햇빛이 거리를 비추면 우리는 기뻐한다. 방마다 온갖 색깔들이 잠에서 깨어나고, 얼굴들도, 표정들도 거기 나타난다. 형체들을 손으로 만져 보는 것은 기분 좋은 일이다. 그러나 보는 것, 보는 것은, 색깔을 보는 것, 선을 보는 것은 행복이다. 그래서 우리는 기뻐하고 우리가 무엇이며 우리가 살아가고 행동하는 모습을 보여 줄 수 있다. 우리는 4월의 약간의 따뜻함에도 기뻐하고, 꽃이 자라나는 것을 보면서 기뻐한다. 그러므로 그 모든 영과 함께 그 끔찍한 숫자들은 오류요 착오일 뿐이다. 

태양아, 솟아라, 너는 우리를 놀라게 하지 않으니. 너의 그 엄청난 크기에 우리는 신경 쓰지 않는다. 너의 직경이나 체적에도, 따뜻한 태양이여, 솟아라, 밝은 빛이여, 솟아라, 너는 크지도 않고 작지도 않으며, 너는 그저 기쁨일 뿐이다.              (P341-342)    

 

[2]

그러나 나무토막처럼 누워 있을 뿐 아무것도 입 밖에 내지 않는 자, 그게 누구인가, 그것은 바로 프란츠이다. 나 좀 내버려둬, 나 좀 내버려 두라고. 한쪽 팔이 없어졌어. 그것은 다시 돋아나지 않는다. 놈들은 나를 차 밖으로 내동댕이쳤다. 그래도 머리는 남겨 두었다. 우리는 앞으로 나아가야 한다. 우리는 극복해야 한다. 진흙탕에 빠진 수레를 끌어내야 한다. 그러기 위해서는 우선 기어 다니기라도 해야 한다.            (P30)     


“한마디로 우리는 헛소리나 지껄이려고 이곳에 온 것이 아닙니다. 그것은 국회에 가 있는 인간들이나 하는 짓입니다. 어떤 사람이 우리 동지들 중 한 사람에게 혹시 국회에 진출할 생각이 없느냐고 물은 적이 있습니다. 황금 지붕에 안락의자가 있는 그곳 말입니다. 그러자 우리의 동지는 이렇게 말했지요. 이보게, 동지, 내가 국회에 진출하면, 그건 그저 사기꾼 하나 더 느는 것에 지나지 않아. 잘 알지도 못하면서 입만 나불댈 그럴 여유가 우리에겐 없습니다. 다 부질없는 짓이니까요. 공산주의자들은 아주 진지하게 이렇게 말합니다. 우리는 폭로의 정치를 하겠다고, 그렇게 해서 드러난 게 무엇인지 우리는 보았지요. 공산주의자들 자신이 타락해 버린 것이지요. 우리는 그들이 말하는 폭로 정치에 말을 소모할 필요는 없습니다. 그것은 사기입니다. 무엇을 폭로해야 할지는 독일에서는 장님도 다 봅니다. 그것 때문에 굳이 국회까지 갈 필요는 없습니다. 그러나 그것을 보지 못하는 사람은 어쩔 도리가 없습니다. 국회가 있든 없든 상관없는 얘기죠. 입만 살아 있는 이 사랑방이라는 것이 국민을 속이는 것 외에는 아무 쓸모가 없다는 사실은 이른바 노동자 계층을 대표한다는 사람들만 빼놓고 모든 당에서 다 알고 있습니다."       (P93-94)     

“여러분은 뭔가 체험하게 될 것입니다. 그러나 그것은 무지몽매의 영원한 순환뿐입니다. 모든 것은 변하지 않고 그대로 있을 테니까요. 의회주의는 노동자들의 비참함만 연장할 뿐입니다. 그들은 또 사법부의 위기를 논하면서 말하지요. 사법부를 개혁해야 한다. 머리와 몸통을 몽땅 개혁해야 한다. 법관들 역시 개혁의 대상이다. 이들은 공화제에 걸맞게 변해야 한다. 국가 질서의 유지에 걸맞게, 정의에 걸맞게, 우리는 새로운 판사를 원하지 않습니다. 우리는 이 사법부 대신 다른 사법부를 원하는 게 아니라 사법부 자체를 원치 않습니다. 우리는 직접적인 행동을 통해 국가 기관들을 모조리 무너뜨려야 합니다. 우리는 그것을 위한 수단을 갖고 있습니다. 바로 노동의 거부입니다. 모든 바퀴를 멎게 하는 것입니다. 이것은 그냥 말로만 하자는 게 아닙니다. 우리는, 남녀 동지 여러분, 의회주의와 복지를 비롯한 모든 사회 정책의 달콤한 술수에 걸려들어 잠이 들어서는 안 됩니다. 우리가 아는 것은 다만 국가에 대한 증오와 무법과 자립뿐입니다.”       (P97)     

--현존 사회질서는 노동 계층의 경제적, 정치적, 사회적 노예화에 바탕을 두고 있다. 이것은 소유권, 즉 소유의 독점과 권력의 독점이라는 형태로 표현된다. 인간이 갖는 자연스러운 욕구의 만족이 아니라 이익에 대한 전망이 오늘날 생산의 근거이다. 어느 것이든 기술의 발전은 광범위한 사회 계층의 궁핍에 대해서는 아랑곳하지 않고 자본가 계층의 부만을 무한대로 늘려 줄 뿐이다. 국가는 자본가 계층의 특권을 보호하고 대부분의 민중을 억압하는 데 봉사할 뿐이며, 온갖 수단의 간계와 폭력을 동원하여 독점과 계급 차이를 고착화하는 데 일익을 담당한다. 국가의 성립과 함께 위로부터 아래로의 인위적인 조직의 시대가 시작된다. 이제 개인은 꼭두각시일 뿐이며 거대한 메커니즘 속의 죽은 바퀴이다. 각성하라! 우리는 다른 모든 사람들처럼 정치권력을 쟁취하기 위해 노력할 것이 아니라 정치권력을 뿌리째 제거하기 위해 노력해야 한다. 이른바 입법기구에 들어가 일하지 말라. 그곳에 가면 노예인 여러분이 결국 자신의 노예 신분을 확인하는 법의 도장을 찍도록 유혹당할 뿐이다. 우리는 자의적으로 그어진 모든 정치적, 국가적 경계를 배척한다. 민족주의는 근대 국가의 종교이다. 우리는 어떤 형식의 민족 통일도 배척한다. 그 배후에는 자본가의 지배가 숨겨져 있으므로, 각성하라!--     (P98)     

라인홀트는 그때 경찰국에 가서 조사를 받으면서 뭔가 좋지 않은 일이 다가오고 있음을 금방 알아차렸다. 그래서 그는 프란츠를 이 일에 끌어들이기로 한다. 프란츠가 그렇게 하지 않았다고 할 수도 없거든. 함석장이 카를 같은 녀석이 무엇을 증명할 수 있겠어? 혹시 프라이엔발데에서 나를 본 사람이 있는지 없는지는 모를 일이다. 어쩌면 레스토랑이나 길거리에서 나를 본 사람이 있을지도 모른다. 하지만 신경 쓸 것 없어. 일단 한번 해 봐야지, 프란츠를 어디론가 떠나보내야 한다. 그러면 그가 이 일에 가담한 것처럼 보일 테니까.         (P280)     

만일 내가 라인홀트 녀석을 붙잡으면 그러면 나의 분노도 누그러질 텐데. 그러면 녀석의 목을 잡아 비틀어서 더는 살지 못하게 해 줄 텐데. 그러면 내 기분도 더 좋아질 텐데. 그러면 내 마음도 흡족할 텐데. 그러면 모든 게 공평할 텐데. 그러면 나도 마음의 평화를 누릴 텐데. 그러나 그 개 같은 자식은 내게 온갖 나쁜 짓을 다 저지르고 나를 다시 범죄자로 만들어놓고 내 팔마저 부러뜨린 그 자식은 스위스의 어디에선가 나를 비웃고 있을 것이다. 나는 지저분한 똥개처럼 비참한 꼴로 이리저리 헤맬 뿐, 녀석은 마음대로 나를 가지고 논다, 내 편을 들어주는 사람 하나 없고, 경찰마저 내가 미체를 죽이기라도 한 것처럼 나를 잡으려 혈안이다. 그런데 나를 그 사건에 읽어 넣은 것도 그 악당 자식의 짓이다. 꼬리가 길면 밟히는 법이다. 나는 견딜 만큼 견뎠으며 할 만큼 했다. 그 이상은 못 하겠다. 누구도 내가 방어하지 않았다고는 말하지 못할 것이다. 그러나 참는 데도 한계가 있다. 라인홀트를 죽이지 못하니 내 스스로 목숨을 끊을 수밖에, 나는 북을 치고 나팔을 불며 지옥으로 달려간다.         (P314)     

술을 많이 먹어 코가 빨간 한 노인이 프란츠의 침대에 걸터 앉아 있다. “어이, 눈 좀 떠 봐, 내 말 들리지, 나도 자네와 같은 처지야. 홈, 스위트 홈, 즐거운 집, 그게 내겐 땅 밑이야. 집이 없으면 땅 밑으로 들어가야지. 세대가리 자식들이 나를 혈거인으로 만들려고 해, 동굴 속에 사는 인간 말이야. 나더러 이 동굴 속에 처박혀 살라는 거지, 자네 혹시 혈거인이라는 게 뭔지 알아? 우리 같은 사람을 바로 혈거인이라고 하는 거야. 어서 깨어나라, 이 세상의 저주받은 자들아, 굶주림에 허덕이는 자들아, 너희는 민족을 사랑하는 고귀한 마음에서 전쟁의 희생물이 되었다. 너희는 모든 것을 바쳤다. 민족과 생명과 행복과 자유를 위해, 그게 바로 우리라고, 독재자는 호화스러운 방에서 배부르게 먹으며 불안한 마음을 술로 달랜다네, 그러나 한쪽 손은 이미 오래전부터 진수성찬의 식탁 위에다 언제 들이닥칠지 모를 위험의 글자를 쓰고 있다네. 나는 독학자야, 나는 말이야, 모든 것을 내 스스로 깨우쳤다고, 다 교도소와 여기 이 요새에서 배운 거야, 녀석들은 지금 나를 이곳에 가두고서 우리 백성에게 금치산을 선고하는 거야, 녀석들은 나를 사회의 안정을 위협하는 존재로 보는 거지. 그래, 맞아, 나는 원래 그런 사람이야, 나는 생각이 자유로운 사람이야.          (P353)     

죽음이 천천히 노래한다. 

“이제 드디어 내가 네 앞에 나타날 때가 되었구나, 벌써부터 씨앗이 창문 밖으로 날리고 너는 이제 더는 누워 있지 않을 것처럼 침대 시트를 털고 있으니 말이다. 나는 단순히 낫질하는 자고 아니요 단순히 씨를 부리는 자도 아니다. 내가 이 자리에 온 까닭은 지키는 것이 내 의무이기 때문이다. 오, 좋아! 오, 좋아! 오, 좋아!”

오, 좋아! 죽음은 매 연이 끝날 때마다 이렇게 노래한다. 힘찬 동작을 할 때에도 그는 오, 좋아! 하고 노래한다. 그러면 기분이 좋아지기 때문이다. 그러나 그 소리를 듣는 자들은 눈을 감아 버린다. 그 소리가 참기 힘들기 때문이다. 

천천히, 천천히, 죽음은 노래한다. 사악한 창녀 바빌론이 그의 노래에 귀를 기울이고, 세찬 폭풍들도 귀를 기울인다. 

“나는 여기 서서 기록해야 한다. 이곳에 누운 채 자신의 생명과 육체를 내놓은 자는 프란츠 비버코프이며, 어디에 있든 그는 자기가 가는 길이 어디인지, 자기가 원하는 게 뭔지 알고 있다고.”               (P366-367)    

 

제일 먼저 찾은 곳은 알렉산더 광장이다. 광장은 여전히 그대로 있다. 눈에 띄는 것은 아무것도 없다. 매서운 추위가 겨울 내내 기승을 부렸으니까. 사람들도 일을 하지 않았고 하던 일을 그대로 버려두었다. 그 거대한 증기 항타기는 지금은 게오르겐키르히 광장에 서 있다. 사람들은 하안 백화점의 파편더미를 파내는 중이다. 많은 레일을 박아 놓은 것으로 보아 역이 들어설 모양이다. 알렉산더 광장에서는 그 밖에도 많은 일들이 진행 중이다. 그러나 무엇보다 중요한 것은 알렉산더 광장이 여전히 있다는 것이다. 그리고 알렉산더 광장에는 여전히 사람들이 지나다닌다. 진창이 엄청나다. 베를린 시 당국은 너무나 고상하고 인간적이어서 눈이 몽땅 저절로 천천히 녹아 진창이 되도록 전혀 건드리지 않는다.         (P398)    

 

눈을 뜨고 있어라, 눈을 뜨고 있어라, 이 세상에서는 뭔가 일어나고 있으니, 이 세상은 설탕으로 만들어진 게 아니다. 녀석들이 가스탄을 던지면 나는 질식해 죽을 수밖에 없다. 녀석들이 왜 던졌는지 알 수도 없는 노릇이다. 그러나 그게 문제가 아니다. 이미 그런 것에 대비할 태세가 되어 있어야 한다. 

전쟁이 터져 내가 징집을 당하고, 왜 그런지 그 이유를 모르고 내가 관여하지 않았는데도 전쟁이 터졌다면 그것은 내 잘못이다. 당해도 싸다. 눈을 뜨고 있어라, 눈을 뜨고 있어라, 사람은 혼자 살아가는 게 아니다. 우박이 쏟아지고 비가 내려도 우리는 어쩔 도리가 없다. 그러나 다른 많은 것은 막아 낼 수 있다. 그래, 이제 나 지난날처럼 소리치지 않겠다. 운명, 운명이라고, 운명이라는 말로 경배할 것이 아니라 그것을 눈여겨보고 움켜잡아 박살을 내야 한다. 

눈을 떠라, 앞을 보라, 조심하라, 수천이 같은 편이다, 눈을 뜨지 않는 사람은 조롱을 받거나 체포당하리라.            (P40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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