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진에 관한 짧은 단상-330
사진은 보이는 것을 찍는다고 믿는다. 보이지 않는 것이 사진에 찍힐 리가 있을까. 사진의 정확하고, 과학적인 데이터는 보이는 것을 재현한다고 생각한다. 그러나 많은 사진가들은 여기에 상상을 덧붙인다. 보이지 않는 것도 사진에 담았다고, 그것이 냄새이든, 소리이든 말이다. 로버트 프랭크(Robert Frank)의 <미국인들The Americans> 사진집을 보면, <과자 가게-뉴욕시Candy Store–New York City, 1955/56>에서의 주크박스(jukebox), 또는 <시카고 정치 유세Political Rally–Chicago>(Man with Sousaphone, 1959)에서의 수자폰(Sousaphone)을 통해서 사진 안에 담겨진 소리를 과연 우리는 들을 수 있을까. 음악가의 연주 장면을 촬영한 사진을 본다고 그 안(현장에서)에 울려 퍼지는 소리는 그 현장에 있었던 사람만이 느낄수 있는 것이 아닐지. 우리는 사진의 내포된 소리는 상상으로 유추할 뿐이다. 그 소리가 어떠했는지는. 2014년에 개봉한 프랑스 영화 <마담 프루스트의 비밀정원>에서처럼, “기억은 약국의 조제실과도 같아서 손을 뻗으면 때로는 진정제가, 때로는 독약이 잡힌다”, 마르셀 프루스트(Marcel Proust)의 소설 <잃어버린 시간을 찾아서>에서 마들렌의 냄새는 소설 속에서만 가능한 냄새일지 모른다. 사진에 냄새가 담길 수 있을까. 현상액과 정착액에 담근 사진의 냄새만 기억난다.
예술은 ‘보이는 것과 보이지 않는 것’에 무한 부딪힘이라고 말한다. 라캉은 ‘응시이론’을 통해서, 메를로 퐁티는 ‘상호 신체성’을 통해서, 들뢰즈는 ‘촉지적 감각’을 통해서 이야기한다. 메를로 퐁티의 사후에 발간된 유작으로 <보이는 것과 보이지 않는 것>에서 그는 살과 색의 존재론을 주장하였다. 그는 ‘주체(의식)-대상’의 관계에서 ‘대상’을 ‘지시하는 것’과 ‘지시당하는 것’이란 이분법적 사고에서 존재를 설명하고 있다. 하이데거의 존재론에 영향을 받은 ‘살(chair)의 개념’에서 ‘살’은 지각으로 느껴지는 물질적인 육체성을 의미한다. ‘지각 이면에 숨겨져서 보이지 않던 존재의 의미가 생생하게 느껴지는 것’이 보이지 않는 것이 분명하게 느껴지는 그 ‘무엇’인 셈이다. 그러나 시각만으로 모든 감각을 일깨우기에는 한계를 갖는다고 여겨진다. 사람은 청각과 촉각, 미각등의 감각으로 총체적으로 느끼기 때문이다.
영화 <보이는 것과 보이지 않는 것(The Seen and Unseen)>(2017), 호반문화재단의 컬렉션으로 선보이는 전시 <ACT3, ALLEGORIA-보이는 것과 보이지 않는 것>은 메를로 퐁티(Maurice Merleay-Ponty)의 저서 <보이는 것과 보이지 않는 것>에서 제목을 빌린 것이 아닐까 여겨진다. 모든 예술의 한계는 보이지 않는 것에 대한 갈망일지 모른다. 보이지 않는 것을 본다는 것은 마치 성경에서처럼, 예수가 토마스에게, “너는 나를 보고서여 믿느냐? 보지 않고도 믿는 사람은 행복하다”라고 말하듯이, 인간은 보이지 않는 것을 보기란 쉽지 않다. 인간은 항상 의심하는 사람이 아닐까. 인간은 하지말라는 것은 더 하고 싶은 것이 인간이 아닐지. 에우리디케가 독사에게 발뒤꿈치를 물려 죽자 오르페오는 저승에 가서 신 하데스를 만난 그의 아내 에우리디케를 돌려달라고 설득하여 그의 아내를 되찾아 지하세계를 빠져나갈 때, 뒤를 돌아보지 말라는 조건을 잊고 뒤를 돌아보고 말았다는 신화처럼 사람은 아마도 보이지 않는 것에 대한 의심을 가진다. 보이는 것이 존재하는 것이라고, 보이지 않는 것은 존재하지 않는 것이라고.
내면을 보기는 쉽지 않다. 대부분의 인상은 외면만 보이기 때문이다. 물론 꿰뚫어 보는 사람도 있을 수 있겠지만. 내면은 외피에 가려져 있다. 겉모습만 보고 판단하는 것이 얼마나 위험한 생각일지 모른다. 사진은 그 내면에 담겨진 함의(기표가 아닌 기의)를 알려고 하는 행위 자체가 사진의 해석의 문제이다. 모든 사진은 행위의 분절(사진은 초 분단위로 짤려진다)된 장면들이다. 1/500분의 1초로 사건은 분절되는 초분광(hyperspectral imaging) 이미지이다. 행위자가 있고, 그 행위(사건)은 분절되기 때문에 맥락을 이해하기 전까지는 이해할 수 없다. 맥락은 보이지 않는 영역이다. 우리는 가시영역, 보이는 영역만을 이해하고, 적외선이나 자외선등 보이지 않는 영역은 이해할수 없다. 보이지 않기 때문이다. 마찬가지로 행위 또한 맥락(전후관계, 인과관계)을 보지 않고서, 또한 연극의 무대 이면(뒤에서 존재하는 것들)에도 그렇다. 보이는 무대만이 지각되는 것이다. 그 막은 사진가 이명호의 작업 ‘사진-행위 프로젝트(Photography-Act Project)’ 혹은 ‘예술-행위 프로젝트(Art-Act Project)’로 불리는 일련의 작업들에서 나타난다. 막을 세운 나무는 보이지만, 막 뒤의 모습은 보이지 않는 영역이다. 사건의 행위에서도 맥락을 이해하지 못한다면 보이지 않는 것들의 예는 많다. 에디 아담스가 촬영한 1968년 ‘사이공식 즉결 처형’이라는 제목의 유명한 사진에서처럼, 당시 상황과 맥락을 이해하지 못한다면 단순히 권총으로 남베트남군 정보국장이자 경찰청장인 ‘응우옌 응옥 루안’장군이 처형한 사람이 평범한 시민이 아니라 사이공 일대에서 강간 및 살인을 일삼던 인물이었다는 것은 사실 사진은 이야기하지 않는다. 단지 권총으로 즉결 처형하는 모습, 행위만 보이기 때문이다. 12월 2일 광화문 파이낸스빌딩앞 화단에 조성된 크리스마스 트리 전구들의 모습을 촬영했었다. 전구에 초점을 일부러 맞추지 않고 뒤에 초점을 맞추어 마치 보케(Bokeh)사진을 만들었다. 보이는 대로 찍지 않고 일부러 배경을 흐리게 아웃포커싱을 한 것이다. 보이는 것이 아니라 보이지 않는 것 사진은 과연 얼마나 보이지 않은 것을 담을 수 있을지 궁금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