영화 <무기여 잘있거라> 1957년
<무기여 잘있거라>(1932)
그해 여름도 다 지나갈 무렵 우리는 강과 들판을 사이에 두고 산들이 바라보이는 어느 마을의 민가에 머물고 있었다. 강바닥에는 햇볕을 받아 바싹 마른 자갈과 둥근 조약돌이 하얗게 빛나고 있었고, 여울목에는 푸르고 맑은 물이 빠르게 흐르고 있었다. 군인들이 집 옆 도로를 따라 내려가자 그들이 일으킨 먼지가 분처럼 뽀얗게 나뭇잎에 내려앉았다. 나무줄기도 먼지도 뒤집어썼으며, 그해는 유난히 나뭇잎도 일찍 떨어졌다. 도로를 따라 진군하는 보대며, 뽀얗게 피어오르는 먼지며, 미풍에도 우수수 떨어지는 나뭇잎들이며, 행군하는 병사들의 모습이 보였다. 그들이 지나간 도로는 희뿌옇게 텅 빈 채 나뭇잎만 뒹굴었다.
들판은 곡식으로 풍성했다. 과수원이 많았지만 들판 너머 산들은 갈색 맨살을 드러내고 있었다. 산에서는 전투가 벌어지고 있어 밤이 되면 대포에서 내뿜는 섬광이 번쩍였다. 어둠속에서 번쩍이는 섬광은 마치 여름날의 번갯불 같았다. 그러나 밤이면 날이 서늘해졌고 폭풍우가 몰아닥칠 기미는 보이지 않았다. (P11-12)
“생각 좀 한다는 사람은 모두 무신론자지. 물론 그렇다고 프리메이슨을 믿는 건 아니지만.” 소령이 말했다.
“전 프리메이슨을 믿습니다. 훌륭한 결사 조직이지요.” 중위가 말했다. 바로 그때 누군가가 식당 안에 들어왔다. 문이 열리면서 밖에 눈이 내리는 것이 보였다.
“눈이 내리는 계절이 되었으니 공격은 더 없겠지요.” 내가 말했다.
“물론이지. 그러니 자네는 휴가나 갔다 오게. 로마든 나폴리든 시칠리아든.....” 소령이 대답했다. (P19)
나는 그녀의 두 눈을 들여다보면서 아까처럼 한 팔로 그녀를 끌어안고 키스를 했다. 힘껏 키스를 하고 꼭 껴안은 채 그녀의 입술을 열기 위해 애썼다. 그러나 그녀의 입술은 굳게 닫혀 있었다. 나는 여전히 화가 났다. 그녀를 껴안고 있으려니 그녀가 갑자기 몸을 부르르 떨었다. 더욱 바짝 끌어안자 심장의 고동이 느껴졌다. 그녀가 입술을 열면서 내 팔에 기댄 채 머리를 뒤로 젖혔다. 그러고 나서 내 어깨에 기대어 울었다.
“아, 당신, 내게 잘해 주실 거죠?” 그녀가 말했다.
어렵쇼, 별꼴 다 보겠네. 나는 속으로 그렇게 생각했다. 나는 그녀의 머리카락을 쓰다듬으며 가볍게 어깨를 두드려 주었다. 그녀는 여전히 울고 있었다.
“그래 주실 거죠?” 그녀는 내 얼굴을 올려다보았다. “이제부터 우리는 이상한 삶을 살게 될 테니까요.” (P48-49)
신부는 선량한 사람이지만 따분했다. 장교들은 선량하지 않으면서도 따분했다. 국왕은 선량했지만 따분했다. 포도주는 좋지 않았지만 따분하지 않았다. 포도주를 마시면 치아의 법랑질이 벗겨져서 입천장에 들러붙는다. (P68)
“전쟁에서 승리한다고 해서 반드시 이기는 건 아닙니다. 아군이 산가브리엘레를 점령한다고 한들 그게 무슨 소용입니까? 카르소랑, 몬팔코네랑, 트리에스테를 빼앗은들 무슨 대수냐고요? 그런들 우리한테 뭐가 달라지는 겁니까? 오늘 저쪽 멀리 있는 산들을 모두 보셨죠? 그 산들을 전부 점령할 수 있다고 생각하세요? 오스트리아군이 전투를 그만두지 않는 한 불가능하죠. 어느 한쪽이라도 전투를 그만둬야 합니다. 우리라도 전투를 그만둬야 하는 것 아닙니까? 적군이 이탈리아로 내려온다고 하더라도 놈들은 그동안 지쳐서 돌아가 버릴 거예요. 놈들에게도 자기 나라가 있으니까요. 하지만 사정은 그렇지 않지요. 자기 나라로 돌아가는 대신 지금처럼 전쟁만 하고 있잖아요.”
“자네 말 한번 잘하는군.”
“우리도 생각할 줄 압니다. 책을 읽고요. 우리는 시골 농부가 아닙니다. 기술공이죠. 하지만 시골 농부들도 전쟁을 믿을 만큼 무지하진 않아요. 누구나 전쟁은 끔찍이 싫어한다고요.”
“아무 것도 깨닫지 못하고 또 깨달을 능력도 없는 우둔한 계급이 있어요. 그자들이 지금 한 나라를 지배하는 거죠. 그런 부류 때문에 지금 이런 전쟁이 벌어지고 있는 겁니다.”
“더구나 전쟁으로 돈도 벌지.”
“대부분은 그렇지도 못해. 아주 멍청이들이거든, 아무런 이유도 없이 전쟁만 하는 거야. 멍청해서 그러는 거지.” 파시니가 말을 이었다. (P87)
“어떻게 다른가요?”
“한마디로 말할 수는 없어요. 전쟁을 일으키고 싶어하는 사람들 있는 겁니다. 이 나라에는 그런 사람들이 많지요. 전쟁을 싫어하는 사람도 있고요.”
“전쟁을 원하는 사람들이 다른 사람들에게 전쟁을 시키는 거군요.”
“맞습니다.”
“그런데 전 그런 사람들을 돕고 있어요.”
“중위님은 외국인이죠. 애국자입니다.”
“그러면 전쟁을 하고 싶어 하지 않는 사람들은요? 그들이 전쟁을 그만두게 할 수 있을까요?”
“그건 저도 모르겠어요.” (P118)
이탈리아인들은 미국이 오스트리아에 대해서도 선전포고를 할 것이라고 확신했고, 그래서 비록 적십자 요원들이지만 미국인들이 그곳에 오는 것에 무척 고무되어 있었다. 그들은 나에게 윌슨 대통령이 오스트리아에 대해서도 선전포고를 하리라고 생각하느냐고 물었고, 나는 그것은 시간문제라고 대답했다. 우리 미국인이 오스트리아에 대해서 무슨 감정을 갖고 있는지는 모르지만, 독일에 선전포고를 했다면 오스트리아에도 선전포고를 하는 것이 논리적으로 맞을 것 같았다. 또 그들은 터키에 대해서도 선전포고를 할 것 같으냐고 물었다. 그것은 확실하지 않다고 대답했다. 터키는 미국 국민이 좋아하는 새이기 때문이라고 했더니, 이 농담을 제대로 해석하지 못해 매우 어리둥절하고 의아해하는 표정을 지었다. 나는 다시 터키에 대해서도 선전포로를 할 것 같다고 말해 주었다. 그러면 불가리아에 대해서는? 이미 브랜디를 대여섯 잔 마신 뒤라 나는 단연코 미국은 불가리아에 대해서도, 또 일본에 대해서도 선전포고를 할 것이라고 말했다. 그랬더니 그들은 일본이 영국의 동맹이라고 했다. 그놈의 영국을 누가 믿을 수 있겠어. 일본인들은 하와이를 탐내지. 내가 말했다. 하와이가 도대체 어디 있는 거야? 태평양 한복판이잖아. 그런데 왜 일본인들이 그 섬을 탐내지? 그들이 정말로 하와이를 탐내는 건 아냐. 내가 말했다. 그저 그렇다는 소문일 뿐이지. 일본인들은 춤과 약한 술만 좋아하는 데다 키가 작고 속을 알 수 없는 사람들이지. 프랑스인들과 비슷하군. 소령이 말했다. 우린 프랑스에서 니스와 사부아를 빼앗을 거야. 또 코르시카와 아드리아 해의 전 연안을 점령할 거야. 리날디가 말했다. 이탈리아가 이제 다시 로마의 영광을 되찾는 거지. 소령이 말했다. 나는 로마가 싫어. 반박했다. 날씨가 더운데다 온통 벼룩 천지거든. (P125-127)
우리는 그녀가 이 병원에 온 첫날에 결혼했다고 서로에게 말하면서 그날로부터 몇 달이 지났는지 헤아려 보곤 했다. 나는 정식으로 결혼하고 싶었지만, 캐서린은 그랬다간 자신이 병원에서 쫓겨날 것이며, 또 정식으로 결혼 수속을 밟기 시작만 해도 병원이 감시를 하고 우리를 갈라놓을 것이라고 말했다. 또 우리는 이탈리아의 법에 따라 결혼해야 하는데, 정식 절차가 여간 까다롭지 않았다. 나는 아이가 생길 것을 염려해서 정식으로 결혼하고 싶었다. 하지만 어쨌든 우리는 이미 결혼한 사람들처럼 지냈고 크게 걱정하지도 않았다. 사실 나는 결혼하지 않고 지내는 것이 오히려 즐거웠는지도 모른다. 어느 날 밤 우리가 결혼에 관해 얘기를 나누던 일이 기억난다. 캐서린이 이렇게 말했다. “하지만 자기, 우리가 결혼하면 병원에서 나를 내보낼 거예요.”
“꼭 그러리란 법은 없잖아.”
“그럴 거예요. 나를 본국으로 송환할 거라고요. 그러면 우린 전쟁이 끝날 때까지 헤어져 있어야 해요.”
“내가 휴가를 받아서 찾아갈게.” (P183-184)
“우리 모두는 패배할 때 온순해집니다. 만일 베드로가 감람산에서 주님을 구했더라면 주님은 어떻게 되었을까요?”
“그래도 그분은 마찬가지로 했겠죠.”
“난 그렇게 생각하지 않습니다.” 내가 말했다.
“중위님 얘기를 들으니 용기가 없어지네요. 난 무슨 일이 일어날 것이라고 믿고 있고, 또 그렇게 되기를 기도하고 있어요. 그것이 아주 가까이 와 있다는 걸 느끼고 있습니다.”
“무슨 일이든 일어나긴 하겠죠. 하지만 그건 우리편에게만 일어날 겁니다. 그들도 우리가 느끼는 것처럼 느낀다면 좋은 일이겠죠. 하지만 그들은 우리를 패배시켰습니다. 그래서 그들의 생각은 우리 생각과는 다른 거죠.” 내가 말했다.
“많은 병사가 늘 이렇게 느껴왔습니다. 반드시 전쟁에 패배했다고 해서 그렇게 느끼는 건 아니지요.”
“그들은 처음부터 패배한 겁니다. 농장에서 군대로 끌려 왔을 때 벌써 패배한 거죠. 농부들에게 분별력이 있는 건, 처음부터 패배했기 때문이죠. 그들에게 권력을 줘 보세요. 얼마나 분별력이 있는지 곧 알게 될 겁니다.” (P280-281)
그러나 나는 신성한 것을 실제로 본 적이 한 번도 없으며, 영광스럽다고 부르는 것에서도 조금도 영광스러움을 느낄 수 없었다. 희생은 고깃덩어리를 땅속에 파묻는 것 말고는 달리 할 것이 없는 시카고의 도살장과 같았다. 차마 참고 듣기 힘든 말들이 너무도 많은 까닭에 나중에는 지명만이 위엄을 갖게 되었다. 숫자나 날짜 같은 것들이 지명과 함께 우리가 말할 수 있고 의미를 부여할 수 있는 유일한 것들이었다. 영광이니 명예니 용기니 신성이니 하는 추상적인 말들은 마을의 이름이나 도로의 번호, 강 이름, 연대의 번호나 날자와 비교해 보면 오히려 외설스럽게 느껴졌다. (P290)
“전쟁이 끝난다면 상관없는 일이죠. 하지만 전쟁이 끝날 것 같지 않아요. 끝이 난다면야 얼마나 좋겠습니까만.” 피아니가 말했다.
“곧 알게 되겠지.” 내가 말했다.
“끝날 것 같지 않아요. 다들 끝났다고 생각하지만 믿어지지 않아요.” (P342)
“나를 총살할 작정이라면 더 이상 심문하지 말고 당장 하시오. 심문은 바보짓이야.” 중령이 말했다. 그러면서 그는 십자성호를 그었다. 장교들이 자기들끼리 의논했다. 그중 하나가 종이철에다 무언가를 적었다.
“부대 이탈 죄로 총살형에 처함!” 그 장교가 말했다.
헌병 둘이 중령을 강둑으로 끌고 갔다. 모자도 쓰지 않은 노인은 양쪽으로 헌병의 감시를 받으면서 비를 맞으며 걸어갔다. 나는 총살하는 장면은 보지 못했지만 총소리는 들었다. 장교들은 또 다른 장교를 심문했다. 그 역시 소속 부대에서 이탈한 장교였다. 그에게는 해명조차 허락되지 않았다. 그들이 종이철에 쓴 선고문을 읽자 그는 소리 내어 울었다. 그의 총살이 집행될 때 그들은 또 다른 장교를 심문했다. 먼저 심문받은 사람이 총살을 당하는 동안 바로 다음 군인을 심문하는 것이었다. 이런 식이라면 총살을 피할 수 있는 방법이 없었다. 나는 심문을 기다릴 것이나, 아니면 탈출할 것인가, 갈피를 잡을 수 없었다. 누가 봐도 나는 이탈리아 군복을 입고 있는 독일군이었다. 나는 그들의 머리가 어떻게 돌아가는지 잘 알았다. 만약 그들에게도 머리가 있고 또 그것이 제대로 돌아간다면 말이다. 그들은 모두가 청년 장교로 나름대로 조국을 구하고 있었던 것이다. 제2군이 탈리아멘토 강 건너에서 재편성되는 중이었다. 그들은 소속 부대를 이탈한 소령급 이상 장교를 처형하고 있었다. 또한 이탈리아 군복을 입은 독일군 선동자들을 즉결 처분하고 있었다. (P349)
길고 텅 빈 복도, 문밖에 나란히 놓인 구두, 두꺼운 카펫이 깔린 바닥, 창밖에 내리는 비와 함께 호텔에서 보낸 그날 밤, 방 안은 밝고 즐겁고 쾌적한 기운으로 가득했다. 불을 끄니 보드라운 시트와 편안한 침대에 가슴이 두근거렸으며 마침내 내 집에 돌아온 듯한 느낌, 이제는 혼가가 아니라는 느낌, 한밤중에 잠을 깨도 사랑하는 사람이 아무 데도 가지 않고 곁에 그대로 있을 거라는 느낌이 들었다. 그 밖의 모든 것도 현실 같지가 않았다. 피곤하면 자고 잠에서 깨면 다른 한 사람도 눈을 떠서 우리는 전혀 외롭지 않았다. 남자나 여자나 이따금씩은 혼자 있고 싶을 때가 있다. 사랑하는 사람끼리는 서로의 그런 기분을 질투하는 법이지만 솔직히 우리는 조금도 그런 기분을 느끼지 않았다. 오히려 우리는 함께여서 외로운 기분, 즉 세상 사람들에게 맞선 고독을 느낄 뿐이었다. 나도 그와 비슷한 기분을 느낀 적이 있다. 많은 여자와 함께 있을 때 오히려 고독을 느꼈는데 그런 경우가 가장 고독했다. 그러나 우리가 함께 있을 때는 결코 고독하지 않았고 두렵지도 않았다. 밤이 낮과 같지 않다는 것, 모든 것이 다르다는 것, 밤에 겪은 것은 낮에 존재하지 않으므로 설명할 수 없다는 것을 나는 잘 알았다. 또 고도한 사람에게 일단 고독이 찾아오면 밤이야말로 끔찍한 시간이라는 것도 잘 알았다. 그러나 캐서린과 함께 있으면 밤이 더 유쾌하다는 것만 다를 뿐 낮과 거의 다른 게 없었다. 사람들이 이 세상에 너무 많은 용기를 갖고 오면 세상은 그런 사람들을 꺾기 위해 죽여야 하고, 그래서 결국에는 죽음에 이르렀다. 이 세상은 모든 사람을 부러뜨리지만 많은 사람은 그 부러진 곳에서 더욱 강해진다. 그러나 세상은 부러지지 않으려 하는 사람들을 죽이고 만다. 아주 선량한 사람들이든, 아주 부드러운 사람들이든, 아주 용감한 사람들이든 아무런 차별을 두지 않고 공평하게 죽인다. 당신이 그 어디에 속하지 않는다 해도 이 세상은 당신 역시 틀림없이 죽이고 말겠지만, 특별히 서두를 필요는 없을 것이다. (P384-385)
우리는 몽트뢰에서 로잔행 기차를 탔다. 차창을 통해 우리가 살던 쪽을 바라보았지만 구름에 가려 산은 보이지 않았다. 기차는 브베에서 정차했다가 다시 한쪽으로는 호수를 끼고 다른 한쪽으로는 비에 젖은 갈색 들판과 앙상하게 헐벗은 나무들과 젖은 집들을 지나쳐 달렸다. 로잔에 도착해서는 중간 크기의 호텔에 묵었다. 마차를 타고 거리를 달려 호텔 현관에 들어설 때까지도 비는 계속 내렸다. 구팅겐 부부의 집에서 살다 와서 그런지, 윗도리의 접은 깃에 놋쇠 열쇠를 달고 있는 수위며, 엘리베이터며, 마룻바닥에 깔린 카펫이며, 번쩍거리는 부속품이 달린 하얀 세면기며, 놋쇠 침대와 넓고 편안한 침실 등 모든 것이 호화롭게만 보였다. 창문으로는 꼭대기에 철책을 두른 담에 둘러싸인 비에 젖은 정원이 내려다보였다. 가파르게 경사진 거리 건너편에도 비슷한 담과 정원이 있는 호텔이 또 있었다. 나는 정원 분수에 비가 내리는 모습을 바라보았다.
캐서린은 방 안의 전등을 모두 켜고 짐을 풀었다. 나는 위스키소다를 주문하고 침대에 누워서 정거장에서 사온 신문을 읽었다. 1918년 3월로 프랑스에서는 독일군의 공격이 시작되었다. 캐서린이 짐을 풀면서 방 안을 왔다 갔다하는 동안 나는 위스키소다를 마시며 신문을 읽었다. (P466-467)
옆으로 간호사의 보고서가 클립에 끼워져 걸려 있는 책상 앞에 앉아 나는 창밖을 내다보았다. 어둠과 함께 창밖에서 새어 나오는 불빛에 비가 내리는 것이 보일 뿐이었다. 역시 그랬구나. 아기는 이미 죽어 있었어. 그래서 의사가 그렇게 지친 얼굴이었던 거야. 그런데 뭣 때문에 갓난아기에게 그런 짓을 했던 걸까? 갓난아기가 다시 살아서 숨을 쉴지도 모른다고 생각한 모양이지. 나는 종교가 없지만 갓난아기에게 세례를 받게 해 줘야 한다는 것쯤은 알고 있었다. 하지만 아기가 전혀 숨을 쉬지 않았다면 어떻게 되는 거지? 그 아기는 전혀 숨을 쉬지 않았다. 한 번도 살아 있지 않았던 것이다. 오직 캐서린의 배 속에서만 살아 있었을 뿐이다. 그놈이 엄마의 배를 쿡쿡 차는 것은 나도 가끔 손으로 느꼈다. 그러나 최근 일주일 동안은 그런 움직임이 없었다. 어쩌면 그때부터 질식해 있었는지도 모른다. 불쌍한 어린 것. 제기랄, 차라리 내가 그렇게 질식했더라면 좋았을걸. 아냐, 그건 거짓말이야. 하지만 그랬더라면 이런 식으로 죽음을 경험하지는 않았을 텐데. 이제 캐서린은 죽겠지. 내가 바로 그렇게 만든 거야. 인간은 죽는다. 그것이 무엇인지 몰랐어. 그것에 대해 배울 시간이 없었던 거야. 경기장에 던져 놓은 뒤 몇 가지 규칙을 알려주고는 베이스를 벗어나는 순간 공을 던져 잡아 버리거든. 아이모처럼 아무 까닭없이 죽이거나, 또는 리날디처럼 매독에 걸리게 하지. 하지만 결국에는 모두 죽이고 말지. 그것만은 분명해. 결국 살아남는다 해도 종국에는 죽임을 당하는 거야. (P495-496)
언젠가 캠프를 할 때 나는 모닥불 위에 통나무 하나를 얹어 놓은 적이 있다. 통나무에는 개미가 잔뜩 붙어 있었다. 통나무에 불이 붙기 시작하자 개미들은 우글우글 기어 나와 처음에는 불이 있는 한가운데로 기어갔다. 그러다가 나무 끄트머리 쪽으로 돌아갔다. 개미 떼는 끄트머리 쪽에 잔뜩 모여 있다가 불 속으로 뚝뚝 떨어졌다. 그중 몇 마리는 기어 나왔지만 몸이 불에 타서 납작해진 채로 어디로 가는 줄도 모르고 무작정 달아났다. 그러나 대부분의 개미들은 불 쪽으로 갔다가 나무 끄트머리 쪽으로 돌아가서 뜨겁지 않은 곳에 모여 있다가 결국은 불 속으로 떨어졌다. 나는 그때 바로 이것이야말로 세계의 종말이라고 생각했다. 구세주가 되어 통나무를 불 속에서 끄집어내어 개미들이 땅바닥으로 달아날 수 있는 곳으로 던져 줄 수 있는 절호의 기회라고 생각했다. 그러나 나는 아무것도 하지 않았다. 다만 함석 컵의 물을 통나무에 끼얹었을 뿐이다. 그것도 컵을 비워 거기에 위스키를 따르고 물을 타기 위해서였다. 활활 불타고 있는 통나무에 물 한 컵을 끼얹은 것은 개미를 삶아 죽이는 일에 불과했다. (P496-497)
“아직 들어오시면 안 됩니다.”
“당신이나 나가요. 다른 분도요.” 내가 소리를 질렀다.
그러나 간호사들을 내보내고 문을 닫고 전등을 꺼도 소용이 없었다. 마치 조상(彫像)에게 마지막 작별 인사를 하는 것 같았다. 잠시 뒤 나는 병실 밖으로 나와 병원을 뒤로 한 채 비를 맞으며 호텔을 향해 발걸음을 옮겼다. (P503)