표도르 도스토옙스키의 <백야>

영화 <백야> 1960년

by 노용헌

몽상적 테마가 서정적이고도 문학적인 형태로 구현된 「백야」는 ‘감상 소설(어느 몽상가의 회상에서)’라는 부제가 말해주듯 어느 몽상가의 이야기를 다룬다. 전체가 다섯 장으로 구성되며-첫번째 밤/두번째 밤 (나스텐카의 이야기)/세번째 밤/네번째 밤/아침-이는 기이할 만큼 명랑하고 낙천적인 환상에 젖은 당대 청년들의 시대정신을 반추하며 그에 대응하는 현실 인식으로 균형을 맞추는 기능적 설계(“나의 밤들은 아침이 오면서 끝이 났다”)랄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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멋진 밤이었다. 그렇게 멋진 밤은, 친애하는 독자여, 오직 젊은 시절에나 만날 수 있는 법이다. 수많은 별들이 하늘을 아름답게 수놓고 얼마나 찬란하게 빛나던지, 한번 쳐다보면 저도 모르게 스스로 이런 질문이 들 정도였다. ‘이리도 아름다운 하늘 아래 살면서 어째서 사람들은 온갖 화를 내거나 변덕을 부리는 걸까?’ 이 또한 젊은이다운, 정말이지 젊은이만이 품을 수 있는 의문이지만, 친애하는 독자여, 하느님께서 이런 의문의 기회를 당신 영혼에 더 많이 부어주시기를..........! 변덕스럽고 이런저런 이유로 화를 내는 신사들 이야기를 꺼내고 보니, 그날 하루종일 내가 보인 알량한 행동을 떠올리지 않을 수 없다. 이른아침부터 나는 뭔가 야릇한 울적함에 시달렸다. 불현 듯 모두들 나만 홀로 외롭게 남겨두고 떠나가는 것처럼, 모두들 나에게서 등을 돌리는 것처럼 느껴졌다. 물론, 누구든 이렇게 물어볼 수 있다. ‘대체 그 모두란 누구를 말하는 겁니까?’ (P115-116)


“혹시 내가 다시 허튼소리를 하는 것이라면 용서하십시오...... 내 얘기는 이겁니다. 나는 내일 이곳에 오지 않을 수가 없습니다. 나는 몽상가니까요. 나에게는 현실적인 삶이 거의 존재하지 않습니다. 지금 같은 이런 순간이 나에게는 정말 흔치 않은 경우라서 나는 이 순간을 상상 속에서 되새기지 않을 수 없습니다. 나는 온밤을 지새우며, 온 일주일을 보내며, 온 일 년을 지내며 내내 당신을 꿈꿀 겁니다. 나는 내일 반드시 여기 이곳으로, 이 자리로, 바로 이 시간에 다시 올 것이고, 오늘 일을 떠올리며 행복해할 겁니다. 이 자리는 벌써 나에게 다정한 곳이 되어버렸습니다. 나는 페테르부르크에 이미 이런 곳을 두세 군데 알고 있지요. 한번은 심지어 옛일을 추억하다 울음을 터트린 적도 있습니다. 당신처럼....... 당신도 어쩌면 몇 분 전에 예전 일이 떠올라 울고 있었던 것은 아닌가요....... 아, 용서하십시오. 내가 또 쓸데없는 말을 지껄였습니다. 당신은 어쩌면 언젠가 이곳에서 특별히 행복한 때를 보냈을 지도 모르는데.........” (P130-131)


“계속 들어봐요. 나스텐카(당신을 나스텐카라고 아무리 불러도 싫증나지 않을 것 같아요), 더 들어봐요. 이 궁벽한 곳에는 이상한 사람들이 살고 있습니다. 바로 몽상가들이죠. 몽상가에 대한 상세한 정의를 원한다면, 몽상가는 인간이 아니라, 뭐랄까, 일종의 중성적인 존재라고 할 수 있습니다. 몽상가는 대체로 인간이 근접하기 어려운 구석진 곳에 정착합니다. 마치 한낮의 햇빛까지도 피하려는 듯 그 속에 숨어 지내요. 그리고 자신의 안식처에 한번 들어앉으면 달팽이처럼 아예 그곳에 찰싹 달라붙어버립니다. 적어도 이런 점에서 몽상가는 생물이면서 동시에 집이기도 한, 저 흥미로운 동물, 거북이라 불리는 것과 아주 흡사하다고 할 수 있습니다. 당신 생각은 어떻습니까? 이 몽상가는 왜 사방을 둘러싼 자신의 벽, 항상 초록색으로 칠해져 있고, 거뭇거뭇 때가 끼고, 음산하고, 도저히 봐주기 힘들 만큼 담배 연기에 찌든 그 벽을 그토록 사랑할까요? 어째서 이 우스운 신사는 몇 안 되는 친구들 중 하나가 자신을 찾아오면(결국에는 그 친구들마저 모두 사라져버릴 테지만), 그토록 당황해하며, 그토록 안색까지 달리하며, 또 그토록 곤혹스럽게 그를 맞이하는 걸까요? 마치 사방을 둘러싼 벽 안에서 방금 범죄라도 저지른 사람처럼, 마치 위조지폐를 만들다가, 아니면 자신이 쓴 시를 슬쩍 적어놓고는 이 시의 저자는 이미 유명을 달리한 친구로, 그의 유작을 발표하는 것이 친구 된 도리 아니겠느냐는 구구한 변명을 덧붙인, 익명의 편지를 잡지사에 보내려다 들키기라도 한 사람처럼 말입니다......” (P138-139)


환상은 그림자와 관념의 노예이자, 갑자기 나타나 태양을 뒤덮어버린 채 그토록 태양을 소중히 여기는 페테르부르크의 진실된 마음을 슬픔으로 짓누르는 맨 처음 먹구름의 노예일 뿐입니다. 그런 우울과 슬픔 속에 무슨 환상이 있겠습니까! 환상도 결국은 지쳐버리고, 끊임없이 계속되는 긴장 속에서 이 마르지 않는 환상의 샘도 말라가게 됩니다. 누구나 어른이 되면 예전에 품었던 이상으로부터 벗어나는 법이니까요. 그 이상들은 산산이 부서져 먼지가 돼버립니다. 만약 거기 다른 삶이 없다면 이 먼지 부스러기들을 가지고 다시 삶을 쌓아올릴 수밖에 없습니다. 그런데 영혼은 뭔가 다른 것을 요구하고 또 갈망합니다! 그래서 몽상가는 헛되이 마치 재 속을 헤집듯 자신의 낡은 상상들을 뒤적입니다. 재 속에서 뭔가 작은 불씨라도 찾아내어 그것을 살살 분 다음 되살린 불길로 싸늘하게 식어버린 자기 심장을 따뜻하게 데우려는 거지요. 예전에는 그토록 달콤했던 모든 것, 영혼을 감동시켰던 모든 것, 피를 끓게 했던 모든 것, 그리고 눈에서 눈물을 쏟게 하고 그렇게나 멋지게 자신을 속여넘겼던 그 모든 것들을 가슴속에 다시 살려내려는 겁니다! 나스텐카, 내가 지금 어떤 상황까지 몰렸는지 압니까? 지금 나는 내가 느끼고 꿈꿨던 것들을 위한 기념식을 거행해야 할 지경입니다. 예전에는 그토록 달콤했던, 하지만 실제로는 한 번도 존재한 적이 없는 것들의 기념식을 말입니다. 기념식이란 예전의 그 어리석은 꿈들을 다시 한번 떠올려보는 겁니다. 그렇게라도 기념해야만 하는 이유는 이 어리석은 몽상들은 실제로는 존재하지 않기에 그 무엇으로도 쫓아낼 재간이 없기 때문입니다. 사실 몽상도 꽤 생명력이 긴 편이거든요! (P153-15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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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들어봐요, 나의 착하고 사랑스러운 나스텐카!‘ 그 사람도 눈물을 글썽이며 말했어요. ’좀 들어봐요, 만약 언젠가 내가 결혼할 처지가 되면, 나를 행복하게 해줄 사람은 바로 당신일 거예요. 분명히 말하는데, 이제 당신, 오직 당신 단 한 사람만이 나에게 행복을 줄 수 있어요. 자, 잘 들어요. 이제 나는 모스크바로 떠나 정확히 일 년을 거기서 지낼 거예요. 그 일 년 안에 내 일이 자리가 잡혀야겠지요. 내가 돌아왔을 때 당신이 여전히 나를 사랑한다면, 맹세컨대, 우리는 분명 행복해질 거예요. 하지만 지금은 불가능해요. 그럴 수가 없어요. 아무것도 약속할 수가 없어요. 하지만 다시 한번 말할게요. 만약 일 년 뒤에 내 말대로 되지 않는다 해도 언젠가는 반드시 그렇게 될 거예요. 물론, 그때도 당신이 다른 사람 아닌 나만을 여전히 사랑하고 있다면요. 나는 어떤 말로도 당신을 구속할 수 없고, 또 그럴 용기도 없으니까요.‘

그 사람은 그 말만 남기고 다음날 떠났어요. (P167)


어제는 우리의 세 번째 만남의 날이었고, 우리의 세 번째 백야였다.....

하지만 기쁨과 행복은 어쩌면 이리도 사람을 아름답게 변화시키는지! 심장은 또 얼마나 사랑으로 뜨겁게 끓어오르는지! 자신의 온 마음을 다른 사람의 마음에 흘려보내고 싶고, 모든 것이 즐겁고 모든 것이 기쁘게 웃기를 바라는 마음이 되다니, 이 기쁨은 또 얼마나 전염성이 강한지! 어제 그녀의 말투는 무척이나 다정했다. 그녀의 마음은 나를 향한 호의로 가득차 있었다..... 그녀는 얼마나 자상하게 내 기분을 맞춰주고, 얼마나 귀엽게 응석을 부리고, 또 얼마나 부드럽게 내 마음을 어루만지고 용기를 북돋워주었던가! 아아, 행복감에서 나오는 그 애교스러운 행동들! 그런데 나는....... 나는 이 모든 것을 진심으로 받아들였다. 나는 생각했다, 혹시 그녀가.......... (P174)


“....... 나는 당신을 계속 사랑할 겁니다. 당신이 여전히 그 사람을 사랑한다 해도, 나는 알지도 못하는 그 사람을 당신이 앞으로도 변함없이 사랑한다 해도, 당신이 알아채지 못하게 그렇게 당신을 사랑할 겁니다. 내 사랑이 당신에게 무거운 짐이 되면 안 되니까요. 당신은 다만 감사로 가득찬 심장이, 당신을 향한 뜨거운 심장이 당신 옆에서 힘차게 뛰는 소리를 듣게 될 겁니다. 매 순간 느끼게 될 겁니다..... 아, 나스텐카, 나스텐카! 대체 나에게 무슨 짓을 한 겁니까.......!” (P192)


“그 사람이에요!” 그녀가 더욱 바짝 내게 떨리는 몸을 밀착시키며 속삭이듯 말했다....... 나는 가까스로 버티고 서 있었다.

“나스텐카! 나스텐카! 당신이었어!” 우리 뒤에서 목소리가 들리는가 싶더니 거의 동시에 그 젊은 남자가 우리 쪽으로 몇 발짝 다가왔다.

오, 세상에, 그 비명소리! 그녀는 얼마나 무섭게 떨었던가! 또 얼마나 재빨리 내 손을 뿌리치고 그 사람에게 달려갔던가.........! 나는 죽은 듯 그 자리에 서서 두 사람을 바라보았다. 그런데 그 사람에게 손을 내밀며 거의 그의 품에 안기려던 순간 그녀가 갑자기 내 쪽으로 몸을 돌려 마치 바람처럼 번개처럼 나에게 달려왔다. 그리고 내가 정신을 추스를 새도 없이 두 팔로 내 목을 감싸안고 강렬하고도 뜨겁게 내게 입을 맞췄다. 그러고는 한마디 말도 없이 다시 그 사람에게 달려가 그의 두 손을 잡아 끌어당겼다.

나는 오래도록 그 자리에 서서 멀어져가는 그들의 뒷모습을 바라보았다....... 마침내 두 사람 모두 내 눈앞에서 사라졌다. (P200)


하지만 나스텐카, 내가 모욕당한 일을 언제까지고 가슴에 품고 있으리라 생각하는가! 내가 그대의 밝고 평온한 행복에 어두운 그림자를 드리우리라 믿는가. 쓰라린 말로 그대를 비난하여 그대의 심장에 슬픔을 심어주고, 남모를 가책으로 고통받도록 만들고, 한없이 행복한 순간에도 우울해하며 가슴 졸이게 만들, 그런 사람 같은가. 그대가 사랑하는 사람과 함께 제단을 향해 걸어갈 때 그대의 까만 곱슬머리에 꽂힌 부드러운 꽃송이들 중 단 한 송이라도 짓뭉개버릴 것 같은가........ 오, 결코, 그런 일은 없을 것이다! 그대의 하늘이 맑게 개기를, 그대의 사랑스러운 미소가 언제까지나 밝고 평화롭기를, 기쁨과 행복의 순간에 그대 위에 축복이 넘치기를! 그대는 감사함으로 가득찬 어떤 이의 외로운 가슴에 기쁨과 행복의 순간을 안겨주었으므로.

오, 세상에! 지극한 기쁨의 완전한 순간이여! 한 사람의 일생이 이것이면 충분하지 않은가.....? (P203-20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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