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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노용헌 Mar 12. 2024

애거서 크리스티의 <핼러윈 파티>

영화 <베니스의 유령 살인사건>  2023년

〈오리엔트 특급 살인〉, 〈나일 강의 죽음〉에 이은 케네스 브래너의 에르퀼 푸아로 시리즈 세 번째 영화로 애거서 크리스티의 소설 <핼러윈 파티>를 원작으로 한다. 이전 두 작품과 마찬가지로 영화의 감독 케네스 브래너가 직접 주인공 에르퀼 푸아로로 분해 연기하였다.     

올리버 부인은 몸을 벽에 더욱 바짝 붙이고 계속 말했다.

“멍하니 서서 방해만 하고 있네. 어쨌든 그렇게 많은 호박이나 페포호박을 보는 것도 꽤 인상적인 경험이었어. 촛불이나 은은한 조명을 속에 넣거나 매단 호박들이 가게든 집이든 없는 데가 없었어. 정말 재미있었지. 하지만 그때는 핼러윈이 아니라 추수감사절 파티였어. 이제 호박하면 핼러윈과 10월 마지막 날이 생각나. 추수감사절은 훨씬 나중이지? 11월. 그러니까 11월 셋째 주쯤일 거야. 어쨌든 핼러윈이 10월 31일인 건 확실하지? 핼러윈이 먼저고 그다음이 뭐더라? 위령의 날(11월 2일. 카톨릭에서 모든 죽은 자들을 위해 기도하는 날)인가? 파리에서는 묘지에 꽃을 놓는 날이지. 그렇다고 꼭 슬픈 날이라고는 할 수 없어. 아이들까지 가서 신나게 노는 날이니까. 그날은 먼저 꽃 시장에 들러 예쁜 꽃을 많이 사지. 파리 꽃 시장만큼 예쁜 곷들이 많은 곳도 없을 거야.”             (P12)     

“살인요. 스냅드래건이 끝나고 모두 집으로 돌아갔거든요. 그때부터 그 애가 보이지 않았어요.”

“누구 말인가요?”

“어떤 소녀요. 이름은 조이스예요. 모두 그 애 이름을 부르며 이리저리 찾아다녔어요. 혹시 다른 사람하고 집에 갔는지 알아보기로 했고요. 그 애 엄마는 조이스가 피곤했거나 몸이 안 좋아서 혼자 집에 가 버린 게 틀림없지만 아무 말도 하지 않고 가는 건 너무 생각 없는 것이라고 둘러대며 화를 내더군요. 그런 일이 있을 때 엄마들이 흔히 하는 말 있잖아요. 하지만 어쨌든 조이스가 보이지 않았어요.”

“그래서 그 애 혼자 집에 간 겁니까?”

“아니요. 그 애는 집에 간 게 아니었어요.”

올리버 부인의 목소리가 또다시 떨렸다. 

“우리는 결국 그 애를 서재에서 발견했어요. 누군가 서재에서 그 짓을 한 거예요. 사과 건지기 말이에요. 양동이가 거기 있었어요. 커다란 아연 도금 양동이요. 플라스틱 양동이는 쓰지 않기로 했거든요. 플라스틱 양동이를 썼다면 그 일이 일어나지 않았을지도 몰라요. 별로 무겁지 않거든요. 뒤집혔을 테니까.”

“무슨 일이 일어난 겁니까?”

푸아로가 날카로운 목소리로 물었다. 

“거기서 그 애를 발견했어요. 누군가, 누군가 사과를 띄운 물속 깊숙이 그 애 머리를 밀어 넣었어요. 그렇게 양동이 밑바닥까지 밀어 그대로 누르고 있었으니 당연히 죽죠. 익사래요, 익사. 고작 물이 가득 든 아연 도금 양동이에서 말이에요. 무릎을 꿇어 사과를 물려고 하다가 그렇게 된 거예요. 이제 사과라면 끔찍해요. 사과는 두 번 다시 쳐다보고 싶지도 않아요.”

푸아로는 올리버 부인을 바라보며 한 손을 뻗어 작은 잔에 코냑을 따랐다. 

“이걸 좀 마셔요. 기분이 나아질 겁니다.”

푸아로가 말했다.                (P39-40)     

“그렇지는 않을 겁니다. 어쨌든 파티에 온 사람 중에 부인을 아는 사람이 있었나요?”  

“네, 어떤 아이가 내 책에 대해 말했고 아이들이 살인을 좋아한다고 했어요. 그래서 그 일이 일어난 거예요. 당신을 찾아오게 만든 이 사건 말이에요.”

“부인은 아직 그 이유를 말하지 않았습니다.”

“그게, 처음에는 그 생각을 못 했어요. 바로 생각나지 않더라고요. 아이들은 원래 희한한 일들을 잘 벌이잖아요. 그러니까 사실은 정신병원에 보내야 하는데 그냥 집으로 돌려보내서 정상적인 생활을 하는 아이들 틈에 돌아다니면서 이런 일을 저지르는 아이들이 있다는 거죠.”           (P44)   

  

“그렇습니다. 바로 그 점이에요. 조이스는 살인 사건을 목격했지만 살인자의 얼굴은 보지 못했어요. 우리는 그 사실의 이면을 생각해 봐야 합니다.”

“무슨 말인지 모르겠군요.”

“그 살인이나 살인에 얽힌 사람, 그러니까 살인자와 밀접하게 관련되어 있는 사람이 그날 일찌감치 그곳에 나타나 조이스의 말을 들었을 수도 있어요. 자신의 아내나 어머니나 아들이나 딸이 한 짓을 오직 자기 혼자만 알고 있다고 생각한 어떤 남자가 범행을 저질렀을 수도 있다는 말이지요. 아니면 자신의 남편이나 어머니나 딸이나 아들이 한 짓을 알고 있는 어떤 여자일 수도 있고요. 자기 외에는 아무도 모른다고 생각했던 누군가였겠죠. 그런데 그때 조이스가 그 얘기를 꺼낸 겁니다.....”

“그래서........”

“조이스가 없어져야 했다?”

“그래요. 이제 어떻게 할 건가요?”

“이제야 기억났습니다. 우들레이 커먼이라는 이름이 귀에 익다 싶더니......”       (P49-50)    

 

“이번에도 조이스가 목격한 살인은 아니라고 봐야겠군요.”

푸아로는 이렇게 결론을 내리고 마지막 이름을 읽었다. 

“재닛 화이트.”

“학교 사택에서 집으로 가는 좁은 지름길에서 목이 졸린 채 발견되었어요. 노라 앰브로즈라는 교사와 방 하나를 같이 쓰고 있었다더군요. 노라 앰브로즈 말에 따르면 재닛 화이트는 1년 전 헤어진 남자가 가끔 협박 편지를 보내는 통에 괴롭다는 말을 종종 했다고 해요. 그 남자에 대해서는 밝혀진 게 전혀 없어요. 노라 앰브로즈는 그 남자 이름이나 사는 곳도 몰랐고요.”

“아하, 이 사건이 더 맘에 드는군요.”

푸아로는 재닛 화이트의 이름에 진하고 굵게 표시했다. 

스펜스가 물었다. 

“무엇 때문이죠?”

“조이스 또래의 소녀가 목격했을 법한 살인이거든요. 조이스는 자신이 아는, 어쩌면 자신을 가르쳤을지도 모르는 학교 선생님을 알아볼 수 있었을 겁니다. 그녀를 해치는 사람이 누구인지는 몰랐겠죠. 자기가 아는 사람이 낯선 사람과 다투는 광경을 목격했겠죠. 하지만 당시에는 그 이상 생각하지 못했던 겁니다. 재닛이 죽은 게 언제였나요?”

“2년 6개월쯤 전이에요.”

“역시 시기도 적당하군요. 당시 자신이 목격한, 재닛 화이트의 목을 감고 있던 남자가 알고 보니 단순히 목을 껴안은 게 아니라 그녀를 죽이려고 했던 거였습니다. 나중에 조금 더 자라고 보니 그게 살인이었을 수도 있었다는 생각이 든 거죠.”

푸아로가 그렇게 말하고 엘스페스를 쳐다보았다. 

“제 추리에 동의하십니까?”                 (P108-109)     

“그런 사람들은 청소년이라거나 가정 환경이 열악하다거나 결손 가정 출신이라고 해서 특별히 봐주지 않을걸요.”   

“부인은 그런 아이나 청소년들에게 징역형 말고 다른 처분이 필요하다고 생각하십니까?”

“교화가 되게끔 적절한 처분을 내려야죠.”

로위나 드레이크가 단호하게 대답했다. 

“그러니까 또 다른 오래된 속담이 생각나는군요. ‘돼지 귀로는 비단 주머니를 만들지 못한다.’라거나 ‘사람의 운명은 그의 목에 휘감겨 있다.’라는 격언을 믿지 않으시나요?”

드레이크 부인은 그게 도대체 무슨 소리냐는 듯한 표정이었다. 기분이 조금 상한 것처럼 보이기도 했다.

“이슬람 속담이지요.”

푸아로의 말을 듣고도 드레이크 부인은 심드렁해 보였다.             (P201) 

    

"부목사님은 어때? 그 사람이라면 조금 이상한 데가 있어. 원죄니 뭐니 하는 것하고 물과 사과 같은 걸 생각해 봐. 좋은 생각이 났어. 그 사람이 조금 돌았다고 하자. 여기 온 지 얼마 되지 않았으니까 그 사람에 대해 아는 사람이 없어. 그가 생각해 낸 게 스냅드래건이라고 하자. 바로 지옥 불이지! 불꽃이 너울너울 타오르는 지옥 불 말이야. 그런 다음 조이스를 붙잡고 이렇게 말하는 거야. ‘나랑 같이 가자. 보여 줄 게 있어.’ 그러고는 사과가 있는 방으로 데리고 가서 ‘무릎 꿇어.’라고 말하는 거지. ‘이건 세례식이야.’라면서 그 애의 머리를 물속에 처박는 거야. 어때, 그럴듯하지? 아담과 이브와 사과와 지옥 불과 스냅드래건과 죄 사함을 위해 다시 받는 세례식.“

“그 전에 조이스에게 자기 성기를 드러내 보였을지도 몰라. 이런 일에는 항상 성과 관련된 요인이 숨어 있거든.”

두 소년은 자신의 희망을 담은 추리를 하나씩 내놓고는 만족스러운 얼굴로 푸아로를 쳐다보았다. 

“그래, 너희는 정말 생각해 볼 거리를 주는구나.”

푸아로가 말했다.             (P221)     

“리먼 부인이라고 했죠? 세례명은 뭔가요?”

“해리엇이에요.”

“해리엇 리먼, 그리고 제임스라는 사람은 성이 뭐죠?”

“글쎄요. 뭐더라? 젠킨스. 맞아요. 제임스 젠킨스였어요. 가슴이 조마조마해서 견딜 수가 없어요. 저를 좀 도와주시면 정말 고맙겠어요. 아시겠지만 정말 걱정이 되거든요. 지금도 골치가 아픈데, 만약 올가 양이 그랬다면, 그러니까 루엘린 스마이스 부인을 죽였다면, 그리고 그 광경을 어린 조이스가 봤다면..... 올가 양은 이만저만 의기양양한 게 아니었어요. 어마어마하게 많은 돈을 받게 될 거라는 사실을 변호사들한테 듣고 나서 말이에요. 그런데 경찰이 찾아와 이것저것 조사하면서 상황이 달라졌고 올가 양이 갑자기 사라져 버렸어요. 어느 누구도 저한테 물어보지 않았어요. 하지만 지금 돌아보니 그때 제가 무슨 말을 했어야 했다는 생각이 드는 건 어쩔수 없네요.”

“내 생각에는 루엘린 스마이스 부인의 대리 변호사에게 이 모든 사실을 알려야 할 것 같네요. 훌륭한 변호사라면 부인의 감정과 진의를 제대로 이해해 줄 거예요.”            (P239)    

 

“그 사건은 나흘 전에 일어났어요. 그래요, 그건 엄연한 사실이에요. 하지만 모든 일에는 과거가 있게 마련이에요. 지금 이 순간에는 오늘과 통합되지만 어제나 지난달이나 작년에 존재했던 과거 말입니다. 현재는 거의 언제나 과거에 뿌리를 두고 있어요. 1년, 2년. 아마 3년 전에도 살인 사건이 일어났지요. 한 아이가 그걸 목격했고요. 그 아이가 나흘 전 죽은 건 지금은 오래된 과거에 묻힌 어느 특정한 날짜에 살인을 목격했기 때문이고요, 그렇지 않습니까?”

“네, 그래요. 적어도 내가 보기엔 그런 것 같아요. 전혀 아닐지도 모르지만요. 사람 죽이는 걸 즐기는 정신 이상자가 물장난을 한답시고 사람 머리를 물속에 처박고 그대로 눌러 버렸는지도 모르고요. 정신병을 앓고 있는 범죄자가 파티 때 놀이를 즐긴 거라고 할 수도 있지요.”

“부인이 그런 믿음 때문에 나를 찾아온 건 아닐 텐데요.”           (P243-244)   

  

루엘린 스마이스 부인이 이곳을 이렇게 동화처럼 바꾸지 않았다면 좋았을 거라는 생각이 문득 들었다. 채석장을 이런 분위기 말고 꽤 수수한 분지 정원으로 만들 수 있었을텐데 그녀는 야심이 큰 여자였다. 야심이 큰 데다 큰 부자였다. 푸아로는 잠시 유언장에 대해 생각해 보았다. 부유한 여성이 만든 유언장. 부유한 여성이 만든 유언장을 둘러싼 거짓말. 부유한 과부들이 유언장을 감춰 두는 곳. 그리고 다시 위조범의 입장에서 생각해 보려고 애썼다. 검인을 받기 위해 제출된 유언장은 의심할 여지 없이 위조된 것이었다. 신중하고 유능한 변호사인 플러턴 씨도 그렇게 확신했다. 그는 확실한 증거나 정당한 이유가 없으면 고객에게 법정 소송을 권하지 않는 변호사였다.            (P258)     

“앉으세요, 부인. 진정하시고 차근차근 말씀해 보세요. 아이가 죽었다고요? 또 다른 아이가요?” 

“그 애 동생요. 리어폴드 말이에요.”

“리어폴드 레이놀즈가요?”

“네. 들판 오솔길에서 시체를 발견했대요. 학교에서 돌아오는 길에 이 근처 냇가에서 놀려고 길을 벗어난 게 틀림없어요. 누군가 그 아이를 냇물에 빠트렸어요. 물속에 머리를 처박았다고요.”

“조이스에게 했던 것과 똑같은 수법이군요.”

“네, 그래요. 그건 분명, 분명 일종의 광기예요. 그리고 누가 그랬는지 아무도 모른다는 게 더 끔찍하죠. 도대체 누군지 알 수 없다는 거 말이에요. 하지만 저는 알 것 같아요. 저는 정말...... 그래요. 그건 정말 사악한 짓이에요.”              (P278)     


“네, 맞아요.저는 그렇게 생각했어요. 그래서 그 애 표정이 그랬던 거라고 생각했지요. 저는 제가 잘 안다고 생각했어요. 저는 평생 뭐든지 잘 알고, 내가 옳다고 생각하고 살았어요. 하지만 저도 틀릴 수가 있더군요. 그 애도 살해되었다는 건 제 생각이 완전히 틀렸다는 뜻이니까요. 리어폴드는 서재에 들어갔다가 죽어 있는 조이스를 보고 충격을 받고 겁을 집어먹었던 게 틀림없어요. 그래서 아무도 보지 않을 때 그 방에서 나가고 싶었지만 위를 쳐다보다가 저를 보고는 다시 서재로 들어가 문을 닫은 거죠. 그리고 현관에 사람들이 아무도 없을 때까지 기다렸다가 다시 나온 것 같아요. 하지만 그 애가 조이스를 죽인 건 아니에요. 절대 그렇지 않아요. 다만 조이스가 죽은 걸 보고 충격을 받은 것뿐이에요.”           (P280)    

 

“이런 형편없는 멍청이 바보야. 미치광이 살인자하고 여기까지 오다니, 네가 무슨 짓을 하고 있는지는 알고 다녀야지.”

니컬러스 랜섬이 나무라자, 미란다가 맞받아쳤다. 

“알고 그런 거야. 오빠도 알다시피 다 내 잘못이니까 제물이 되려고 한 거야. 조이스는 나 때문에 죽은 거니까. 그러니까 내가 제물이 되어야 하는 게 맞잖아? 의식 살인 같은 거 말이야.”

“의식 살인 같은 말도 안 되는 얘기는 집어치워. 다른 아가씨를 발견했대. 왜, 오래전에 실종된 오페어 걸 있잖아. 2년쯤 됐지. 모두 그 아가씨가 유언장을 위조한 뒤에 달아났다고 생각했잖아. 그런데 도망간 게 아니었어. 그 아가씨 시체가 우물 속에서 발견됐대.”

미란다가 갑자기 비통에 찬 울음을 터트렸다. 

“이럴 수가! 소원의 우물은 아니겠지? 내가 그토록 찾고 싶어 했던 그 소원의 우물은 아니겠지? 아, 그 아가씨가 소원의 우물 속에 있는 건 바라지 않았는데. 누가, 누가 그 아가씨를 거기 빠트렸대?”

“널 여기로 데리고 온 그 사람이.”             (P309)     

“결정적인 단서라는 게 뭐죠?”    

“물이었습니다. 나는 파티에 참석한 사람 중에 물에 젖은 사람, 그리고 물에 젖어서는 안 되는데도 젖어 있었던 사람을 찾아야 했어요. 조이스 레이놀즈를 죽인 범인은 누가 됐건 젖지 않을 수 없었을테니 말이에요. 기운이 팔팔한 아이를 물이 가득 든 양동이 속에 밀어 넣으면 버둥거리면서 물이 튈 테니 젖을 수밖에요. 그러니 물에 젖은 합당한 이유를 만들어 내려면 무슨 일이 생겨야 해요. 사람들이 모두 스냅드래건을 하느라 식당으로 몰려갔을 때 드레이크 부인은 조이스를 서재로 데려갔죠. 파티를 연 여주인이 같이 가자고 하면 자연히 따라가게 마련이니까요. 조이스는 드레이크 부인을 조금도 의심하지 않았던 겁니다. 미란다가 조이스에게 말한 건 예전에 살인을 목격한 적이 있다는 게 다였어요. 그래서 조이스는 살해당했고 살인범은 흠뻑 젖어 버렸죠. 물에 젖은 데는 이유가 있어야 했기에 그녀는 이유를 만들어 내는 일에 착수했어요. 어쩌다 젖었는지 증언해 줄 목격자가 있어야 했지요. 그래서 드레이크 부인은 물이 가득 든 커다란 꽃병을 들고 층계참에 서서 기다리고 있었고, 적당한 때에 휘태커 양이 스냅드래건을 하던 식당에서 나왔지요. 그곳은 더웠으니까요. 드레이크 부인은 깜짝 놀라는 척하면서 꽃병을 놔 버립니다. 꽃병이 현관 바닥에 떨어져 산산조각이 날 때 자신의 몸이 물에 젖도록 신경 쓰면서요. 꽃병을 놔 버렸어요. 드레이크 부인은 계단을 급히 내려왔고 휘태커 양과 함께 깨진 조각을 흩어진 꽃들을 주워 모으면서 예쁜 꽃병을 깨트려 속상하다며 불평을 늘어놓았죠. 살인이 자행된 서재에서 누군가 나오는 걸 본 것 같다는 인상을 휘태커 양에게 심어 주는 데 성공한 거지요. 휘태커 양은 드레이크 부인의 말을 액면 그대로 믿었습니다. 하지만 그걸 들은 에믈린 양은 흥미로운 점이 있다는 것을 알아차렸어요. 그래서 에믈린 양은 휘태커 양에게 그 이야기를 내게 들려주라고 한 거고요. 그렇게 해서 나도 조이스를 죽인 범인이 누군지 알게 된 겁니다.”

콧수염을 빙빙 돌리면서 푸아로가 말을 맺었다. 

“그래도 조이스는 살인을 목격한 적이 없잖아요!”

“드레이크 부인은 그걸 몰랐어요. 하지만 자신과 마이클 가필드가 올가 세미노프를 죽였을 때 취리 우드에 누군가 있었고 그걸 목격했을지도 모른다는 의심은 늘 하고 있었지요.”

“그게 조이스가 아니라 미란다였다는 건 언제 알았나요?”

“사람들이 하나같이 조이스가 거짓말쟁이였다고 말하니 그 사실을 받아들일 수밖에 없었고, 그때 바로 알게 되었어요. 사실은 미란다였다는 게 눈에 보이더군요. 그 애는 퀴리 가든에 자주 들러 새와 다람쥐를 관찰하곤 했으니까요. 미란다 말대로 조이스는 미란다의 가장 좋은 친구였어요. 그 아이가 ‘우리는 서로에게 모든 비밀을 털어놓았어요.’라고 말했어요. 미란다가 파티에 가지 않았으니 강박적인 거짓말쟁이인 조이스는 살인을 목격한 적이 있다는 친구의 말을 그대로 써먹은 겁니다. 아마도 유명한 범죄 소설가인 당신에게 뚜렷한 인상을 남기려고 그랬던 것 같아요.”               (P315-316)    

 

“이피게네이아.”  

“그래요. 이피게네이아. 아가멤논은 트로이로 가는 자신의 배들을 지키기 위해 바람을 멎게 하려고 자신의 딸을 바쳤어요. 마이클은 새로운 에덴의 정원을 가지기 위해 자기 딸을 바치려고 했던 겁니다.”

“마이클은 자기가 무슨 짓을 하고 있는지 알고 있었어요. 그 사람도 후회라는 걸 한 적이 있는지 궁금하네요.”

푸아로는 대답하지 않았다. 유일무이한 아름다움을 지닌 한 젊은이가 쌍날 도끼 그림이 새겨진 거석 옆에 누워 있는 모습, 제물을 구하고 젊은이를 법에 따라 응징하려는 순간 잔을 잡아채 들이마시고는 죽은 손가락으로 여전히 황금 잔을 굳게 쥐고 있는 모습이 머릿속에 떠올랐다. 

마이클 가필드는 그렇게 죽었다. 푸아로는 그에게 어울리는 죽음이라고 생각했다. 하지만 그리스의 섬에 꽃이 만발한 정원은 없으리라..........                (P32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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