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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노용헌 Mar 13. 2024

서머싯 몸의 <인생의 베일>

영화 <페인티드 베일>  2006년

소설 <인생의 베일>은 불륜을 소재로 한 소설 중에서 플로베르의 <마담 보바리>, 톨스토이의 <안나 카레니나>와 함께 손꼽히는 소설이다.     

 

<페인티드 베일>(The Painted Veil)은 캐나다에서 제작된 존 커랜 감독의 2006년 멜로/로맨스, 드라마 영화이다. 나오미 왓츠 등이 주연으로 출연하였고 에드워드 노튼 등이 제작에 참여하였다.    

 

그로부터 석 달도 채 못 되어 그들이 그런 관계로 발전할 줄 누가 상상이나 했을까? 그는 그날 저녁 그녀를 처음 만났을 때부터 그녀에게 마음을 빼앗겼노라고 말했다. 그녀는 세상 무엇보다 아름다운 존재라고. 그는 그날 그녀가 입고 있던 옷까지도 기억했다. 그것은 그녀의 결혼 드레스였다. 그녀는 마치 계곡의 한 떨기 백합 같았다고 그는 말했다. 그가 마음을 털어놓기 전부터 그가 그녀에게 푹 빠졌다는 것을 눈치 챈 그녀는 다소 두려워진 나머지 그와 거리를 두었다. 하지만 충동적이고 격정적인 그에게 그것은 견디기 힘든 형벌이었다. 그녀는 그의 품에 안기는 생각만 해도 심장이 너무나 두근거려서 그가 자기에게 키스하도록 내버려 둬도 괜찮을지 걱정스러울 정도였다. 그녀는 사랑에 빠져 본 적이 없었기 때문에 모든 것이 경이롭기만 했다. 그리고 사랑이 무엇인지 깨닫자 그녀에게 사랑을 품고 있는 월터에게 갑자기 동정심이 일었다. 그녀는 월터를 짓궂게 놀리고서 그가 즐거워하는 모습을 바라보곤 했다. 전에는 남편을 약간 두려워하는 마음도 있었지만 이제는 좀 더 자신감이 차올랐기 때문이다. 그를 놀리고서 그녀의 농담을 받아들이는 그의 입가에 서서히 미소가 번지는 것을 바라보면 재미있었다. 놀라면서도 기뻐하는 그 모습이라니, 그런 날들이 계속되는 동안, 그녀는 남편이 점점 인간적인 모습을 찾아 간다는 생각이 들었다. 열정이라는 것을 이해하게 된 이상, 그녀는 하프의 줄 위로 손가락을 움직이며 연주하는 하프 연주자처럼 그의 애정을 자유자재로 요리했다. 그가 그녀 때문에 당황하고 곤혹스러워하는 것을 보면 웃음이 터져 나왔다. 

찰스를 애인으로 얻고 난 이후, 그녀는 자신과 월터를 둘러싼 상황이 묘하게도 터무니없어 보였다. 그녀는 너무나 근엄하고 자제력이 강한 그를 웃음으로 앞세우지 않고서는 도저히 쳐다볼 수 없었다. 하지만 너무나 행복한 나머지 남편에게 불만을 품을 여력조차 없었다. 어쨌든, 그가 없었다면 그녀는 찰스를 만나지 못했을 테니까. 그녀는 마지막 선을 넘기 전 얼마간 망설였다. 찰스의 열정에 항복하고 싶지 않아서가 아니었다. 그와 마찬가지로 그녀의 열정 또한 뜨거웠다. 그녀가 받은 교육과 일생토록 익숙하게 받아들였던 관습이 그녀의 발목을 붙잡았기 때문이다. 마침내 (두 사람 모두 예기치 못한 기회에 맞닥뜨렸을 때 사건이 터지듯) 마지막 선을 넘고 나서, 그녀는 자신이 예전과 조금도 달라지지 않았다는 것을 발견하고 깜짝 놀랐다. 어떤 변화가 일어날 것으로 예상했지만 과연 완전히 다른 사람이 된 것처럼 느낄 만한 환상적인 변화는 도무지 찾아볼 수 없었다. 우연히 거울 속에 비친 자신의 모습에서 늘 봐 왔던 같은 여자의 모습을 발견하고 그녀는 당황하고 말았다. (P62-64)   

  

그가 알고 있음엔 틀림없었다. 그 점에는 의심의 여지가 없었고 분명 그는 그녀에게 분노하고 있었다. 왜 아무 말도 하지 않는 걸까? 화가 나서 상처를 받았는데도 나를 너무 사랑하기 때문에 내가 자기를 떠날까 봐 두려워서? 그런 생각이 들자 그가 약간 경멸스러웠지만 그녀의 선한 성품이 반기를 들었다. 어쨌든 그는 그녀의 남편이고 그 덕분에 먹고 자고 하지 않는가. 그가 간섭하지 않고 그녀가 원하는 대로 놔두는 이상 그녀는 그에게 착하게 굴어야 했다. 한편으로 그의 침묵은 단지 병적인 수줍음에서 비롯하는 것인지도 몰랐다. 찰스의 말이 옳았다. 월터보다 더 추문을 싫어할 사람은 없었다. 그는 남들 앞에서 연설하는 것을 절대적으로 피했다. 어떤 사건에 전문가 자격으로 진술하기 위해 법정에 선 적이 있었는데, 한 주 전부터 거의 잠을 이루지 못했다고 그녀에게 말한 적도 있었다. 그의 수줍음은 병적이었다.

그리고 또 다른 측면이 있었다. 남자들은 체면을 매우 중요시한다. 그들에게 무슨 일이 일어났는지 아무도 모르는 상황임을 고려하고 그냥 무시하고 넘어가기로 월터가 결심한 것일 수도 있었다. 하지만 그가 어느 쪽이 실속이 있을지 저울질했을 거라는 찰스의 말은 과연 신빙성이 있을까? 찰스는 이 식민지에서 가장 인기가 많은 남자이고 곧 식민지 총독부의 총리가 될 것이다. 그는 월터에게 아주 유용한 도구가 될 수 있지만, 한편으로 월터가 그의 심기를 거스른다면 그가 고약하게 나올 수도 있었다. 애인의 권력과 결단력을 생각하자 그녀의 심장은 기쁨으로 미친 듯이 뛰었다. 그의 남성미가 물씬 풍기는 팔을 생각하기만 하면 그녀는 무방비 상태가 되었다. 남자들은 이상한 존재다. 월터도 그렇게 비굴할 수 있다는 걸 그녀는 꿈에도 생각지 못했다. 아마 그의 근엄함은 비열하고 소심한 성격을 가리기 위한 가면에 불과할지도 모른다. 그런 생각을 하면 할수록 점점 더 찰스의 말이 맞는 것만 같았다. 그녀는 남편을 한번 더 힐끔 쳐다보았다. 그녀의 눈길에는 관심의 흔적이라곤 전혀 없었다. 

그때 양옆의 여자들이 각자 다른 옆 사람과 이야기를 나누기 시작하면서 그는 혼자가 되었다. 정면을 응시하는 그의 연회장의 모습은 온데간데없고 치명적인 슬픔만 가득했다. 그것을 본 키티는 충격에 휩싸였다.  (P85-87)     

“당신이 날 실망시킬 걸, 그는 알고 있었어.”

그녀는 더 이상 말을 하지 않았다. 외국어를 처음 공부할 때 글을 읽으면 처음에는 도무지 이해가 가지 않다가 단어 하나, 문장 하나가 단서를 제공하면서 말이 되기 시작한다. 마찬가지로 갑자기 엉클어진 머리에 한 줄기 의심이 번쩍하고 스치며, 그녀는 월터의 속셈을 어렴풋이 들여다볼 수 있었다. 번쩍거리는 번갯불 아래 어둡고 음울한 풍경이 보이다가 곧 다시 밤의 어둠 속으로 묻혀 버렸다. 

“그는 당신이 꽁무니를 뺄 걸 알고 있었기 때문에 그런 협박을 한 거예요. 찰스, 이상하리만큼 그는 당신을 정확하게 판단했어요. 나의 환상을 그토록 잔인하게 깨뜨려 버리다니, 그 사람다워요.”

찰스는 앞에 놓인 압지를 내려다보고 있었다. 그는 약간 얼굴을 찌푸린 채 시무룩하게 입을 다물고 아무런 대답도 하지 않았다.  

“그는 당신이 허영심이 많고 비겁하고 이기적이라는 걸 알고 있었어. 내가 내 눈으로 그걸 확인하길 바랐던 거지. 그리고 당신이 다가오는 위험에 산토끼처럼 달아날 것도 알았던 거야. 내가 당신이 나를 사랑한다고 착각하며 얼마나 철저하게 속고 있는지도 알고 있었어. 당신이 당신 자신밖에 사랑하지 못한다는 걸 알고 있었기 때문에, 당신이 자신의 화를 면하기 위해 거리낌없이 나를 희생시킬 인간이라는 걸 그 사람은 알고 있었어.”      (P117-118)     

“끔찍하지 않나요?”

“뭐가요? 죽음이?”

“네, 죽음은 모든 걸 무서우리만치 시시하게 만들어 버려요. 저이는 인간 같지가 않군요. 그를 보세요. 살아 숨 쉰 적이 있다고는 믿기지 않아요. 한때는 그도 언덕을 달려 내려오며 연을 날리던 어린 소년이었을 텐데, 그렇게 생각하기 힘들군요.”        (P155)     

“왜 스스로를 경멸하죠?”

그녀가 자기도 모르게 아까 하다 만 대화를 계속하려는 듯 물었다. 

그는 책을 내려놓고 생각에 잠긴 듯 그녀를 주시했다. 먼 곳에서부터 생각을 끌어모으기라도 하는 것처럼.

“당신을 사랑했으니까.”

그녀는 얼굴을 붉히고 고개를 돌렸다. 그의 차갑고 흔들리지 않는 꿰뚫는 시선을 감당할 수 없었다. 그의 말이 무슨 뜻인지 이해가 갔다. 그녀는 잠시 뜸을 들였다가 대답했다. 

“그건 부당해요. 내가 어리석고 경박하고 천박하다고 해서 날 비난하는 건 공평하지 않아요. 난 그렇게 자랐어요. 내가 아는 모든 여자들은 다 그래요..... 교향곡 연주회가 지루하다는 사람에게 음악에 대한 기호가 없다고 힐책하는 것과 같아요. 내가 갖지 못한 품성을 내 탓으로 돌리고 나를 비난하는 게 공평한가요? 난 내가 아닌 존재인 척하면서 당신을 속이려고 한 적 없어요. 난 그냥 예쁘고 명랑해요. 장터 노점에서 진주 목걸이나 담비 외투를 찾지 마요. 주석 트럼펫이나 장난감 풍선을 찾으라고요.”

“난 당신을 비난하지 않아.”

그의 목소리에 힘이 없었다. 그녀는 그가 다소 짜증스럽게 느껴지기 시작했다. 그들의 머리 위에 드리운 암울한 죽음의 공포에 비하면, 그날 그녀가 언뜻 엿본 숭고한 아름다움에 비하면 그들의 문제는 하찮다는 것이 그녀에게는 돌연 이토록 명백하게 다가왔는데, 그는 어째서 깨닫지 못하는 것일까? 어리석은 여자가 부정을 저질렀다고 해서 무엇이 그토록 중요하단 말인가? 왜 그녀의 남편은 숭고함과 마주하고서도 그 생각에서 벗어나지 못할까? 월터가 그의 모든 명석함에도 불구하고 그렇게 균형 감각이 없다니 이상했다. 인형에게 근사한 드레스를 입혀 놓고 그것을 숭배하려고 신전에 세워 놓았는데 인형 속에 톱밥이 가득찬 것을 발견하고 자신이나 인형을 용서할 수 없다고 하는 꼴이었다. 그의 영혼은 갈가리 찢겨졌다. 그가 잘 버텨 왔다는 것은 모두 위장이었다. 진실이 그것을 산산이 부숴 놓았을 때 그는 현실 자체가 산산조각 났다고 생각한 것이다. 그가 그녀를 용서하지 않으리라는 것은 사실이었다. 그 자신을 용서하지 못할 것이기 때문이었다. 

그의 나지막한 한숨 소리가 들렸고 그녀는 그를 흘끔 쳐다보았다. 어떤 생각이 그녀의 머리를 스치자 그녀는 그만 숨이 막히고 말았다. 그리고 울음이 터져 나오려는 것을 간신히 억눌렀다.

그의 고통은 이른바 상처 받은 가슴...... 바로 그것 때문이었을까?”         (P181-183)  

   

그들은 작은 건물의 계단 위에 앉아서 (옻칠을 한 네 개의 기둥과 높은 기와지붕 아래 커다란 청동 종이 매달려 있다.) 넘실대는 강물과 병마에 시달리는 도시를 향해 구불구불 뻗어 난 길을 바라보았다. 총안이 똟린 성벽이 보였다. 후끈거리는 열기가 그 위를 관 덮개처럼 덮고 있었다. 아주 천천히 흘러가는 강물의 모습에서 사물의 무상함과 애수가 밀려왔다. 모든 것이 흘러갔지만 그것들이 지나간 흔적은 어디에 남아 있단 말인가? 키티는 모든 인류가 저 강물의 물방울들처럼 어디론가 흘러가는 것만 같았다. 서로에게 너무나 가까우면서도 여전히 머나먼 타인처럼, 이름 없는 강줄기를 이루어, 그렇게 계속 흘러흘러, 바다로 가는 구나. 모든 것이 덧없고 아무것도 그다지 중요하지 않을 때 사소한 문제에 터무니없이 집착하고 그 자신과 다른 사람까지 불행하게 만드는 인간이 너무나 딱했다.     (P204-205)     

그가 아주 조용히 일어섰다. 그의 무표정하고 창백한 얼굴이 섬뜩했다. 그녀는 그를 믿지 않았다. 그녀가 잘못 말한다면 그는 그녀에게 얼음장 같은 가혹함으로 응수할 터였다. 이제 그녀는 그가 가진 극도의 민감함을 절감했다. 그의 통렬한 냉소는 그것에 대한 보호막이라는 것도, 그가 상처 받으면 얼마나 빨리 가슴을 닫아 버리는지도, 그의 어리석음에 일순간 화가 치밀었다. 그를 가장 괴롭힌 것은 그의 허영심에 난 상처가 분명했다. 그리고 그것이 가장 치료하기 어려운 상처임을 어렴풋이 깨달았다. 남자가 아내의 정조를 아무리 중요하게 여긴다 해도 이건 도에 지나쳤다. 처음 찰스와 잤을 때 그녀는 자신이 완전히 다른 여자로 다시 태어나기라도 할 것 같았다. 하지만 자신의 모습은 전과 다름없었고 오직 행복과 크나큰 활력을 경험했다. 월터의 아이라고 말했더라면 하는 아쉬움이 생겨났다. 그 거짓말은 그녀에겐 아무 의미도 없지만, 그녀가 그렇게 확신만 주었다면 그에겐 커다란 위안이 되었을 것이다. 게다가 그것은 거짓말이 아닐 수도 있었다. 하지만 아까는 가슴속에 존재하는 이상한 훼방꾼이 나서서 상황을 그녀에게 유리하게 해석할 수 없도록 방해했다. 남자들이란 얼마나 어리석은지! 생식에서 그들의 역할은 너무나 사소했다. 기나긴 달들을 힘들게 아이를 품고 있다가 고통 속에 출산하는 것은 여자였지만 남자는 잠깐 관여했다는 이유만으로 그런 터무니없는 요구들을 했다. 그것이 어째서 아이에 대한 그의 감정에 차이점을 만들어야 하나? 그러자 키티의 생각이 그녀가 품고 있는 아이에게로 흘러갔다. 그것에서 어떤 감정도 열광적인 모성애도 느끼지 못했지만 왠지 모를 호기심이 생겼다.         (P226-227)     

“영혼이 불멸하다고 생각하세요?”

그녀가 물었다.

그는 그 질문에 놀란 기색을 보이지 않았다.

“제가 그걸 어떻게 알 수 있겠습니까?”

“방금 전 그들이 월터를 관에 넣기 전에 씻길 때, 그를 봤어요. 그는 아주 젊어 보이더군요. 죽기엔 너무 젊은 나이죠. 당신이 나를 처음 산책에 데리고 나갔을 때 우리가 봤던 거지를 기억하세요? 내가 겁에 질렸던 건 그가 죽었기 때문이 아니라 그가 조금도 인간처럼 보이지 않았기 때문이었어요. 그는 그저 죽은 동물이었어요. 그리고 이번에 월터도 마찬가지로 멈춰 버린 기계와 너무나 흡사했죠. 그게 너무나 두려워요. 그것이 단지 기계일 뿐이라면 그 모든 고통과 가슴의 상처와 불행은 얼마나 부질없을까요.”

그는 대답하지 않았지만 그의 눈은 그들 발밑의 풍경 위를 떠돌고 있었다. 청명하고 햇살 가득한 아침에 그 탁 트인 광경은 가슴을 온통 환희로 가득 채울 만했다. 정리된 논들이 시야가 닿는 곳까지 죽 펼쳐졌고 상당수의 논 안에는 파란 옷을 입은 농부들이 소를 데리고 부지런히 일하고 있었다. 평화롭고 행복한 광경이었다. 키티가 침묵을 깼다.

“수녀원에서 그 모든 것들을 목격하면서 얼마나 깊은 깨달음을 얻었는지 이루 다 말할 수 없어요. 그들은 놀라워요. 수녀들, 그들은 내가 완전히 무가치하다고 느끼도록 만들었어요. 그들은 모든 걸 포기했어요. 집도, 나라도, 사랑도, 아이들도, 자유도. 그리고 내가 가끔 여전히 포기하기 힘든 그 모든 소소한 것들, 꽃과 초원, 가을날의 산책, 책과 음악, 안락함, 그 모든 것도 그들은 포기했어요. 모든 걸. 그렇게 함으로써 그들은 희생과 가난과 살인적인 노동과 기도의 삶 속으로 자신을 내던질 수 있었겠죠. 그들 모두에게 이 세상은 실제로 진정한 유배지예요. 삶은 그들이 기꺼이 짊어져야 할 십자가지만 그들의 가슴속엔 언제나 욕망이..... 오, 욕망보다 더 강한 것이 가득하죠. 그건 열망이자, 갈망이에요. 영원한 삶으로 그들을 이끌어 줄 죽음에 대한 열렬한 열망이에요.”

키티는 양손을 맞잡고 고통에 젖어 그를 바라보았다. 

“그래서요?”

“영원한 삶이 없다고 생각하세요? 죽음이 진정 모든 것의 끝을 의미한다고 생각해 보세요. 사람들은 무(無)를 위해 모든 걸 포기하는 거예요. 속아 넘어가는 거죠. 얼간이들처럼.”  

워딩턴은 잠시 생각하다가 대답했다.

“난 이런 의문이 듭니다. 사람들이 추구하는 것들이 한갓 환영은 아닐까 하는 의문이, 그들의 삶은 그 자체로 아름답습니다. 우리가 살고 있는 이 세상을 역겨움 없이 바라볼 수 있도록 만드는 유일한 것은 인간이 이따금씩 혼돈 속에서 창조한 아름다움이라는 생각이 들어요. 그들이 그린 그림, 그들이 지은 음악, 그들이 쓴 책, 그들이 엮은 삶. 이 모든 아름다움 중에서 가장 다채로운 것은 아름다운 삶이죠. 그건 완벽한 예술 작품입니다.”

키티는 한숨을 쉬었다. 그의 말이 어렵게 들렸다. 그녀는 더 듣고 싶었다.

그가 말을 이었다.  

“교향곡 연주회에 가 본 적 있습니까?”

그녀가 미소를 지었다. 

“네. 난 음악은 아무것도 모르지만 좋아해요.”

“관현악단의 각 단원들이 자신의 작은 악기를 연주할 때 허공 속으로 퍼져 나가는 복잡한 하모니에 대해 어떤 생각을 할까요? 그들은 오직 그들 자신의 작은 역할에만 신경 씁니다. 하지만 그들도 교향곡이 아름답다는 걸 압니다. 듣는 사람이 없어도 그것은 여전히 아름답고 그들도 자신의 역할에 만족합니다.”

키티가 잠시 후에 말했다. 

“저번에 말했던 그 도를 말씀하시는군요. 그게 뭔지 말씀해 보세요.”

워딩턴은 그녀를 슬쩍 쳐다보고는 잠시 망설이다가 그의 희극적인 얼굴에 희미한 미소를 띠며 대답했다. 

“그것은 ‘길’과 ‘길을 가는 자’입니다. 그것은 모든 존재가 걸어가는 영원한 길이지만, 어떤 존재도 그것을 만들지는 못합니다. 그것 자체가 존재이니까요. 그것은 만물과 무(無)이지요. 그것으로부터 모든 것들이 자라나고, 모든 것들이 그것을 따르며, 마침내 그것을 모든 것들이 돌아갑니다. 각이 없는 네모이고, 귀로 들을 수 없는 소리이며, 형태 없는 상(像)이랍니다. 그것은 거대한 그물이고, 그물코는 바다처럼 넓지만 아무것도 통과하지 못합니다. 그리고 모든 것들의 피난처가 되는 성소입니다. 그것은 아무 곳도 아니지만 창문 밖을 내다보지 않아도 그것을 볼 수 있습니다. 소망하지 않기를 소망하라고 그것은 가르칩니다. 그리고 모든 것을 흘러가도록 내버려 두라고 합니다. 비천한 사람이 온전히 지속됩니다. 굽히는 사람이 똑바로 섭니다. 실패는 성공의 밑거름이고 성공은 실패가 도사린 함정입니다. 그런데 어느 누가 언제 전환점이 나타날지 짐작할 수 있을까요? 부드러움을 추구한 사람은 심지어 어린애처럼 될 수 있습니다. 부드러움은 공격한 자에게 승리를 불러오고 방어한 자에게 안전을 가져다줍니다. 위대함은 스스로를 극복한 자의 것입니다.”

“그게 어떤 의미를 지니고 있을까요?”  

“가끔은, 위스키를 대여섯 잔 들이켜고 나서 별을 바라 볼 때, 난 아마도 그럴 거라고 생각합니다.”         (P264-267) 

    

물론 월터의 죽음은 그녀에게 충격이었다. 그녀는 월터가 죽기를 바라지 않았다. 하지만 어쨌든 그녀는 그를 사랑하지 않았고 사랑한 적도 없었다. 그래도 슬픔에 젖는 것이 그녀에게 합당한 행동이었다. 아무에게나 그녀의 마음을 들킨다면 추하고 천박하게 보일 터였다. 하지만 가면을 쓰기에 그녀는 너무 많은 일을 겪었다. 지난 몇 주 동안 그녀가 깨달은 것은 남에게 거짓말하는 것이 때론 필요하지만 스스로를 기만하는 행위는 언제나 비열한 짓이라는 점이었다. 월터가 그렇게 비극적인 방식으로 죽었다는 게 그녀도 안타깝기는 했지만 그것은 그가 단지 알고 지내던 사람이었다고 해도 느꼈을 법한 순전히 인간적인 차원의 슬픔이었다. 월터가 존경받을 만한 자질을 지녔었다는 건 그녀도 인정하는 바다. 하지만 공교롭게도 그녀는 그를 좋아하지 않았고 그가 따분하기만 했다. 그의 죽음이 그녀에게 안식을 가져왔다고 한다면 억지겠고, 그녀의 말 한마디에 그가 다시 살아 돌아온다면 얼마나 좋겠냐마는 그것도 아닌 바에야 그의 죽음이 그녀의 길을 어느 정도는 수월한 쪽으로 돌려놓았다는 느낌이 어쩔 수 없이 드는 게 그녀의 솔직한 심정이었다. 그들은 함께 있어서 행복한 적인 없었고 헤어짐조차 끔찍하고 어려웠다. 그녀는 이런 생각을 하는 자신이 놀라웠다. 사람들이 실상을 안다면 나를 무자비하고 잔인하다고 생각하겠지. 글쎄, 그들이 어떻게 알겠나. 그녀는 다른 친구들도 각자의 가슴에 수치스러운 비밀을 품고서 호기심 어린 시선들을 피해 평생을 살아가지는 않을까하는 생각이 들었다.          (P282-283) 

    

키티는 잠깐 동안 저능아처럼 몸을 웅크린 채 침대 끝에 가만히 앉아 있었다. 마음이 공허했다. 한 줄기 전율이 그녀의 몸을 훑고 지나갔다. 그녀는 비틀거리며 일어나 화장대로 가서 의자에 털썩 주저앉았다. 그리고 거울 속의 자기 모습을 바라보았다. 울어서 눈이 퉁퉁 부어 있었다. 얼굴은 얼룩덜룩했고 뺨에는 빨간 자국이 그의 뺨이 머물렀던 흔적으로 남아 있었다. 그녀는 공포에 휩싸여 자신을 바라보았다. 같은 얼굴이었다. 그녀가 기대했던 타락의 조짐은 어디에도 없었다.

“돼지.”

그녀는 생각나는 대로 내뱉었다.

“돼지.”

그러고는 고개를 푹 떨어뜨리고 팔에 얼굴을 파묻고는 서럽게 흐느끼기 시작했다. 이건 수치야, 수치! 자신에게 무슨 일이 들이닥친 건지 그녀는 혼란스러웠다. 끔찍했다. 그녀는 그가 미웠고 그녀 자신도 미웠다. 황홀했었다. 아, 가증스러워라! 그녀는 그의 얼굴을 다시는 마주할 수 없을 것이다. 그가 너무나 옳았다. 무가치한 그녀와, 그가 결혼하지 않은 건 그로서는 당연했다. 그녀가 매춘부보다 나은 게 뭐란 말인가. 아니, 더 형편없지. 최소한 그 가여운 여자들은 빵을 위해서 자신을 내준다. 그것도 도로시가 그녀를 받아준 이 집에서! 슬픔과 비통함은 또 어쩌고! 그녀의 어깨가 흐느낌으로 흔들렸다. 이제 모든 것이 다 끝장이다. 그녀는 자신이 변했다고 생각했었고, 자신이 강하다고, 독립한 여성으로서 홍콩으로 돌아왔다고 생각했었다. 새로운 생각들이 햇살 속에 날아다니는 작은 노란 나비들처럼 그녀의 가슴속에서 파드닥거렸고 훨씬 더 나은 미래가 그녀를 찾아오리라 기대했다. 자유가 찬란한 기백으로 그녀를 유혹했고 세상은 그녀가 가벼운 발걸음으로 고개를 꼿꼿이 들고 걸어 나갈 수 있는 드넓은 평원 같았다. 그녀는 자신이 정욕과 상스러운 열정으로부터 자유롭다고, 깨끗하고 건강한 정신적 삶을 영유할 수 있으리라 생각했다. 그녀는 황혼 무렵 논 평원 위를 유유히 나는 흰 해오라기가 되었고 그녀의 마음도 함께 공중으로 치솟았다가 휴식을 취하곤 했다. 하지만 그녀는 노예에 불과했다. 나약하고, 나약한! 한심하고, 가망 없는, 창녀!             (P304-305)     

증기선이 마르세유로 들어가자 키티는 햇빛에 작열하는 들쭉날쭉하고 아름다운 해변가의 윤곽선을 바라보았다. 갑자기 생트마리 성당 위에 세워진 동정녀 마리아의 황금상이 눈에 들어왔다. 그것은 항해 중인 선원들에게 안전의 상징이었다. 키티는 메이탄푸 수녀원의 수녀들이 그들의 조국을 영원히 떠나면서 그 황금상이 멀리 시야에서 사라질 때 무릎을 꿇었다는 이야기가 생각났다. 그 이후 그것은 그들에게 단지 파란 하늘에 타오르는 작은 황금색 불꽃이 아니라 이별의 고통을 완화시키기 위해 올리던 기도 속에서 찾곤 하던 의지의 대상이었다. 그녀는 양손을 맞잡고 누군지도 모르는 신에게 간청을 올렸다.

길고 고요했던 여행길 내내 키티는 자신에게 일어났던 그 끔찍한 일을 끊임없이 떠올렸다. 자신을 이해할 수 없었다. 너무나 뜻밖의 일이었다. 도대체 무엇에 홀렸기에 그토록 그를 경멸하는데도, 온 마음을 다해 경멸하는데도 찰스의 천박한 포옹에 열정적으로 굴복했단 말인가? 분노가 그녀를 휩쌌고 자신에 대한 혐오감에 그녀는 중독될 지경이었다. 그 굴욕감을 평생 잊지 못할 것만 같아서 펑펑 눈물을 쏟았다. 하지만 홍콩과의 거리가 점점 멀어질수록 그녀의 노여움도 서서히 생기를 잃어 갔다. 다른 세상에서 일어난 일만 같았다. 그녀는 돌발적인 광기에 휘말렸다가 회복된 사람이 제정신이 아닐 때 저질렀던 괴상한 짓을 희미하게 기억하면서 괴로워하고 부끄러워하는 상황에 처한 기분이었다. 하지만 그 사람은 자기가 제정신이 아니었음을 내세우며 어쨌든 자기 입장에서 당당히 관대함을 요구할 수 있었다. 만약 너그러운 가슴을 가진 사람이라면 그녀를 단죄하기보다는 동정할 수도 있을 거라고 키티는 생각했다. 하지만 그녀의 자존심이 얼마나 처참하게 산산조각 났는지를 생각하면 한숨이 절로 나왔다. 그녀 앞에 탄탄대로로 쭉 뻗어 있는 듯 보였던 길이 이제는 복잡한 미로였고 곳곳에 함정이 도사리고 있었다. 하지만 인도양의 광대함과 극적이고 아름다운 석양이 그녀의 마음을 달래 주었다. 그러자 그녀는 자유롭게 자신의 영혼을 소유할 수 있는 어떤 곳으로 흘러가는 것만 같았다. 그녀는 뼈아픈 투쟁의 대가를 치렀으니 다시 자존심을 회복할 수만 있다면 그것을 가당할 용기도 되찾을 수 있으리라.         (P312-314)    

 

과거는 끝났다. 죽은 자는 죽은 채로 묻어 두자. 너무 무정한 걸까? 그녀는 온 마음을 다해 자신이 동정심과 인간애를 배웠기를 바랐다. 어떤 미래가 그녀의 몫으로 준비되었는지 모르지만 어떤 것이 닥쳐오든 밝고 낙천적인 기백으로 그것을 받아들일 힘이 자신의 내부에 자리하고 있음을 느꼈다. 그러자 갑자기 이유는 알 수 없지만 무의식의 심연으로부터 그들이 떠났던 여정이 추억처럼 떠올랐다. 그녀와 불쌍한 월터가 전염병이 도는 도시로 갔고 거기서 그는 죽음을 만났다. 어느 날 아침 아직 어두운데 가마에 오른 것하며 동이 터 올 때 숨 막힐 듯한 아름다움을 눈이 아닌 온몸으로 체감하면서 순식간에 가슴속의 고통이 사그라졌던 기억이. 모든 인간의 번뇌가 하찮게 쪼그라들었던 그때. 태양이 안개를 헤치며 떠올랐고 구불구불한 길이 논 평원 사이를 뚫고 작은 강을 가로질러서 시야가 닿는 곳까지 쭉 펼쳐진 장면이 그녀의 눈에 선했다. 굽이치는 자연을 뚫고 지나간 그 길은 그들이 가야 할 길이었다. 그녀가 저지른 잘못과 어리석은 짓들과 그녀가 겪은 불행이 아마도 완전히 헛된 것은 아닐 것이다. 이제 희미하나마 가늠할 수 있는 그녀 앞에 놓인 그 길을 따라간다면, 친절하고 익살맞은 늙은 워딩턴이 아무 곳에도 이르지 않는다고 말하던 길이 아니라 수녀원의 친애하는 수녀들이 너무나 겸허히 따랐던 길, 평화로 이어지는 그 길을 간다면 말이다.          (P329-33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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