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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노용헌 Mar 17. 2024

버지니아 울프의 <댈러웨이 부인>

영화 <댈러웨이 부인>  2006년

영화 <댈러웨이 부인>(1997)  

   

원작인 버지니아 울프의 소설 <댈러웨이 부인>을 <안토니아스 라인>을 만든 마를레인 고리스 감독이 충실하면서도 이해하기 쉽게 영상으로 옮겼다. 노년의 댈러웨이 부인 역은 바네사 레드그레이즈가 맡았다. 영화는 늙어가는 댈러웨이 부인의 삶과 결혼 전 클라리사(나타샤 메켈혼)로 살았던 처녀 시절을 교차하며 보여준다.     


우린 참 바보라니까, 그녀는 빅토리아 스트리트를 건너며 생각했다. 왜 그렇게 삶을 사랑하는지, 어떻게 삶을 그렇게 보는지, 삶을 꿈꾸고 자기 둘레에 쌓아 올렸다가는 뒤엎어 버리고 매 순간 새로 창조하는지, 하늘이나 아실 일이다. 더없이 누추한 여인들, 남의 집 문간에 앉아 있는, 비참하기 짝이 없는 이들도 (자신의 몰락을 마시는 거지) 마찬가지야. 저 사람들도 인생을 사랑하거든. 바로 그 때문에 의회 법으로도 다스릴 수 없는 거야. 사람들의 눈 속에, 경쾌한, 묵직한, 터벅대는 발걸음 속에, 아우성과 소란 속에, 마차, 자동차, 버스, 짐차, 지척거리며 돌아다니는 샌드위치맨, 관악대, 손풍금 속에, 승리의 함성과 찌르릉 소리, 머리 위를 날아가는 비행기의 묘하게 높은 여음(餘音) 속에, 들어 있었다. 그녀가 사랑하는 것이, 삶이, 런던이, 유월의 이 순간이.                (P9)     


브로치를 탁자 위에 놓다가, 그녀는 갑작스런 경련을 느꼈다. 잠시 그런 의문들을 떠올리는 사이를 틈타, 얼음처럼 차디찬 새 발톱이 가슴속을 파고들기라도 한 것 같았다. 아직 그렇게 늙은 것은 아니다. 이제 겨우 쉰두 번째 해로 접어들었을 뿐인데, 아직도 여러 달이 고스란히 남아 있었다. 유월, 칠월, 팔월! 한 달 한 달이 여전히 옹글게 남아 있었다. 마치 그 떨어지는 방울을 붙잡기라도 하려는 듯, 클라리사는 (화장대 쪽으로 다가가며) 바로 그 순간의 핵심 속으로 뛰어들어, 그것을 거기에 고정시켰다--이 유월 아침의 순간을, 다른 모든 아침들의 무게가 실려 있는 이 아침의 한순간을 고정시키듯, 그녀는 거울과 화장대와 늘어선 병들을 새삼스럽게 둘러보면서, 자신의 전부를 한 점에 모아 (거울 속을 들여다보면서), 섬세한 분홍빛 얼굴을 마주 보았다. 오늘 저녁 파티를 열려는 여인, 클라리사 댈러웨이, 그녀 자신의 얼굴이었다.

얼마나 수없이 그녀는 자신의 얼굴을 바라보았던가! 그럴 때마다 얼굴은 눈에 띄지 않을 만큼 미세하게 긴장되곤 했다. 거울을 보면서 그녀는 입술을 꼭 오므렸다. 그러자 얼굴에 구심점이 살아났다. 예리하고, 화살 같고, 분명한, 그것이 그녀 자신이었다. 본연의 자기 자신이 되고자 하는 어떤 부름, 어떤 노력이 부분들을 -- 그것들이 얼마나 다양하고 양립할 수 없는 것들인지는 그녀만이 알고 있었다 -- 한데 끌어 모을 때의 그녀 자신이었다. 그렇게 해서 세상 사람들에게 하나의 중심, 하나의 다이아몬드, 응접실에 앉아 사교의 중심이 되는 한 여인의 얼굴을 내보이는 것이다. 따분한 생활에 분명 생기를 돌게 하고, 외로운 이들에게는 아마도 피난처가 될 수도 있을 터이다. 그녀는 젊은 사람들을 도와주었으며 그들은 그녀에게 감사하고 있다. 그녀는 언제나 한결같은 모습을 보이려 노력해 왔고, 그녀의 다른 면들 --결점이나 시기심, 허영, 의심 같은 것들을 결코 드러내지 않았다. 가령 레이디 브루턴이 그녀를 점심 식사에 초대하지 않은데 대해 느끼는 감정도, 그것은 정말이지 (그녀는 마침내 머리에 빗질을 하면서 생각했다) 옹졸하다! 그런데, 드레스를 어디 두었더라?                (P52-53)     

이런 몽환들이다. 외로운 나그네는 곧 숲 밖에 있다. 거기서, 손 그늘로 눈을 가리고 문간에 나오는 이는, 아마도 그가 돌아오는 것을 찾기 위해 손을 들고 하얀 앞치마를 바람에 날리는 한 나이 든 여인이었다. 그녀는 사막에서 잃어버린 아들을 찾는 듯, 쓰러진 기수를 찾는 듯, 세상의 전쟁에서 아들을 잃은 어머니의 모습을 하고 있다. 그러므로 외로운 나그네가 여자들은 뜨개질을 하고 남자들은 정원에서 삽질을 하는 마을의 길을 따라 나아갈 때면, 저녁은 불길해 보이고, 형체들은 움직이지 않는다. 마치 어떤 준엄한 운명이, 그들은 이미 알고 있으며 두려움 없이 기다리고 있는 듯한 운명이 그들을 완전한 무로 쓸어 넣을 것만 같다.

집 안에서는 찬장이나 식탁이니 제라늄 꽃이 핀 창문턱이니 하는 일상적인 것들 가운데서, 갑자기 안주인의 윤곽이 나타나, 식탁보를 걷으려고 몸을 숙이는 모습이 빛을 받아 부드러워진다. 차가운 인간적 접촉에 대한 기억만이 그것을 선뜻 끌어안지 못하게 하는 다정한 표상이다. 그녀는 마멀레이드를 집어, 찬장에 넣는다.

“오늘 밤 더 할 일은 없습니까?”

그러나 외로운 여행자는 누구에게 대답을 하나?                (P79-80)     

댈러웨이보다 두 배는 똑똑하면서도 그의 눈을 통해 세상을 본다는 것 -- 그것도 결혼 생활의 비극 중 하나일 터였다. 자기 생각을 가지고 있으면서도, 항상 리처드의 말을 인용해야 하다니 -- <모닝 포스트> 신문을 읽기만 해도 리처드가 하는생각쯤은 속속들이 다 알 수 있을 텐데 말이다! 가령 그 파티라는 것도 모두 그를 위한 것 내지는 그녀가 생각하는 그를 위한 것이었다(공정히 말해 리처드는 노퍽에서 농사를 짓는 편이 더 행복했을 터이다).    (P103-104)   

  

그녀는 신이란 인간의 삶을 상처 내고 방해하고 망칠 기회를 결코 놓치지 않지만, 그래도 만일 숙녀답게 행동하면 진정 물리칠 수 있다는 식의 사고를 가지고 있었다. 이런 식으로 생각하게 된 것은 실비아가 죽은 직후부터였다. 무서운 일이었다. 자기 언니가 쓰러지는 나무에 깔려 죽는 광경을 바로 눈앞에서 본다는 것은(모두 저스틴 패리의 과실이었다. 그가 부주의했기 때문이었다) 사람을 신랄하게 만들기에 족했다. 더구나 그녀는 이제 막 인생의 문턱에 서 있던 처녀였고, 형제 중에 가장 재능이 뛰어났다고 클라리사는 늘상 말했었다. 아마도 나중에는 그렇게까지 확고한 태도는 아니었을 것이다. 다만 신이란 없으며 따라서 비난할 대상도 없다고 생각했다. 그래서 그녀는 선을 위해 선을 행한다는, 이 무신론자의 종교로 돌아서게 되었던 것이다.               (P105)     


인간이란 존재는 순간의 쾌락을 증가시키는 데 필요한 것 말고는 친절도 믿음도 자비심도 없다는 것이다. 그들은 떼 지어 사냥을 한다. 그들 떼거리는 사막을 짓밟고 비명을 지르며 황야로 사라져 간다. 넘어진 자는 버리고 간다. 그들은 악의 어린 미소로 뒤덮여 있다. 사무실의 브루어도 마찬가지다. 왁스 칠한 콧수염에 산호 박은 타이핀, 하얀 셔츠 차림으로 유쾌한 척 떠들지만 그 속은 온통 차갑고 끈적끈적하다.            (P120)     

인간 본성이 그에게 사형을 선고하게 한 죄, 아무것도 느낄수 없다는 죄 말고는, 에번스가 죽었을 때도 그는 눈썹 하나 까닥하지 않았다. 그게 최악이었다. 하지만 새벽마다 침대 난간 너머에서 다른 모든 죄악들도 고개를 들어 손가락질하고 곁눈질하고 조롱했다 -- 쇠잔해 가는 것을 의식하며 널브러져 있는 몸뚱이를, 왜 아내를 사랑하지도 않으면서 결혼을 하고 동침을 했을까. 그녀를 농락했고 미스 이사벨 포울을 모독했다. 이토록 악덕으로 얽고 흉이 졌으니, 거리에서 마주치는 여자들이 몸서리치는 것이다. 이런 불한당에 대한 인간 본성의 판결은 죽음이다.              (P122)   

  

그들도 그의 균형 감각을 공유할 때까지, 그들이 남자라면 그의, 여자라면 레이디 브래드쇼의 균형 감각을, (그녀는 자수와 뜨개질을 하고 1주일에 나흘 밤은 아들과 함께 집에서 보냈다) 그래서 그의 동료들이 그를 존경할 뿐 아니라 그의 부하들은 그를 두려워했다. 그러나 환자들의 친지와 친척들은 그에게 무한히 감사했다. 세상의 종말이나 신의 도래를 예언하는 자칭 그리스도 및 여자 그리스도들이 경의 명령에 따라 침대에 누워 우유를 마셔야 한다고 단호히 주장해 준 데 대해, 윌러엄 경은 이런 종류의 사례들에 대한 30년 경력과 틀림없는 본능으로 이것은 광증이고 이것은 정상이라고 딱 부러진 진단을 내려 주었다. 사실상 그가 말하는 정상이란 그 자신의 균형 감각에 맞는다는 것이었지만.

그러나 균형의 여신에게는 자매가 있었으니, 이 여신은 훨씬 덜 상냥하고 더 가혹했다. 바로 지금도 그녀는 분주하다 --인도의 열기와 모래 속에서, 아프리카의 진흙과 늪지에서, 런던의 지저분한 변두리에서, 요컨대 기후 혹은 악마가 인간을 유혹하여 그녀 자신의 것인 진정한 믿음을 저버리게 하는 어디에서나-- 우상들을 부수고 그 자리에 자신의 준엄한 형상을 올려놓는 데 몰두해 있다. 그녀의 이름은 전향(轉向)이라고 하며, 그녀는 약자들의 의지를 먹고 산다. 사람들을 감동시키고 강요하기를 좋아하며 인류의 얼굴 위에 자기 얼굴이 찍히는 것을 좋아한다. 하이드 파크의 모퉁이에서 통(桶)을 연단 삼아 설교를 하고, 흰 수의 차림으로 형제애로 가장을 하고서 참회하듯 공장과 의회들을 돌아다니며 도움을 제공하지만 권력을 원한다. 자신이 지나는 길에서 모든 반대와 불만을 일소해 버리고, 자기를 우러러보며 자기 눈길에서 광명을 구하는 자들에게는 축복을 내린다. 이 여신 또한(레치아 워렌 스미스는 그 점을 간파했다) 윌리엄 경의 마음속에 거처를 지니고 있었다. 흔히 그렇듯이 그럴싸한 변장을 하고, 사랑이니 의무니 자기희생이니 하는 존경할 만한 이름으로 숨어 있기는 했지만, 그는 얼마나 열심히 일하는가, 기금을 모으고 개혁을 추진하고 제도를 시행하기 위해 얼마나 노력하는가! 그러나 전향이라는 거만한 여신은 벽돌보다는 피를 좋아하고 인간의 의지를 더없이 교묘하게 포식한다. 가령, 레이디 브래드쇼만 하더라도 그랬다. 15년 전에 그녀는 굴복하고 말았다.           (P133-134)      


도대체 왜 살지요? 그들은 물었다. 윌리엄 경은 인생은 좋은 것이라고 대답했다. 그야 벽난로 선반 위의 사진 속에서 레이디 브래드쇼는 타조 깃털을 두르고 있고, 그 자신의 수입으로 말할 것 같으면 연봉 1만 2천은 너끈히 되었다. 그러나 우리에게는 인생이 그런 횡재를 가져다주지 않아요, 하고 그들은 항의했다. 그는 수긍했다. 그들에게는 균형 감각이 없었다. 아마도 결국 신이란 없지 않겠어요? 그런 질문에 그는 어깨를 으쓱해 보였다. 요컨대 살든 안 살든 우리 자신의 문제 아닙니까? 바로 그 점에서 그들은 잘못 생각하는 것이다.          (P135)     


피터가 그녀에게 <좋아, 좋아, 하지만 당신의 파티들은, 대체 그 파티들은 무슨 의미가 있지?>하고 묻는다면, 그녀는 (아무도 이해하리라고는 기대하지 않지만) 그건 하나의 봉헌이라는 대답밖에 할 수 없을 것이고, 그 말은 한심할 만큼 막연하게 들릴 것이었다. 하지만 피터가 무슨 자격으로 인생이란 그저 단조로운 항해라고 주장할 것인가? 그 자신은 언제나 엉뚱한 여자와 사랑에 빠져 있지 않은가? 당신 사랑은 어떻고요? 하고 반박할 수도 있을 것이었다. 그러면 그의 대답은 뻔했다. 그거야말로 세상에서 가장 중요한 일이며 여자들은 도저히 이해 못한다고. 뭐 그렇다고 해두자. 하지만 그렇다면 그녀가 인생에 대해 생각하는 것은 어떤 남자가 이해할 수 있겠는가? 그녀는 피터나 리처드가 아무 이유도 없이 파티를 여는 수고를 하리라고는 상상할 수 없었다.

그러나 사람들이야 뭐라고 하든 (그런 판단은 얼마나 피상적이고 단편적인가!) 좀 더 깊이 자신의 마음속으로 들어가 보면, 그녀가 삶이라고 부르는 그것은 그녀에게 대체 어떤 의미였던가? 오, 그건 아주 기묘했다. 여기 사우스 켄싱턴에 어떤 사람이 있고 저기 베이스워터에는 다른 어떤 사람이 있으며, 메이페어에도 또 다른 어떤 사람이 있다. 그녀는 항상 그들의 존재를 의식하게 되며, 그렇게 다들 흩어져 있다니 얼마나 낭비인가, 얼마나 유감스러운가 하는 느낌이 든다. 그래서 모두 함께 모일 수 있었다면 하고 생각한다. 그래서 파티를 여는 것이다. 파티는 하나의 봉헌이었다. 조합하고 창조하는 것. 하지만 누구를 위해?          (P161)

     

만일 누가 죽어가고 있었다면 -- 어느 여자가 마지막 숨을 거두고 누구든 그녀가 방금 죽음이라는 지고의 위엄을 지닌 행동을 성취한 방의 창문을 열고 플리트 스트리트를 내려다본다면, 그 소란은, 그 군악 소리는 그에게 위로하듯 무심하게 다가갔을 것이었다.

그 소리에는 의식이 없었다. 그 안에는 어떤 행운이나 운명에 대한 인식이 없었고, 바로 그 때문에 위로가 되었다. 죽어 가는 자들의 얼굴에서 의식의 마지막 깜박임을 찾기에 지친 자들에게도, 사람들의 망각은 상처를 주고 배은망덕은 마음을 좀먹지만, 이 음성, 가고 오는 세월 속에 끝없이 쏟아지는 이 소리는 무엇이건 실어 갈 것이었다. 이 맹세, 이 짐차, 이 인생, 이 행렬, 이 모두를 싸안고 실어 갈 것이었다. 빙하의 거친 흐름 속에서 얼음이 한 조각 뼈를, 푸른 이파리를, 떡갈나무들을 휘말아 가듯이.              (P182)     


누구라도, 그들을 완성하는 사람들, 장소들을 찾아내야 한다고 그녀는 한 번도 말을 건네 본 적이 없는 사람들. 길거리에서 마주 치는 어떤 여자, 계산대 뒤에 있는 어떤 남자, 심지어 나무나 헛간과도 묘한 친화력을 느낀다고 했다. 그것은 결국 초월적 이론으로 발전해서, 한편으로는 죽음에 대한 공포도 작용한 나머지, 그녀는 이렇게 믿기에, 혹은 적어도 믿는다고 (자신의 회의주의에도 불구하고) 말하기에 이르렀다. 즉, 우리의 외현, 즉 겉으로 드러나는 부분은 나머지 부분에 비하면 너무나 일시적이며, 그 보이지 않는 부분은 널리 퍼져 나간다고, 보이지 않는 것은 어쩌면 살아남아서 이 사람 혹은 저 사람과 어떻게인가 결부된 채 다시 나타나거나, 심지어 죽은 후에 특정한 장소들에 출몰하게 된다고....... 아마도--- 아마도.         (P200)   

    

우리의 자아는 물고기처럼 깊은 바다에 살면서 어둠 속을 누비며 돌아다니고 거대한 수초 줄기 사이를 헤치고 나아간다. 햇살이 아롱거리는 곳들을 지나 어둡고 차고 깊고 헤아릴 수 없는 곳으로 계속해서 나아간다. 그러다가 불쑥 표면으로 솟구쳐 올라 바람에 쓸리는 물결 사이를 뛰놀기도 한다. 다시 말해 우리의 자아도 가끔은 한담을 하며 스스로 털고 비비고 추스를 필요가 있는 것이다.           (P210)  

   

목소리를 낮추어 같은 여자들끼리의 세계, 남편들의 훌륭한 점이나 유감스럽게도 과로하는 경향 같은 것을 은근히 자랑으로 여기는 공통된 세계로 댈러웨이 부인을 끌어들이면서, 레이디 브래드쇼는 (딱하게도 우둔한 여자야 -- 미워할 수가 없어) 나직이 귀엣말을 했다. “막 출발하려고 하는데, 남편에게 전화가 왔어요. 아주 슬픈 일이었지요. 한 청년이 (방금 윌리엄 경이 댈러웨이 씨께 말씀드린 그 환자지요) 자살을 했답니다. 군에 있었다더군요.” 아! 클라리사는 생각했다. 내 파티 한복판에 죽음이라니, 그녀는 생각했다.            (P239)  

   

그는 자기 몸을 내던진 것이다. 우리는 여전히 살아가겠지(그녀도 다시 가봐야 했다. 방들은 여전히 북적이고, 손님들은 계속해서 오고 있었다). 우리는 (그녀의 온종일 부어턴과 피터와 샐리를 생각했다) 늙어 갈 거야. 중요한 단 한 가지. 그녀의 삶에서는 그 한가지가 쓸데없는 일들에 둘러싸여 가려지고 흐려져서, 날마다 조금씩 부패와 거짓과 잡담 속에 녹아 사라져 갔다. 바로 그것을 그는 지킨 것이었다. 죽음은 도전이었다. 죽음은 도달하려는 시도였다. 사람들은 그 중심이 왠지 자신들을 비켜가므로 점점 더 거기에 도달할 수가 없다고 느낀다. 가까웠던 것이 멀어지고, 황홀감은 시들고, 혼자 남게 되는 것이다. 그럴 때, 죽음은 팔을 벌려 우리를 껴안는다.            (P24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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