영화 <7년의 밤> 2018년
"나는 내 아버지의 사형 집행인이었다."라는 인상적인 첫문장으로 소설은 시작된다. 소설은 2009년 6월 4일 광주광역시와 전남 담양군에 걸쳐 발생한 실제 살인사건을 모티브로 한다. 이기운(당시 48세, 인테리어 업자)은 내연녀를 만나기 위해 음주운전을 하다가 광주광역시 북구 일곡동에서 횡단보도를 건너던 초등학생(10세) 정○○군을 차로 치었다. 주변에 아무도 없다는 것을 깨달은 이씨는 정 군을 차에 싣고 시체 유기를 위해 전남 담양군의 저수지로 가던 중 피해자가 아직 살아 있다는 사실을 알고 이스타나 차량에 있던 공기총을 6발 쏘아서 살해한 뒤 방향을 바꿔 담양군 가사문학면(당시 남면) 만월리 야산 계곡에 시체를 유기했다고 진술했었다.
등대마을 역시 소멸로 접어든 동네였다. 주민이라야 유령인구인 ‘애기들(아저씨와 나)’까지 합해 12명에 불과하다. 주민평균연령은 69세. 고구마농사로 먹고 산다. 바다는 있되 고기를 잡을 이가 없는 탓이다. 바다가 있으니 뭔가를 잡아들이기는 한다. 국거리나 술안주가 아쉬울 때, ‘애기들’등을 떠밀어서, 등대마을의 마지막 아기는 61년 전에 태어났다고 면사무소에 기록돼 있다. 이 아기가 등대마을의 청년회장이자 동네에 하나 밖에 없는 통통배 선주이며, 아저씨와 내가 세 들어 사는 등대민박집주인이다. 민박손님은 대개 알음알음으로 찾아드는 스쿠버다이버들이었다. 마을 앞바다에 있는 돌섬의 수중절벽이 이 적요한 땅으로 그들을 불러들이는 것이다. 아저씨와 나도 그들처럼 불려왔다가 눌러앉았다. 짐작건대, 시보레 팀도 돌섬의 부름을 받았을 테다. 아니라면 좋겠는데, 아니지는 않을 것 같았다. (P13)
고양이는 천둥이 치기 전에 뇌에 자극을 느낀다고 한다. 인간의 뇌 변연계에도 비슷한 감관이 하나 있다. 재앙의 전조를 감지하면 작동되는 ‘불안’이라는 이름의 시계. 자리에 누운 후로도 나는 잠을 이루지 못했다. 째깍대는 초침소리를 들으며 기억 속으로 뒷걸음질 쳤다. 7년 전 그날, 아저씨와 경찰서에서 헤어진 후로.
어머니는 장례식조차 치르지 못하고 화장됐다. 나는 작은아버지에게 위탁됐다. 학교에는 다니지 못했다. 전학한 첫날에 다닐 수 없다는 걸 깨달았다. 반 아이들은 내가 누군지 나보다 더 잘 알고 있었다. 열두 살짜리 여자아이의 목을 비틀어 살해하고, 여자아이의 아버지를 몽치로 때려죽이고, 자기 아내마저 죽여 강에 내던지고, 댐 수문을 열어 경찰 넷과 한 마을주민 절반을 수장시켜버린 미치광이 살인마의 아들. 그 광란의 밤에 멀쩡하게 살아남은 아이. (P18)
석 달이 지나자 작은아버지는 나를 큰고모네로 보냈다. 큰고모는 석 달 후 둘째 고모네로.... 어디를 가나 내 처지는 비슷했다. 달라진 건 불규칙하게나마 학교에 다닐 수 있었다는 점뿐이었다. 시간이 흐르면서 세령호 사건은 세간의 관심에서 멀어졌고, 나를 알아보는 이도 점차 줄었던 것이다. 다니던 학교와 작별하는 날은 석 달이 끝나거나 내가 누군지 알려지는 날이었다. 그나마 내게 연민을 보여준 이는 어머니의 동생인 영주이모뿐이었다. 그 집에서는 다른 집보다 한 달 남짓 더 살았다. 넉 달째 되던 날, 이모는 외삼촌에게 나를 보내며 “서원아, 이모가...... 미안해.”라고 말했다. 그때 이모의 눈에 차오르던 눈물을, 가끔 떠올리고는 한다. 이모부가 없었다면, 영주이모는 나를 쭉 데리고 살아줬을까. (P19-20)
나는 중학생이 되었다. 절박한 심정으로 공부에 매달렸다. 내가 할 수 있는 유일한 일이었고, ‘저 잘할게요’라는 무언의 맹세였다. 버림받을지도 모른다는 두려움의 다른 얼굴이기도 했다. 아저씨는 기꺼이 과외선생이 돼주었다.
2학기 중간고사에서 목표의 8부 능선에 섰다. 반 석차 1등, 전체 석차 5등. 그날 아저씨는 나를 동네 고깃집에 데려갔다. 맥주잔과 콜라 잔을 부딪치며 성과를 자축했다. 그때, 벽에 걸린 텔레비전에서 아버지의 이름이 흘러나왔다. 사형이 확정됐다고 했다. 내 손에서 콜라 잔이 빠져나갔다.
나는 그 순간에야 알았다. 내 마음 어딘가에 희망이 도사리고 있었다는 것을. 아버지가 진짜 범인이 아닐지도 모른다는 희망, 무언가 잘못됐을 거라는 희망, 진짜 범인이 나타나면 아버지와 다시 만나게 되리라는 희망. 그걸 지키려고 내가 무엇을 해왔는지도 기억해냈다. (P23)
4주 후 심리에서 보호관찰 2년이 떨어졌다. 당시의 여론을 감안하면 가벼운 처분이었다. 아저씨의 읍소, 피해자와의 합의 노력이 소년원행을 막았을 것이다. 덕택에 아저씨의 전세원룸이 사라졌다. 우리의 새집은 반지하 단칸방이었다. 아저씨는 내게 두부를 내밀며 말했다.
“괜찮아. 이제 다 끝났어.”
끝나지 않았다. 그것이 시작이었다. 내 출소에 맞춰 선데이매거진이 집주인에게 배달됐다. 이번에는 내가 주인공 노릇을 한 4주 전 기사까지 추가됐다. 주인은 방을 빼라고 요구해왔다. 학교는 나를 받아들이지 않았다. 아저씨는 전학과 자퇴 중에서 선택을 해야 했다.
나는 중학교를 졸업하지 못했다. 열두 번의 전학 끝에 자퇴해 검정고시로 고등학교에 갔다. 고등학교 네 학기 동안에 아홉 번 전학을 했다. 신분이 알려지는 방식은 늘 같았다. 선데이매거진과 나에 관한 기사의 복사본이 학교와 학부모회와 반 아이들, 집주인과 이웃집으로 동시 배포됐다.
우리는 떠돌이가 됐고 주거지는 대개 항구도시였다. 아저씨는 내게 본격적으로 다이빙을 가르쳤다. 바다는 내게 자유를 주었다. 해저의 어둠속에 가만히 몸을 웅크리면 세상이 한숨에 사라졌다. 그곳은 누구의 손도 닿지 않고, 누구의 눈길도 미치지 않고, 누구의 소리도 들리지 않는 세상의 절대벽이었다. (P27-28)
“사고야.”
아저씨는 비키니옷장에서 내복과 드라이슈트(동계용 잠수복)를 꺼냈다.
“셋은 찾았는데, 카메라를 든 아이가 없다는 거야.”
‘그런데 아저씨가 왜 가요?’라고 묻고 싶었다. 잠수장비를 감춰버리고 싶었다. 아저씨가 아무 일도 하지 않기를 바랐다. ‘뭔가를 한다’는 ‘뭔가를 잃는다’와 같은 말이었다. 가까스로 얻은 것, 불안하게 지켜온 것, 막 꾸기 시작한 내 꿈.
“면 119엔 잠수대원이 없고 목포해경이 와야 구조를 시작할 텐데 그땐 너무 늦어.”
내 머릿속을 들여다본 듯한 해명이었다. (P31)
인터넷을 켜고 뉴스를 검색했다. 본말이 전도된 기사들이 주르르 떴다. 사고보다 ‘최현수의 아들’을 제목으로 뽑은 기사들. 첫 번째 기사를 열어봤다. 댓글이 수천 개 달려 있었다. 내용은 보지 않았다. 살인마의 아들이 착한 짓을 했다고 경배를 바치고 있지는 않을 테니까.
뉴스 창을 닫자 포털 상단의 검색어가 뒤늦게 눈에 들어왔다. ‘최현수의 아들’이 1순위에 올라 있었다. 정말이지 대단한 위력이었다. 7년이 지났는데도 최현수에 대한 세간의 관심은 당시에 비해 조금도 밀리지 않았다. 지금쯤 네티즌수사대가 출동했을까. 그렇다면 최현수의 아들에 대한 ‘신상 털기’가 한창일 터였다. 머리를 박박 민 소년분류심사원 시절의 사진이 나돌아 다닐 것이고, 과대망상이라면 좋으련만...... (P42-43)
머리털이 곤두섰다. 내 기억은 맞았다. 오영제는 그 아이, 세령의 아버지였다. 동시에 선데이매거진이었다. 그러나 이 추측에는 논리적 결함이 하나 있었다. 그는 7년 전에 죽은 남자였다. 그것도 아버지 손에 죽었다는 걸, 온 세상이 알고 있었다. 기분 나쁜 혼란이 온몸으로 번졌다. 불길한 직감이 악취처럼 달려들었다.
나는 블록 속에 하얗게 반전돼 있는 이름을 노려보았다. 오영제. (P51-52)
승환은 말똥구덩이와 세령호의 차이가 뭘까, 하는 연구로 시간을 보냈다. 들어가 놀 수 없다는 면에서 본질적으로 같았다. 밤새워 지킬 필요가 없다는 면에서 말똥구덩이가 나았다. 이 덩치 큰 우물은 밤낮으로 교대해서 지켜야 했다. 그 일을 하는 보안팀 팀원은 고작 여섯이었다. 그중 넷이 103호에 살았다. 102호는 승환과 이제는 전임이라 불러야 할 팀장이 함께 썼다. 전임팀장은 현관에 ‘주 예수 그리스도를 믿는 집’이라는 푯말을 붙이고 전도활동에 몰두하는 예수의 사도였다. 사도의 전도에 밤낮으로 시달린 승환의 눈 밑에는 보잉 선글라스 같은 다크 서클이 달렸다. 세 줄에서 멈춰버린 소설 때문에 불면증까지 생겼다. 자리에 누우면 뭔가를 써야 한다는 조급증이 덮쳐오고, 일어나 노트북을 켜면 시커먼 현기증이 덮쳐왔다. 밤이 무서울 지경이었다. 그리하여 잠 못 이루는 밤이면 떠돌이고양이처럼 별채 숲을 배회하는 습관이 생겼다. 밤새 돌아다녀도 사택경비가 쫓아오지 않는 곳이었다. 숲이 깊어 인적이 없고, CC카메라가 없어 사생활 유출을 염려할 필요도 없었다. 종종 같은 구역에서 활동하는 야행성존재와 마주칠 때가 있기는 했다. 새벽 2시면 술에 취해 숲을 돌아다니는 수목원 관리인 노인이라든가, 밤마다 세령의 방을 들락거리는 진짜배기 고양이 ‘어니’라든가. (P61)
세령호에 내려와 맞은 첫 주말 밤이었다. 사도팀장은 서울 집에 다니러갔고 승환 혼자 사택에 있었다. 자정 무렵, 가물가물 눈이 감겨오던 순간, 승환은 날카로운 비명을 들었다. 눈을 뜨고 보니 사방은 고요하기만 했다. 꿈결에 들은 소린가, 싶어 다시 눈을 감았다. 잠시 후, 숨죽여 흐느끼는 소리에 완전히 잠을 깼다. 희미했지만 방향을 찾을 수 있었다. 창밖이었다. 그는 수중랜턴을 꺼내들고 창문을 열었다. 나뭇가지 두 개가 엇갈려 휘어진 편백나무 그늘에 여자아이가 숨어 있었다. 랜턴 빛은 팔을 엇갈려 가슴을 가리고 있는 팬티바람의 소녀를 보여주었다. 소녀는 몸을 웅크리며 흐느꼈다.
“보지 마세요, 아저씨, 보지 마세요.....”
아이의 목소리에 짙은 수치심이 배어났다. 승환은 부탁을 들어주기로 했다. 무슨 일인지 몰라도 모르는 척하는 게 나을 것 같았다. 소녀가 정신을 잃어버리지 않았다면, 단 1초 만에 마음을 훌쩍, 뒤집고 창문으로 뛰쳐나갈 일은 없었을 것이다. 소녀는 숲 속에서 강도라도 만난 듯한 몰골을 하고 있었다. 코가 왕만두만큼 부어올랐고, 들숨 때마다 목에서 가래 끓는 소리가 났다. 몸엔 회초리 자국이 선명했다. 살갗이 터진 곳도 있었다. 그는 담요로 소녀의 몸을 감싸 안고 정문으로 달렸다. 정문 앞 상가지구에 진료소가 있다는 것을 기억해 냈던 것이다. 뉘 집 딸인지, 누구한테 폭행을 당했는지 알아보는 건 그다음 일이었다. (P69-70)
“숲에서 만난 고양이하고 ‘무궁화 꽃이 피었습니다’ 놀이를 하다가 나무에 부딪혔답니다.”
순경은 남자와 승환 사이에 섰다.
“그래서 집으로 돌아가려고 했는데 어두워서 옆집하고 헷갈렸고, 코피가 나는 바람에 어지러워서 쓰러졌고, 옆집 아저씨는 오늘 처음 만났는데도 저를 안고 진료소로 데려와준 고마운 아저씨고, 때리거나 만진 적이 없다고 아빠에게 꼭 전해달랍디다.”
승환은 자리에서 일어났다. 분노가 뜨거운 물처럼 식도로 내려가고 있었다.
“열두 살짜리 여자아이가 야밤에, 팬티바람으로 고양이하고 ‘무궁화 꽃이 피었습니다’ 놀이를 했다고요, 그게 믿어집니까?”
“고양이 이름이 뭐라더라, 하여간 그놈이 제일 좋아하는 놀이라고 합디다만.”
“몸에 난 회초리자국은 뭐라고 설명하던가요. 어깻죽지 살이 다 터졌던데요.”
“고양이한테 긁힌 자국이라더군. 꽤 험하게 놀았던 모양이오. 하여간 의사소견은 이렇소이다. 성폭행여부는 본인이 진단하기 어렵다. 엑스레이상 코뼈가 함몰된 건 확실하다.” (P73)
세령은 ‘어떤 이유’ 때문에 제 아빠에게 알몸으로 매를 맞는다. 기회를 보아 도망치지만 곧 옴짝달싹 못하는 지경이 된다. 숲으로 들어가자니 무섭고, 중앙통행로로 나가자니 알몸이고, 그리하여 옆집 뒷방 창문에서 가장 가까운 나무 밑에 숨는다. 아빠라는 작자는 딸을 찾으러 다닌다. 하필 그때 오지랖 넓은 이웃집남자가 끼어든다. 아이아빠는 이웃집남자가 딸을 안고 집으로 들어가는 걸 본다. 집에서 나와 진료소로 뛰는 것까지 지켜본다. 얼마 후, 순경의 전화를 받는다. 순경은 아이가 상습적으로 구타당한다는 걸 안다. 이웃집남자가 미묘한 상황에 걸렸다는 것도 짐작한다. 그런데도 모르는 척 원칙대로 일을 처리한다.
승환이 보기에 진실은 단순했다. 아이아빠는 이웃집남자를 자신의 폭행사실을 감추는 연막으로 써먹은 것이다. 납득할 수 없는 진실이기도 했다 대한민국은 자기 딸을 때렸다고 부모를 감옥에 보내는 선진사회가 아니었다. 동네 평판이야 좀 나빠지겠지. 돌아올 결과에 비해 남자의 방어는 쓸데없이 과했다. 거미줄을 치우겠다고 전기톱을 휘두른 꼴이었다. 무고로 고소당할 위험도 감수해야 할 무리수였다. 왜 그랬을까, 그는 궁금했다. (P74-75)
현수는 소녀에게 돌아갔다. 소녀 어깨 옆에 한쪽 무릎을 꿇고 앉았다. 섬뜩하고도 기괴한 얼굴이 시야로 덤볐다. 아이는 짙은 화장을 하고 있었다. 눈 화장이 번진 눈꺼풀이 검은 구멍처럼 보였다. 으깨진 입술 사이로는 앞니 없는 살빛 잇몸이 내다보였다. 소녀 곁엔 파멸로 줄달음치는 자신이 앉아 있었다. 무면허, 음주운전, 사망사고......
옳지 않았다. 공평하지 않았다. 그는 지금껏 쥐 한 마리 죽여본 적이 없었다. 죄를 저질러 교도소에 간 적도 없고, 독 묻은 혀로 남의 등골을 빨아먹은 적도 없었다. 거창한 소망을 바란 적도 없었다. 가족에게 세끼밥을 먹이고, 아들을 키우고, 내키면 소주 한잔할 수 있는 딱 지금만큼의 행운을 바랐다. 그것이 그리도 주제넘은 바람이었던가, 두려움 밑에서 깜박대던 분노가 불길로 타올라 소녀에게 옮겨 붙었다.
대체 너는 누구더냐. 죽고 싶었다면 호수로 뛰어들었어야 한다. 죽을 힘을 다해 버둥거린 끝에 유리 공 하나를 손에 쥔 남자의 차가 아니고.
현수는 소녀 쪽으로 팔을 뻗었다. 소녀를 안아 올리려고 등 밑에 손을 가져가는 순간, 그의 가슴팍에서 휴대전화가 울기 시작했다. 쿵, 쿵, 쿵, 쿵. 베토벤 바이러스가 폭발하듯 흉벽 위에서 터져 나왔다. 온몸이 굳어지며 맥박이 일순간에 크레센도로 치달았다. 동시에 검은 구멍 같던 소녀의 눈이 번뜩 열렸다. 뭉개진 입술 사이에선 외마디 소리가 흘러나왔다.
“아빠.” (P121)
만약 세령호에 가지 않았더라면, 만약 술을 마시지 않았다면, 만약 무면허만 아니었다면...... 사고로 죽인 아이를 호수에 버리고 도망치는 일은 하지 않았을까? 사고로 죽이고, 호수에 버리고, 사고, 호수...... 동요가 그를 뒤흔들었다. 손가락 사이에서 담배가 빠져나갔다. 뒤늦게야 그는 자각의 구역으로 들어섰던 것이다. ‘사고’와 ‘호수’ 사이에 진짜가 있었다. 숨이 턱 막혀오는 무시무시한 기억. 수용할 수 없는 진실, 자신이 의도적으로 누락시킨 ‘어떤 것’. 그것이 의식의 문턱에 걸리자 두 배로 커진 충격이 덮쳐왔다. (P139)
세령의 시신이 발견된다. 경찰은 정황상 영제를 1번 용의자로 지목한다. 영제는 세령에 대한 폭행을 인정한다. 그런 다음, 세령이 매를 맞다 도망쳤고, 와중에 누군가에게 붙잡혀 성폭행을 당하고 살해돼 유기됐을 가능성을 제기한다. 예전 옆집 남자와의 시비전력을 들먹이며 용의자로 지목한 뒤 낚싯줄을 증거물로 제시한다. 이어 옆집 남자가 남몰래 야간 다이빙을 즐기는 인간이며, 선착장 부교에 낚싯줄을 묶어놓은 것도 그 때문이며, 그날 밤 선착장에 있었고, 세령은 선착장에 숨었다가 일을 당했다, 라는 완성된 이야기를 내놓는다.
승환은 땅을 치고 싶었다. 머리가 다 어질어질했다. 낚싯줄을 앞에 놓고 요리법을 연구하는 영제가 떠올랐다. 이제 형사들이 부를 일만 남았구나, 싶었다.
힘 빠진 몸을 일으키다가, 그는 그만 기함을 할 뻔했다. 오영제가 등 뒤에 서 있었다.
“여기서 뭐하는 거요?” (P192)
영제는 잠깐 멍했다.
“부검결과가 나왔습니까?”
“어젯밤에.”
“금방 들은 말이 부검결과란 말이지요?”“그렇소만.”
“그럼 덤프트럭이 내 딸을 뭉개고 지나갔다는 얘깁니까.”
“무슨 트럭씩이나 필요하겠소, BMW면 충분하지.”
“내가 도망치는 딸을 차로 치어 죽이고 호수에 던져버렸다는 얘기는 아니겠지요?”
“직접사인은 따로 있어요. 질식사랍디다.”
“살아 있는 아이를 호수에 던졌다고요?”“차로 때려서 반쯤 죽여 놓고 숨통을 막아 끝장을 봤다. 그 얘기요. 그것도 목뼈가 뒤로 돌아갈 만큼 무지막지한 힘으로 눌러서.”
영제는 입술을 꾹 다물었다. 목 안에서 숨소리가 튀었다. 연달아 키운 터블로를 얻어맞은 기분이었다. 선수가 말했다.
“자, 하던 얘기로 돌아갑시다. 그날 밤 아이가 도망치던 상황부터.”
차로 치고 숨통을 막았다. 목뼈가 돌아갈 만큼 힘센 손이, 영제는 맨 먼저 승환의 기록을 떠올렸다. SSU 출신이면 그런 훈련도 받았겠지. 다음으로 운영팀장이 CCTV를 보고 했던 말을 생각했다. 10시 40분. 빠르게 달려와 한자리에 20분 가량 머무른 뒤 사라진 두 번째 불빛. (P230)
안승환은 어떤 사람일까. 현수는 승환의 평소언행을 되짚어봤다. 뭔가 이상한 점이 있었던가. 아무 기억도 떠오르지 않았다. 어쩌면 당연한 일이었다. 정신 못 차리게 혼란스러웠던 일주일이었다. 파도에 휩쓸려 바다를 떠돌아다닌 듯한 밤낮이었다. 승환까지 신경 쓸 여력이 없었다. 그는 승환에 대한 분석을 포기하고 자신의 관점에서 상황을 읽었다. 모든 걸 봤다면, 침묵할 이유가 없다고. 승환이 얻을 이득이 없었다. 상사와 잘 지내려고 입을 다물었을 리도 없었다. 상사가 암에 걸린 데다 유산을 물려줄 가족도 없는 억만장자라면 모를까.
범인을 보지 못했다면, 상황을 본 것이 아니라 물속으로 가라앉는 시신만 봤다면 침묵할 이유가 있었다. 출입금지구역에서 잠수한 사실을 숨기고 싶었을 테고, 그 자신이 용의자가 될 위험을 피하고 싶었을 것이다. (P265)
“그리고 이 일은 우리끼리만 알았으면 좋겠는데.”
나는 초대를 받아들였다. 아저씨에게까지 비밀을 지켰다. 그땐 우연이라고만 생각했다. 소설을 읽은 지금에 와서야 그 만남이 오영제의 의도였음을 알겠다. 그는 죽은 딸과 나를 이용해 아버지를 건드린 것이다. 아직도 모르겠는 건 의도의 목적이었다. 단순히 아버지를 괴롭히기 위한 것이었는지, 다음 행동을 위한 포석이었는지.
그 밖에도 숱한 의문들이 꼬리에 꼬리를 물었다. 형사들이 어머니를 찾아와 무슨 얘기를 했는지, 오영제가 서포터즈에게 알아봐 달라고 한 ‘두 가지’ 일은 무엇인지, 우물과 아버지 사이에 도사리고 있는 악령이 무엇인지, 아버지가 내 신발을 두고 노심초사한 까닭이 뭔지.
소설의 나머지 부분에 답이 있을 테지만 나는 더 읽고 싶지 않았다. 궁금증만 점점 증폭됐다. 아저씨는 왜 이 소설을 썼을까. 작품으로 세상에 내놓으려고? 인물 모두를, 심지어 아저씨 본인까지 실명을 쓴 걸로 미루어 그런 목적은 아닌 것 같았다. 내게 보여주려고? 무엇을 보여주려고? ‘진실’을? 진실은커녕, 어디서부터 어디까지가 사실인지조차 알 수 없었다. 사실과 사실 사이에 숨겨진 이야기들은 어떻게 알아냈는지, 특히 오영제의 장은 거의 공상으로 보였다. 아버지와 어머니의 장은 취재가 가능한 부분이었다. 고모들, 작은아버지, 영주이모, 외삼촌, 아버지 본인이 입을 열었다면 더 말할 필요도 없겠지. 하지만 오영제는 달랐다. 그의 내면까지 말해줄 수 있는 사람이 대체 누구란 말인가. 당사자와 딸은 죽었다. 소설에 의하면, 그의 아내는 당시 세령호에 없었다. (P279)
어머니는 사건 나흘 후 세령호로부터 60킬로미터쯤 떨어진 세령강 하구언에서 시신으로 발견됐다. 사인은 두부 손상이었다. 기사대로라면 아버지가 어머니의 머리를 둔기로 쳐서 즉사시킨 후, 2공도교 아래로 던져버렸다. 그 아이의 목뼈를 틀어 호수로 내던졌듯. 검찰은 오영제도 동일한 흉기에 의해 살해됐을 것이라고 추정하고 있었다. 체포될 당시, 현장에서 발견된 몽치에는 오영제와 아저씨와 아버지의 혈흔이 모두 묻어 있었다. 아버지는 의식을 잃은 상태에서 체포됐다고 했다. 곧바로 병원으로 후송됐으나 생명이 위독한 상태라고 씌어 있었다. 오른쪽손목 복합골절 및 인대근육 손상. 코뼈 골절. 하악골 함몰골절 및 치아 손실, 사건 이틀 전에 입은 왼쪽 발등 개방골절로 인해 패혈증까지 와 있었다. 기사는 경찰이 오영제의 시신을 찾는 데 주력하고 있다는 말로 마무리됐다. (P280)
“멈추고, 생각하고, 행동하고.”
이번엔 아버지가 아니었다. 잠수를 배우던 날부터 들어온 아저씨의 정언명령이었다. 나는 일어나려고 바르작대던 동작을 멈췄다. 호흡을 조절하며 주변을 둘러봤다. 앞, 뒤, 양옆, 모두 검은 바위로 둘러싸여 있었다. 머리를 뒤로 젖혀 위를 봤다. 드높은 상공에 길고 불규칙한 틈이 벌어져 있었다. 틈 사이로 내다보이는 허공은 내가 앉은 곳보다 한층 밝았다. 틈 가장자리는 산호초의 그림자가 에워싸고 있었다. 손목에 찬 다이브 컴퓨터를 체크했다. 총 잠수시간 24분. 현재수심 48.5미터, 질소 바(bar) 그래프는 눈부신 속도로 빨간 벽돌을 쌓고 있었다. 비로소 내 상황을 파악할 수 있었다. 물기둥이 나를 크레바스처럼 깊은 바위틈에 쑤셔 박은 것이었다. 쑤셔 박힌 자리에서 질소마취에 걸려든 것이고. ‘수심 10미터당. 빈속에 마티니 한 잔꼴’이라고 하는 ‘마티니의 법칙’에 의하면, 나는 마티니 다섯 잔을 원 샷 해버린 꼴이었다. 그러니 그토록 황홀한 꿈을 꿨겠지. (P298)
현수는 꿈에서 깬 것처럼 사방을 둘러보았다. 무슨 일이 있었던가. 왜 여기 와 있는가. 그가 발견한 건, 풀죽처럼 갈아버린 가시박덩굴을 맨발로 밝고 서 있는 광인이었다. 호수에 비친 자신의 모습은 악령 그 자체였다. 머리털은 잘려나간 잡목 그루터기처럼 곤두서 있고, 손목지지대는 목에서 덜렁대고, 왼팔은 허벅지 밑으로 축 늘어져 있었다. 땀투성이 몸엔 풀물이 흘렀다. 살갗엔 조각난 덩굴줄기와 이파리들이 뒤덮여 있었다.
한기가 그를 휘감았다. 끝내 미치고 말았다는 자각과 앞으로 또 무슨 일을 저지를지 모른다는 불안, 형태만 다른 제초기를 들고 누군가를 향해 돌진할지도 모른다는 두려움이 등을 덮쳤다. 현수는 호숫가에 풀썩 주저앉았다. 와들와들 떨면서 무릎 사이에 얼굴을 묻었다. 시커멓게 밀려드는 절망과 자기혐오 속에서 정신을 차려보려고 처절하게 싸웠다. 지나간 기억을 하나하나 되짚으며 도움이 될 만한 걸 찾아보려고 안간힘을 썼다. 그리하여 마침내, 8월 27일 밤 이래로 가장 현실적인 일을 시작할 수 있었다. 자신이 어디쯤에 와 있는지 평가하는 일. 서 있는 곳에서 뭘 해야 하는지, 뭘 할 수 있는지, 최선이 무엇인지 모색하는 일. (P332)
기묘한 상황이 시작됐다. 팀장이 앞서가고, 영제가 미행하고, 승환이 둘을 쫓았다. 취수탑에서 벌어진 영제와 팀장의 충돌은 승환에게 선택의 순간을 불렀다. 그는 영제를 택했고 그 결과 영제의 과녁을 분명하게 볼 수 있었다. 승환은 팀장에 대한 의구심들을 잠시 밀쳐놓기로 했다. 영제의 속내가 더 궁금했다. 단서를 잡고 싶었다. 무엇이 오영제로 하여금 팀장을 조준하게 했는지, 경찰에 알리지 않고 은밀하게 행동하는 이유가 뭔지, 무슨 일을 벌이고 있는 것인지, 지하실을 엿본 결과 얻은 건 혼란뿐이었다. 미행과 몽치. 우주선과 양파만큼 거리가 먼 단어들이었다. (P346)
“우린 그곳을 등대마을이라고 불렀다네.”
팀장의 눈은 다시 어둠 속으로 들어가 있었다.
“달이 뜨지 않은 어두운 밤이면 나는 홀로 수수벌판 끝까지 걸어가 보곤 했어. 지평선 너머에서 번뜩이는 등대불빛을 보려고. 열두 살 시절이야. 학교에서 특별활동으로 야구를 하던 시절. 미치도록 진짜 야구선수가 되고 싶었던 시절. 동네어른들은 귀에 못이 박히게 말했지. 달이 뜨지 않는 밤에는 수수벌판으로 들어가지 말라고. 수수의 키가 2미터도 넘게 자라서 앞이 잘 보이지 않거든. 이랑이 어찌나 많고 복잡한지 우리 같은 어린애들은 길을 잃기 십상이었고. 저기인가 해서 가보면 거기고. 거기인가 해서 보면 여기고. 수수밭 미로에 걸리면, 종일 헤매고도 빠져나오지 못할 때가 많았어. 게다가 수수밭 가운데에 오래된 우물이 있었거든. 바깥쪽 높이는 1미터나 될가 말가 한데, 안은 아주 깊었어. 허리를 걸치고 엎드려서 들여다봐도 안이 깜깜할 정도로. 언제부터 있었는지는 아무도 몰라. 그저 수수밭주인이 파놓은 거려니 하더라고, 아이들은 우물에 신발을 빠뜨려선 안 된다고 했어, 신발을 빠뜨린 아이는 반드시 우물이 불러들인다고. 우리 식구가 이사하기 훨씬 전에 실제로 우물에 빠져 죽은 아이가 있었던 모양이야. 그 사건 이후 어른들이 밭주인한테 쫓아가 우물을 메워달라고 했는데 말을 안 들었나봐. 남의 수수밭에 들어가지 말라고 욕만 먹었다더라고. 밭주인이 읍내사람이었거든.”
팀장은 잔기침을 했다. 갈증이 나는 모양이었다.
“자네, 수수가 두런대는 소리 들어본 적 있나?”
“아뇨.” (P370-371)
“어때, 정신이 좀 드나?”
현수는 이를 물고 숨을 멈췄다. 피가 엉겨 붙은 눈을 끔벅이며 자신의 처지를 살폈다. 등받이가 긴 의자에 앉아 있다는 걸 맨 먼저 알아차렸다. 양팔은 등받이 뒤로 둘러 묶어놓았다. 몸통은 등받이에, 허벅지는 의자 바닥에, 양쪽 발목은 교차돼서 묶인 채 의자 밑에 늘어져 있었다. 이만하면 마술사라 해도 풀기 힘든 결박이었다. 그나저나 여기는 어디일까. 의자는 경비실 것이었으나 장소는 경비실이 아니었다.
“그새에 잊었을까 봐 알려주는 건데 나는 네놈이 목뼈를 틀어 죽인 여자애의 아빠야.”
영제의 음성은 차분했다. 내 딸을 죽이다니, 좀 유감이야, 라고 말하는 듯한 어조였다. (P418)
“왜 죽였나?”
영제는 어느새 소파로 돌아가 앉아 있었다. 현수는 수위 표시창을 찾았다. 아아, 그것은 통제실 바깥방에 있었다. 수위를 알려줄 통제실 내부 화면은 그의 시야에서 너무 멀리 있었다. 그는 다시 CCTV를 노려봤다. 악문 잇새로 신음이 흘렀다. 눈앞에, 그러나 손쓸 수 없는 자리에 서원이 제물로 놓여 있는데 자신은 통제실에 묶여 CCTV화면을 노려보고, 영제는 살인의 이유를 묻고 있었다. 안승환. 너는 도대체 어디에 있는 것이냐.
탐조등 빛이 화면에서 사라졌다. 서원의 모습 위로 안개가 덮였다. 현수는 자신도 모르게 손을 뻗으려다 온몸이 묶여 있다는 걸 깨달았다. 비명같은 숨결이 목 안에서 요동쳤다. 눈자위에 차오르던 뜨거운 것이 목 안으로 내려왔다. 이것은 여앙이었다. 그러나 단죄는 죄를 저지른 자에게 해야 하는 것이다. 그 시간에 제 방에서 자고 있었을 죄인의 아들이 아니고.
“아이를 풀어줘, 그러면 다 얘기할 수 있어.”
현수는 말했다. 또박또박 말하려 했지만 어쩔 수 없는 흐느낌이 묻어 나왔다.
“얘기한 다음 자살처럼 죽어줄 수 있어, 하라는 대로. 원하는 대로 뭐든 할 수 있어.”
영제는 배시시 웃었다. (P424)
“넌 가족을 차에 태우고 호수를 향해 전속력으로 돌진하게 될 거야. 죄책감에 못 이겨 범행을 자백하고 가족과 동반 자살한 살인범. 눈물겹게 인간적인 얘기 아닌가?”
영제는 재킷주머니에서 녹음기를 꺼내 보였다.
“어때, 내 계획이 마음에 드나.” (P425)
“무궁화 꽃이 피었습니다.”
3시 방향에서 그 아이를 발견했다. 길게 휘어져 내린 나뭇가지 밑에 움직임 없이 서 있었다. 거리가 멀었으나 나는 그 아이의 모습을 선명하게 볼 수 있었다. 양어깨를 가린 검고 긴 머리칼, 뾰족한 턱과 나를 응시하는 검은 눈동자, 허벅지 옆으로 늘어뜨린 팔, 흰 팬티. 가느다란 다리와 땅을 딛고 있는 맨발. 늘 봐왔던 꿈속의 모습이었다. 얄팍한 안도감이 찾아들었다. 꿈이 맞구나.
초침이 그 아이를 지나 4시 방향으로 내려왔다. 그 아이의 모습은 그림자처럼 희미해지다가 마침내 어둠 속으로 묻혀버렸다.
“무궁화 꽃이 피었습니다.” (P459)
비로소 게임의 룰을 알아차렸다. 그 아이에게 절대적으로 유리한 게임이었다. 어둠 속과 물속을 자유자재로 오가며 몸을 숨길 수 있고, 빛에 걸렸을 땐 가만히 서 있으면 되고, 내 눈에 걸려도 벌을 받지 않았다. 나는 초점이 일주를 끝내기 전에 오감을 동원해 그 아이의 움직임을 감지하고 찾아내야 했다. 찾아내면 초침이 우리를 비출 때까지 그 아이의 눈을 붙잡고 있어야 했다. 소녀가 내 목덜미를 만진 건 네가 술래야, 라는 뜻이 아니었다. 네가 졌어, 벌을 받아야지, 라는 뜻이었다. 나는 영원한 술래였다. 잡지 못하면 벌을 받고, 잡으면 벌을 면하는 불공평한 술래. (P462-463)
차 안에서 눈을 뜰 것이라고 계산하고 있었다. 7년 전 그곳. 세령호에 도착하게 되리라 예상했다. 근거는 없었지만 확신에 가까운 감정이었다. 그런데 틀렸다. 차 안도, 세령호도 아니었다. 나는 여전히 등대에 있었다. 팔을 뒤로 묶이고, 발목도 묶인 채 조명탑 출입문에 기대앉아 있다는 게 좀 전과 다를 뿐, 예상과 일치한 건, 오영제가 책상 앞 의자에 다리를 꼬고 앉아 있다는 점이었다. 전문가는 방 출입문 앞에 열중쉬어 자세로 서 있었다.
“정신 드나.”
짧은 머리, 검은자위만 있는 듯한 눈, 단정한 턱 선, 호리호리한 체구. 오영제는 내 기억 속 모습과 완벽하게 일치했다. 그때로부터 단 한 살도 더 먹지 않은 것 같았다. 나는 경동맥이 발끈거리는 걸 느꼈다. 하여간에 만났구나.
“꽤 오랜만이지, 7년 만인가?” (P482-483)
“이젠 너도 알았을 거다. 세령호에서 내가 뭘 쓰고 있었는지, 그때 내가 팀장님을 설득해서 자수를 하게 했다면 어땠을까. 아니면 신고를 하든가, 그랬다면 그런 비극은 일어나지 않았을 거야. 그런데 난 기다렸어. 기다려달라는 말이 자수를 결심할 시간을 달라는 뜻이 아니라는 거 눈치챘으면서도, 나 자신한테 한사코 그렇다고 우긴 거야. 당시에는 내가 왜 그랬는지 몰랐다. 그날 밤, 경찰서에서 사건진술을 하던 중에 깨달았지. 담당형사가 답을 말해주더라. 당신, 소설 결말을 알고 싶었구먼. 충격이 컸다. 형사 말 때문이 아니라, 그게 진실이라서, 블루 오브 증후군(Blue Orb Syndrome)이라는 게 있어, 바다에서 일어나는 광장공포증이지. 깊고, 넓은 해저에 나 홀로 있다는 인식이 엄습하면, 공포에 사로잡힌 나머지 의식이 핀 포인트가 되는 거야. 감압은 말할 것도 없고 숨을 뱉는 일까지 잊어버려. 그 일이 내게 남긴 게 그거다. 뭔가를 쓰려고 노트북을 켜면 내 앞에는 워드화면 대신 블루 오브가 열리는 거다. 길을 찾으려 들면 들수록 넓어지고 깊어지며 광활해지는 공간. 나는 그 어둡고 푸른 우주에서 미아가 되곤 했어. 대필을 시작한 건 그 때문이야. 누군가 던져주는 얘깃거리를 정리하면 되는 일이니까. 동네 근린공원을 달리는 것처럼 편안했어. 길을 잃을 염려도 없고, 아직 글을 쓰고 있다는 안도감을 얻을 수 있고, 밥벌이까지 했으니, 나름 성공한 셈이지. 이게 본래 내 그릇이라고 인정하지 못하는 게 괴롭긴 했지만 소설 한 편 내고 소설가 인생이 끝장났다는 생각이 들면 정말 미칠 것 같았거든. 그럴 때마다 네 이야기를 썼어. 미아가 되지 않고 쓸 수 있는 유일한 내 글이었지. 오늘 무슨 책을 읽었는지, 어떤 의견을 내놨는지, 무얼 먹었는지, 무얼 좋아하는지, 무얼 싫어하는지, 삐쳤을 때와 화났을 때와 난감할 때의 행동이 어떻게 다른지, 다이빙 실력이 얼만큼 늘었는지, 이번엔 얼마 만에 학교를 옮겼는지, 매달 말일이면, 그걸 팀장님에게 보냈다. 답장을 받은 적은 한번도 없었지만.” (P501-502)
9시경, 선수가 병실로 전화를 걸어왔다. 병원 뒤편 축대 밑에 봉고를 대기시켜 놓았다고 했다. 병원으로 곧 기자들이 몰려올 것이라 했다. 떠나기 전에 YTN 뉴스를 보라는 말도 덧붙였다. 나는 TV를 켰다. 뉴스속보가 나오고 있었다.
최현수의 사형집행 소식이 먼저 보도됐다. 이어 S시 경찰서장이 사건 브리핑을 시작했다. 실종됐던 오영제가 살아 있었고, 최현수의 아들과 보호자 안모 씨를 약물로 혼절시켜 납치, 살해하려다 현장에서 체포됐으며, 차량에서 ‘최 군’의 위패와 관이 발견됐다는 사실이 간략하게 언급됐다. 오영제는 살인미수, 폭행, 납치감금, 의료법위반혐의로 체포됐다. 서포터즈도 그와 운명을 같이했다. 어머니를 살해한 혐의에 대해서는 언급이 없었다.
나는 텔레비전을 껐다. 최현수는 죽었고 여전히 살인마였다. 조만간 아내를 살해한 혐의는 벗겠지만 평가가 달라질 건 없었다. 오영제는 체포됐으나 나는 여전히 최현수의 아들이었다. 나로 인해 죽어간 영혼들이 등에 올라앉아 있었다. 그들을 등에 진 채 평생을 살아갈 수 있을까? (P511)
[작가의 말]
사실과 진실 사이에는 바로 이 ‘그러나’가 있다고, 나는 생각한다. 이야기되지 않은, 혹은 이야기할 수 없는 ‘어떤 세계’. 불편하고 혼란스럽지만 우리가 한사코 들여다봐야 하는 세계이기도 하다. 왜 그래야 하냐고 묻는다면, 우리는 모두 ‘그러나’를 피해 갈 수 없는 존재기 때문이라고 대답하겠다.
이 소설은 ‘그러나’에 관한 이야기다. 한순간의 실수로 인해 파멸의 질주를 멈출 수 없었던 한 사내의 이야기이자, 누구에게나 있는 자기만의 지옥에 관한 이야기며, 물러설 곳 없는 벼랑 끝에서 자신의 생을 걸어 지켜낸 ‘무엇’에 관한 이야기기도 하다. (P521-522)