영화 <살인자의 기억법> 2016년
내가 마지막으로 사람을 죽인 것은 벌써 25년 전, 아니 26년 전인가, 하여튼 그쯤의 일이다. 그때까지 나를 추동한 힘은 사람들이 흔히 생각하는 살인의 충동, 변태성욕 따위가 아니었다. 아쉬움이었다. 더 완벽한 쾌감이 가능하리라는 희망. 희생자를 묻을 때마다 나는 되뇌곤 했다.
다음엔 더 잘할 수 있을 거야.
내가 살인을 멈춘 것은 바로 그 희망이 사라졌기 때문이다. (P7)
시를 가르치는 문화센터의 강사는 내 또래의 남자 시인이었다. 그는 첫 수업 시간에 엄숙한 표정으로 이런 말을 해서 나를 웃겼다. “시인은 숙련된 킬러처럼 언어를 포착하고 그것을 끝내 살해하는 존재입니다.”
그때는 이미 수십 명의 사냥감을 ‘포착하고 그것을 끝내 살해’해 땅에 묻은 뒤였다. 그러나 내가 한 일이 시라고는 생각하지 않았다. 살인은 시라기보다 산문에 가깝다. 해보면, 누구나 알 수 있다. 살인은 생각보다 번다하고 구질구질한 작업이다. (P8-9)
검사를 마치고 의사를 만났다. 표정이 밝지 않았다.
“해마가 위축돼 있습니다.”
의사는 뇌를 찍은 MRI 사진을 가리키며 말했다.
“알츠하이머가 분명합니다. 어느 단계인지는 아직 확실치 않습니다. 시간을 두고 살펴봐야 할 것 같습니다.”
옆에 앉아 있던 은희는 입을 꾹 다문 채 아무 말도 없었다. 의사가 말했다.
“기억이 점차 사라질 겁니다. 단기 기억이나 최근 기억부터 없어질 겁니다. 진행을 늦출 수는 있지만 막을 수는 없습니다. 일단은 처방해드린 약 꼬박꼬박 챙겨 드세요. 그리고 뭐든지 기록하고 그 기록을 몸에 지니세요. 나중엔 집도 못 찾아가실 수 있습니다.” (P13)
사람들은 은희가 내 손녀라고 생각한다. 딸이라고 하면 놀란다. 그도 그럴 것이 나는 올해 칠십 줄에 들어섰지만 은희는 겨우 스물 여덟이기 때문이다. 이 미스터리에 가장 관심이 많았던 사람은 역시 은희였다. 열여섯 살의 은희는 학교에서 피에 대해 배웠다. 나는 AB형인데 은희는 O형이다. 부모 자식 간에는 나올 수 없는 혈액형이다.
“내가 어떻게 아빠의 딸이에요?”
나는 가능하면 진실을 말하려고 노력하는 편이다.
“내가 입양을 했다.”
은희와 멀어진 것은 아마 그때부터였을 것이다. 은희는 나를 어떻게 대해야 할지 몰라 당황한 것 같았고, 그렇게 벌어진 간격은 끝내 좁혀지지 않았다. 그날 이후로 은희와 나 사이에는 친밀감이 사라졌다.
카그라스증후군이라는 게 있다. 뇌의 친밀감을 관장하는 부위에 이상이 생길 때 발생하는 질병이다. 이 병에 걸리면 가까운 사람을 알아보기는 하지만 더 이상 친밀감을 느낄 수 없게 된다. (P16-17)
은희 엄마가 내 마지막 제물이었다. 그녀를 땅에 묻고 돌아오면 길에 차가 나무를 들이받고 전복했다. 경찰은 내가 과속을 하다 커브길에서 중심을 잃었다고 말했다. 두 번의 뇌수술을 받았다. 처음에는 약 기운 탓이라 생각했다. 병실에 누워 있는데, 마음이 한없이 평안하여 기이했다. 전에는 사람들이 떠드는 소리만 들어도 참을 수 없을 정도로 짜증을 느꼈었다. 음식을 주문하는 소리, 애들이 웃는 소리, 여자들이 조잘대는 소리, 다 싫었다. 그런데 갑자기 찾아 온 평화, 끝없이 들끓기만 하던 마음이 정상인 줄만 알았다. 아니었다. 갑자기 귀가 멀어버린 사람처럼 나는 마음에 찾아온 이 돌연한 정적과 평온에 익숙해져야만 했다. 사고 때의 충격 때문이든 의사의 메스질 때문이든 내 뇌에서 뭔가가 일어났던 것이다. (P22)
죽음은 두렵지 않다. 망각도 막을 수 없다. 모든 것을 잊어버린 나는 지금의 내가 아닐 것이다. 지금의 나를 기억하지 못한다면 내세가 있다 한들 그게 어떻게 나일 수 있으랴. 그러므로 상관하지 않는다. 요즘 내가 마음에 두는 것은 딱 하나뿐이다. 은희가 살해되는 것을 막아야 한다. 내 모든 기억이 사라지기 전에.
이 생의 업, 그리고 연. (P28)
아버지가 나의 창세기다. 술만 마시면 어머니와 영숙이를 두들겨 패는 아버지를 내가 베개로 눌러 죽였다. 그러는 동안 어머니는 아버지의 몸을, 영숙이는 다리를 누르고 있었다. 영숙이 나이 고작 열 셋이다. 옆구리가 터진 베개에서 왕겨가 쏟아져나왔다. 영숙이는 그걸 쓸어담고 엄마는 멍한 얼굴로 베개를 꿰맸다. 내 나이 열여섯 살의 일이었다. 6.25 직후에는 죽음이 흔했다. 자기 집에서 자다가 죽은 남자에게 아무도 관심이 없었다. 순경 한 명 와보지 않았다. 바로 마당에 천막을 치고 조문객을 받았다.
나는 열다섯 살에 쌀가마를 졌다. 고향에선 사내가 쌀가마를 질 수 있는 나이가 되면 아버지라도 손을 못 댔다. 어머니와 여동생은 아버지에게 계속 맞았다. 어머니와 여동생의 옷을 모두 벗겨 엄동설한에 내쫓기도 했다. 죽이는 게 최선이었다. 다만 후회가 되는 것은, 혼자 할 수도 있었던 일에 어머니와 여동생을 연루시켰던 것뿐이다.
전쟁에서 살아남은 아버지는 늘 악몽을 꿨다. 잠꼬대도 심했다. 죽는 순간에도 아마 나쁜 꿈을 꾸고 있다고 생각했을 것이다. (P30-31)
열여섯 살에 시작해서 마흔 다섯까지 계속했다. 4.19와 5.16을 겪었다. 박정희가 시월유신을 선포하고 종신독재를 꿈꿨다. 육영수가 총에 맞아 죽었다. 지미 카터가 와서 박정희더러 독재 좀 그만하라고 하고는 팬티만 입고 조깅을 했다. 박정희도 암살당했다. 김대중이 일본에서 납치되었다가 구사일생으로 살아남고, 김영삼은 국회에서 제명됐다. 계엄군이 광주를 포위하고 사람들을 때려죽이고 총으로 쏴 죽였다.
그러나 나는 오직 살인만 생각했다. 이 세상과 혼자만의 전쟁을 벌이고 있었다. 죽이고, 달아나서, 숨었다. 다시 죽이고, 달아나서, 숨었다. 그때는 DNA 검사도, 폐쇄회로 TV도 없던 시절이었다. 연쇄살인이라는 용어조차 생경했다. 수십 명의 거동수상자와 정신병자가 용의자로 지목돼 경찰서에 끌려가 고문을 당했다. 몇몇은 허위 자백까지 했다. 경찰서들끼리는 서로 협조를 하지 않아 다른 지역에서 사건이 벌어지면 별개의 사건이라고 생각했다. 경찰 수천명이 작대기를 들고 애먼 야산을 쑤시고 다녔다. 그게 수사였다.
좋은 시절이었다. (P32-33)
노트를 뒤적이다가 놀랐다. 그놈이 그놈이었다. 어떻게 이런 일이 가능할 수 있을까. 귀신에 홀린 기분이다. 놈은 태연하게 내 집으로 걸어들어왔다. 그것도 은희의 약혼자로, 그런데도 나는 놈을 전혀 알아보지 못했다. 놈은 내가 연기를 한다고 생각했을까. 아니면 정말로 자기를 완전히 잊어버렸다고 생각했을까. (P62)
은희를 앉혀놓고 박주태에 대해 말했다. 내가 그의 사냥용 지프를 추돌했을 때 그 트렁크에서 뭘 봤는지, 그 피가 얼마나 붉고 선명했는지, 그가 어떻게 내게서 달아났는지, 그후로 얼마나 오래 내 주변을 서성거렸는지. 그런 자가 ‘우연히’ 네 앞에 나타났다면 그 우연이 뭘 의미하는지, 네가 얼마나 큰 위험에 처해 있는지.
은희는 참을성 있게 듣더니 이렇게 말했다.
“아빠, 도대체 무슨 말씀을 하시는지 전혀 모르겠어요.”
나는 다시 시도했다. 그러나 은희의 반응은 비슷했다. 내 말이 너무 두서가 없어 알아들을 수가 없다는 것이었다. 영어를 처음 배워 미국인 앞에서 떠들 때와 같은 기분이었다. 최선을 다해 말하고 있고 상대방도 애써 듣고는 있지만 의사소통은 전혀 되고 있지 않았다. 은희는 내가 그 남자를 아주 싫어하고 있다는 사실만 받아들였다. 은희야, 나는 그를 싫어하고 있는 게 아니라 너에게 위험을 경고하고 있는 것이다. 너는 너무 위험한 남자와 만나고 있다. 그리고 네가 그 남자를 만나게 된 것은 절대 우연이 아니란다. (P67-68)
사람들마다 구원의 이미지가 있을 것이다. 따스한 햇볕이 쏟아지는 영국풍 정원과 잔디밭일 수도 있고, 베란다에 화분을 내놓은 스위스풍 전통가옥일 수도 있겠다. 나는 늘 감옥을 떠올렸다. 겨드랑이와 사타구니와 온몸의 땀샘에서 냄새를 풍기는 거친 사내들을 떠올렸다. 죄수들은 엄격한 위계로 나를 길들일 것이고, 그 안에서 나는 철저하게 나를 잊을 수 있을 것만 같았다. 잠시도 쉬지 않고 부산히 움직이던 내 자아를 잠재울 수 있을 것 같았다.
나는 징벌방에 대한 환상도 갖고 있었다. 관을 연상시키는 좁은 방에 갇혀 뒷수갑이 채워진 채 혀로 식기를 핥아먹는 장면을 거듭 떠올리곤 했다. 나는 처절하게 짓밟힌 채 탈진하여 내가 떠나온 세계, 흙의 세계를 극도로 갈망하며 발버둥을 치게 될 것이다. 그 상상은 꽤 짜릿한 쾌감으로 나를 인도하였다. 어쩌면 나는 너무 오랫동안 나 혼자 모든 것을 결정하고 집행하는 삶에 지쳐 있었는지도 모른다. 내 악마적 자아의 자율성을 제로로 수렴시키는 세계, 내게는 그곳이 감옥이고 징벌방이었다. 내가 아무나 죽여 파묻을 수 없는 곳, 감히 그런 상상조차 하지 못할 곳, 내 육체와 정신이 철저하게 파괴될 곳, 내 자아를 영원히 상실하게 될 곳. (P87)
시내에 나갔다가 돌아오는 길에 마을 초입에서 낯선 놈과 마주쳤다. 젊은 남자가 팔짱을 낀 채로 내 눈을 정면으로 쏘아보고 있었다. 누굴까? 누군데 저토록 대놓고 내게 적대적일까? 무섭고 두려웠다. 오랜 사고 습관대로 처음에는 형사라고 생각했다. 집에 들어와 노트를 뒤적이다가 깨달았다. 놈은 박주태였다.
그놈 얼굴은 왜 이토록 내 기억 속에 입력되지 않는 것일까. 답답했다. 어쨌든 잊기 전에 적어둔다. 그의 거듭된 출현을.
은희가 또 요양원 얘기를 꺼냈다. 구경이라도 가보자고 한다. 문득 치매에 걸린 노인들이 어떻게 살고 있을지 궁금해졌다. 그래서 가보기로 했다. 그런데 은희가 화를 냈다. 왜 화를 내냐니까 내가 ‘언제 그랬냐’며 갑자기 고집을 부렸다고 했다.
“내가? 기억이 안 나는데.”
은희는 다시 나를 설득한다. 그래서 나는 은희를 바로 따라나선다. 나중에 녹음기를 들어보니 차를 타고 가는 내내 나는 은희에게 묻고 있다. 지금 어딜 가는 거냐고. 은희는 참을성 있게 대답한다. “아빠가 요양원에 가보고 싶다고 해서 지금 가는 중이에요. 그냥 구경 가는 거예요.”
은희는 카메라로 요양원 곳곳을 찍었다. 나중에 내가 기억하는데 도움이 될 거라면서. 나는 녹음을 하고 메모를 했다. (P90-91)
메모지에 ‘미래 기억’이라는 말이 뜬금없이 적혀 있다. 뭘 보다가 적어놓은 걸까. 내 필체인 것은 분명한데 무슨 뜻인지 아무리 생각해도 알 수가 없다. 지나간 일을 기억하니까 그게 기억 아닌가. 그런데 ‘미래 기억’이라니. 답답한 마음에 인터넷을 찾아보니 ‘미래 기억’은 앞으로 할 일을 기억한다는 뜻이었다. 치매 환자가 가장 빨리 잊어버리는 게 바로 그것이라고 했다. “식사하시고 30분 후에 약을 드세요.” 같은 말을 기억하는 게 바로 미래 기억이란다. 과거 기억을 상실하면 내가 누구인지를 알 수 없게 되고 미래 기억을 못하면 나는 영원히 현재에만 머무르게 된다. 과거와 미래가 없다면 현재는 무슨 의미일까. 하지만 어쩌랴. 레일이 끊기면 기차는 멈출 수밖에. (P93)
인간은 시간이라는 감옥에 갇힌 죄수다. 치매에 걸린 인간은 벽이 좁혀지는 감옥에 갇힌 죄수다. 그 속도가 점점 빨라진다. 숨이 막힌다. (P98)
“낮에 연구소로 형사가 찾아왔었어요.”
은희가 말했다. 물어보니 안형사인 것 같았다.
“엄마에 대해 묻더라고요.”
“그래서 뭐라고 그랬니?”
“아는 게 있어야죠. 모른다고 그랬죠.”
“이제 와서 형사가 왜 네 엄마에 대해 캐고 다닐까?”
“내가 알아요? 나야말로 그쪽에서 아는 거 있으면 좀 알려달라고 그랬죠.”
“그랬더니?”
“그러겠대요. 그런데 이상한 게 있어요.”“뭔데?”
“아빠는 내 생모가 돌아가셨다고 했잖아요. 그런데 안형사 말로는 실종된 상태래요. 생부는 병원에서 발부한 사망진단서도 있고 사망신고도 돼 있지만 엄마는 없대요. 장기 실종으로 사망 처리가 되었다는 거예요. 어떻게 된 일이에요? 이상하잖아요.”
“그렇게 말했니, 안형사한테? 이상하다고?”
“네, 그랬더니 안형사도 그렇대요.”
“고아원 원장이 나한테 그렇게 말했다. 네 엄마는 죽었다고, 그래서 나도 그렇게 알고 있었고.”
“엄마는 그럼 지금 어디 계실까요?”
“모르지, 어쩌면 아주 가까운 데 있을지도.”
예를 들면 우리 집 마당이라든가. (P102-104)
나는 하루종일 뉴스를 본다. 박주태의 시체가 아직 발견되지 않은 모양이다. 현장 주변을 어슬렁거리는 것은 위험하니 가볼 수도 없다. 시체가 있기는 있을까. 흙이 팔뚝에 말라붙어 있는 것을 보니 어딘가에 파묻은 것 같기도 한데 기억이 나지 않으니 정말 답답하다. 만약 은희가 놈의 시체를 발견하게 된다면 어떤 표정을 지을까. 그후엔 어떻게 행동할까. 내가 자기를 위해 그토록 힘들고 어려운 일을 해냈다는 것을 먼 훗날에라도 알게 될까. 경찰은 어떨까. 박주태가 이 동네를 공포의 도가니로 몰아넣은 연쇄살인범이라는 것도 밝혀내게 될까. 그것까지는 기대하기 어렵겠지.
나는 샤월를 했다. 몸을 꼼꼼하게 씻은 후 입고 있던 옷은 불태웠다. 방을 진공청소기로 깨끗이 청소한 다음 먼지통에서 나온 것들도 모두 태워버렸다. 먼지통은 락스를 풀어 깨끗이 씻어 말렸다. 문득 자문했다. 이 모든 짓이 무슨 의미가 있는가? 나는 어차피 기억을 잃을 것이 아닌가. 설령 검거된다 해도 늘 환상 속에서만 보던 감옥을 잠깐이나마 보게 될 것 아닌가. 그게 뭐가 나쁘지? 잠시 이 어지러운 흙의 세계를 떠나 엄정한 사각틀로 구획된 철의 세계로 떠나는 것이. (P121)
오이디푸스가 거울을 보면 내 모습이 거기 있을 것이다. 닮았지만 좌우가 뒤집혀 있다. 그는 나와 같은 살인자였지만 자기가 죽인 사람이 아버지인지도 몰랐고 나중엔 그 행위마저도 잊어버렸다. 그러다 자신이 저지른 일을 자각하면서 자멸한다. 나는 처음부터 내가 아버지를 죽인다는 것을, 죽이게 되리라는 것을 알고 있었다. 후에 잊은 적도 없다. 나머지 살인들은 첫 살인의 후렴구였다. 손에 피를 묻힐 때마다 첫 살인의 그림자를 의식했다. 그러나 인생의 종막에 나는 내가 저지른 모든 악행을 잊게 될 것이다. 그리하여 나는 스스로를 용서할 필요도, 능력도 없는 자가 된다. 절름발이 오이디푸스는 늙어서 비로소 깨달은 인간, 성숙한 인간이 되지만 나는 어린아이가 된다. 아무도 책임을 물을 수 없는 유령으로 남으리라.
오이디푸스는 무지에서 망각으로, 망각에서 파멸로 진행했다. 나는 정확히 그 반대다. 파멸에서 망각으로, 망각에서 무지로, 순수한 무지의 상태로 이행할 것이다. (P129)
사복을 입은 형사들이 대문을 두드렸다. 나는 옷을 차려입고 밖으로 나가 문을 열어주었다.
“신고를 받고 오셨소?”
“그렇습니다. 김병수씨 되십니까?”
“맞습니다.”
나는 비닐봉지에 든 손을 그들에게 건네주었다.
“이걸 개가 물고 왔다고요?”
“그렇소.”
“그럼 저희가 이 일대를 좀 수색해도 되겠습니까?”
“여길 수색할 필요는 없지. 범인을 잡아야지.”
“범인이 누군데요? 알고 계십니까?”
“박주태라는 놈이오. 이 일대에서 사냥을 다니는 부동산업자인데.......”
형사들이 피식거리며 웃는 소리가 들렸다. 그들 뒤에서 한 남자가 불쑥 앞으로 나섰다.
“저 말씀이십니까?”
박주태였다. 그가 그들과 함께 있었다. 다리에 힘이 풀렸다. 나는 그들을 둘러보았다. 모두 한패인 건가. 나는 박주태를 가리키며 외쳤다.
“저놈을 잡으시오.”
박주태는 웃었다. 뜨끈한 것이 허벅지를 타고 흘러내린다. 이게 뭘까.
“노인네 오줌 싼다.”
형사들이 웃음을 참지 못하고 키득거렸다. 나는 부들부들 떨며 툇마루에 주저앉았다. 열린 대문 사이로 셰퍼드들이 들어섰다.
“영장 제시해. 알아볼 수 있을지는 모르겠지만.”
가죽점퍼를 입은 초로의 형사가 지시를 내리자 더 젊은 형사가 종잇장을 내 면전에 들이밀었다.
“자, 영장 보셨죠? 수색합니다.”
셰퍼드가 마당 한구석에서 코를 킁킁거리더니 짧게 세 번을 짖었다. 제복을 입은 경찰들이 삽을 들고 파들어갔다.
“어, 나온다.”
“그런데 좀 이상한데요?”
경찰들이 찾아낸 것은 한눈에 봐도 어린아이의 유골이다. 오래 전에 묻힌 것이 분명한, 백골이다. 경찰들이 술렁거린다. 대문 밖에는 주민들도 몰려와 있다. 정복 경찰들이 폴리스라인을 쳤다. (P130-131)
평행우주로 보내진 것 같다. 이 우주에서 박주태는 경찰이고 안형사는 없고 나는 은희의 살해범이다. (P133)
무심코 외오던 반야심경의 구절이 이제 와 닿는다. 침대 위에서 내내 읊조린다.
“그러므로 공(空) 가운데에는 물질도 없고 느낌과 생각과 의지작용과 의식도 없으며, 눈과 귀와 코와 혀와 몸과 뜻도 없으며, 형체와 소리, 냄새와 맛과 감촉과 의식의 대상도 없으며, 눈의 경계도 없고 의식의 경계까지도 없으며, 무명도 없고 또한 무명이 다함도 없으며, 늙고 죽음이 없고 또한 늙고 죽음이 다함까지도 없으며, 괴로움과 괴로움의 원인과 괴로움의 없어짐과 괴로움을 없애는 길도 없으며, 지혜도 없고 얻음도 없느니라.” (P148)