영화 <누드모델> 1991년
영화 <누드모델>(La Belle Noiseuse, The Beautiful Troublemaker)은 프랑스에서 제작된 자크 리베트(Jacques Rivette) 감독의 1991년 드라마 영화이다. 제인 버킨 등이 주연으로 출연하였고 피에르 그리스 등이 제작에 참여하였다. 이 영화는 44회 깐느영화제 그랑프리와, LA비평가 협회 외국어 영화상을 수상하였다.
도매상인에게 세상은 봇짐이거나 유통 중인 지폐 뭉치다. 대부분의 젊은 남자들에게 세상은 여자다. 일부 여자들에게 세상은 남자다. 그리고 어떤 영혼들에게 세상은 거실이고, 집단이며, 동네이고, 도시다. 하지만 돈 후안에게 세상은 그 자신이었다!
우아함과 고귀함의 표본이며 매혹적인 정신의 소유자인 그는 자신의 배를 모든 해안에 정박시켰고, 누군가 자신을 이끌도록 내버려 두면서도 자신이 원하는 데까지만 갔다. 살면 살수록 그는 의심이 더 많아졌다. 사람들을 관찰하면서 그는 자주 용기가 무모함이 되는 것을 알아챘다. 신중함이 비겁함이 되고 관대함이 교활함이 되며, 정의가 범죄가 되고, 섬세함이 어리석음이 되고, 성실함이 조직이 되는 것을 알게 되었다. (P43)
물론 그 영감은 항상 시들해져서, 행복은 단지 하나의 추억에 불과해지고 영광은 한낱 거짓말에 불과해지지만 말이다. 부서지기 쉬운 우리의 감정들 중 그 어떤 것도, 영광과 불행으로 점철되는 운명의 감미로운 형벌을 시작하는 예술가의 젊은 열정 같은 사랑과 닮은 것은 없다. 오만함과 수줍음, 모호한 믿음과 확실한 절망으로 가득찬 그 열정.
돈은 없지만 재기 있는 청년이 대가를 만나 심장이 강하게 고동치지 않는다면, 그에게는 항상 가슴 속에 현(絃) 하나가 부족하다 할 수 있을 것이다. 어떻게 표현해야 할지 모르겠지만, 작품 속의 어떤 감정 하나가, 어떤 시적인 표현 하나가 빠져 있다고 말할 수 있는 것이다. 자신에 대한 확신으로 가득 차 너무 일찍 미래를 낙관하는 허풍선이들은 그저 바보들에게나 재능있는 사람으로 보일 뿐이다.
이 점에서, 이 미지의 젊은이는 진정한 덕목을 지닌 것처럼 보였다. 재능을 평가하는 기준이 일차적인 수줍음과 정의할 수 없는 순수함에 있다면 말이다. (P71)
자네들은 팔레트에서 미리 만들어진 살색으로 이 윤곽선을 채색하면서 한쪽을 다른 쪽보다 더 어둡게 유지하는 데에만 심혈을 기울이지. 그리고 테이블 위에 서 있는 나체의 여인을 틈틈이 바라보았기 때문에, 실물을 그대로 모사했다고 생각해. 스스로를 화가라고 생각하고 신의 비밀을 훔쳐냈다고 생각하지!... 흠! 위대한 시인이 되기 위해서는 통사법을 완전히 이해하는 것만으로, 언어적 실수를 범하지 않는 것만으로 충분하지 않아! (P77)
그토록 칭찬할 만한 노력에도 불구하고, 나는 이 아름다운 육체가 따뜻한 생명의 숨결을 받아 생기를 띠고 있다고 생각하지 않네. 너무 탄탄하고 둥근 이 목에 손을 얹으면 마치 대리석처럼 차갑게 느껴질 것 같군! 아니야, 친구, 이 상아처럼 흰 피부 아래로는 피가 흐르지 않아. 그녀의 육체는 존재하지만, 관자놀이와 가슴의 투명한 황갈색 피부 아래에 그물처럼 얽혀 있는 혈관과 소섬유는 주홍빛 핏방울로 채워져 있지 않네. 이 부분은 꿈틀거리고 있지만, 다른 부분은 움직이질 않아. 삶과 죽음이 각각의 세부에서 서로 맞서고 있는 셈이지. 여긴 여자이지만, 저긴 조각이고, 나머지는 시체야. 자네의 창조물은 불완전해. 자네는 자네의 소중한 작품에 자네 영혼의 일부만을 불어넣었을 뿐이야. 프로메테우스의 불은 자네의 손에서 여러 번 꺼졌고, 자네의 그림의 많은 부분이 천상의 불꽃을 거치지 못했어. (P79)
손, 아까 예로 들어서 다시 말하는 건데, 손은 단지 육체에만 속하는 것이 아니라, 우리가 포착해서 재현해야만 하는 어떤 생각을 표현하고 연장해 내는 것이야. 화가도, 시인도, 조각가 도 원인과 결과를 분리시킬 수는 없네. 그 둘은 어쩔 도리가 없 을 정도로 서로가 서로에 속해있지! 진짜 투쟁은 바로 거기에 있는 거야! 수많은 화가들이 이러한 예술의 테마를 알지 못한 채 직관적으로만 성공을 거두지. 자네들은 여자를 그리지만 그녀를 보지는 못해! 그렇게 해서는 자연의 비밀을 손에 넣을 수가 없어. 자네들의 손은 스승의 작품에서 베꼈던 모델에 대 해 사유하지 않은 채 그것을 재현할 뿐이지. 자네들은 형태의 내면으로 충분히 침잠하지 못하고, 우회하기도 하고 달아나기 도 하는 그 형태를 충분한 사랑과 인내로 쫓지도 못해.
미란 엄격하고 어려운 것이네. 결코 이런 식으로 도달하도 록 내버려두지 않지. 그것의 시간을 기다려야만 하고, 그것을 탐색하고 압축해야 하며, 그것이 스스로를 드러내도록 긴밀하 게 얽어매야 하네. (P83)
“....... 이봐, 젊은이, 내가 여기서 자네에게 보여 주는 것은 어떤 선생도 가르쳐 줄 수 없는 거야. 오직 마뷔즈 선생만이 그림에 생명을 불어넣는 비밀을 알고 있었지. 마뷔즈 선생에게는 단 한 명의 제자가 있었는데, 그게 바로 나야. 나는 제자가 없었고, 어느새 늙어버렸지! 자네는 내가 잠시 보게 해 준 것으로 나머지를 파악할 수 있는 지혜를 지니고 있겠지.”
이런 얘기들을 하면서, 그 이상한 노인은 그림의 모든 부분에 손을 댔다. 여기에는 두 번 붓칠하고 저기에는 한 번 붓칠했지만, 항상 너무도 적절해서 하나의 새로운 그림을, 빛으로 흠뻑 물든 어떤 그림을 보는 것 같았다. 그는 벗겨진 이마에 땀방울이 맺힐 만큼 아주 열정적이고 격렬히 작업했다. 그가 몹시 조급하고 발작적인 작은 동작들로 너무 빠르게 그렸기 때문에, 젊은 푸생은 마치 그 이상한 인물의 육체 안에 악마가 들어가 있는 것처럼 느꼈다. 악마가 인간의 의사와 상관없이 환상적으로 손을 잡고 움직이고 있는 것처럼 여겨졌다. 초자연적인 눈의 광채와 저항의 결과인 듯한 경련은 이런 생각을 진실처럼 보이게 했고 젊은이의 상상에도 영향을 미쳤다. (P91-92)
“......... 나 역시 밑그림을 그리는 것을 멈추지 않지만, 동시에 나는 그 윤곽선 위에 따뜻한 금색의 반농담 암영을 펴 바르네. 이 암영은 윤곽선이 배경과 만나는 자리를 정확히 지적할 수 없게 만들어줘. 가까이서 보면, 이 작업은 희미해 보이고 정확함이 부족해 보이지. 하지만 두 걸음만 떨어져서 보면, 모든 것이 확고해지고 멈춰서고 뚜렷이 드러나네. 육체는 움직이고, 형태는 도드라지며, 모든 것의 주위로 공기가 순환하는 것이 느껴지지.
그러나 난 아직 만족을 못하네. 내겐 의심이 남아 있어. 아마도 단 하나의 선으로 그려서는 안 되겠지. 우선 가장 밝게 드러나는 부분에 집중한 다음 가장 어두운 부분으로 옮겨가면서, 배경을 통해 형상을 표현하는 것이 더 나을 거야. 우주의 신성한 화가인 태양도 그렇게 하지 않는가? 오! 자연, 자연이여! 일찍이 그대를 원근법으로 간파한 이는 누구던가? 이봐, 너무 많은 지식은 무지와 마찬가지로 부정에 이르게 되지. 나는 나의 작품을 의심하고 있어.”
노인은 잠시 멈추더니 다시 말을 이었다. (P100)
“..........그(프렌호퍼)는 데생이란 존재하지 않으며 선으로는 오로지 기하학적 형상들만 만들어낼 수 있다고 주장하기도 했지. 이것 또한 지나치게 절대적인 사고야. 왜냐하면 색채가 아닌 선과 어둠만으로도 형상을 만들어낼 수 있기 때문이지. 이는, 우리의 예술이 자연처럼 무한한 요소들로 이루어졌다는 것을 의미하네. 데생은 골격을 부여하고, 색채는 생명에 해당하지. 그런데 골격 없는 생명은 생명 없는 골격보다 더 불완전한 것이라네. 여하튼, 이 모든 것보다 더 진실한 무언가가 있네. 바로, 화가에게는 실천과 관찰이 전부라는 거야. 또 추론과 시정(詩情)이 화필과 싸우면, 화가이자 광인인 저 어르신처럼 결국 의심에 이르게 된다는 것이지. 그는 위대한 화가이지만 불행하게도 부자로 태어났지. 그것이 그를 헤매게 했네. 그를 모방하지말게! 작업하게! 화가는 손에 붓을 쥐고서만 성찰해야 하네.”
“우린 깊이 성찰할 수 있을 겁니다!”
푸생은 더 이상 포르뷔스의 말을 듣지 않고 어떤 것도 의심하지 않으면서 소리쳤다. 포르뷔스는 이 미지의 젊은이의 열정에 미소를 지었다. 그리고 언제 자신을 보러 오라고 초대하면서 떠났다. (P106)
내가 이 여자와 산 게 벌써 십 년이야. 그녀는 나의 것, 나만의 것이네. 나를 사랑하지. 내가 그녀에게 붓질 할 때마다 그녀가 내게 미소 지어주지 않던가? 그녀는 영혼을 지니고 있고, 그 영혼은 내가 부여한 것이네. 내가 아닌 다른 사람의 눈길이 그녀 위에 멈추면 그녀는 얼굴을 붉히지. 그녀를 보게 해 달라니! 자신의 여인을 수치스럽게 만들 만큼 파렴치한 남편, 연인이 어디 있겠는가?
자네는 궁정을 위해 그림을 그릴 때 자네의 영혼을 전부 쏟아 붓지 않지. 자네는 궁중 사람들에게 채색한 인형들만을 팔 뿐이니까. 내 그림은 단순한 그림이 아니야. 그건 하나의 감정이고, 열정이지! 그녀는 내 아틀리에에서 태어난 이상 그곳에서 동정을 지키며 머물러 있어야 하네. (P115)
"자" 그가 말했다. "이 여자는 세상의 모든 걸작들에 비할 만하지 않나요?"
프렌호퍼는 소스라치게 놀랐다. 질레트는 강도들에게 유괴당해 노예 상인 앞에 끌려온 순진하고 겁먹은 조지아 처녀처럼, 순수하고 꾸밈없는 태도로 거기에 서 있었다. 수줍어하는 듯한 홍조가 그녀의 얼굴을 물들이고 있었다. 그녀는 눈을 내리깔았고, 힘이 다 빠져나간 것처럼 두 손을 허리 곁에 늘어뜨렸다. 그리고 그녀의 수치심에 가해진 폭력에 저항하는 듯 눈물을 흘리고 있었다.
그 순간, 푸생은 이 아름다운 보물을 그의 창고에서 꺼낸 것에 절망했고, 스스로를 저주했다. 그리고 젊음을 되찾은 노인의 눈을 보자 숱한 양심의 가책으로 심장에 고통을 느꼈다. 노인의 눈이 화가의 습관으로 이 젊은 여인의 옷을 벗기고 가장 은밀한 형태까지 읽어냈기 때문이다. (P120~121)
발자크는 17세기를 배경으로 하는 이 소설에서, 프렌호퍼의 입을 빌어 당대 뜨겁게 달아올랐던 ‘색채 논쟁’과 관련해 데생 옹호자들(푸생 파)보다 색채 옹호자들(루벤스 파)의 손을 들어준다. 그보다 수십 년 앞서 칸트가 “판단력 비판”에서 회화의 본질은 ‘선묘’이고 ‘색채’는 감각을 위해 대상을 생기 있게 만들어줄 뿐 진정한 아름다움과는 거리가 멀다고 확언한 것과 정반대되는 입장이다. (P140, 옮긴이 김호영 해설)
그 최상의 단계에 다다르면, 그림은 이처럼 사물에서 존재로, 무생물에서 생명체로 탈바꿈할 수 있는 것이다.
이 지점에서, 발자크는 당시 서구에서 부흥하던 ‘물활론(物活論)’적 사고의 한 유형을 보여준다. 화가의 노력과 능력에 따라 그림이 생명과 영혼을 갖춘 존재가 될 수 있다고 보는 시각의 근저에는 모든 물질이 그 자체로 생명이나 영혼을 지니고 있다고 간주하는 물활론적 사유가 깔려 있는 것이다. (P149, 옮긴이 김호영 해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