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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노용헌 Aug 02. 2024

로맹 가리의 <새들은 페루에 가서 죽다>

영화 <새들은 페루에 가서 죽다>  1968년

새들이 죽는 페루 해변의 카페를 운영하는 나는 자살하는 아름다운 여인을 구한다. 그녀를 찾아온 남편과 투우사에게 위협을 느끼지만 그녀는 그들을 따라 떠난다. 로맹 가리가 직접 감독하고 부인 진세버그가 출연한 영화 <새들은 페루에 가서 죽다>는 성적노출과 난해함으로 히트하지 못한 누벨바그영화다.    

 

그는 난간에 팔꿈치를 괴고 그날의 첫 담배를 피우면서 모래 위에 떨어져 있는 새들을 바라보았다. 개중엔 아직 살아 파득거리는 것들도 있었다. 새들이 왜 먼바다의 섬들을 떠나 리마에서 북쪽으로 십 킬로미터나 떨어져 있는 이 해변에 와서 죽는지 아무도 그에게 설명해주지 못했다. 새들은 더 남쪽도 더 북쪽도 아닌, 길이 삼 킬로미터의 바로 이곳 좁은 모래사장 위에 떨어졌다. 새들에게는 이곳이 믿는 이들이 영혼을 반환하러 간다는 인도의 성지 바라나시 같은 곳일 수도 있었다. 새들은 진짜 비상을 위해 이곳으로 와서 자신들의 몸뚱이를 던져버리는 것일까. 피가 식기 시작해 이곳까지 날아올 힘밖에 남아 있지 않게 되면, 차갑고 헐벗은 바위뿐인 조분석 섬을 떠나 부드럽고 따뜻한 모래가 있는 이곳을 향해 곧장 날아오는 것인지도 몰랐다. 그런 설명들로 만족해야 하리라. 모든 것에는 항상 과학적인 설명이 있게 마련이다. 시에서 설명을 구할 수도, 자연의 신비를 줄곧 믿을 수도 있다. 조금 시적이고 조금 몽상적이지만..... 스페인 내전에서, 프랑스의 레지스탕스에서, 쿠바에서 전무를 치른 다음, 모든 것이 종말을 고하는 안데스 산맥 발치의 페루 해변으로 몸을 피한다. 마흔일곱이란 알아야 할 것은 모두 알아버린 나이, 고매한 명분이든 여자든 더 이상 아무것도 기대하지 않는 나이니까. 자연은 사람을 배신하는 일이 거의 없으므로, 다만 아름다운 자연에서 위안을 구할 뿐, 조금 시적이고 조금 몽상적이지만..... 하지만 시도 언젠가는 과학적으로 설명되고, 단순한 생리적 분비 현상으로 연구되리라. 과학은 모든 면에서 인간을 제압하고 있다. 오직 바다만을 친구로 삼고, 페루 해변의 모래언덕 위에 있는 카페의 주인이 되는 데에도 설명이 있을 수 있다. 바다란 영생의 이미지, 궁극적인 위안과 내세의 약속이 아니던가?             (P11-13)     

“이 새들은 모두 어디서 오는 건가요?” 그녀가 물었다.

“먼바다에 섬들이 있소. 조분석(鳥糞石) 섬들이오. 새들은 그곳에서 살다가 이곳에 와서 죽소.”

“왜요?”

“모르겠소. 갖가지 설명이 있을 수 있겠지요.”

“그럼 당신은요? 당신은 왜 여기로 왔죠?”

“저 카페를 운영하고 있소. 여기 살아요.”

그녀는 자기 발치께 죽어 있는 새들을 바라보았다.

울고 있는지, 아니면 그녀의 뺨에 흘러내리는 것이 물방울인지 알 수 없었다. 그녀는 여전히 모래 위의 새들을 내려다보고 있었다.

“어쨌든 한 가지 설명은 있을 거요. 언제나 한 가지 이유는 있는 법이니까.”          (P17-18)     


그녀는 흐느꼈다. 그가 대책 없는 어리석음이라고 스스로 이름붙인 그 무엇에 다시 점령당하고 만 것은 바로 그 순간이었다. 충분히 의식하고 있었고, 자신의 손 안에서 모든 것이 부서지는 걸 목격하는 일에 습관이 되어 있었음에도 불구하고, 늘 이런 식이었으므로 속수무책이었다. 그의 내부에 있는 무언가가 체념을 거부하고 줄곧 희망이라는 미끼를 물고 싶어 했다. 그는 삶 깊숙한 곳에 숨겨져 있는, 황혼의 순간 문득 다가와 모든 것을 환하게 밝혀줄 그런 행복의 가능성을 은근히 믿고 있었다. 대책 없는 어리석음 같은 것이 그의 안에 자리잡고 있었다.           (P20)      

그는 그녀의 손을 잡았다. 그는 처음으로 그녀가 원피스 안에 아무것도 입고 있지 않음을 알았다. 그녀가 어디에서 왔는지, 누구인지, 거기서 무엇을 하고 있었는지, 어째서 죽으려고 했는지, 왜 야회복 속에 아무것도 입지 않고 목에는 다이아몬드 목걸이를 걸고 두 손에는 금붙이와 에메랄드를 주렁주렁 달고 슬프게 웃고 있는지 묻기 위해 그는 입을 열었다. 그녀야말로 왜 이곳 모래언덕까지 와서 죽으려는 것인지 그에게 말해줄 수 있는 유일한 새일 터였다. 한 가지 설명은 있어야 하고 언제나 있을 테지만 모른들 무슨 상관이랴. 과학은 우주를 설명하고, 심리학은 살아 있는 존재를 설명한다. 하지만 스스로를 방어하고, 되어가는 대로 몸을 맡기지 않고, 마지막 남은 환상의 조각들을 빼앗기지 않는 법을 배워야 한다. 약동하는 바다와 땅의 색조만을 가늠하게 해줄 뿐인 보이지 않는 태양빛과 주위로 번진 빛을 받아, 해변과 바다와 하얀 하늘이 순간적으로 모습을 드러냈다.         (P22)      

인간이라—우리로서는 물론 이의가 전혀 없고말고, 언젠가는 인간이 될 게 아닌가! 좀더 참고 좀더 버텨야 해. 일만 년 정도밖에 남지 않았잖아. 이 친구들아, 기다릴 줄 알아야 해. 뭐니뭐니 해도 크게 보고, 지질학적 시대 단위로 시간을 헤아리는 법을 배우고, 상상력을 가져야 한다네. 그러면 인간이 될 가능성이 높다고 할 수 있지. 인간의 시대가 올 때 그 자리에 남아 있기만 하면 되는 거야. 지금으로서는 자취와 몽상과 예감뿐이지만—지금 인간은 그 자신의 선구자일 뿐. 우리 고매한 선구자들에게 영광 있으라! 

—사샤 치포츠킨, ‘달빛 산책’ 중에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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