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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노용헌 Aug 06. 2024

윌리엄 포크터의 <소리와 분노>

영화 <더 사운드 앤 더 퓨리>  2014년

<소리와 분노>는 가공의 땅 제퍼슨의 대지주 가문 콤슨가를 통해, 남북전쟁에서 패한 이후 남부사회가 경제적, 정신적으로 와해되고 타락해가는 모습을 묘사한다. 포크너 특유의 강렬한 시각적 언어로 구현되어 있고, “4악장의 심포니 구조”로 이루어져, 콤슨가 4남매 가운데 첫째인 켄틴, 셋째 제이슨, 막내 벤지가 각각 화자가 되어 일인칭 시점으로 서술하는 장과 전지적 작가 시점으로 쓰인 마지막 장 등 총 4장으로 나뉘어, 콤슨가의 몰락 과정에서 주요한 역할을 하는 사건들이 서로 다른 화자에 의해 재구성되었다.

아버지가 문으로 가서 다시 우리를 바라보았다. 그다음에 어둠이 돌아왔고 아버지가 문간에 서 있는데 검었다. 그리고 문이 다시 검어졌다. 우리 모두의 소리가, 그리고 어둠이, 그리고 냄새나는 무언가가 들렸다. 그리고 창문이 보였고 거기에 나무들이 윙윙거렸다. 그다음에 어둠이 매끄럽고 환한 모양으로 가기 시작했다. 언제나 그렇듯이, 또 내가 잠들어 있었다고 캐디가 말할 때에도 그렇듯이.               (P98)     


커튼에 창틀 그림자가 보이니 일곱시에서 여덟시 사이일 것이며 시계 소리를 듣고 있는 나는 또다시 시간 안에 있는 것이다..... 내 너에게 이것을 주는 건 시간을 기억하라 함이 아니라, 이따금 잠시 시간을 잊으라는 것이요, 시간을 정복하려고 인생 전부를 들이지 않도록 하기 위함이다. 그것은 시간과의 싸움에서 이긴 사람은 없기 때문이다. 싸움이 성립조차 안된다. 그 전쟁터는 인간의 우매와 절망을 드러낼 뿐, 승리는 철학자들과 바보들의 망상이다.          (P101-102)  

   

남부 사람들은 자기가 동정이란 걸 부끄러워 해. 애고 어른이고 간에. 남자들은 모두 동정에 대해 거짓말을 해. 여자들에게는 그게 그렇게 중요하지 않아, 아버지가 말했다. 그는 또 동정이라는 개념을 지어낸 건 여자가 아니라 남자라고 말했다. 아버지가 말했다. 그것은 죽음과 같다고, 어떤 사람들은 속하고 어떤 사람들은 속하지 않은 어떤 상태일 뿐이라고 그래서 내가, 하지만 그게 중요하지 않다고 간주하는 것은 하였더니 아버지가 이르기를, 동정뿐 아니라 그게 무엇이든 바로 그렇게 생각하는 게 애석한 것이지 그래서 내가 말하기를, 동정을 잃은게 왜 내가 아니라 캐디냐고 하였더니 아버지가 말하기를, 그래서 그게 또한 애석하다는 것이다. 그것을 바꾸어 노는 것은 아무런 가치도 없으니 말이다 하였다.         (P104-105)

     

나는 한때 남부 사람이라면 항상 깜둥이를 의식하지 않을 수 없다고 생각했다. 북부 사람들이 남부 사람들에게 그런 기대를 품을 것 같았다. 처음 동부에 왔을 때 나는 그들을 깜둥이가 아니라 유색인으로 간주할 것을 잊지말자고 마음 속에 되새겼다. 만일 내가 많은 깜둥이들과 함께 산 적이 없었다면, 나는 피부가 검든 희든 모든 사람을 생각할 때 가장 좋은 방식은 그들이 스스로에 대해 생각하는 방식대로 그들을 생각하는 것이며, 그런 다음에는 그들을 그냥 내버려두는 것임을 알기까지 많은 시간과 수고를 허비했을 것이다. 깜둥이란 하나의 인격체라기 보다는 일종의 행동 양식임을, 함께 사는 백인들의 이면이 비친 모습과 같다는 것을 깨달은 것은 바로 그때였다.                 (P114-115)   

  

그들은 그런 식으로, 그들의 특성인, 초라하지만 시간이 흘러도 변함없는 인내와 함께, 정적인 평온과 함께, 스르르 시야에서 사라졌다. 그들은 어린애같이 그리고 영악하게 무능하지만, 역설적이게도 그들을 돌보고 보호해주는 신뢰를 받는데, 이 무능과 신뢰가 뒤섞여 그들은 사랑받기도 하고 끊임없이 약탈당하기도 하며, 위장이라고 하기에는 너무 노골적인 방식으로 책임과 의무를 회피하기도 한다..... 한편 백인들의 변덕에 대한 그들의 애정 어린 시들지 않는 인내는 종잡을 수 없는 성가신 손자들의 응석을 받아주는 할머니 할아버지의 마르지 않는 인내와도 같다.              (P116-117)  

   

“속좁게 계층을 구별하지는 않아. 어디에 속하든 나한테 사람은 사람일 뿐이야.”          (P134) 

    

그게 사십오 분 종소리였다면 지금 십 분 전이 넘지 않았을 것이다. 기차가 떠난 지 얼마 되지 않았는데 이미 다음 기차를 기다리는 사람들이 있었다. 나는 다음 기차에 대해 물어보았지만, 교외선 기차라는 게 으레 그렇듯이 그 사람도 다음 기차가 정오 전에 출발할지 아닐지는 모른다고 했다. 결국 먼저 온 것은 다른 전차였다. 나는 전차를 탔다. 정오는 느껴지기 마련이다. 광부들은 땅속에서 정오를 느낄 수 있을까. 그래서 경적이 있는 것이다. 사람들은 그 고역, 그리고 내가 고역에서 충분히 멀리 떨어져 있기만 하면 경적이 들리지 않을 것이며 팔 분 안에 보스턴의 고역에서 그만큼 멀리 떨어져 있어야 할 것이다. 아버지가 말했다 인간은 자기 불행의 총합이다. 언젠가는 불행도 지칠 거라고 생각하겠지만 시간이 네 불행이야. 허공을 가로지르는 보이지 않는 전신줄에 앉아 있는 갈매기가 질질 끌리는 듯했다. 좌절의 상징을 영원으로 가져간다고 하자. 그러면 날개야 더 크겠지만 아버지가 말하기를 다만 누가 하프를 연주할 줄 알겠니.

전차가 설 때마다 내 시계 소리가 들렸다. 하지만 사람들이 이미 점심을 먹으러 들어가 있어 전차가 자주 서지는 않았다. 누가 그것을 연주할까 먹는다는 것 먹는다는 일 몸 안에도 공간이 있어 공간과 시간은 위(胃)라는 녀석을 혼동시켜 두뇌에 정오를 알려 밥 먹을 시간이라고 말한다 좋아 나는 지금이 몇 시인지 궁금하다 그래서 뭐 어쨌다고. 사람들이 전차에서 내리고 있었다.                      (P139-140)   

  

사람은 그렇게도 많이 언어로 자신과 서로를 다루거니와 적어도 침묵하는 혀에 지혜가 있다고 생각하는 면에서 일관된 것 같다.                   (P158)  

   

내가 무슨 말을 하는지 몰랐어 고향에서 팔월이 끝나갈 무렵이면 이런 날들이 있다. 이렇게 산소가 희박하고 열망으로 가득한 날들이, 서글프고 향수 어린 친숙한 무언가가 느껴지는 날들이. 아버지는 인간은 자신이 경험하는 기후의 총합이라고 했다. 인간은 기타 이런저런 것들의 총합이야. 불순한 속성들로 이루어진 하나의 문제야. 이 문제는 끈덕지게 변함없는 무(無)로 이끌리는데, 이 무는 흙과 욕망의 교착상태야.              (P165-166) 

    

우리 방 창문이 어두웠다. 건물 출입구에는 아무도 없었다. 건물에 들어서자 나는 왼쪽 벽에 붙어 걸었지만 안에는 아무도 없었다. 그림자들 속으로, 그림자들 위에 앉은 가벼운 먼지 같은 지나간 슬픈 세대들의 발소리가 메아리치는 속으로 구부러져 올라가는 계단이 있을 뿐이었다. 내 걸음이 그 그림자들을 깨웠으며 그 먼지들은 다시 가볍게 내려앉았다.       (P227-228)     


아버지가 사람이란 다 자기미덕의 결정권자야 네가 그걸 용기라고 생각하느냐 아니냐가 그 행동 자체보다 또 그 어떤 행동보다 더 중요하다 그렇지 않다면 진지하지 않은 것이지 하기에.....                 (P235) 

     

그리고 이상한 일은 말이야 우연히 잉태되어 숨쉬는 매순간이 자신에게 불리한 협잡 주사위를 매번 새로이 던지는 듯한 삶을 사는 사람은 자기가 이미 알고 있는 최후의 도달점을 직시하지 않으려 한다는 거야 폭력에서부터 어린애도 안속는 시시한 속임수에 이르는 모든 수단을 시도하는 일 없이 대담하게 직시해야 하는데도 말이야 그러다가 어느 날 모든 게 싫어져 맹목적으로 단 한 번 뒤집은 카드에 모든 것을 위험에 내맡기는 것이지 절망이나 회한이나 사별 앞에 처음 느끼는 분노로 그러는 사람은 없어 절망이나 회한이나 사별조차 그 음험한 주사위를 던지는 사람에게 특별히 중요하지 않다는 것을 깨달았을 때에만 그러거든 하기에 내가 잠깐 동안이에요 하니 아버지가 사랑이나 슬픔은 계획 없이 구입한 채권과 같아서 싫든 좋든 만기가 닥치면 예고없이 회수되어 그때 폭군들이 발행하는 것으로 교체된다는 생각은 믿기 어렵지 아니야 너는 캐디가 네가 절망할 만한 가치가 없다고 생각하기 전에는 그러지 않을 것이야 아마도 하기에 내가 저는 그러지 않을 것이에요 아무도 제가 아는 것을 알지 못해요 하니 아버지가 너 지금 당장 케임브리지로 가는 게 좋겠다 한 달 정도 메인 주에 가 있어도 좋아 그럴 돈이 있으니까 검소하게 지내기만 하면 말이야 돈을 쓰기 전에 잘 생각해서 쓰는 법을 연습하는 것도 유익할 거야 그러는 것은 예수보다 더 많은 상처를 낫게 했느니라 하기에 내가 제가 거기에 가서 다음주나 다음달에 제가 깨달으리라고 아버지가 생각하시는 것을 깨닫는다면 하니 아버지가 그럼 네가 하버드에 가는 것은 네가 태어나서부터 네 엄마가 품어온 꿈임을 기억할 게다 콤슨 집안 남자 중에 숙녀를 실망시킨 사람은 없어 하기에 내가 잠깐 동안이에요 저를 위해서나 우리 모두를 위해서나 그러는 게 좋겠죠 하니 아버지가 사람이란 다 자기 미덕의 결정권자니라 그러나 다른 사람이 네 행복을 규정하지 않도록 해 하기에 내가 잠깐 동안이에요 하자 아버지가 존재의 과거형은 가장 슬픈 말이야 세상에 그보다 슬픈 말은 없단다 절망도 시간이 흘러가야 있을 수 있지 시간조차 그 존재가 과거가 되지 않으면 시간이 아니니까            (P236-237)     


내가 늘 하는 말이지만 돈에는 가치가 없다. 그것을 어떻게 쓰느냐의 문제일 뿐이다. 그것은 누구의 것도 아니다. 그런데 뭐하러 쌓아두겠는가. 그것은 손에 쥐고 놓지 않을 수 있는 사람의 것일 뿐이다. 여기 제퍼슨에 깜둥이들을 대상으로 허접한 물건들을 팔아 큰돈을 번 사람이 있다. 그는 가게 위의 돼지우리만한 방에서 손수 밥을 해먹으며 살았다. 그런데 너덧 해 전인가 병이 들었다. 그러자 단단히 겁이 났던지 병석에서 일어나자마자 교회에 다니기 시작하더니 그간 쓰지 않고 움켜쥐고 있던 돈을 중국 선교에 쓰기 시작해서 매년 오천 달러를 냈다. 간혹 나는 그가 죽어서 천국이 존재하지 않는다는 것을 알면 매년 기부한 오천 달러를 생각하며 얼마나 화를 낼까 하고 생각했다. 내가 누누이 말하는 것처럼 그러느니 그냥 빨리 죽어서 돈을 아끼는 게 나았을 것이다.               (P259)     


“안 될 소리.” 엄마가 말했다. “의사가 뭐라고 했는지 모르는가? 어째서 이이가 술을 마시도록 부추기는 건가? 이이가 지금 이렇게 된 게 술 때문인데, 나 좀 봐요, 나도 괴롭지만 술로 나 자신을 죽일 만큼 약하지는 않아요.”

“당찮은 소리.” 아버지가 말했다. “의사들이 뭘 안다는 말이요? 그들은 자기들이 현재 하지 않는 것을 사람들에게 충고해주는 걸로 먹고 사는 사람들이요. 그 퇴화한 원숭이들이 그렇다는 건 누구나 다 아는 사실이오. 다음에는 내 손을 잡아줄 성직자를 부르구려.” 그러자 엄마가 울었다. 아버지는 밖으로 나가 아래층으로 내려 갔다. 찬장 여는 소리가 들렸다. 잠을 자다가 문득 깨보니 아버지가 다시 아래층으로 내려가는 소리가 들렸다. 엄마가 잠이 들었는지 어쨌는지 마침내 집 안이 조용했다. 아버지도 조용히 움직였다. 그래서 아버지의 긴 잠옷 밑단과 맨다리가 천장 앞에서 스치는 소리 외에 다른 소리는 들리지 않았다.         (P266-267)    

 

나는 더 이상 말하지 않았다. 말해봤자 아무 소용 없다. 나는 틀에 박힌 생활을 하는 사람은 그냥 그렇게 살라고 내버려두는 게 제일 좋다는 것을 알고 있었다. 그리고 나를 위해 나를 고자질해야겠다는 사람이 있다면, 그 사람에게는 작별인사가 있을 뿐이다. 나는 병든 강아지는 늘 돌봐줘야 한다는 유의 양심이 나한테 없어서 좋다. 그가 보잘 것 없는 것으로 가득한 이 작은 가게에서 팔 퍼센트 이상 이익을 얻지 않게 조심하듯 나도 조심해야 한다고 생각하면 정말이지, 그는 팔 퍼센트 이상의 순이익을 올리면 고리대금법에라도 걸릴 거라고 생각하는가보다. 이런 마을에, 이런 가게에 꼼짝없이 발이 묶인 사람에게 도대체 어떤 기회가 있겠는가. 물론 내가 그의 가게를 일 년 동안 맡아 운영한다면 그가 다시는 일할 필요가 없게 해줄 수 있을 것이다. 그래도 그는 그 돈을 교회 같은 데 갖다바치겠지. 나를 화나게 하는 게 하나 있다면 그것은 젠장맞을 위선이다. 무언가에 대해 속속들이 이해하지 못하면 속임수가 있는 거라고 생각하는 사람은 기회만 있으면 자기가 상관할 일이 아닌데도 도덕심이 발동해 제삼자에게 말하지 않고는 못 배긴다. 내가 말했듯이 내가 속속들이 알지 못하는 일을 누군가가 할 때마다 내가 그를 사기꾼이 틀림없다고 생각한다면, 나는 별로 힘들이지 않고 저 안의 저 장부들 속에서 무언가 찾아낼 수 있을 것이다. 당신은 내가 돌아다니며 그런 일을 알 만한 사람들에게 말하는 게 아무 소용 없다고 생각할지 모르지만, 의외로 그들이 나보다 그런 일에 대해 훨씬 더 많이 알지도 모르고, 또 그렇지 않다 해도 그건 어쨌든 내가 알 바 아니지 하는데 그가 말하기를 “누구든 내 장부를 볼 수 있네. 이 사업체에 대해 불만이 있거나 이 사업체에 대해 자네 어머니가 주장할 권리가 있다고 생각하는 사람이 있다면 누구든 저 안에 가서 뒤져봐도 되네. 언제든 환영이야.”

“아무렴요. 말하시지는 않겠죠.” 내가 말했다. “그러면 양심에 가책을 받을 테니까요. 대신 엄마를 안으로 데려가 그걸 보게 하시겠죠. 직접 말하지는 않겠지만.”

“자네 일에 참견하려는 게 아니야.” 그가 말했다. “자네가 형이 누렸던 것들을 가지지 못했다는 걸 알아. 하지만 자네 어머니도 불행한 인생을 사셨어. 그리고 자네 어머니가 여기에 오셔서 자네가 왜 일을 그만두었냐고 물으시면 나는 사실을 말할 수밖에 없네. 그 천 달러에 대해 말하는 게 아니야. 알면서 그래. 사실과 장부가 일치하지 않는 사람이 잘되는 법은 없으니 그러네. 더구나 나는 누구한테도 거짓말하지 않을 거네. 나 자신이나 다른 사람을 위해서도.”            (P302-303) 

    

무슨 일에든 별로 성공해보지 못한 사람이 꼭 남의 사업에 훈수를 두는 법이다. 제 이름으로는 양말 한 짝 가진 게 없는 대학 교수들이 남에게 십 년 안에 백만 달러 버는 법을 알려주고, 남편감도 못 구하는 여자들이 꼭 남에게 가정 꾸리는 법을 가르쳐 주는 것처럼.         (P328)     


날이 밝았다. 을씨년스럽고 쌀쌀한 날이었다. 움직이는 장벽처럼 회색빛이 북쪽에서 밀려왔다. 공기중의 수증기에 녹아들지 않고 미진처럼 잘디잘고 유해한 미립자로 분해되는 듯한 그 빛은 딜지가 오두막집 문을 열고 나오자 바늘처럼 비스듬히 살갗에 와 닿았다. 그것은 수증기라기보다는 미처 응결되지 않은 묽은 기름과 같은 성질의 물질로 응결되었다. 그녀는 터번처럼 천을 두른 머리 위에 뻣뻣한 검은색 밀짚모자를 쓰고 있었다. 보라색 실크 드레스 위에 걸친 밤색 벨벳 케이프의 가장자리가 너덜너덜했으며 모피는 특색이 없었다. 그녀는 잠시 문간에 서서 홀쭉하고 주름살이 자글자글한 얼굴을 쳐들고 손바닥이 생선 뱃가죽에 허옇고 수척한 손을 내밀어 날씨를 살폈다. 그리고 케이프를 옆으로 젖히고 드레스의 가슴께를 살펴보았다.           (P351)  

   

비는 다시 오지 않았다 바람이 남동쪽에서 불어왔다. 구름이 밀려나면서 하늘에 군데군데 파란 부분들이 드러났다. 마을의 나무숲과 지붕과 첨탑 너머의 산마루에 햇빛이 한 조각 옅은 천조각처럼 걸쳐 있다가 이동하는 구름에 가려 없어졌다. 종소리가 대기에 실려왔다. 그러자 마치 그게 신호이기라도 한 듯 다른 종들이 그 소리를 뒤쫓아 반복해 울렸다.        (P378)   

  

그는 차에 올라 시동을 걸었다. “다른 생각을 해야지.” 그는 그렇게 말하고 로레인 생각을 했다. 그녀와 한 침대에 있는 상상을 했다. 그런데 상상 속의 그는 그녀의 옆에 가만히 누워 그녀에게 도와달라고 간청할 뿐이었다. 그러자 그는 다시 생각을 바꿔 돈 생각을 했다. 여자에게, 어린 여자에게 허를 찔린 생각을 했다. 도둑질한 게 남자라는 생각을 할 수만 있다면 얼마나 좋을까, 놓쳐버린 일자리에 대한 보상이 되어줄 그것을, 상당한 노력을 기울이고 위험 부담을 안으면서 획득한 그것을 도둑맞았다는 것은, 놓쳐버린 일자리 그 자체의 상징에게, 설상가상으로 어린 잡년에게, 그것을 도둑맞았다는 것은 정말이지 견딜 수 없었다. 그는 끊임없이 들어오는 바람을 막느라 상의 한쪽으로 얼굴을 가렸다.

그는 이제 서로 적대하는 운명과 의지의 세력이 돌이킬 수 없는 합류점을 향해 동시에 속속 다가가는 것이 보였다. 그는 교활해졌다. 실수를 저지르면 안 돼. 그는 혼잣말했다. 틀림없이 길은 하나밖에 없을 것이다. 딴 길은 없을 것이다. 그는 그 길을 찾아야 한다. 그들은 그를 금방 알아보겠지만 그로서는 남자가 빨간색 넥타이를 메고 있지 않은 이상, 그가 먼저 퀜틴을 발견하는 요행에 의지할 수밖에 없었다. 그 빨간색 넥타이에 의존해야 한다는 사실이 임박한 재난의 결정인 듯했다. 그 냄새가 나는 것 같았다. 욱신거리는 두통보다 더 뚜렷하게 느껴졌다.             (P403-404)     


일순간 벤은 전적인 단절감에 휩싸이며 울부짖었다. 울부짖음에 울부짖음이 더해지며 그의 목소리는 더욱 커졌다. 숨을 쉴 틈도 두지 않았다. 거기에는 경악 이상의 감정이 담겨 있었다. 그것은 공포였다. 충격이었다. 눈이 없고 혀가 없는 고통이었다. 그것은 오로지 소리였다. 러스터의 눈이 일순간 돌아가며 흰자위가 희번덕였다. “하나님 맙소사. 조용히 해! 조용! 하나님 맙소사!” 그는 다시 휙 돌아보고는 퀴니를 갈겼다. 회초리가 부러졌다. 그러자 그는 그것을 버렸다. 벤의 목소리가 점차 클라이맥스를 향해 커지고 있는 가운데 제이슨이 껑충껑충 뛰며 광장을 가로질러 와 마차 계단에 올랐다. 러스터는 말고삐를 잡아올리며 앞으로 몸을 구부렸다.

제이슨은 손등으로 러스터를 후려갈기며 거칠게 옆으로 밀어내고 고삐를 잡았다. 그리고 퀴니를 반대 방향으로 돌리려고 고삐를 톱질하듯 잡아당기며 겹쳐 쥔 고삐로 퀴니의 엉덩이를 내리쳤다. 벤이 고통으로 거칠게 포효하는 소리에 휩싸인 가운데 제이슨은 고삐를 세게 내리치고 또 내리쳐 기념비 오른쪽으로 가도록 퀴니를 빙 돌려놓았다. 그런 다음 주먹으로 머리를 갈겼다.

“너 벤지가 있는데 왼쪽으로 돌 만큼 머리가 안 돌아가냐?” 그가 말했다. 그리고 뒤로 손을 뻗어 벤을 때렸다. 꽃줄기가 도로 부러졌다. “닥쳐!” 그가 말했다. “닥치란 말이야!” 그는 고삐를 홱 잡아당기고 마차에서 뛰어내렸다. “너 당장 벤지 집으로 데려가. 너 한 번만 더 벤지를 데리고 집 밖에 나오면 나한테 죽는다!”

“네!” 러스터가 말했다. 그리고 고삐를 잡아 끄트머리로 퀴니를 내리쳤다. “이랴! 이랴, 그렇지 벤지! 제발 좀!”

벤이 목소리가 포효하고 또 포효했다. 퀴니가 다시 움직였다. 말발굽 소리가 다시 일정해지기 시작했다. 벤이 금방 조용해졌다. 러스터는 어깨 너머로 뒤를 홱 돌아보고는 계속 마차를 몰았다. 줄기가 부러진 꽃이 벤의 손 위에 축 늘어져 있었다. 그의 눈은 텅 비었고 파랗고 다시 평온했다. 기념비 돌출부의 가장자리 테와 전면이 다시금 왼쪽에서 오른쪽으로 매끄럽게 흘렀으며 기둥과 나무, 창문과 입구와 간판이 모두 제자리를 찾았다.             (P419-42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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