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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노용헌 Aug 26. 2024

장 꼭또의 <앙팡 떼리블>

영화 <앙팡테리블Les enfants terribles>  1950년

소설 <앙팡 떼리블>은 상식적인 도덕관념과 기성세대의 질서를 전면적으로 거부하며 자신들만의 독특한 세계를 만들어내는 10대의 두 남매를 둘러싼 짧고 강렬한 이야기이자 소설로 쓴 시이며, 장 꼭또의 예술관을 집약한 작품이다. 이 작품은 동성애, 근친상간, 마약, 권총자살 등 사회적 규범에 반하는 내용을 담으면서도, 그것에 몰입하는 아이들의 관점을 미학화하며 절대적 순수의 세계를 구현했다고 평가받는다. 이 작품 이후, <앙팡 떼리블>은 젊지만 무시무시한 힘을 가진 이, 즉 ‘무서운 신예’를 뜻하는 관용구로 널리 자리 잡았다.

     

그러나 하루에 두 번, 오전 10시 반과 오후 4시가 되면, 한바탕 소란이 그 고요를 깨뜨려놓는다. 암스떼르담 가 72의 2번지 맞은편에 있는 꽁도르세 고등학교 부속중학교의 교문이 열리는 때가 그때인데, 학생들이 몽띠에 주택단지를 자신들의 본부로 정해놓았기 때문이다. 거기서 그들의 그레브 광장이다. 그곳은 중세 시대의 광장 같은 곳으로, 연애와 놀이의 장소이자 기적의 안뜰이고, 우표와 구슬 거래가 이루어지는 장터이며, 판관들이 죄수들을 심판하고 처형하는 살벌한 장소이자, 교실에서 실행에 옮겨지면 그 치밀한 준비에 선생들도 놀라고 마는 신입생 신고식이 오래전부터 미리 모의되는 장소이기도 하다. 5학년들의 혈기가 정말 대단하기 때문이다. 내년에 4학년이 되면 그들은 꼬마르땡 가로 등교하면서 암스떼르담 가를 우습게 여길 것이고, 제법 한몫을 하게 될 것이고, 배낭(메는 가방 말이다) 대신에 네모난 천과 띠로 묶은 책 네권을 들고 다닐 것이다.              (P10-11)     


“그러나 5학년 아이들의 경우에는 이제 막 깨어나기 시작하는 그 힘이 아직은 유년의 불가해한 충동들을 이기지 못한다. 동물적이면서도 식물적인 충동들, 우리의 뇌리에는 그것들이 몇몇 고통에 대한 기억 이상으로 남아 있지 않고 또 어른들이 다가가면 아이들은 입을 다물어버리기 때문에, 그 구체적인 드러남의 현장을 목격하기가 어려운 충동들. 아이들은 입을 다물고, 시침 떼며 딴청을 부린다. 그 뛰어난 배우들은 대뜸 짐승처럼 털을 곤두세우거나 화초처럼 공손하고 상냥한 태도를 꾸밀 줄 알아서, 자기네들의 은밀한 종교의식을 절대로 노출시키지 않는다.” (P11)   

  

“그는 다르즐로를 찾고 있었다. 그는 다르즐로를 좋아했다.

사랑이 뭔지 알기도 전의 사랑이었기 때문에, 그 애정은 아이를 더한층 번민하게 만들었다. 그것은 치료 수단이 전혀 없는, 모호하고도 강력한 병이었고, 성별도 목적도 없는 순결한 욕망이었다.” (P14)     

아름다움의 특권은 엄청나다. 아름다움은 미처 그것을 인지하지 못하는 사람들에게도 영향을 미친다. 

선생님들은 다르즐로를 좋아했다. 학감은 이 이해하기 힘든 사건 때문에 아주 곤혹스러웠다. 

쓰러진 학생은 수위실로 옮겨졌고, 사람 좋은 여자 수위가 아이를 씻기고 제정신이 들게 하려고 애를 썼다. 

다르즐로는 출입문께에 서 있었다. 호기심 많은 아이들이 문 뒤로 몰려들었다. 제라르는 울면서 친구의 손을 잡고 있었다. 

“무슨 일인지 말해보게. 다르즐로.” 학감이 말했다. 

“말씀드릴 게 아무것도 없습니다. 선생님, 눈싸움을 하고 있었거든요. 제가 눈덩이 하나를 쟤한테 던졌어요. 아주 단단한 눈덩이였나봐요. 그게 저 친구 가슴 한복판에 맞았는데, ‘아!’ 하고 비명을 지르면서 그냥 그렇게 쓰러졌어요. 처음에 나는 저 친구가 다른 눈덩이에 맞아서 코피가 나는 건 줄 알았어요.”                (P16-17)      

제라르는 혼잣말을 되풀이했다. “뽈이 죽어, 뽈은 죽을 거야.” 그렇지만 그 말을 믿지는 않았다. 그에게 뽈의 그 죽음은 눈 위에서의 여행, 계속 이어질 것 같은 어떤 꿈의 자연스러운 연속처럼 보였다. 왜냐하면 뽈이 다르즐로를 좋아하듯이 제라르는 뽈을 좋아했지만, 제라르의 눈에 비친 뽈의 매력은 그의 나약함이었기 때문이다. 뽈의 시선이 오로지 다르즐로라는 불꽃에만 꽂혀 있었기 때문에, 제라르는 뽈이 그 불꽃에 타서 화상을 입지 않도록 강하고 정의로운 자신이 뽈을 지켜보고, 살피고, 보호해야겠다고 생각했다. 그런데 아치 밑에서는 얼마나 어리석었던가! 뽈이 다르즐로를 찾았을 때 제라르는 무관심한 태도로 뽈을 놀래주고 싶었고, 뽈을 싸움터로 이끈 것과 똑같은 감정 때문에 뽈을 따라가지 않았다. 구경꾼들을 한발짝 물러나 있게 만드는 그런 위태로운 자세로 뽈이 피를 흘리며 쓰러지는 것을 제라르는 멀리서 보았다. 자기가 가까이 가면 다르즐로와 그의 무리가 사람들한테 알리지 못하게 할 거라는 생각에, 제라르는 도와줄 사람을 찾아 뛰었다.                 (P21)     

“뽈은 자고 있었다. 엘리자베뜨는 그의 숨소리를 들으며 그를 지그시 바라보았다. 그녀는 격한 열정에 사로잡혀서, 사랑스러워 죽겠다는 표정으로 그를 어루만졌다. 잠자는 환자를 내가 성가시게 하고 있는 게 아니야. 살펴보고 있는 거지. 환자의 눈꺼풀 밑에 엷은 보라색 반점들이 보이고, 부풀어오른 윗입술이 아랫입술 위로 삐져나와 있는 것이 보인다. 그녀는 자기 귀를 환자의 천진난만한 팔에 갖다 댄다. 어찌나 요란한 소리가 들리던지! 엘리자베뜨가 자기 왼쪽 귀를 막는다. 자신한테서 나는 소리가 뽈의 소리에 더해진다. 그녀는 불안해진다. 요란한 소리가 더 커지는 것 같다. 이 소리가 더 커지면 죽을 거야.” (P36)     


그날 아침, 다르즐로는 교장실로 불려갔다. 교장은 학감이 했던 취조를 다시 시작하려고 했다. 

짜증이 난 다르즐로가 “됐어요. 됐어!” 라는 식으로 아주 무례하게 대꾸하는 바람에 교장이 의자에서 벌떡 일어나 탁자 위로 주먹을 휘둘러 때리려는 시늉을 했다. 그러자 다르즐로가 윗옷에서 후추통 하나를 꺼내 내용물을 교장의 얼굴에 정통으로 뿌려버렸다. 

너무나 끔찍하고 즉각적인 결과 앞에서 겁이 난 다르즐로는 마치 열린 수문을 통해 거칠게 밀려 나오는 물줄기를 보고 반사적으로 방어 동작을 취하는 사람처럼 의자 위로 기어올라갔다. 그 위에서 다르즐로는 앞 못 보는 한 노인이 셔츠 깃을 쥐어뜯고 탁자 위에서 뒹굴며, 광기에 사로잡힌 사람처럼 울부짖는 광경을 내려다 보았다. 전날 눈덩이를 던졌을 때처럼 어리둥절한 표정으로 의자 위에 올라앉아 있는 다르즐로와 교장의 광기가 어우러진 장면 앞에서, 비명소리를 듣고 달려온 학감이 붙박인 듯 입구에 멈춰 섰다. 

학교에서는 사형제도가 없었기에 다르즐로는 퇴학을 당했고, 교장은 의무실로 옮겨졌다. 다르즐로는 누구와도 악수하지 않았고, 뾰로통한 표정으로 머리를 꼿꼿이 쳐든 채 회랑을 가로질러갔다.                  (P41-42)     

어머니의 갑작스러운 죽음이 사나운 폭풍우를 잠시 멎게 했다. 그들은 어머니를 사랑했고, 어머니를 함부로 대한 것은 어머니가 불멸의 존재라고 생각했기 때문이었다. 자기들이 어머니의 죽음에 책임이 있다고 생각하는 바람에 상황은 더 심각해졌다. 어느날 저녁 처음으로 침대에서 일어난 뽈과 누이가 방에서 다투고 있을 때, 두 사람은 알지도 못하는 사이에 어머니가 돌아가신 것이었다. 

간병인은 주방에 있었다. 언쟁이 싸움으로 번지자 양볼이 시뻘겋게 달아오른 누이가 환자인 어머니의 안락의자 옆으로 몸을 피했다가, 두 눈과 입이 휑하게 벌어진 채로 자기를 바라보고 있는 미지의 커다란 여인 하나와 비극적으로 조우했다. 

죽음이 즉흥적으로 연출하는, 오로지 죽음에만 속하는 자세 중 하나가 사체의 뻣뻣한 두 팔과 안락의자 위에서 굳어버린 손가락들에 고스란히 보존되어 있었다. 의사는 그런 갑작스러운 사태를 예견한 바 있다. 자기들끼리 있는 상황에서 아이들은 뭘 어떻게 해야 할지 전혀 몰랐다. 딱딱하게 화석화된 그 비명 소리, 살아 있는 사람을 대체해버린 그 마네킹, 자기들은 모르는 사람인 그 분노한 볼떼르를 그저 사색이 되어 바라볼 뿐이었다.               (P48-49)     

병이 재발하여 악화된 뽈의 상태는 오래갔고 그를 위험한 상황에 빠뜨렸다. 간병인인 마리에뜨는 성심껏 자기 할 일을 했다. 의사는 화를 냈다. 그는 환자의 안정과 휴식, 영양 보충을 원했다. 그는 집에 들러서 지시를 내리고 필요한 만큼의 돈을 주었으며, 다시 와서 지시한 대로 되었는지 확인했다. 

처음에는 사납고 공격적이었던 엘리자베뜨도 결국에는 마리에뜨의 크고 붉은 얼굴, 잿빛 곱슬머리, 그녀의 헌신적인 태도에 지고 말았다. 변함없고 한결같은 헌신의 태도, 브르따뉴에 사는 손자를 사랑하는, 브르따뉴 출신의 그 배운 것 없는 할머니는 어린아이들만의 수수께끼 기호들을 해독할 줄 알았다.               (P51)  

   

“한번 더 강조하지만, 그 무대의 어떤 배우도, 심지어 관객 역할을 하는 배우조차도, 배역을 연기하고 있다는 의식은 전혀 없었다. 그들의 연극이 보여주는 영원한 젊음은 바로 그런 원초적 무의식 상태에서 비롯되는 것이었다. 본인들은 그런 줄도 모른 채, 그들의 연극 무대(달리 말하면 그들의 방)는 신화의 가장자리에 정박하여 흔들거렸다.” (P69) 

    

이성적인 사람들이라면 아연실색하고 말 그런 가정(家庭)들, 그런 삶들이 있다. 기껏해야 2주일을 넘길 수 없을 것 같은 무질서가 여러해 동안 지속될 수 있다는 사실을 그들은 이해하지 못할 것이다. 그런데 예상과는 전혀 딴판으로, 그런 문제적인 가정들, 문제적인 삶들도 온전하게, 빈번하게, 비상식적으로 지속된다. 그럼에도 이성이 틀리지 않는다고 말할 수 있는 것은, 어쩔 수 없는 상황의 힘이, 그것도 힘이라면, 서둘러 그런 삶들을 전락을 향해 이끌어가기 때문이다. 

독특하고 별난 사람들과 그들의 반사회적인 행동은 그들을 파문하는 다원적인 세계의 매력이다. 사람들은 그 가볍고 비극적인 영혼들이 호흡하는 태풍의 불어나는 가속도 때문에 불안해한다. 그 시작은 어린아이들의 유치한 짓거리이고, 처음에는 그저 놀이로만 보인다. 

그렇게 몽마르트르 가에서는, 절대로 약해지지 않는 일정한 강도의 리듬에 실려 3년이 흘러갔다. 기질적으로 유년에 적합하게 타고난 엘리자베뜨와 뽈은 계속해서 마치 두 개의 쌍둥이 요람에 타고 있는 것처럼 살았다. 제라르는 엘리자베뜨를 좋아했다. 엘리자베뜨와 뽈은 서로를 사랑했고 서로를 괴롭혔다. 2주마다 한밤중의 격한 언쟁이 있은 뒷면 엘리자베뜨는 가방을 꾸렸고, 호텔에 가서 살겠노라고 통고했다.               (P79-80)     

“한결같이 난폭한 밤들, 한결같이 답답하고 무거운 아침들, 두 남매가 표류물이 되고 백주의 두더지 신세가 되는 한결같이 긴 오후들이 지나갔다. 어쩌다가 엘리자베뜨와 제라르가 함께 외출하는 때가 있었다. 뽈은 자기만의 즐거움을 찾으러 갔다. 그러나 그들이 보고 듣는 것은 자기 자신만의 것이 아니었다. 엄격한 규칙의 종복들인 그들은 자기들이 보고 들은 것들을 방으로 가져와서 그곳에서 꿀로 변화시켰다.” (P80)   

  

제라르가 엘리자베뜨를 그 여성 디자이너에게 데려갔고, 디자이너는 그녀의 대단한 미모에 깜짝 놀랐다. 불행히도 판매직은 여러 개의 언어를 알아야 했다. 디자이너는 엘리자베뜨를 모델로밖에는 채용할 수 없었다. 아가뜨라는 고아 소녀가 이미 모델로 있는데, 그녀에게 엘리자베뜨를 맡기면 엘리자베뜨 입장에서는 새로운 세계에 대해 아무것도 두려워할 필요가 없을 거라고 했다. 

판매원? 모델? 엘리자베뜨는 아무래도 좋았다. 오히려 모델 일을 해보라는 제안은 처음으로 무대 위에 설 기회를 그녀에게 주는 것이었다. 계약이 이루어졌다. 

그 일의 성사는 아주 이상한 결과도 가져왔다. 

‘뽈이 독 먹은 사람처럼 넋이 나갈 거야.’ 그녀가 예상했다.            (P83-84) 

    

제라르를 뽈로부터 엘리자베뜨에게로 이끌었던 메커니즘이 아가뜨를 엘리자베뜨에게서 뽈로 이끌었다. 아주 이해하기 불가능한 사례는 아니었다. 뽈은 아가뜨가 있으면 마음의 동요를 느꼈다. 분석에는 거의 젬병이어서, 그는 그 고아 소녀를 그저 자기 마음에 드는 좋은 것들의 목록에 올려놓았다. 

그런데 사실은 그가 다르즐로를 향해 쌓아올렸던 모호한 동경의 덩어리들을 자기들 모르게 아가뜨 쪽으로 옮겨놓았던 것이다.                 (P87)    

 

“그녀는 살아 있었고, 숨을 쉬었다. 아무것도 그녀를 불안하게 하지 않았고, 그녀는 친구들이 혹시라도 마약에 손을 댈까봐 불안에 떤 적도 전혀 없었다. 그들은 질투라는 천연 마약의 효과 아래 움직였고, 그들로서는 마약을 하는 것이 흰색 위에 흰색을 칠하고 검은색 위에 검은색을 칠하는 것처럼 무의미한 일이었기 때문이다.” (P92)     


그 방은 식당이나 계단을 깜박했음을 뒤늦게 깨달은 어느 건축가의 아주 엉뚱한 계산 착오의 결과물 같았다. 

미까엘은 그 집을 개축한 적이 있었지만, 언제나 다다르게 되는 막다른 골목 같은 그 문제를 해결하지는 못했다. 그러나 미까엘 같은 사람의 집에서 계산 착오는 곧 생명의 출현이었고, 기계장치가 인간화되면서 자리를 양보하는 순간이었다. 생기라곤 거의 없는 그 집에서 그 사점(死點)은 생명이 기어코 망명해 있는 장소였다. 무자비한 양식(樣式)에 내몰려, 시멘트와 철골 덩어리에 내몰려, 생명은 아무것이나 몸에 걸치고 달아나는 전락한 공주들의 외양을 하고 그 휑뎅그렁한 구석 자리에 숨어 있었다. 

그 저택에 감탄한 사람들은 이렇게 말하곤 했다. “더이상 손댈 데가 없어. 전혀, 아무것도, 억만장자는 어쨌든 뭔가 달라.” 그런데 뉴욕에 매혹된 사람들, 그래서 그 방을 우습게 여겼을 사람들도 그 방이 얼마나 미국적인지는 짐작하지 못했다. (미까엘도 마찬가지였다.)   (P111~112)     

그는 작업실을 샅샅이 살폈고, 다시 몸을 일으켰고, 서성거렸고, 칸막이들을 둘둘 말아 안락의자 하나를 둘러쌌고, 안락의자에 누워 두 발을 다른 의자에 얹었다. 이윽고 흡족한 마음으로 그는 떠나려고 시도했다. 그러나 등장인물은 내버려둔 채, 무대가 움직이기 시작했다. 

그는 고통스러웠다. 자존심 때문에 고통스러웠다. 다르즐로의 분신(分身)에 대한 그의 복수는 끔찍한 실패로 끝났다. 아가뜨가 그를 지배했다. 그리고 자기가 아가뜨를 사랑한다는 것, 그녀가 부드러움으로 자기를 지배하고 있다는 것, 그냥 자기가 져야 한다는 사실을 납득하는 대신에, 그는 머리를 꼿꼿이 쳐들었고, 저항했고, 자신의 사탄이자 악마적인 숙명이라고 여겨지는 것과 맞서 싸웠다.                    (P115)   

       

뽈은 입을 다물었고, 믿기 어려운 그 새로운 사실이 주는 쓰라린 고통을 감내했다. 엘리자베뜨가 자신의 주장을 펼쳤다. 뽈, 너는 제 정신이 아니다! 아가뜨는 사랑스럽고 단순한 여자고, 제라르는 선량한 남자다. 그 둘은 서로에게 딱 맞는다. 제라르의 아저씨는 늙었다. 제라르는 부자가 되어 독립할 것이고, 아가뜨와 결혼하여 평범한 가정을 이룰 것이다. 두 사람의 행운 앞에는 아무런 장애도 없다. 그들을 가로막는 것, 비극을 초래하는 것, 아가뜨를 혼란스럽게 만드는 것, 제라르를 절망하게 만드는 것, 두 사람의 장래를 망치는 것은 잔인하고 범죄적인, 그렇다. 범죄적인 일이다. 뽈, 너는 그러지 못할 것이다. 너의 행동은 일시적 기분에 따른 것이다. 잘 생각해보면, 일시적 기분으로 두 사람이 서로 주고받는 사랑을 이길 수는 없다는 걸 깨닫게 될 것이다. 

그녀는 한시간에 걸쳐 말을 하고 또 말을 했고, 어느 쪽이 올바른 선택인지 역설했다. 그녀는 흥분했고, 자신의 변론에 열중했다. 그녀는 흐느껴 울었다. 뽈은 고개를 떨어뜨린 채, 그녀의 말에 수긍했고, 그녀의 손아귀에 자기를 내맡겨버렸다.                (P128-129)     


그녀는 그들 각자에 대해서는 믿음을 가지고 있었다. 그들은 신중하기 때문에, 자기가 좋지 않게 생각하거나 악의에서 비롯된 것으로 간주할 수도 있는 일들에 대해 서로 의견을 교환하는 일 따위는 없을 거라고 그녀는 생각했다. 어떤 악의? 무엇을 위한 악의? 어떤 동기에서 비롯된 악의? 그렇게 자문해보았지만 아무런 해답도 찾을 수 없자 엘리자베뜨는 마음이 놓였다. 그녀는 그 불쌍한 친구들을 사랑했다. 그녀가 그들을 자신의 희생자로 만든 것도 호의와 사랑 때문이었다. 그녀는 그들을 보살폈고, 도와주었고, 장차 그들에게도 증명될 골치 아픈 상황으로부터 본인들의 의사와는 관계없이 그들을 빠져나오게 해주었다. 그 힘든 일을 해내느라 그녀는 상당히 심적 고통을 댓가로 치렀다. 그래야만 했다. 그럴 수밖에 없었다. 

‘그럴 수밖에 없었어.’ 마치 위험한 외과 수술 이야기라도 하듯, 엘리자베뜨는 그렇게 마음속으로 되뇌었다.  (P136)     

기진한 뽈이 고개를 옆으로 떨구었다. 엘리자베뜨는 끝났다고 생각했고, 권총의 총신을 자기 관자놀이에 갖다 대고 방아쇠를 당겼다. 쓰러지는 그녀의 몸에 깔려서 칸막이 하나가 굉음을 내며 함께 쓰러졌다. 그와 동시에, 눈 덮인 창문의 희끄무레한 빛과 폭격당한 도시의 내밀한 상처가 성곽 안에 생경하게 모습을 드러냈고, 그 비밀의 방을 관객들 앞에 펼쳐진 하나의 극장으로 바꾸어놓았다. 

뽈은 창문 뒤에 있는 그 관객들의 모습을 알아보았다. 

공포에 짓눌린 아가뜨가 아무 말도 못한 채 엘리자베뜨의 사체에서 흘러나오는 피를 쳐다보고 있는 동안, 뽈은 창문 밖에서 서리와 얼음이 뒤범벅된 좁은 도랑에 몸을 웅크린 채 눈싸움하는 아이들의 코와 볼과 손을 알아보았다. 그는 얼굴들, 짧은 외투들, 모직 목도리들을 알아보았다. 그는 다르즐로를 찾았다. 다르즐로만은 식별이 되지 않았다. 다르즐로의 몸짓, 그의 엄청나게 큰 동작만이 보였다. 

“뽈! 뽈! 도와주세요!”

두려움에 떨며, 아가뜨가 그를 들여다보았다.

그런데 그녀는 무엇을 원하는가? 그녀는 무엇을 바라는가? 뽈의 눈빛이 꺼져가고 있다. 실이 끊어지고, 이윽고 날아가버린 그 방에서 이제 남은 것이라곤 악취와 피신해 있는 작은 여인 하나, 작아지고, 멀어지고, 사라지는 한 여인밖에 없다.

쌩끌루에서, 1929년 3월.                          (P157-15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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