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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노용헌 Sep 08. 2024

잡문-사진 단상

[8화 의자]

“인간존재에 있어서 존재한다는 것은, ‘거기에-있는(être-là)’ 일이다. 다시 말하면 ‘거기 그 의자 위에’ 존재하는 일이고, ‘거기 그 탁자 앞에’ 존재하는 일이며, ‘거기에, 이 산꼭대기에, 이러이러한 크기로, 이러이러한 방향 따위로’ 존재하는 일이다.” 

-존재와 무, 사르트르       

보도파트 전공 교수 모집에 순수사진(fine art)을 전공한 교수가 유력하다는 것이었다. “이게 사실이야, 말이 돼, 하여간 낙하산으로 낙점되어 있다고 하니, 대책이 필요할 듯 싶어.” 학생회 활동을 하던 인철은 분노를 토하며 말했다. 학생들은 회의를 급히 소집했고, 안성캠퍼스의 부총장 면담이라도 진행해서, 학생들의 의견을 피력해야겠다고 했다. 그 후 부총장 면담은 성사되었다. 사진학과 학생대표로 6명은 부총장실에 면담을 했다. “Y교수는 보도사진 전임 교수로는 적합하지 않습니다. 저희는 보도 사진을 전공한 교수였으면 합니다.”하고, 인철은 말했다. 부총장은 원형 테이블에 학생들을 안내했고, 6명의 학생들은 의자에 앉아 학생들의 의견을 각각 이야기했다. J 총장은 담담히 듣고만 있었다. 그러고 나서는 학생들의 의견은 알겠다는 표정을 지으며, 별다른 말은 없었다. 어떤 해결책이 보이지 않는 불확실한 상태로, 면담은 조용히 끝났다. 이후 며칠이 흘렀는데, 결국 Y교수가 지도교수로 오게 되었다. 학생들의 의견은 무시당한 채. 인철은 Y교수의 수업을 보이콧 하자고 의견을 내었다. 학생들이 수업을 모두 참석하지 않으면 Y교수의 강의는 자연히 폐강될 것이라고 말이다. 과 사무실내 모퉁이 벽에는 대자보를 붙였다. Y교수의 강의에 대한 항의 대자보였다. 학생회 간부들 모두 개별적으로 학생들을 만나 이유를 설명하며, 수업을 혹시라도 들어가지 말라고 무언의 압박을 했다. 그러나 막상 수업이 시작되던 날, 예상을 깨고 한명이 수업에 참여하기 위해, 강의실에 들어갔다. 강의는 폐강되지 않았고, Y교수의 보도사진 전임교수 자리도 변동 없이 굳혀졌다. 허탈하기만 했다. 어쨌든 보도 전공 학생들은 Y교수의 수업을 들어야만 졸업을 할 수 있게 되었다. 부총장 면담을 한 6명의 명단은 Y교수에게 전달되었는지 수업을 들어도, 인철은 괘씸죄로  F학점을 받았다. “제기랄!” “인생이 꼬이는 것 같네!” 보도사진 전임교수에 대한 사건으로 대자보를 과내 홍보게시판에 붙인 것은 이번만은 아니었다. 두 번 과내 문제로 대자보를 썼는데, 이전에는 과내 폭력문제에 관한 것이었다. 매번 신입생환영식의 고압적인 사발식이나, 체육대회 강제 참석에 대한 A스튜디오 집합과 함께 선배들이 후배들에게 강해지는 빳다 행위등, 군대 문화적이고, 폭력적인 문제에 대한 항의에서였다. “안녕들 하십니까?”라고 대자보 문구들은 “안녕치 못했다.” 소위 지성인이고 성인으로서 이해할 수 없는 현실, 전혀 바뀌지 않은 현실에 대한 항의였고 외침이었다. 그런데 이러한 목소리에 귀 기울이는 사람은 도대체 몇 명이 될지 가늠이 되지 않는 현실이다. 10년이 지나고 Y교수의 일은 잊혀 졌고, 간간이 들려오는 소식에는 그가 미투(#MeToo)로 교내 성평등위원회의 조사를 받고 있다는 뉴스였다. 학생 성폭력과 연구비 횡령 의혹이 제기돼 중앙대 총학생회와 총학생회 산하 성평등위원회가 해당 교수의 파면을 촉구했다는 뉴스보도였다. 조사위원회는 최근까지 피해학생 3명과 참고인 10여명을 조사하고 있다고 했다. 피해학생들은 2000년대 후반부터 최근까지 교수 연구실, MT장소 등에서 성추행을 당했다고 진술했다. 학내 인사위원회는 Y교수에 대한 직위해제 여부를 논의한다고 했다. 그 후 그는 파직(罷職)당했다.

     

의자는 누군가의 자리이다. 누군가에게 쉼을 주기도 하고, 누군가에게는 위로를 준다. “의자 빼” 책상이나 의자를 한 사람이 가지는 공간이라면, 그 사람의 공간을 박탈한 셈이다. 부총장실에 있었던 위압적인 의자도 있고, 강의실에 있었던 딱딱한 의자도 있고, 편안하게 피로를 풀어줄 의자도 있다. 푹신푹신한 의자 보다는 딱딱한 의자를 커피숍 매장에 두는 것도 손님들(고객)이 오래 머물지 못하게 하는 매장 점주의 속셈이 있을 것이다. 연대의 의미인 소녀상의 의자도 있고, 예술작품이 된 의자도 있다. 의자를 떠 올릴 때 우리는 무엇을 떠올리는가? 

조셉 코수스(Joseph Kosuth)의 “One and Three Chairs (1965)” 작품은 개념미술이 언급될 때 빠지지 않은 것으로, ‘세 개의 의자’에서 ‘실제의자’, ‘의자의 사진’, ‘의자의 정의(텍스트)’는 개념미술이 어떤 것이지를 제시하는 대표적인 작품이다. 이 작업에서 그는 ‘의자란 무엇인가’ ‘미술과 재현이란 무엇인가’를 관람객에게 묻는다. 동의반복적인 개념의 다른 형태(표현)을 보여주면서 사람들에게 질문을 던지고 있는 것이다. 그는 세 개의 의자 증에서 어느 것이 진짜 의자일까? 물으며 기존의 미술에 대한 개념을 전복시켰다. “그걸 발표할 때가 20세였어요. 구겐하임에서도 퐁피두에서도 전시를 했지만 당시 나이를 비밀에 붙였지요. 젊은 사람의 작품은 진지하게 받아들이지 않으니까요. 28세 때에야 개념미술에 대한 이론화가 돼 실제 나이를 밝혔는데, 미술계가 발칵 뒤집혀졌지요. 하하.”

변기를 전시장에 옮겨놓고 예술이라고 말하는 뒤샹이나, 파이프를 그려놓고 이것은 파이프가 아니다라고 말하는 마그리트나, 의자를 갖다놓고, 그 옆에는 의자 사진과 의자에 관한 텍스트를 휘갈겨 써놓고(의자에 대한 사전적 정의) 어떤 것이 진짜 의자냐고 묻는 코수스의 질문은 딱히 이해하기 어렵다. 사막한복판에 의자 하나 덜렁 갖다 놓고 의자 가게라고 외치는 주인장 같으니 말이다. “사진속의 의자도 의자이고, 실제 놓여진 실물도 의자이고, 의자라는 글자가 쓰여 있는 글도 의자이면 진짜 의자는 무엇이오?” “그렇기 때문에 이 모두는 의자가 아니오.” “의자가 의자가 아니라면 도대체 여기 있는 의자는 무엇이오?” “여기 있는 의자는 예술작품이오.” “이런, 이게 말이요, 막걸리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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