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9화 시계]
“오후 네 시. 노량진역 1번출구로 나오면 도로변 육교로 이어지는 곳에서, 동을 뜨면 동작경찰서 기습작전이다.” “택(tactics)을 받으면 무조건 꽃병(화염병)을 던져라” 꽃병을 던지는 사람 외에 다른 사람들은 피(Paper)를 뿌렸다.
오후 세 시 삼십 분. 지하철 1호선 노량진역에서 하차(下車) 했다. 계단을 올라 출입구 게이트로 향했다. 올라가는 길에는 어쩐지 껄그러웠다. 아닌게 아니라 출입구 게이트 건너편에는 사복경찰처럼 보이는 이들이 몇몇 눈에 들어왔다. “야, 저자식 잡아라.” 검문이 행해지고 있었다. 올라가던 계단을 다시 뒤로 하고 전철 탑승구로 다시 거꾸로 갔고, 몇 명은 선로를 넘어서 뛰어 다른 편 선로로 뛰어갔다. 누군가 프락치의 소행이었는지 계획이 사전에 밀고(密告)된 것이다. 시위주동자로 수배중이었던 총학생회장이 관할 동작경찰서에 구금(拘禁)되어 있어서, 학생들은 이를 항의하기 위해 경찰서로 가던 계획이 틀어진 순간이었다. 그러나, 일부 학생중 마을버스를 타고 학원가 대로변으로 향했던 이들은 검문을 피할 수 있었고, 경찰서를 향해서 꽃병을 던지고 전단지를 뿌리는 것으로 마무리되었다. 혹시 몰라 루트를 두 군데로 잡았던 것이다.
요즘은 핸폰에 시계 기능이 있기 때문에 따로 시계를 차고 다닐 필요가 없다. 핸폰 전화기도 없던 시절, 연락은 공중전화로 전화를 걸겠지만, 전화를 받는 사람은 집이나 전화기가 있는 곳에 있어야 할 텐데 불편했던 시절에도 서로 약속장소에서 잘 만날 수 있었던 것은 손목시계가 없었다면 불가능했을 것이다. 손목시계는 태엽을 감는 아날로그(analogue) 시계보다는 카시오에서 나온 디지털(digital) 시계가 기능도 많았고 디자인도 눈길을 끌었다. 100미터 달리기 할 때도 스톱워치의 기능도 있고 말이다. 계산기 제조사였던 카시오가 손목시계를 1974년부터 만들었다고 한다. 지금도 지샥(G-SHOCK) 브랜드로 인기가 많은 손목시계이다. 시간 약속은 철저히 하는 편이다. 30분 늦게 오기 보다는 30분 먼저 갈려고 노력한다. 꼭 행사 시간 늦게 도착하는 친구들도 있지만. 약속 시간이 가까워지면 시계를 여러 번 들여다보게 된다. 한 남자가 시계를 보고 있다. 아니, 시계를 보고 있는 것인가, 저기 앞쪽을 보고 있는 것인가?
“그는 때가 되기를 기다린다. 어떤 때는 아무것도 찍지 못한다. 다른 사람들이라면 사진이 될 만한 것을 애써서 만들어냈으리라. 그는 시간이 흘러가도록 내버려 둔다. 쿠델카는 아이들, 우연, 외로움, 시간, 추억, 죽음, 믿음을 응시한다.”
-요세프 쿠델카(Josef Koudelka) 사진집 글 중에서-
쿠델카(Josef Koudelka)의 손목시계 사진이 생각난다. 쿠델카의 사진은 1968년, 체코의 봄. 비극적인 프라하의 모습을 보여준다. 도로는 한산하고, 사람들이 사라진 광장에 사진가 자신의 시계는 멈춰져 있다. 손목에 찬 시계는, 암울한 조국의 현실, 운명을 시계로 암시된다. 정지된 현실, 정지되어 버린 사진. 소설 <참을 수 없는 존재의 가벼움>에서 쿤데라(Milan Kundera)는 “역사란 개인의 삶만큼이나 가벼운, 참을 수 없을 정도로 가벼운, 깃털처럼 가벼운, 바람에 날리는 먼지처럼 가벼운, 내일이면 사라질 그 무엇처럼 가벼운 것이다.”라고 말한다. 1초, 1초, 시간은 내일이면 사라질 그 무엇이던가. 그 가벼움을 사진에 찍고 있는 데, 가볍기 보다는 다시 보니 너무 무겁다. 기억이 화석이 되어 버린 사진들, 우리들의 추억, 외로움, 시간, 슬픔들이 그 사진 속에 담겨져 있어 더욱 무거워 보인다. 사진가는 사라질 무언가를 붙잡아두려 한다. 앵커(anchor)를 던져 고정시키려던 바르트나, 부패를 막기 위해 미라화(momification)한다는 바쟁이나, 사진의 속성은 기억을, 그리고 그 시간을 정착액에 담구고, 핀에 고정시키는 나비의 몸짓은 유리관에 밀봉된다.
저녁 8시 때 아닌 알람 시계가 울렸다. 광한이가 죽었다. 어느 인적 없는 한적한 곳에서 자동차 안에서 쓸쓸히 죽어 갔다. 사인은 질식사다. 무엇이 그를 질식시켰을까. 세상의 부조리와 빡빡한 현실이 그를 질식시켰다. 등 뒤로 한 줄기 식은땀이 흐른다. 일산의 한 장례식장을 찾았다. 친구 인철이는 미리 조문을 한 모양이었다. 인철이와 함께 소주잔을 마시며 이런저런 생각을 해 본다. 무엇이 그토록 힘들게 했을까? 한때는 광고 사진계에서 잘 나갔던 것 같았는데. 잘 지내고 있었을 것이라 여겼었는데. 내가 잘 몰랐던 것 같다. 광한이의 삶을 돌이켜 보면, 군대는 전경으로 다녀왔고, 아마도 현실과 괴리감을 많이 느꼈을 듯하다. 스튜디오를 운영했고, 시대는 아날로그에서 점차 디지털로 진화하고 있었으며, 한때는 벤처기업으로 양재동에서 무리하게 사업도 벌였었다. 인터넷의 발전, 사진 한 장(10메가 내외) 전송하는 것도 시간이 오래걸려, 동영상 600메가는 더군다나 쉽지 않았고, 컬러사진 한 장 전송하기에는 CMYK 석장이 필요했으니 말이다. 97년 IMF. 국가는 부도가 났다. 광한이의 스튜디오도 부도가 났다. 카드 돌려막기도 쉽지 않았다. 겉으로 보기엔 화려해보였지만, 속으로는 그것이 다 빚이었다. 누구나 마이너스인 생활에서 살아왔다. 광고 스튜디오의 장비들이 늘어갈 때 마다 빚은 쌓여갔던 것이다. 누구나 카메라를 들고 있는 요즘, 점차 전문 기술자로서의 사진가는 필요치 않다. 사진의 대중화는 사진 시장의 거품들을 걷어내고 있었다. 그래도 그렇지, 광한이를 자살하게 만들 이유가 무엇인가. “얼마나 힘들었을까?” “얼마나 외로웠을까?” “얼마나 고통스러웠을까?” 광한이가 발견된 곳은 뒷산이었다. 스튜디오에서도 내다보이는 곳이다. 믿기지 않았다. 유서에 있던 말이 떠올랐다. “나 멀리 안 갔어. 가까운 데 있으니 빨리 찾아 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