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0화 목걸이]
나는 우리나라의 문제가 4가지가 있다고 생각했다. 노동, 농민, 도시빈민, 사회복지 문제가 있다고 생각했고, 각각 경험을 해야겠다고 여겼다. 학창시절 경험을 많이 해야겠다고 생각했고, 농활도 했고, 장애인 시설에서 봉사활동도 하고, 빈민촌의 야학도 해보았다. 89년 여름방학을 맞아 성남 상대원동에서 공활을 했다. 가톨릭 노동청년회(JOC)의 소개로 성남에 있는 도금공장에서 한달간 노동을 경험했다. 인근 허름한 월세방에 한 신부님과 둘이 자취를 하며 매일 아침 6시 공장으로 출근을 하였다. 가톨릭 노동청년회는 사람을 모집하는 공장만 알선해주고, 아르바이트가 아니라, 취업을 전제로 이력서를 고졸로 위조한 것이었다. 위장취업인 셈이다. 어쨌든 그 신부님은 샤니 빵집으로 출근하고, 나는 도금 공장으로 출근을 시작했다. 도금공장에서는 먼저 일하던 사수로부터 여러 가지 주의점들을 듣고 작업을 하였다. 금도금, 은도금, 니켈도금, 도금의 전처리와 후처리과정에서 발생하는 유독가스들, 조심하라고, 그리고 뜨거운 황산과 염산의 용액을 유의하라고 설명했다. 공업용품이나 생활용품들의 갖가지 도금을 했지만, 지금 생각해보면 금으로 도금된 팔찌들, 액세서리(accessory)들이 기억에 남는다. 목걸이 팔찌, 반지등은 여자들만의 액세서리도 아니다. 요즘은 남자들도 종종 팔찌와 목걸이를 한 사람들도 많다. 한때는 몸에 좋다는 건강팔찌로 게르마늄 팔찌나 목걸이를 한 사람들도 있고, 군대에서는 인식표로 군번줄을 착용한다.
“검은 공단 상자 속에 눈부신 다이아몬드 목걸이가 들어있는 것이 언뜻 그녀의 눈에 띄었다. 그녀의 가슴은 걷잡을 수 없이 뛰기 시작했다. 그것을 쥐는 그녀의 손은 떨리고 있었다. 그녀는 그것을 목에 걸고 자기의 모습에 스스로 황홀해하고 있었다.”
-모파상, 목걸이
욕망은 물건으로 진화되어 갔다. 모파상의 단편소설 목걸이는 마틸드의 허영심과 욕망을 잘 보여준 소설이다. 과연 마틸드의 진정한 행복은 무엇일까? 결국 가짜 목걸이를 위해서 그녀가 수년간 보냈던 고된 삶은 진정한 행복이 무엇인지에 대한 깊은 질문을 던진다. 과연 진정한 행복, 가짜 목걸이를 향한 욕망, 진실을 찾고자 하는 욕망. 그것이 퓰리처상(The Pulitzer Prizes)을 받은 유명한 사진, 케빈 카터(Kevin Carter)의 ‘수단의 굶주린 소녀’ 사진을 통해서 묻게 된다. 아이를 구했어야 한다. 사진을 찍었어야 한다는 두 가지 상충된 윤리적 의견에 대한 논란보다는 이 사진을 통해서 인간의 욕망을 생각해볼 수 있다. 특종 사진에 대한 사진기자의 욕망. 사진으로 무언가를 보여주려는 욕망. 사진에 담겨진 욕망. 인간은 아마도 욕망이 없다고 말할 수 없을 것이다. 세상의 근원에는 이런 욕망들이 서로 끊임없이 생겨났다가 사라진다. 쇼펜하우어는 "인생이란 충족되지 않는 욕망과 권태 사이를 오락가락하는 시계추와 같다."고 했다. 어쩌면 욕망은 끊임없이 재생산되고, 무한한 자기증식이다. 마시면 마실수록 갈증을 유발한다. 그러한 채워지지 않는 욕망이 케빈 카터에게는 무엇이었을까. 경계에 서있는 사진가가 자신의 사진이 과도하게 유명해지고, 그로인한 자신의 고뇌는 더 깊어졌다. 과연 나는 허상의 욕망을 찍고 있는 것이 아닌지. 잠재적인 이미지에 내재된 욕망은 시뮬라크라로 복제 재생산된다. 들뢰즈는 현실태-잠재성의 이미지로 단지 현실계의 모사로 간주하지 않는다. 이들은 끊임없이 서로에게 반작용을 하며 생산하고 소비된다고 말한다. 이미지 자체, 물자체의 세계는 존재하지 않는다. 이미지의 욕망만이 남은 시뮬라크라의 세계만 존재한다. 나와는 전혀 다른 세계, 그들의 비참한 모습은, 내게 먼 나라의 풍경이다. 더욱 비참한 장면에도 무감각해져 있다. 욕망은 더 비참한 장면들을 소비하고자 한다. 더 자극적인 것은 없냐?고.
케빈 카터는 보도사진가의 딜레마에 대한 고민을 고통스럽게 털어 놓았다. “나는 시각적으로 생각해야 한다. 나는 피로 붉게 물든 주검을 프레임에 곡 채우기 위해 줌인을 하기도 한다. 죽은 자의 얼굴은 약간 회색빛이 돈다. 나는 사진을 찍고 있는 것이다. 마음 내면의 세계에서 비명소리가 들려오기도 한다. 그러나 지금은 일을 할 시간이며 나머지 일은 (사진을 찍은) 다음에 처리해야 한다고 되뇌이곤 했다. 내가 이 일을 할 자신이 없으면 사진기자란 직업을 관두어야 했다.” 현역 최고의 보도사진가중 한명인 제임스 낙트웨이(James Nachtwey)는 카터의 이야기에 대해 이렇게 언급했다. “자신의 기분을 만족시키기 위해 이런 일을 하는 사진기자는 아무도 없다. 그 일은 계속하기가 아주 어려운 직업이다.”
‘뱅뱅클럽(Bang-Bang Club)’에서부터 함께 했던 절친한 동료인 켄 오스터브룩(Ken Oosterbroek)이 카터가 세상을 뜨기 몇 달 전 1994년 4월 18일 남아공 흑인거주지역에서 취재 중에 총격으로 사망하면서 카터는 정신적 한계에 달했다. 그의 자동차에서 다음과 같은 내용의 유서가 발견되었다.
"정말로, 정말로 죄송합니다. 저는 인생의 고통이 기쁨을 뛰어넘어, 더 이상 기쁨 따위가 없는 지점에 도달하고 말았습니다... 절망적입니다... 전화가 끊어졌습니다... 집세도 없고... 양육비... 빚 갚을 돈... 돈!!!... 저는 살육과 시체들과 분노와 고통의 기억에 쫓기고 있습니다... 굶주리거나 상처를 입은 아이들, 권총을 마구 쏘는 미친 사람, 경찰, 살인자, 처형자 등의 환상을 봅니다... 제가 그럴 대접을 받을 만 하다면 켄의 곁으로 가겠죠."
그리고 카터는 이런 말을 남겼다. “여기, 비참한 현실을 사는 아이가 있다. 그대들은 이들을 위해서 무엇을 했는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