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5화 우산]
비가 보슬보슬 내리던 날이었다. 우산을 쓰기에는 뭐하기도 하고 비는 간간이 내렸다. 용산역 CGV에서 영화시사회 및 제작표회가 있어 가던 중이었다. 전경들이 에워싸고 있었다. 용산 제4구역 도심 재개발 사업과 관련해서 철거민들이 마지막 보루인 남일당 건물 옥상에 있었다. 뭔가 심상치 않은 분위기였고, 영수는 급히 인철이에게 전화를 걸었다. “내가 영화제작발표회 가는 중인데, 아마도 여기 무슨 일이 벌어질 것 같아. 철거민이 있는 건물 주변과 인근 빌딩위에도 전경들이 있고, 전경들이 토끼몰이작전을 수행하고 있는 것 같아, 89년 동의대 사건이나, 91년 시위도중 막다른 골목으로 몰려 사망한 김귀정 열사나, 이런 것들이 연상된다. 오늘 밤이나 새벽에 큰 일이 벌어질 것 같으니, 여기 취재를 해야 할 것 같은데...” 이후 경찰의 진압에 철거민과 전철연 회원들이 저항하는 과정에서 화재가 발생해 6명이 사망하고 23명이 부상당하는 참사가 벌어졌다. 경찰은 과잉 진압을 했다는 비판을 받았지만, 아무도 기소되지 않았다. 이와 달리 철거민들은 징역형을 받았다.
12월 연말에 소백산 연화봉에 올라갔다. 새벽산행이다. 정상에서 일출 사진을 찍기 위해서였다. 야간산행이라 헤드랜턴으로 불을 비춰가며 올라갔었다. 정상에 도착한 시간은 6시. 이제 해가 뜨는 것만 기다리면 된다. 그런데 아뿔싸, 웬걸 하늘에서 눈이 엄청나게 내린다. 폭설수준이다. 해가 뜨는 것은 포기해야 한다. “멋진 살롱사진 만들기 힘들다, 에라 포기.” 산을 내려가는 길이 막막하다. 앞이 보이지 않을 정도로 눈이 엄청 쌓이다 보니, 내려가는 길 또한 보이질 않는다. 거의 기어가는 수준이 아니라 스키를 타며 내려가야 할 듯싶었다. 잘못 길을 들면 계곡으로 빠지기 십상이다. 어찌어찌 차를 세워둔 주차장까지 내려왔다. 자동차도 문제가 발생했다. 눈에 자동차는 뒤덮여 있었고, 얼어붙은 시동을 겨우 걸었는데, 체인이 없는 것이다. 도로에 아직 제설차가 제설작업을 하지 않아서 체인은 필수였다. 인근 도로변에서 급히 체인을 사고 서울로 돌아가야 했다. 사진작업은 망쳤다. 두 번째 사고는 흩날리던 돌 파편에 자동차 뒷 유리판이 박살이 났다. 뒷 유리판으로 찬 바람은 들어오고 운전은 최악이었다. 뒷 유리판을 막을 방법이 없었다. 대충 우산을 펼쳐 막아보지만 별 도움은 되지 않았다. 어쨌든 비나 눈을 막는 우산처럼, 우산은 바람을 막는데 사용되었다.
오후 6시 퇴근하고 집으로 가는 길, 시청광장에 모여 있는 사람들은 각각 손으로 만든 피켓을 들고 시위를 하고 있었다. 광우병사태에 항의하는 사람들의 집회다. 세검정에 사는 나는 광화문을 거쳐가야 한다. 그런데 집회는 수많은 사람들이 운집했었고, 전경들은 청와대 방면의 도로를 차벽으로 통제하고 있어, 집으로 가는 버스는 다니지 않았다. 골목마다 전경들은 몸으로 막고 있었고, 주민이라 말하며 집까지 한 시간을 걸어가야 했다. 에라, 사진이나 찍어야 겠다. 시작한 것이 1년이 되어버렸다. 여름에 시작한 집회는 토요일마다 열렸고, 다음해 5월 조계사에서 수배자들을 연행하는 것으로 끝날 때까지, 그리고 노무현 대통령의 장례식까지 사진을 촬영하게 되었다. 내가 겪은 광우병 시위에서는 기억나는 것들이 많다. 그전의 시위와는 다른 것들이었다. 유모차를 몰고 나온 엄마들부터 교복을 입은 중고등학생들, 예비군 군복을 입은 시민들, 각계각층의 다양한 사람들의 목소리가 있었다. 그리고 전통적 구호는 8박자 구호(폭력경찰 물러가라)가 대부분이었는데, 구호가 다양해졌다. 특히 ‘뇌송송 구멍탁’은 확실히 다른 구호였다. “아저씨들 왜 이래요.” “시민들이 보고 있어.” “국민이 뿔났다” “광우병 소고기 너나 드세요” “숨쉬지마 산소아까워” “I’m 소 핥, 너무 개념 없어” “형 왔다, 10초 준다 어청수는 굴다리로 와라!” “2MB ㅅㅂㄹㅁ 잠좀자자” 확실히 집회의 양상(문화제)은 바뀐 듯 했다. 적잖이 당황했지만 그런데 재밌었다. 불안해하면서 벌이는 시위는 아니고 신기하게도 여유로워 보였다. 이들은 모두 촛불을 들고 청와대 행진이 가로막혀, 종로로, 서대문으로 행진을 시작했다. 그러다 새벽까지 행진은 길어졌다. 당연히 나는 집에 들어가는 시간이 점점 늦어져 새벽에 들어가게 되었다. 직접 만든 손 피켓, 다양한 드레스 코드, 정말 창의적인 시위였다. 우산도 하나의 시위 용품이었다. 최루액을 막아내는 우산. 전경버스는 명박산성이 되었고, 명박산성을 넘기 위해서 어디선가 등장한 대형 스티로폼들, 스티로폼을 이용해 명박산성을 넘고자 했지만 명박산성은 기름칠을 해놓아 넘지 못하게 하고 그 너머에 전경버스로 다시 막는. 정말 희한한 대한민국이다. 창의적인 시위대의 맞대응의 방법도 진화(進化)하고 있는 것이다.
2014년 홍콩에서 시위대는 물대포와 최루액을 쏘아대는 경찰의 진압에 우산으로 맞섰다. 하지만 우산혁명은 79일간의 시위에도 불구하고 직선제 등 민주적 선거제를 관철해 내지 못했다. 최루액 시위에 우산은 유용해 보인다. 프랑스 노동법 반대 시위 당시 경찰이 쏜 최루탄을 시위대가 테니스 라켓으로 받아 쳐내는 것도 충격적인 장면이었다. 아무리 평화적이고 질서가 유지된 시위이지만 시위는 어떻게 진행될지 아무도 모른다. 그 촉발은 우연히 발생할 여지가 얼마든지 있기 때문이다. 홍콩의 우산 혁명 중 두 학생이 내세웠던 구호는 인상적이다. “희망은 인민에 있고, 개혁은 항쟁에서 시작한다.” 물대포로 직수 살수하는 것을 우산으로 막았다면... 깃발을 부여잡고 물대포를 그대로 온몸으로 맞지 않아도 될 텐데...
사울 레이터(Saul Leiter)의 빨간 우산 사진(1955)은 강렬하다. 그리고 젖은 창문 사진(1960)은 그의 대표적인 사진들이다. “빗방울이 맺힌 유리창이 나한테는 유명인을 찍은 사진보다 훨씬 흥미로워요. 빗방울은 뭔가 오묘하잖아요.” 그의 현상 인화 조수가 지쳐서 말한 적 있다. “우산은 이제 그만하세요!” 그 말에 그는 간단히 대꾸했다. “나는 우산이 정말 좋아!” 그가 촬영한 곳은 대부분이 집 근처이다. “나는 내가 사는 동네를 찍는다. 친숙한 장소에서 신비로운 일들이 일어난다고 생각한다. 늘 세상 반대편으로 가야 하는 것은 아니다.” 익숙한 장소이지만 그가 찍은 비오는 날의 풍경이나, 눈 내리는 날의 풍경은 감성적이다. 빗소리나 비의 젓은 물방울 등은 특히 감성을 자극한다. 그런 감성들을 잃어서 일까. 대부분의 도시인들은 무감각하다. 버스안에 놓고 내린 우산, 아마도 버스 안은 우산으로 넘쳐날 것이다. 제일 잃어버리기 쉬운 것이 우산 아닐까.
이젠 지나버린 이야기들이
내겐 꿈결 같지만
하얀 종이 위에 그릴 수 있는
작은 사랑이여라
잊혀져간 그날의 기억들은
지금 빗속으로 걸어가는
내겐 우산이 되리라
-잃어버린 우산, 우순실 노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