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4화 나침반]
인철이한테 며칠 전 전화가 걸려왔다. “광한이가 죽은지도 벌써 10년이 지났다, 우리도 얼굴본지 오래된 것 같고, 종로에서 함 소주나 마시게 한번 보자, 그간 어떻게 지냈는지도 궁금하고.” “그래.” “광한이가 먼저 갔고 우리 둘만 남아있는 것 같아 요즘 이런저런 생각을 많이 해본다. 너는 제일 힘들고 어려울 때 없니?” “어려울 때는 언제든지 전화해라. 목소리라도 함 듣게.” “맞아. 사랑하는 사람을 먼저 보내고 남을 때, 그때가 제일 힘들지. 며칠 전에 꿈에서 광한이 만났다. 우리가 이렇게 살다가 각자 순서대로 갈 텐데, 마지막 남은 사람들끼리라도 자주 만나자.”
서촌의 한 기획사무실에서 일할 때였다. 여름 장마철이었다. 비는 억수로 내리는 길을 장시간 운전을 하여 간 곳은 석굴암 촬영이었다. 자동차 와이퍼를 연신 움직일 정도여서, 고속도로에서 속도를 내지 못하고 야간 운전이다. 도착시간은 새벽 1시, 촬영을 준비하고 오전 6시까지는 촬영을 마쳐야 한다. 신도들이 없을 시에 잠시 문화재청에서 허가를 받아 촬영하기 때문이다. 문화재청 허가와 주지스님의 허락이 없으면 촬영할 수가 없다. 꼬박 밤을 새워 촬영하는 것이었다. 아침을 인근에서 먹고 다시 운전을 하여 해인사로 가야한다. 해인사의 팔만대장경 촬영이 예정되어 있었다. 도로폭이 좁은 88고속도로를 타고 합천까지 가는 중에 잠시 졸음운전을 했다. 중앙분리대를 너무 붙어서 운전하여 분리대를 타고 차가 뒤집힐 뻔했다. 잠시 쏟아지는 졸음을 깨기 위해 갓길 주차를 했다. 이러다 죽을지도 모르겠구나 생각이 났다. 너무 무리해서 했던 것이다. 기획사무실에는 6명이 직원이 다였고, 대표겸 실장이 있었는데, 내 역할은 아침에 출근해서 마당에 키우던 개 밥을 주는 것과, 퇴근할 때는 실장이 혼자 살기 때문에 인근에서 비디오를 빌려다 주는 것이다. 물론 비디오는 본걸 빌려다 주면 안 된다. 그리고 업무차 만나는 사람들과 함께 만나게 되면 옆에서 같이 술 상무 역할까지 한다. 6개월 쯤 지나니 뭐 이런 사람이 다 있나 싶어 회사를 때려치웠다. 같이 근무하던 동료들에게도 같이 그만두자고 했는데, 결국은 남자 3명만 동조(同調)했다. 결국 나의 인생 첫 실패담이다.
새로운 인터넷 뉴스를 만든다고 의기충천했었다. 오마이뉴스를 벤치마킹을 했지만, 새로운 시도를 해보자고 했다. 사진과 영상이 주가 되는 뉴스넷을 만들자는 것이다. 고품질의 사진으로 이야기하는 인터넷 뉴스판을 시도하자는 것이다. 물주는 D 변호사였다. 새로운 언론지형을 형성해보자고 했다. 그러나 1년도 못 되어 무참히 망했다. 원인은 수익원이 없기 때문이다. 수익을 만드는 것은 광고인데 광고 영업이 신생 언론에게는 쉽지 않은 상황이었던 것이다. 그것도 진보적인 언론사에 투자를 한다는 것이 정치적 시기와 맞물려 있기 때문이다. 여기 사진팀은 두 팀이 합쳐지게 되었다. 나는 A팀이었고, B팀이 있었는데 사진영상국으로 합쳐지는 과정이었다. B팀에 있던 C모가 팀장이 되었는데 이 친구가 사사건건 나를 테스트 했다. 한번은 탑골 공원에 가서 사진을 찍어오라고 했고, 자기가 사진을 잘 찍는지 어떤지 본다고 했다. 뭐 이런 개똥같은 놈이 다 있나, 함께 같이 일하면서 시너지를 내는 것이 아니라, 이건 완전히 나의 기를 꺾어놓으려는 수작이었다. 중대출신이라는 것이 핸디캡이었다. 여기도 별 볼일 없게구나 하고 회사를 때려치웠다. 이것이 나의 두 번째 실패담이다.
지금은 인스타에서 인스타360이라는 카메라가 나와서 손쉽게 360 사진이나 영상을 만들 수 있다. 로드뷰(road view)의 개념이 1997년부터 시작되었던 스트릿트 뷰가 이후 발전을 거듭하여 길거리 로드뷰가 되었다. 로드뷰를 제작하는 부서의 촬영팀장으로 있었다. 내가 운영하는 부원들은 모두 7명이었다. 7명이서 전국을 돌며 촬영을 했다. 촬영은 자동차운전만 잘 하면 되도록 모든 것이 시스템화되어 있다. 같은 길로만 가지 않으면 되고, 하루 9시부터 6시까지 해지기전까지 촬영하면 된다. 카메라는 니콘 DSLR에 8mm 삼양 어안렌즈를 껴서 4set가 한 조이다. 네 대의 카메라로 하루 촬영한 분량은 10만 컷정도 된다. 이후 편집작업은 스티칭, 블러링, GPS에 의한 맵핑(mapping), 서버에 올리는 과정으로 크게 네 공정이다. 그만큼 많은 인원들이 필요한 노가다 작업인 셈이다. 일요일 쉬는 날에 장비점검으로 김포에 있는 자동차 위에 설치된 리프트를 수리하러 팀원들과 갔었다. 작업을 마치고 점심시간에 식사겸 부원들과 맥주 한잔씩을 했다. 그리고 사무실로 복귀했는데, 친구였던 E대표가 업무 중에 술을 먹었다고 부원들 앞에서 질책을 하고 많이 먹은 것도 아니고 날도 더워 뭐 간단히 반주로 먹은 걸 뭐라고, 술값은 내 월급에서 까면 되지 않겠냐고 했다. 그 다음날 회사를 때려치웠다. 나의 세 번째 실패담이다. 욱하는 성질머리를 고쳐야 하는데 하면서 그리고 또 수많은 실패를 거듭했다. 불완전한 시대를 살아가는 자유인은 여전히 불안 속에서 자리를 잡지 못하고 있었다.
“광채 없는 삶의 하루하루에 있어서는 시간이 우리를 떠메고 간다. 그러나 언젠가는 우리가 이 시간을 떠메고 가야 할 때가 오게 마련이다. '내일', '나중에', '네가 출세를 하게 되면', '나이가 들면 너도 알게 돼'하며 우리는 미래를 내다보고 살고 있다. 이런 모순된 태도는 참 기가 찰 일이다. 미래란 결국 죽음에 이르는 것이니 말이다.”
-알베르 카뮈, 『시지프 신화』-
시지프스(Sisyphos)의 신화에서, 시지푸스는 하데스에서 언덕 정상에 이르면 바로 굴러 떨어지는 무거운 돌을 다시 정상까지 계속해서 밀어 올리는 벌을 받는 인간이다. 아마도 신은 인간에게 두 손에 불안과 의지를 쥐어줬다. 왼손에는 불안을, 오른손에는 의지를. 무거운 돌은 인간의 마음속에 들어 있는 불안이고, 정상까지 밀어 올리는 것은 인간의 의지이다. 인간은 불안한 돌을 치우기 위해 죽을 때까지 계속해서 불안해하면서 선택(의지)을 하게 된다. “존재하는 모든 것은 아무 이유 없이 태어나서 연약함 속에 존재를 이어가다가 우연하게 죽는다.” “인생은 B(Birth, 탄생)와 D(Death, 죽음) 사이의 C(Choice, 선택)이다.”라고 말한 사르트르(Jean-Paul Sartre)의 말처럼, 우리는 수많은 선택을 하게 된다. 결혼을 해야 할지 말아야 할지, 이 회사를 다녀야 할지 말아야 할지, 그러면 대안은 있는 가 수없이 질문하게 된다. 그리고 선택을 해야 한다. 결정장애(決定障礙)를 가졌다 할지라도. 암선고를 받은 환자가 연명치료를 해야 할지 말아야 할지도, 선택을 해야 한다.
키에르케고르는 <불안의 개념>에서 이렇게 말한다, “아담의 죄는 원죄이다. 선악과 먹은 이후로 인류는 이 원죄에서 벗어날 수 없다. 그것이 불안의 시조(始祖)이다.” “순진무구함은 무지이다. 바로 무(無)이다. 무는 불안을 낳는다. 순진무구가 동시에 불안이라는 것이다.” “정신은 불안과 관련되어 있다. 정신은 자신을 없앨 수 없다. 정신이 자신을 바깥에 정해놓고 있는 한, 정신은 자신을 잡을 수도 없다. 그는 불안으로부터 달아날 수도 없다. 그러나 진심으로 그가 불안을 사랑할 수는 없다. 순진무구함은 무지이다.” 이러한 죄의 궤변을 제거할 수 있는 것이 있다면 그것은 신앙이라고 보았다. 불안 없이 그 불안을 버릴 수 있는 용기, 이것을 할 수 있는 것은 오직 신앙뿐이라고 그는 역설한다. 그의 ‘불안’은 ‘무(無)에 대한 불안’이다. 키에르케고르가 불안이라는 개념에 매달린 것은 그의 성장과정과 어느 정도 관련이 있다. 그는 종교적으로 매우 신실하면서도 극도의 우울증에 시달리는 아버지의 성격을 그대로 물려받았다. 그리고 평생의 애인 레기네 올센을 만나 약혼했으나 지나친 불안과 우울 탓으로 결혼에 이르지 못하고 파혼했다. 그는 유신론적인 실존주의자이다.
키에르케고르와는 달리 쇼펜하우어는 의지를 더욱 부각시킨 듯싶다. <의지와 표상으로의 세계>에서 그는 이렇게 말한다. 인간은 표상 이외에 의지를 가지고 있으며, 이것으로 세계와 만난다. 우리는 세계를 ‘인식’만 하는 것이 아니라, ‘체험’하기도 하는 것이다. 우리의 판단은 논리적 사유행위에 의해서 진행되는 것이 아니라, 머리로 의식하지 못하는 심층부에서 순간적인 착상이나 결단의 형식으로 나타난다. 가령 걸어가려는 의지는 발에서 나타나고, 붙들려는 의지는 손에서, 소화를 시키려는 의지는 위장에서, 생각하려는 의지는 뇌에서 나타난다. 그렇지만 그는 인간의 의지는 무한하지만, 그것을 충족하는 데에는 많은 제약을 가지고 있다고 말한다. 욕망은 채워지지 않고, 고통은 벗어날 수 없으며, 곧바로 새로운 불행이 찾아들기 때문에 “인생은 고통이요, 이 세계는 최악의 세계”라고 본다. 인간은 고통과 권태, 고독을 피할수 없는 존재이고, 인간은 불안한 상태라는 것이다. 고해의 바다에 있는 인간이 결국은 이것을 벗어날 수 있는 방법은 해탈(解脫)을 해야한다고 말한다. 그리고 또한 “우리의 모든 고통이 끊임없는 의지의 발동에 의한 것인데, 아예 의지 자체를 억제하거나 없앰으로써 우리는 영속적인 해탈에 이를 수 있게 될 것이다”라고 말한다. 그런 열반의 경지가 과연 가능할까? 그것을 깨달을 수 있을까? 현대사회의 불안을 극복할 수 있을까? 우리는 우리 자신과 타인을 더 잘 이해할 수 있으며, 서로 다른 시각을 존중하고 이해할 수 있을까? 우리는 불안과 의지라는 두 경계에 놓여져 있다. 나침반은 어디로 향할까? 내가 지금 서 있는 곳은 어디인가?
나는 능동적 허무주의자이다. 그냥 삶을 받아들이는 수동적 허무주의자가 아니라, 나는 내 삶의 목표를 정하고, 무언가 알 수 없는 길을 설정하고, 살아왔다. 물론 실패를 거듭했지만. 나는 내 삶을 꿈만 꾸다가 실패한 강태공이다. 만약 내게 정확히 길을 알려주는 나침반이 있었더라면....
불안한 사진들을 보여주는 사진가로 나는 체코 출신 사진가, 얀 샤우덱(Jan Saudek)을 꼽는다. 그의 성장 과정이 불안의 연속이었을 것이다. 1939년 나치가 점령하자 은행원이었던 그의 아버지는 유태인이었기에 프라하 거리의 청소부로 전락했고, 전쟁이 막바지에 이르렀을 때는 강제 수용소 생활을 했다. 그의 삼촌들은 그 수용소에서 모두 살해당했다. 전쟁은 끝났지만 빈곤속에 허덕였고, 1945년에는 다시 소련에 의해 핍박받았다. 그의 사진은 음울하고, 흑백 사진이건 컬러 사진이건 간에 모두 불안한 분위기로 일관되어 있다. 음울하고 침울한 감방, 소음, 굶주림, 죽음으로 점철된 세계 속에 그는 곰팡내 나는 어두컴컴한 지하실의 분위기를 사진에서 볼 수 있다. 인간의 불안한 심리, 채워지지 않는 욕망들, 육욕과 세속성의 범주, 공격적인 동물성에서부터 괴팍한 행위들, 야누스 신의 두 얼굴과 같은 ‘인간의 이중성’, ‘두려움’, ‘인간의 정체성’, ‘불안’에 관해 우리에게 질문을 던지고 있는 것이다.
나는 줄곧 믿어왔었다.
그러한 일들 중 어느 것도 정말 내게 일어나리라고는...
그러한 기적적인 생명들이 내 주변에는 없다라고...
그러한 작은 생명들이
지금의 날에 내가 어느 누군가에게 하듯이
내 인생에 기대어 누울 거라고...
“이 모든 것이 달아나는 꿈이었을까?”
-얀 샤우덱Jan Saudek 사진展-