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7화 사다리]
알다가다 모를 예술이지만, 더더욱 이해할 수 없는 것은 삶이다. 착한 사람들이 행복해야 하는데, 대부분의 착한 사람들보다는 더 이기적이고, 위선적인 사람들, 악한 사람들이 더 잘먹고 잘사는 것처럼 보인다. 주변에 착한 사람들은 왜 이리도 병에 잘 걸리나, 질병이라는 고통까지 덤으로 주어진다. 세상은 왜 착한 사람들이 더 힘들까. 결핵, 에이즈, 암등이 그랬다면, 현대사회는 우울증, 조현병, 치매로 사람들은 고통을 받는다. 시인이나 예술가들이 많은 경우 결핵과 에이즈, 암등의 질병으로 죽었고, 그들의 경험들은 소설속 주인공들로 투영되기도 했다. 수잔 손택(Susan Sontag)은 <은유로서의 질병>을 통해 우리에게 이렇게 권유한다. “나는 병을 앓고 있는 나머지 공포에 질린 사람들을 설득해 이렇게 말해주고 싶었다. 질병은 질병일 뿐이라고, 질병은 저주도 아니며 신의 심판도 아니고 곤혹스러워 할 필요가 없다고. 별다른 '의미'를 부여하지 말라고.” 환자 자신이 질병의 병인이 아니고, 의지가 약하기 때문도 아니라고 이러한 편견에 가해진 은유로서의 해석에 반대하고 있다.
1347년 흑사병(Yersinia Pestis)이라는 전염병과 같이 많은 사람들이 감염되었다. 2019년 11월17일, 중국 우한시에서 처음 발생한 코로나(Coronavirus)라는 이해할 수 없는 전염병이 전 세계를 휩쓸었다. 사스나 메르스와는 달리 장기간 이어졌다. 2020년 1월 20일 국내 첫 코로나 확진자가 발생했다고 뉴스가 있은 이후로 감염자의 동선을 파악해서 조치를 한다고, 코로나 확진자가 들린 음식점들은 영업을 하지 못했다. 마스크가 필수적인 대안으로 전국민이 마스크를 구매하느라 수요가 급증했고, 마스크를 구하지 못할 정도였다(1인당 구매 수량도 제한했었다). 모든 시설에 ‘사회적 거리두기’를 시행하였고, 대중교통, 집회, 의료기관등 다중이용시설에 과태료를 부과하기 시작했다(2020년 11월 13일). 이중 종교 대중집회인 대구에서 신천지 사태가 발생했다. 정부는 신천지교에 대한 압수수색 및 강제 폐쇄, 모임 금지 행정명령을 발동했다. 이후 전광훈의 종교집회 또한 극우 정치집단으로 사회적 논란을 불러일으켰다. 전국 5인 이상 사적모임이 금지되었고, 모든 모임은 비대면으로 진행되었고, 실외도 사람 간 2m 거리두기를 하는 등 마스크 착용이 의무화되었다. 마스크로 인해 숨쉬기도, 모든 것이 불편해졌지만 차차 마스크 착용에 적응이 되어갔다. 버스에서 기침만 해도 다들 놀란 표정을 짓곤 했다. 혹시 저 사람 코로나 아닌가 해서, 사람들 간의 불신은 점점 더해져갔다. 코로나 환자들의 격리조치(자가격리 7일)가 이어졌고, 문제는 코로나로 장례를 치르는 사람들은 더욱 불편한 상황이었다. 알리지도 못하고 병원에서 바로 화장터로, 조문객도 없이 치뤄야만 했다. 가족간의 불신도 이어졌다. 전국민이 강제적으로 백신을 접종해야 한다는 정부방침에 의한 것이었다. “코로나 백신이 의학적인 것이고, 과학적인 것인데 맞아야 하지 않겠어?” “나는 알레르기성 체질이고, 백신이 부작용도 있다고 하는데 그걸 다 맞아야 해?” “3차가 기본이고, 4차, 5차 변이는 계속되는데 맞아야 하나, 그리고 백신을 맞으면 코로나에 걸리지 말아야지, 백신 맞고도 코로나에 걸리는 백신을 뭐하러 맞냐고?” “화이자 & 모더나, 아스트라제네카 & 얀센은 각각 mRNA 백신, 바이러스를 벡터로 사용하는 DNA 백신이고, 이거 모두 DNA를 바꾼다는게 영 찝집하다고?” “백화점이야 안가도 되지만, 카페도 못가게 생겼네, 백신을 안 맞은 사람은 미개한 사람 보듯이 하고, 이상한 사람 취급하니 말이야, 핸드폰에 백신접종자 확인증이 없으면 결혼식에 가서도 식사도 못하고, 멀찌감치 있어야 하니 말이야.” 결국 나는 백신을 안 맞았다. 광화문에서 전광훈 대규모 집회때도 촬영했는데 별 이상이 없었고, 여지껏 코로나로 콧구멍이 쑤셔대지 않았으니 말이다. 다행인지 몰라도 병원 갈리는 없었다. 병원(病院)은 병을 옮겨주는 병원체(病原體/pathogen)였다. 없는 병도 생긴다. 안 가는게 상책이다. 이해할수 없는 질병은 더욱 도덕적 혼란을 부추겼다. 미궁 속을 헤매다 미노타우로스(Minotauros)의 먹잇감이 된다는 그리스 신화의 이야기처럼. 코로나 확진자의 죽음은 가족의 임종도, 장례도 아무것도 지켜보지 못한다. 죽음은 먼나라, 미궁속의 죽음으로만 전달된다. 가짜뉴스로, 음모론으로 우리에게 이야기해줄 뿐이다. 아리아드네가 지혜를 발휘해 테세우스가 미궁을 빠져나올 수 있게 명주실을 주어, 이 명주실을 풀면서 나올 수 있던 것처럼. 확실한 명주실은 보이지 않는다.
“나는 너무나 병원 안에서만 살아서 집단적 처벌같은 것을 좋아하지 않습니다. 그리고 당신도 알다시피, 기독교 신자들은 현실적으로는 절대로 그렇게 생각하지 않으면서 가끔 그런 식으로 말을 하더군요. 보기보다는 좋은 사람들이죠.”
그래도 선생님은 파늘루 신부처럼 페스트에도 그것대로의 유익한 점이 있어서 사람의 눈을 뜨게 하고, 사람으로 하여금 생각하게 한다고 여기시겠죠!
리유는 답답해서 머리를 흔들었다.
“이 세상의 모든 병이 다 그렇죠. 그러나 이 세상의 모든 고통에 있어서 진실인 것은 페스트에 있어서도 역시 진실입니다. 하기야 몇몇 사람을 위대하고 만드는 구실도 하겠죠. 그러나 그 병으로 해서 겪는 비참과 고통을 볼 때, 체념하고서 페스트를 용인한다는 것은 미친 사람이나 눈먼 사람이나 비겁한 사람의 태도일 수밖에 없습니다.”
(페스트, 알베르 카뮈, P168-169)
불안과 믿음사이에 우리는 놓여져 있다. 나의 운명은 불확실한 세계에서 남은 것은 자신을 믿는 것뿐인데, 그 희망의 믿음은 사다리를 통해서다. 현실에서 벗어나려고 무작정 사다리를 올라가보지만, 닿을수 없다고 여겨져 다시 내려온 사다리에서처럼. 먼 바다에는 오롯이 나 자신밖에 없고, 망망대해를 헤엄치는 내 운명은 어디로 흘러가고 있는지 알 수 없다. 삶의 경험에서 어떤 지점에 사다리를 세우고 올라가 보지만, 행복이나 꿈은 어디에도 없다. 우리는 그런 불확실함을 알면서도 사다리를 타고 올라가 본다. 언제나 내가 옳은 방향을 택하거나 바른 선택을 하려고 애쓰지만 확실한 건 아무것도 없다. 아마도 천국은 더더욱 묘연하다. 사다리에는 오르막만 있는 것이 아니라 내리막도 있다. 인생처럼.
“경치가 근사하다는 것은 보는 사람이 그렇게 느끼기 때문이란다. 거기서 기다리렴. 나도 올라가마.”
“성경에서 야곱이, 천사들이 천국의 사다리를 오르내리는 광경을 본 것도 이런 밤이었을까요?”
“사람들과 함께 있을 때에야 비로소 우리가 외로우며 광야에 있다는 걸 깨닫는 경우가 가끔 있단다.”
“천국과 지상 사이에 사다리가 있다는 것.”
“사다리를 사용하는 우리 모두가 천사란다.”
“사랑이 없으면, 우린 자신에게서 벗어나 오를 수가 없지.”
(야곱의 사다리, 노아 벤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