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8화 안경]
“인철이가 실종됐다.”
“디지털사진은 SNS 바다에 부유(浮遊)됐다.”
인철이는 내일신문 사진기자이다. 새로이 창간된 신문사에 취직한 그는 보도사진가로서 길을 걷기 시작했다. 그에게 맞는 직업이다. 그렇게 자리를 잡아가고 있는데, 나는 여전히 예술가의 길은 진행중이다. 미래가 불확실한 예술가, 가난한 예술가에게도 봄은 올까. 동구릉에 야간 촬영을 하느라 밤샘 작업을 했다. 아무도 인적이 없는 무덤가에서 사진을 찍고 있으니 더욱 처량하다. 반딧불이라도 나오면 무덤가의 주인의 영혼이 떠도는 것 같아 괴이한 느낌마저 든다. 여기다 한술 더 떠 나는 플래시를 들고 장난을 치면서 사진을 촬영하고 있다니.
밤샘 작업은 이제 힘이 든다. 힘든 일을 마치고, 집으로 돌아가는 길이다. 남들은 출근할 시간에 집으로 들어가 밀려드는 잠을 청하러 들어가는 길은 다리에 힘도 풀리는 느낌이다. 집 근처 사거리에 있는 기사식당에 간단히 요기라도 해야 할 것 같다. 선지해장국에 소주 반잔이라도 해야겠다. 아침 9시 30분. 기사식당 한 구석에 앉아 멍하니 쳐다보았다. TV에서는 뉴스 속보 자막과 함께 사고를 알리고 있었다. 필리핀 해를 지나 남서태평양 노퍽섬(Norfolk Island) 인근에서 부산에서 출발한 호화유람선이 침몰하고 있다는 뉴스였다. 새로운 항로인 부산에서 뉴질랜드 오클랜드(Auckland)항까지 운행하는 코스였다. 아 저 배는 인철이가 뉴질랜드 네버랜드 스튜디오(neverlandstudio)를 취재하러 간다던 그 네버(Never)호 아니던가. 며칠전 인철이가 전화로 이야기했던 배였다. 새로 출항하는 코스로 기획기사겸 취재로 그 배를 타고 며칠 갔다 온다고 했다. 아 큰일인데, 이거. 사람들은 어떻게 됐지? 다행히 인근 바다가 접근이 어려워 구조에 난항을 겪고 있다고만 뉴스는 이어졌다. 밥을 먹는둥 마는둥 하면서 놀란 가슴 진정하고 집으로 들어갔다. 서재에 있는 컴퓨터를 켜고 네이버(Naver)를 실행했다. 또 다른 뉴스가 있는지 검색해보았다. 구조는 어떻게 진행되고 있는지.
노퍽 섬은 1774년에 영국의 탐험가 제임스 쿡 선장이 발견했다고 한다. 그리고 1788년 영국은 시드니에서 노퍽 섬으로 죄수들을 이송하기 위한 제2의 죄수 식민지로 활용했다고 한다. 피터팬이 해적들과 싸웠던 네버랜드에서 만난 선장은 후크선장이었다. 수심이 깊은 남서평양의 노퍽 섬은 시드니에서 북동쪽으로 약 1,600Km 떨어져 있다. 뉴질랜드까지 가는 도중에 만난 여러 섬들 사이로 표류하던 네버호는 노퍽 섬 인근 해안에서 침몰되었다. 호화로운 유람선에 승객들은 여행을 떠나는 사람들, 조기유학을 보내려고 뉴질랜드로 향하는 사람들 등 다양했다.
인철이의 실종 사건은 내게 큰 충격이었다. 1989년 8월 15일 거문도에서 여전히 의문사로 남아있는 내창형이 생각나기도 하고, 그런 죽음에 대한 사건들은 내 기억에 여전히 비틀어 짠 걸레처럼 남아 있다. 2000년 1월 7일 <아사히신문> 석간 사회면에 대서특필되었던 기사가 떠오른다. 1995년 한신대지진에서 자식을 잃은 한 여성의 이야기이다. 자식이 비틀어 짜준 걸레가 생각난다는 여성이다. 마찬가지로 내게는 망월동에 묻어두었던 안경으로 남아있다.
“그녀는 장례를 마치고 나서도 자식의 죽음을 믿을 수 없었다. 그녀는 유골을 바다에 뿌릴 결심을 했다. 바다에서 영원한 생을 되풀이 할 수 있기 때문이다. 자연장(自然葬)을 독려하는 단체에 가입하고 있어서 죽은 자식의 딸도 이해해주었다. 고베 항 앞바다에서 손녀와 산골(散骨)을 치른 것은 그해 4월의 일이었다. 걸레는 그녀의 집에 남았다.
꽉 비틀어 짜서 풀 수 없는 그 모양처럼 그녀는 기억이 풍화되지 않기를 바랐다....
지진이 발생한 그해가 저물어갔고 그녀는 의사에게서 우울증 경향이 있다는 진단을 받았다. 의사가 처방해준 약을 먹으면 곧바로 상쾌한 기분이 되곤 했다. 그러나 그녀는 약을 먹으면 곧바로 상쾌한 기분이 되곤 했다. 그러나 그녀는 약을 먹는 것을 그만두었다. 이대로 가면 자식을 잃은 슬픔마저도 희미해져버릴 것이라는 두려움 때문이었다. (...)
허전할 때는 가까운 바다로 나가 뜰에서 미소짓는 사계(四季)의 꽃잎을 따다가 바다에 뿌렸다. 오사카에 사는 손녀로부터도 바다에 나갔다 왔다는 연락이 오곤 했다. 바다와 걸레. 바람이 멎어 파도가 잔잔해진 날에도, 날씨가 사나운 날에도 자식과 무언가 알 수 없는 끈으로 이어져 있었다.”
(기억∙서사, 오카 마리, P120-121)
치유할 수 없는 슬픔으로 남아있는 수많은 사건들, 그 사건들과 함께 기억속에 계속 남아있는 사건들은 여전히 폭력적이다. 낯선 ‘타자’의 죽음이라고 여겼던 것들이 내게 가까운 ‘사건’으로 다가오기 때문이다. ‘바다와 걸레’, ‘바다와 안경’ 칠흑처럼 어두운 바다 깊은 곳에서 꿈틀거리는 ‘사건’의 기억들은 언제 우리에게 또다시 다가올지 모른다. 단지 기억은 잠시 봉인될 뿐이다. 잊고 있을 뿐이다. “검푸른 바닷가에 비가 내리면, 어디가 하늘이고 어디가 물이요, 그 깊은 바다 속에 고요히 잠기면, 무엇이 산 것이고 무엇이 죽었소, 눈 앞에 떠오는 친구의 모습” 김민기의 노래 가사처럼, 바다는 그렇게 내 기억 속을 부유(浮遊)한다.
아마도 인철이는 침몰하는 그 순간까지 배안 구석구석을 사진을 찍고 있을 것이다. 좌현으로 물이 들어오는 곳을 촬영하고, 조타실도, 승객들이 있는 곳에서도, 갑판 위에서도 침몰하는 그 순간에 카메라를 손에서 놓지 않았을 것이다. “만약 당신의 사진이 만족스럽지 않다면 그건 충분히 가까이에서 찍지 않았기 때문”이라고 말했던, 노르망디 상륙작전을 취재한 로버트 카파처럼, 카메라를 꼭 쥐고 있는 인철의 손도 떨리고 있었을 것이다. 사진은 그렇게 증거를 기록했지만, 바다 속 깊은 곳으로 침몰되어 실종되었다. 증거는 바닷물의 염분으로 부식(腐蝕)되었다.
“구명보트는 제대로 작동되었는지?”
“승객들은 구명조끼를 모두 착용하고 대피했는지?”
“배가 급변침한 원인은 무엇인가요?”
“유압조절장치(솔레노이드 밸브) 고착 현상은?”
“급격한 배의 좌회전은?”
“과적된 화물은 어떻게 쏠리게 되었나요?”
“배에 화물이 적절하게 실린 것 같았나요?”
“배가 다른 물체와 부딪쳤나요?”
“부딪치는 소리가 났나요?”
<끝>