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5월. 책 | 행복의 기원

어쩌면 이 모든 건 다 생존본능일지도.

by 규민

책 | 행복의 기원_어쩌면 이 모든 건 다 생존본능일지도.


내 삶의 궁극적 목적은 ‘행복’이다. 일상생활이 자그마한 행복구슬들로 가득 차있었으면 좋겠다. 그래서 언제나 행복을 만날 때마다 크게 입 밖으로 외친다. ‘아 너무 행복해!’라고. 행복한 순간은 꺼내 외쳐야 더 크게 느껴지는 법이니깐. 그런데 행복이 ‘생존 본능’에서 비롯되었다니. 마냥 아기자기하고 귀엽고 사랑스러운 단어가 실은 ‘쾌락’과 크게 연관이 되어 있다니. 조금 더 행복해지고 싶어서 읽기 시작한 책에서 만난 행복은 원초적이고 솔직하고 단순한 존재였다.


올해는 그다지 행복하지 못하다. 앞으로 반년 정도 25년이 남아있긴 하지만, 이 글을 쓰고 있는 현재는 불행이 빈도도 크기도 압도적이다. 인사이동 후 나의 안부를 묻는 모든 사람들의 질문에 요즘의 나는 이렇게 답한다.


“일이 힘든 게 아냐. 사람이 힘들지.”


다른 직렬에 비해 인사이동 주기가 짧은 탓에, 매년 새로운 사람들을 만난다. 매일 얼굴도 모르는 사람에게 전화를 하고, 처음 보는 사람들의 서류를 접수하고 질문에 답을 한다. 세상엔 참 신기한 사람들이 많다. 자신이 무례한지 아는 건지 모르겠지만, 서류를 툭툭 던지는 사람. “뭐 때문에 오셨어요?”라는 질문에 본인에게 말 좀 걸지 말라는 사람. 질문에 몇 번을 대답해도 자신이 원하는 대답이 나올 때까지 묻고 또 묻는 사람.


같이 일하는 동료도 마찬가지다. 발령이 마음에 안 든다는 이유로 인사이동 전날 휴직을 내버리는 사람, 언제나 잔뜩 날이 서서 입만 열면 부정적인 말을 내뱉는 사람, 갑자기 동료에게 300만 원을 빌려달라는 사람 등등. 어떤 세상 속에서 살아왔기에, 저런 행동을 할 수 있는 건지 도무지 알 수 없었다.


올해 인사이동으로 간 팀은 조각이 맞을 것 같아 넣어보면 맞지 않는 퍼즐조각 같았다. 점심시간, 식사가 끝난 후 매일 카페에 도란도란 둘러앉지만, 언제나 불편한 정적이 맴돌았다. 누군가는 열심히 정적을 메꾸고, 누군가는 열심히 추임새를 넣었다. “와 진짜 대단하시네요.“ 라는 감탄사에는 서로에 대한 이해가 존재하지 않았다. 속으로는 ‘왜 저렇게까지 하지.’라고 생각하면서도 모두들 그냥 대단함으로 뭉그러뜨렸다. 우린 일이 바빠 더 친해질 수 없다고 말하곤 했지만, 실은 그냥 맞지 않는 사람들이었다. 민원인들은 그렇다 치지만, 매일 보는 팀원들 간의 알 수 없는 거리감들과 거짓된 반응들이 조금씩 나를 깎아 먹었다.


‘생존 본능‘

알 수 없는 것들에 지쳐갈 때쯤 행복이 생존 본능에서 비롯되었다면, 사람의 성격과 행동도 그런 게 아닐까 하는 생각이 떠올랐다. 같은 환경에서 자란 것처럼 보이지만, 우린 저마다의 세계에서 살아왔다. 저마다의 생존 본능, 삶의 방식을 가지게 된 것이다. 성격은 어쩌면 각자의 생존방식을 다른 표현일지도 모른다. 분명 무리한 요구를 당당하게 요청하는 민원인들은 이 방식으로 수많은 난관을 헤쳐왔을 것이다. 반복된 요구에 사람들은 지쳐 결국 들어주었을 것이고, 결국 그의 행동은 하나의 생존 방식으로 그에게 새겨진 것이다. ‘선한 사람’또한 ’ 선함‘이 그 사람의 생존방식인 것이다. 자신의 배려 깊은 행동이 다른 사람에게 좋은 평판을 만들었고, 그게 생존방식으로 자리 잡은 것이다.


즉, ’ 좋은 행동‘이든 ’ 나쁜 행동‘이든 궁극적으로 다 각자의 살아남기 위한 방식에 불과하다. ‘치히로’라는 영화에서 사람은 각자 다른 별에서 왔다고 한다. 그렇기 때문에 우리는 서로의 생존을 이해할 수 없다. 그러니 각자의 생존방식을 그저 바라볼 수밖에 없다. 이해하려고 할수록 알 수 없고, 알 수 없기에 지치고 짜증 나고 미워진다.


행복의 기원을 읽으며 도달한 결론은 그것이다.

세상에 모든 것은, 결국 다 ‘생존본능’에서 비롯된 것이다. 삶이란 근사해 보이지만 실은 원초적인 것일지도 모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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