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납작콩 Jun 16. 2022

일상에서의 여행

행복론

최근 목록 (295)

오늘 귀갓길에 무심코 차 앞 내비게이션에 찍힌 최근 목록을 보았다. 295라는 숫자에 놀랐다. ‘내가 이렇게 많은 곳을 다녔구나’ 하는 생각이 들었다. 화살표를 눌러서 화면 하나하나 보다가 스크롤을 맨 밑으로 당겼다. 그러자 차를 산 작년 12월부터 간 장소들이 다 찍혀있었다. 예전에 살았던 아파트도 있고, 이사를 온 후 가구를 사려고 갔던 가구점도 있고, 집수리에 필요한 도구를 사려고 갔던 철물점도 있고, 식구들이 같이 갔던 식당도 있었다. 그리고 딸과 시작했던 집에서 1시간에서 2시간 남짓 되는 여행지가 대부분이었다.      


올해는 나도 일을 쉬고 있지만, 딸아이도 쉬고 있다. 남편은 직장으로 아들은 학교 기숙사로 가고 나면 주중에는 딸아이와 나만 오롯이 남는다.      

딸아이는 6학년이라는 어중간한 나이에 한국에 들어왔다. 낯을 많이 가리고 마음도 약한 그 아이는 그동안 참 많이도 힘든 시기를 보냈다. 딸아이가 가장 힘들어했던 시기에 나는 정신없이 출근하고 퇴근하는 일을 반복하며 지냈다. 딸아이는 갑자기 자신이 지내던 곳과 너무나 다른 문화권의 학교에서 친구와의 문제, 학업의 문제를 혼자 견디며 그 시기를 지냈다. 나는 나 나름의 육체적이고 정신적인 피로를 핑계로 딸아이와 따뜻하게 마음을 보듬어주는 대화를 못 했던 것 같다.      


그러다가 올해 어쩌다 보니 딸아이도 집에서 쉬고, 나도 일을 쉬게 되었다. 둘이 보내게 되는 시간을 나는 나름대로 의미 있게 보내고 싶었다. 내 안에는 딸아이와 그동안 못 나누었던 속 깊은 대화도 하고, 지쳐있었던 딸아이가 온전한 쉼을 경험했으면 좋겠다는 마음이 있었다. 그런데, 어떻게 해야 할지 구체적인 계획은 세우고 있지 않았었다.      


주말에 북적대던 집안이 월요일이면 조용해지면 딸과 함께 집 근처에 있는 공원에 가서 반려견과 함께 산책하곤 했다. 그러다가 우연히 여행 관련 책을 발견했다. 그 책에는 혼자서도 갈 수 있는 여행지를 소개하고 있었다. 그중에 내가 운전해서 갈 수 있을 만한 거리에 있는 여행지 몇 군데를 선별했다. 그리고 하나씩 그 책자의 안내대로 여행을 시작했다. 원칙은 하나였다. ‘일주일에 한 군데만 간다. 너무 무리하거나 욕심내지 말자. 서두르지 말자. 여행 준비를 하는 순간부터 차를 타고 목적지에 가는 순간까지 보내는 시간도 소중하다. 지금-여기에서 느껴지는 감정과 생각에 민감하게 반응하자.’라는 것이었다. 여행을 갔다 오고 나면 딸아이가 느낀 점과 내가 느낀 점을 솔직하게 한글 문서로 작성하고 저장해놓았다. 매주 여행 갈 날짜가 다가오면 나도 딸아이도 기대하는 마음이 커져 있었다. 처음 시작된 서툰 여행은 6주의 시간을 거쳐서 마무리되었다. 그리고 그 이후에는 책자의 도움 없이 우리가 자율적으로 계획을 세워 여행을 하는 중이다.     


나는 그렇게 용감하고 독립적인 사람은 아니다. 여행이라는 것은 항상 누군가와 함께해야 갈 수 있었다. 겁도 많아서 친숙하지 않은 곳에서는 움츠러들고 도전을 회피하는 사람이다.      


그런데 딸과 함께 시작한 일상 속에서의 여행, 집과 일상을 크게 벗어나지 않은 여행을 하며 새로운 재미를 느끼고 있다. 잘 안다고 생각했던 곳에서 새로운 면을 보게 되면서 느끼는 희열을 맛보고 있다. 낯선 곳에서 도전하는 나의 모습을 보며 스스로 자부심도 느끼고 있다. 여행지에서 느낀 점을 나누고 딸과 교감하며 그 아이와 더 친밀해졌다. 그리고, 나와 딸아이는 웃음이 많아지고 표정이 밝아졌다……      


당분간 이 일상에서의 여행은 계속될 것이다.

작가의 이전글 냄새의 향연
작품 선택
키워드 선택 0 / 3 0
댓글여부
afliean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