빛이 된 저주

소설 속 장면을 꿈꾸다

by 글꽃향기

<따로 또 같이 쓰는 첫 문장>

"처음에는 그냥 장난이었다."





그냥 장난이었다.

"날 믿어?"

"내가 수시로 열어보면 어쩌려고?"

그는 웃으며 대답했다.

"뭐가 어때!"

"특별한 것도 없다구!"

나는 속으로 외쳤다.

'내가 할 일이 그렇게 없겠냐? 굳이 시간을 써 가며 훔쳐보게?'

그는 나를 지긋이 바라보며 한마디 더 내뱉었다.

"설마!"





첫사랑과 멀어지면서 오랜 시간 동안 혼자였다. 혹시나 하는 마음이 있었다. 솔직히 말하면 너무나 간절했다. 확신이 필요했다. 그의 연락을 기다렸다. 하지만 기다림은 더 이상 나의 편이 아니었다. 그리 우유부단한 사람과는 잘 되어도 맘고생이 심할 거라는 주변의 조언도 무시했었다. 하지만 결국 긴 시간 앞에서 나는 무릎을 꿇고 말았다. 나는 너무나 지쳐 있었다. 그래서 만나게 된 인연이었다. 친구는 친구의 친구라며 나에게 그를 소개해 줬다.





그는 장난기가 많았지만 다정한 사람이었다. 첫사랑의 그와는 달리 마음을 표현해 주었고, 나를 아껴 주었다. 적극적인 사람을 만나고 싶었고, 연애 다운 연애를 하고 싶었다. 그렇게 나와 인연이 닿은 그였다.






그는 지방에서 직장을 다니고 있었다. 우리는 일주일에 한 번 만날 수 있었다. 나 역시 사회생활을 시작하면서 퇴근 후 녹초가 되어 있었기에 그와 주말에만 만나는 것이 그리 나쁘지 않았다. 처음으로 해 보는 연애다운 연애였지만 처음이었기에 굳이 평일까지 시간을 내지 않아도 아쉬움이 없었다. 일주일에 한 번뿐인 만남으로도 충분하다 여겼다.





평일 밤에는 전화 통화를 꽤 오래 했고, 문자를 주고받으며 애정을 키워 나갔다. 수시로 메일이 오갔다. 플래시 카드는 톡톡히 효자 노릇을 해 주었다. 딱히 쓸 내용이 없어도 적당히 유머스러운 영상이 담긴 카드를 고르기만 하면 상대를 미소 짓게 만들 수 있었다.





"왜? 지금 나가려고 하는데!"

"아직 집이지? 메일 확인할 수 있어?"

"메일? 무슨 메일? 메일 보냈어?"

"아니, 내 메일에 접속 좀 해 봐. 친구가 청첩장을 보냈다는데 장소랑 시간 좀 확인해 줘!"

"나중에 오빠가 확인하면 되잖아."

"아니, 확인 좀 해 줘. 다른 일정이랑 겹치는지 봐야 해서."





그와의 약속 장소로 향하려던 참이었다.

'자기 메일을 확인해 보라니. 뭐가 그리 급하다고!'

할 수 없이 방으로 들어와 컴퓨터 전원 버튼을 눌렀다.

"비밀번호 뭔데?"

"****!"

'뭐야, 뭐 이래 단순해! 휴대전화 비밀번호와 메일 비밀번호가 같다니!'

"접속했어! 김별별? 이 사람한테 온 메일 열어보면 돼?"

"응, 빨리 시간 좀 확인해 줘!"

메일함에 담긴 청첩장의 정보를 알려줬다.

"고마워!"




"날 믿어? 내가 수시로 열어 보면 어쩌려고?"

"특별한 것도 없어!"

그냥 서로 낄낄대며 농담을 주고받았다.

'이 사람 날 정말 믿는 건가?'

'연인이 되면 이렇게 뭐든 터놓을 수 있는 건가?'

누굴 사귀어 본 경험이 없었던 나는 알 수가 없었다. 그래도 나를 믿어준다는 생각이 들어 흐뭇했다. 그와의 시간은 계속 이어졌다.





6개월쯤 지났을까? 그와 내가 인연이 아니라는 생각이 점점 굳어졌다. 어느 순간부터 그의 일상에서 뒷전으로 밀린 듯한 느낌이 들었다. 처음과는 달리 이기적인 모습도 자주 보였다.




"우리 잠시만 떨어져 있자! 내가 좀 혼란스러워!"

곧 멀어질 거라는 생각에 내가 먼저 말을 꺼냈다.

"내가 말한 거 생각해 봐. 일주일 안에 알려줘."

나의 '잠시만'은 그에겐 '일주일'을 의미했나 보다. 나를 기다릴 수 있는 시간이 고작 일주일이라니! 뭐든 천천히 해보고 싶었던 나에 비해 그는 뭐든 서둘러댔다.





일주일은 금방 지났다. 그에게는 전화 한 통, 문자 한 통 오지 않았다.

'아, 남들도 다 이렇게 끝내는 걸까?'

그와는 인연이 아니라고 확신했었다. 분명 그를 금방 잊을 수 있을 거라 생각했었다. 하지만 6개월의 시간은 그리 가볍지가 않았나 보다. 자꾸 그가 생각났다.




'내가 보낸 메일이 잘 있을까? 그것마저 이미 싹 지워 버렸을까?'

확인하고 싶었다. 그의 마음속에 아직 내가 있는지 확인할 방법은 그것뿐이었다.

'말도 안 돼! 아직도 그 비밀번호일리가! 바로 바꿨겠지!'

설마 했다.




'설마 했는데...'

이제 그의 마음속에 아직 내가 있는지 확인하는 일만 남았다.

'내가 보낸 메일이 아직도 남아있다면.....'

'아!!!'

내가 보낸 메일은 고스란히 남아 있었다.

'맞아, 아무리 맘이 없대도 고작 이 주밖에 안 됐는데!'





그 순간 '보낸 메일함' 다섯 글자가 유난히 눈에 들어왔다.

'나에게 보낸 메일이 아직 남아 있을까?'

궁금해졌다. 망설임이 없었다.





'정별하? 이게 뭐지?'

"이번 주엔 맛있는 거 사 줄게. 뭐 먹고 싶어?"

내 눈을 의심했다.

'송주연??'

"다음엔 더 재밌는 영화 보러 가자!"

손이 부들부들 떨렸다. 더 이상 그 화면을 쳐다볼 수 없었다.




첫 만남 후 주고받은 메일은 아니었다. 최소한 서너 번의 만남을 가진 듯한 내용이었다. 이제는 온몸이 떨리기 시작했다. 이불을 뒤집어쓰고 펑펑 울었다.




꽤 오랫동안 앓고 말았다. 분명 그와 인연이 아니라고 확신했는데! 내가 먼저 멀어지자 이야기했는데! 내 인생의 첫 연인이 바람둥이였다는 생각에 나는 세상을 저주했다. 친구들의 남자 친구가 바뀔 때마다 위로의 말을 진심으로 건네던 나였는데, 그렇게 살아온 나에게 세상은 세상은 너무나 가혹했다.





바람둥이 남자 친구의 존재를 알고 있었던 그 누구에게도 나의 이 억울함을 털어놓을 수 없었다. 결국 그의 메일함을 열어 본 나도 당당할 순 없었으니까.





선배 언니에게 나의 사연을 털어놓았다. 왜 그런 짓을 했냐고, 너도 당당할 거 하나 없다고 핀잔을 주면 어쩌나 걱정이 됐지만 그도 안 한다면 미쳐 버릴 것 같았다.





"니가 비밀번호를 알고 있는데 떡하니 그런 메일을 보냈다고?"

"지가 접속을 부탁한 건 그랬다 쳐! 그 후에 비밀번호도 안 바꾸고?"

"그런 멍청한 놈이랑 잘 돼 봤자, 너만 손해야!"

"바람둥이랑 잘 돼서 뭐 하게? 너 운 좋다! "





나의 억울함은 순식간에 사라져 버렸다. 시원했고 통쾌했다. 그 순간, 세상에 외치던 저주는 빛으로 다가왔다.





하지만 설명할 수 없는 '앓이'가 시작됐다. 분명한 건 그 자식에 대한 그리움이나 억울함은 아니었다. 나의 인연이 과연 이 세상에 존재하기는 할지, 혹시나 그 인연을 만나게 된다면 나는 과연 그에게 마음을 열 수 있을지, 의심만 하는 건 아닌지, 두려움이었고 걱정이었다.





그렇게 한동안 앓이는 계속됐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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