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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가 사랑하는 생활

피천득 <인연>을 읽고

by 김이서

나는 내가 마음대로 쓸 수 있는 돈을 조금씩 모아 저금을 한다. 그리고 먼 훗날, 100일간의 자유로운 유럽여행을 꿈꾼다. 하얀 침대 시트 위에 포근히 내 몸을 맡기고, 아침엔 커피 한잔을 마시며 게스트하우스에서 직접 만든 샌드위치를 들고 공원을 걷고 싶다. 그리고는 길거리에 파는 엽서 한 장을 사서 사랑하는 사람에게 편지를 쓰고 싶다. 내가 조금씩 모으는 돈은 아직 부족하다. 하지만 마음대로 쓸 수 있는 돈을 아끼는 내 마음을 사랑한다.




나는 요가 선생님이 나무 바닥을 걸으며 내는 삐그덕 소리를 좋아한다. 내 몸은 누워있고 팔과 다리는 힘이 풀리고 호흡은 깊지 않게, 마시고 내쉬는 숨은 고르게. 선생님의 발걸음 소리는 마음에 덮는 여름밤의 얇은 이불과도 같다. 나는 핑크색을 좋아한다. 핑크색을 좋아하게 된 이유는 정확하게 알 수 없다. 단지 핑크색을 보면 마음에 맑은 공기가 들어온다. 그리고 나의 거친 숨은 고르게 퍼진다.



나는 재즈를 사랑한다. 전날 무리한 몸을 이끌고 오전 7시에 본 투 비 블루를 보러 갈 만큼 내 귀는 마음을 울리는 소리를 사랑한다. Time after time 듣고 있자면 내 마음은 어쩔 줄 모르고 서있다. 나는 내 살결과 하나가 될 수 있는 화이트 머스크 향을 사랑한다. 강하지 않고 어디에든 누구에게든 스며들 수 있는 향기를 가진 여자라는 점이 좋다.



나는 잠을 잘 때 고요한 공기 소리를 좋아한다. 뒤척임이 많아서 어떠한 소리만 들려도 잠이 오질 않는다. 혼자 있는 방, 그 안에 오직 내가 내는 숨소리와 함께 숨 쉬는 내 공간들의 공기들만을 좋아한다. 비 오는 날은 무조건 창문을 닫는다.



나는 아이스 카페라떼를 좋아한다. 내가 아이스 카페라떼를 접한 건 런던 코스타 카페였다. 우유의 고소함과 커피의 깊은 향이 더해진 라떼는 이 세상에 내가 존재하는 이유 중 하나이다. 아침에 빈속으로 마시는 아이스 카페라떼를 사랑한다. 나는 엽서를 좋아한다. 전시를 다녀오면 엽서를 한 장씩 꼭 구입하곤 한다. 언젠가는 나의 작업실에 내가 머물렀던 발자취를 기억할 수 있는 엽서들을 걸어두고 싶다.



너무 밝지도 않고 너무 어둡지도 않은 나의 평온한 얼굴을 사랑한다. 물질적인 것으로 남과 비교하여 나를 낮추지 않고, 어제의 나보다 나은 나를 위해 하루를 시작하는 내가 좋다. 사람에게 바라는 것이 적으며, 되도록 사람을 증오하지 않고 몇몇 사람만을 끔찍이 사랑하는 내 마음이 좋다. 그리고 점잖고, 향기롭고, 조용하게 나이를 먹어 가고 싶다. 내일의 나에게 보여주기 위한 글을 쓰는 나를 무척이나 사랑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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