날이 좋은 어느날 풍경
1983년. 내가 살았던 아파트가 지어진 해이다. 지어진 지 40년이 된 이 아파트의 단지 내 풍경은 아름다운 조경과 심지어 예술 작품으로 장식된 현대식 아파트의 그것과는 확연히 다른 분위기를 풍긴다. 단지 내에는 조그마하지만 소박하게 꾸며진 화단과 시커먼 아스팔트 도로 위에 흰색 페인트를 죽죽 그어 주차 공간을 표시해둔 야외 주차장이 있었다. 날이 좋은 날. 야외 주차장은 아이들의 놀이 장소가 되었다. 남자 아이가 아빠와 함께 배드민턴을 치고, 옆에서 구경하던 자그마한 체구의 여자 아이는 기다리는 시간이 지루한지 허공에 배드민턴 채를 붕붕 휘두르며 팔짝댄다. 때로는 자전거를 탄 한 무리의 아이들이 머리칼을 뒤로 휘날리며 쌩하니 주차장 사이사이를 왔다갔다했다. ‘축! 사업시행계획인가 승인’이라고 써진 현수막은 아파트 한쪽 벽면에 기다랗게 걸려 바람에 제 몸을 맡긴 채 마치 축하 박수 라도 치듯 파닥거렸고 그 아래 그늘 진 곳 의자에는 어르신 한분이 한쪽 다리만 오그려 의자에 올려놓고 주변 풍경을 가만히 바라보고 있었다.
단지 내 후문 출입구를 지나면 전철역과 아파트 단지 사이에 위치한 시장이 보였다. 퇴근 시간이면 장을 보는 사람들과 시장통을 지나 집으로 향하는 행인들로 늘 북적거렸다. 정육점 차양 아래 빨간색 플라스틱 의자에는 백발에 새하얀 난닝구를 입은 할아버지가 항상 그 자리에 앉아 있었는데, 가끔 정육점 주인아저씨를 보며 말을 건넸다.
그리고 얼마 뒤 날이 좋은 어느 날. 나는 그곳을 떠났다. 이사를 간 아파트는 주민들을 위한 커뮤니티 센터와 단지 내 산책로가 잘 꾸며져 있었다. 저녁 무렵, 팔을 앞뒤로 세차게 휘저으며 산책로를 걸어 다니는 사람들을 심심치 않게 볼 수 있었다. 지하 주차장은 그야말로 신세계였다. 주말 한낮. 야외 주차장에 세워진 차에 타면 뜨거운 태양에 몇 시간 동안 시달려 잔뜩 성이 난 공기가 나에게 화풀이라도 하듯 열기를 쏘아댄다. 하지만 지하 주차장은 여름에는 서늘하게 겨울에는 따뜻하게 나를 맞아 줬다. 지하 주차장에서 집으로 연결된 통로는 비가 오건 눈이 오건 한결같이 나를 편안하게 집까지 갈 수 있게 해줬다. 샤워기의 물줄기는 피부가 아플 정도로 힘차게 뿜어져 나왔고 한여름이면 화장실 배수구에서 스멀스멀 기어 올라왔던 나방파리의 유충들도 이 아파트에서는 보이지 않았다.
그렇게 나는 이사 간 집에 만족하며 적응해 갔다. 오래된 아파트가 주는 불편함. 이제는 그 불편함을 견딜 수 없을 것 같다는 생각이 확신으로 굳어질 즈음, 나는 예전에 살았던 그 오래된 아파트를 우연히 들르게 됐다. 화창한 날이었다. 예전보다 더 많은 현수막이 여기저기에서 세차게 펄럭거리며 시위를 하는 듯 했다. 문구도 각양각색. ‘조합장은 물러가라’, ‘비대위 발족’. 무언가 잘 안 풀리는 모양이었다. 단지를 지나 시장으로 들어가자 문을 걸어 잠그고 영업을 하지 않는 가게들이 눈에 띄었다. 장을 보는 사람들로 북적였던 시장 길은 똑바로 앞만 보며 걸음을 재촉하는 행인들이 전부인 듯 했다. 그나마 허리를 구부리고 가게 진열대의 상품을 훑어보던 할머니마저 주인과 몇 마디를 나누더니 이내 고개를 돌리고 자리를 떠나 버렸다.
조금은 불편하지만 나름의 정겨움과 활기를 가지고 있던 오래된 동네가 사라져 가고 있었다. 예전 풍경이 그리웠다. 다른 곳이 다 변해 천지개벽을 하더라도 여기만큼은 변하지 않았으면 하는 생각에 마음 한편에 아쉬움이 크게 자리 잡는다.
마음에 울림을 준 일상들은 어김없이 내 소설의 일부가 되곤 하는데 '날이 좋은 어느날 풍경'은 그렇게 단편소설 '오후 3시'에 녹아들었다.
그렇게 다른 날과 비슷한 하루를 보낸 그날 밤, 상태는 또다시 꿈을 꿨다. 10층 높이의 복도식 아파트가 보였다. 아까 꿈에 나왔던 그 건물이었다. 강하게 내리쬐는 오후의 햇빛은 아파트에 부딪쳐 더이상 뻗지 못하고 그림자를 길게 만들었고 눈부신 햇살을 피해 그림자로 찾아든 아이들은 배드민턴 채를 휘두르며 이리저리 뛰어다녔다. 그렇게 아이들이 뛰노는 모습을 보고 있는데 마치 폭격이라도 맞은 듯 쾅하는 소리와 함께 건물이 풀썩 주저앉았다. 상태는 자기도 모르게 몸을 반쯤 굽히고 양손으로 얼굴을 가렸다. 무너진 건물 주위로 흙먼지가 확 피어올랐고 사람들은 비명을 지르며 사방으로 흩어졌다. 상태는 천천히 허리를 세워 일어나며 무의식적으로 손목시계를 확인했다. 9월 27일 일요일 오후 3시였다. [A의 단편소설: 오후 3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