불안에서 빠져나오려면
불안이, 체중의 2%에 불과한 무게의 뇌를 순식간에 잠식하고 어느새 98%의 나머지 육체를 지배하는 속도는 가히 경이롭다고 할 정도로 빠르다. 그렇게 불안이 스며들면, 2~3평 남짓한 거실을 빙글빙글 맴도는 것 외에는 아무것도 할 수 없다. 두꺼운 쇠사슬로 목이 묶인 채 목줄이 허용하는 그 짧은 거리 안에서만 이리저리 끊임없이 왔다 갔다 하는 개와 비슷한 모양새이다.
그러다 문득 걸음을 멈추고 불안에서 빠져나올 때가 있는데 다른 세상이 나의 머릿속에 들어올 때다. 어떤 때는 강제적이다. 예컨대 아이가 학교에서 선생님 때문에 화가 났다는 이야기를 하기 시작하면 어느새 아이의 말에 집중하게 된다. 때로는 나를 옥죄고 있는 실체 없는 두려움에서 빠져나오기 위해 스스로 노력하기도 한다. 나의 경우, 가장 효과적이었던 것은 죽음에 대해 생각하는 것이었다. 실체가 없는 두려움은, 죽음이라는 인간이라면 누구도 피할 수 없는 운명 앞에 그야말로 보잘것없는 것이 돼버리기 때문이다. 죽음에 대한 묵상은 삶에서 정작 중요하고 내가 집중해야 할 것이 무엇인지를 선명하게 드러낸다. 다만 아쉬운 점이 있다면 그 깨달음이 그리 오래가지 않는다는 것이다. 어찌 되었던 죽음과 삶의 대비를 통해 '어둠이 있기에 빛이 있다'는 클리쉐(cliche)를 실감하는 순간임은 분명하다.
그러니 당신의 세상이 파국으로 치달을 것 같은 불안이 당신을 사로잡고 있다면, 내가 살아가고 있는 또 다른 세상으로 눈을 돌려보자. 직장에서의 힘듦이 가족과 함께 하는 한 끼 식사로 잊히기도 하고, 연인 사이의 헤어짐은 또 다른 인연으로 이어지기도 하는 것이 우리의 삶 아니겠는가.
유리창 강박은 경서가 대학교에 입학하고 얼마 지나지 않아 시작되었다. 도서관의 크고 길쭉한 갈색 책상에 앉아 기말 시험을 준비하고 있을 때였다. 경서는 머리를 수그리고 책을 보다가 정수리가 간질거리는 느낌에 고개를 들고 주위를 두리번거렸다. 듬성듬성 앉아 공부에 열중하고 있는 네다섯 명이 전부였다. 벽에 걸린 시계의 시침은 숫자 3을 넘어 4를 향해 가고 있었다. 주위를 둘러보던 경서의 시선이 멈춘 곳은 도서관 창문이었다. 모든 것을 빨아들일 것 같은 한밤의 시커먼 어둠은 유리창에 막혀 실내로 침입하지 못하고 그저 유리창을 온통 묵색으로 물들일 뿐이었다. 얼마 뒤 그 시커멓고 탁한 묵색 면에서 동그란 두 점이 점점 새까매지며 도드라졌다. 두 개의 점을 시작으로 머리와 몸의 윤곽선이 진해지더니 사람의 형체를 이루기 시작했다. 시커먼 유리창 너머 누군가 자신을 지켜보고 있는 것 같았다. 경서는 호흡이 가빠지고 식은땀이 흐르더니 이내 눈앞이 하얘지며 정신을 잃었다. 책상 위에 엎어져 있던 경서가 정신을 차리고 보니 햇살이 경서의 책상을 환히 비추고 있었다. 경서는 맑고 투명한 유리창을 멍하니 바라보다 가방을 챙겨 도서관을 나왔다. 그날부터 경서는 유리창 강박에 시달리게 되었다. [A의 단편소설: "창"에서 일부 발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