타인의 손
1
작은 찻잔 크기 도가니에 은 알갱이들을 집어넣는다. 토치의 가스 밸브를 열어 불을 붙인 다음 산소 밸브를 천천히 돌려 강도를 조절한다. 주황색 불꽃은 이내 거센 비명을 내지르며 푸르고 맹렬하게 돌변한다. 토치를 도가니에 가져가 아랫부분부터 열을 가한다. 도가니에 골고루 불기운이 전해지면 은 알갱이들은 몇 알씩 엉겨 붙다가 액체처럼 돼 출렁거린다. 토치에서 뿜어져 나오는 불덩어리 속에서 강렬하게 은빛을 발산하는 은들은 물고기떼처럼 와글거린다. 1센티미터 굵기의 긴 직사각형 틀 안에 녹인 은을 쏟아붓고 굳어버린 은 막대기를 물에 담그면 단말마의 비명을 내지른 후 열기는 사그라든다. 압축기에 넣고 길고 가늘게 늘린 다음 작업하기 편한 위치로 공구를 정리한다. 80땜을 잘게 잘라 물에 탄 붕사 옆에 나란히 놓는다. 앞치마에 손을 한 번 훔치고 태장대에 앉아 세공을 시작한다. 금속과 나 사이엔 이제 두 가지만 남는다. 하나는 불길, 하나는 상상력.
인사동 입구 공원 벤치에 그는 앉아 있었다. 고개를 숙인 채 손에 든 사이다 캔을 조물락거리고 있는 남자를 보는 순간 그가 오늘 만나기로 한 사람임을 금세 알 수 있었다. 누군가를 기다리는 듯한 표정을 한 사람은 그밖에 없었기 때문이기도 했지만, 블로그에 쓴 글에서 받은 느낌이 그대로 풍긴 탓도 있었다. 망설이던 그 역시 나와 눈이 마주치자 자리에서 일어났다. 껑충한 키에 비해 몸은 턱없이 말라 걸어오는 모양이 용수철처럼 좌우로 휘어지는 것처럼 보였다. 여드름 많고 까만 얼굴은 지독하게 마르지만 않았다면 제법 준수하게 여겨질 외모였다. 청바지와 티셔츠 차림의 간소한 복장인데도 그는 어딘가 부자연스러웠다. 초췌한 인상이 다른 사람과 그를 구별되게 하는 결정적인 원인 같았다. 미간에 걸쳐진 미소 역시 어색했다. 그 또한 자기를 바라보며 웃는 내 모습이 어색해 보일지 몰랐다. 그가 먼저 말문을 열었다.
- 조용한 데로 갈까요?
광화문 방향으로 걸어가기 시작했다. 교보문고 앞에서 택시를 잡은 그는 기사에게 평창동 홀리데이 호텔 앞으로 가자고 했다. 근처에 카페가 있어요. 그런 말을 하지 않아도 호텔로 나를 데려갈 거란 걱정은 들지 않았다. 창밖을 보는 그의 시선은 초식동물의 것처럼 온순하고 기품이 있었다. 우리는 말없이 창밖 풍경을 바라보았다. 광화문을 지나 효자동으로 넘어오자 한산하고 나무가 많은 길이 펼쳐졌다. 도심 같지 않은 한산함과 여유가 느껴지는 동네였다. 지대가 높은지 택시 안에서도 아래쪽 전경이 훤히 내려다보였다. 15분쯤 후 택시가 섰고 그가 지갑을 열어 만 원 한 장을 꺼냈다. 셈을 치르는 동안 눈에 들어온 그의 지갑 안에는 접히지 않을 정도로 두둑한 액수의 지폐가 들어 있었다. 차에서 내린 그가 잠시 나를 보며 빈약한 미소를 지었다.
그가 잘 간다는 카페 문은 활짝 열려 있었다. 홀에 들어서자 사람은 없고 음악만 크게 흘러나오고 있었다. 지금 막 문을 연 듯 테이블 정리가 제대로 되어 있지 않았다. 어두운 조명 탓도 있지만 홀은 1층인데도 폐쇄적인 느낌이 들었다.
- 산 밑이라 여긴 주말이 더 한산해요.
그는 유유히 홀 안으로 들어가더니 익숙하게 창가 쪽에 자리를 잡았다. 왔어? 1층 아래 쪽에서 주인임 직한 목소리가 들려왔다. 예, 형. 잠깐만 기다려 여기 마대질만 마저 하고 올라갈게. 천천히 하세요. 그는 나에게 자리를 권하더니 다시 일어나 카운터 쪽으로 걸어갔다. 뭐 마실래요? 아무거나요. 맥주를 꺼내는 그는 아까보다 한결 편안해 보였다. 표정으로도 그가 이 공간을 좋아하고 있다는 걸 알 수 있었다. 내 쪽으로 걸어올수록 그의 손에 들린 맥주 병에 붙은 앞니 빠진 척 맨지오니 사진이 시야 가까이 들어왔다. 챙이 넓은 모자를 쓰고 웃고 있는 모습이 영락없이 멕시코 농부 같았다. 사진이 재밌어요. 그가 맥주를 따더니 나에게 뚜껑을 보여줬다. 몸을 둥글게 만 초록색 도마뱀 문양이 그려져 있었다. 팬던트로 만들어도 좋을 것 같다는 생각이 들었다. 나는 뚜껑을 만지작거리며 주변을 다시 한 번 천천히 둘러보았다. 카운터 안쪽으로 오래된 엘피와 시디들이 빽빽하게 꽂혀 있었다. 주인이 걸레질을 하는 지하 중앙에는 간이 무대가 마련되어 있었고 작은 무대 위엔 기타와 키보드 한 대가 놓여 있었다. 여기서 라이브 연주도 해요. 그가 무대를 쳐다보는 나를 향해 말했다. 지하뿐 아니라 1층 벽 곳곳에 이름난 뮤지션들의 포스터와 사진들이 붙어 있었다. 주인의 취향을 한눈에 알 수 있었다. 잠시 후 아래층에서 소매를 걷어올린 주인 남자가 마른과자가 든 접시를 들고 올라왔다. 뿔테 안경을 낀 순한 인상의 남자는 상대를 편안하게 해줄 것 같은 나직한 음성을 지니고 있었다. 두 사람은 느리고 조용한 음성으로 안부를 주고받았다. 형, 앉아. 그가 자리를 권하자 주인은 이따가 하고는 카운터에 앉아 음악을 고르기 시작했다.
- 여기요.
물건을 내밀었다. 그가 천천히 받아 상자를 열었다. 남자 손치곤 가늘고 긴 손가락이었다. 반지를 살피는 일련의 행동은 느리고 조심스러웠다. 그런 행동과 표정은 아주 오랜 시간에 걸쳐서 완성된 느낌이 들었다.
- 치수가 맞나 한번 껴보세요.
제가 낄 게 아니라서요. 그가 고개를 젓더니 바지 뒤춤에서 지갑을 꺼냈다. 돈은 나중에 부쳐 주세요. 그가 다시 고개를 저었다. 지금 드릴게요. 그게 편할 거 같아요. 주인 남자는 자켓을 들여다보고 자신이 선곡한 음악을 틀고 자신이 튼 음악을 들으며 자켓을 다시 들여다보는 행동을 반복하고 있었다. 그 역시 아주 오랫동안 음악 고르는 일을 한 듯 편안하고 자연스러웠다. 주인 남자가 음악을 두어 곡 바꿔 트는 사이 창밖으로 어둠이 도마뱀처럼 기어내려오고 있었다.
모든 것이 낯설 때가 있지 않나요? 오늘 집을 나서는데 갑자기 그랬어요. 신대방동에 살고 있거든요. 예전 같았으면 2호선을 타고 시청에서 1호선으로 갈아타 몇 정거장만 가면 바로 종각역이니까 그렇게 왔을 텐데, 오늘은 어지러워서 그럴 수가 없었어요. 마음을 다잡지 않으면 집 밖으로 나갈 수 없을 만큼 소심해져 버렸죠. 버스를 탈까 하다 시간을 보니 약속 시간보다 2시간이나 일찍 나왔더군요. 택시를 잡아 타고 종각에서 가장 가까운 영화관으로 가자고 했어요. 기사가 허리우드 극장에 데려다 주더군요. 웃음이 나왔어요. 예전에 맞은편 낙원상가에 자주 갔던 기억이 났거든요. 그땐 형이 악기상가에서 일할 때라 거기서 악기 만지며 시간을 때우곤 했어요. 내가 가면 형이 곧잘 연주를 청했죠. 소리가 나면 손님이 반응을 보이니까요. 이태원에서 형하고 밴드 활동도 같이 했어요. 형이 대마초를 너무 많이 피워서 오래 하진 못했지만 그때 형한테 음악 많이 배웠어요. 그때까지만 해도 내가 형 자취방에 거의 살다시피 했죠. 엘리베이터를 타고 4층에 올라가서 표를 끊었어요. 영화가 시작되려면 시간이 좀 남았기에 젊음의 광장에서 인사동 길목을 바라보며 담배를 한 대 피웠어요. 맞은편 카바레 앞에 중년 남녀가 몇 쌍 보이더군요. 잘 챙겨 입긴 했는데 어딘가 촌스러웠어요. 옷은 화려하고 그에 비해 얼굴이나 손 같은 덴 왠지 찌들어 보이는, 뭐 그런 식이었어요. 예전부터 느꼈던 거지만 그 사람들은 기묘하게 그곳과 잘 어울려요. 낡은 옥상 위에서 무도복을 입고 춤을 추며 상대를 기다리는 늙은 중년들. 그런 식으로 재미를 찾는 모습이 이 도시와 맞물리는 거 같아요. 무거운 거 보면 기분이 가라앉을 거 같아서 코미디물을 봤어요. 영화는 별로였어요. 어쨌거나 이곳에서 흘러가는 시간이니 의미가 있는 거죠.
2
5밀리미터 크기의 멜레를 길게 이어 붙인다. 멜레는 속이 빈 아주 작은 관을 생각하면 된다. 다음 은선 네 개를 1센티미터 길이로 잘라 네 모서리에 붙여 준다. 이 가는 은선이 알을 지탱해 주는 발이 된다. 은선을 붙일 때 한쪽만 열을 가하면 은이 녹아 뭉그러지거나 은선이 잘라질 수 있다. 멜레를 잡고 있는 핀셋도 조심해야 한다. 핀셋 자체도 철이기 때문에 열이 전도돼서 멜레를 녹이거나 붙인 조각을 떨어뜨릴 수 있다. 작업에서 가장 주의해야 하는 건 딴생각을 하지 않는 거다. 퍼렇게 낼름거리는 불길을 오랫동안 쳐다보면 나도 모르게 시선이 생각 안쪽으로 파고든다. 그 사이 불길은 가차없이 은을 녹여버린다. 불작업을 오래 하다 보면 천오백 도가 넘는 불꽃을 만져보고 싶은 충동이 생긴다. 그 유혹을 이기지 못하고 손으로 만지면 순식간에 손가락은 허물이 벗겨지거나 지글지글 타버린다. 한 번쯤은 실패의 순간을 경험해 보는 것도 좋다고 생각할지 모른다. 절대 그렇지 않다. 불은 언제나 찰나로 시작해서 찰나로 끝이 난다. 불길은 과거를 태울 수 없다. 물질에 불과하다.
여러 병의 맥주를 마시는 동안 손님은 단 한 팀도 들어오지 않았다. 빈 속에 술이 들어가니 취기가 금세 올라왔다. 먼저 취해 버리면 안 되었기에 조절이 필요했다. 말이나 글은 역시 몸보다는 거리가 멀었다. 블로그를 통해 그와 난 꽤 많은 이야기를 나누었는데 막상 얼굴을 마주하니 서먹했다. 익명이 보장된 공간 속에선 닉네임을 내세워 적당히 거리를 두고 대화를 할 수 있었지만 이곳에선 그럴 수 없다는 것도 적지않은 부담이었다. 어찌 보면 그런 상황이어서 더욱 부자연스러웠을지도 모른다. 반지를 주문하고 돈을 치르는 형식적인 절차라 생각하지는 않았다. 나는 그를 만나야 할 이유가 있다고 여겼다. 바라나시에 가고 싶어요. 그가 처음 내 블로그에 남긴 말이었다. 그 밑에 내가 다시 질문을 했다. 거긴 왜 가려고요? 잠시 후 그가 남겼다. 그곳에서 죽고 싶어요.
형, 같이 마셔. 그가 다시 주인 남자를 불렀다. 남자가 일어나 맥주를 두 병 꺼내 우리가 있는 테이블로 걸어왔다. 주인과 마주하고도 그는 한참 말이 없었다. 주인 역시 지루할 정도로 조용한 타입이었다. 대화가 없어도 두 사람은 어색해 보이지 않았다. 침묵에 강한 사람이 언제나 신기했다. 타인과 자기를 훑고 지나가는 어색함에 내성을 가지려면 얼마만큼의 고독이 필요한 걸까. 말없는 두 사람을 닮은 카페도 고독해 보였다.
- 형, 내가 말했지? 세공한다는 분.
- 응.
- 반지를 하나 부탁했거든.
- 그랬구나.
- 보여줄까?
- 그래.
그는 테이블 한켠에 밀어넣은 상자를 형에게 건넸다.
- 어때?
- 좋네.
- 한번 껴봐.
- 응?
남자가 느린 손놀림으로 왼쪽 무명지에 반지를 꼈다. 반지는 걸림 없이 들어갔다. 남자는 호기심 어린 눈으로 조심스럽게 반지를 살폈다. 반지를 살피는 형을 바라보는 그의 입가에 소년 같은 미소가 걸쳐졌다. 건조한 보컬의 노랫소리가 홀 안에 스미고 있었다. 헬로헬로헬로헬로. 주인 남자는 여전히 반지를 쳐다보고 있었고 그는 반지를 쳐다보는 형을 지켜보고 있었다. 말이 없는 두 남자는 카페를 이루는 정물과 같이 딱딱해 보였지만 배치되어야 할 곳에 있듯 어색해 보이지 않았다. 그들이 내게 보이는 무관심이 마음에 들었다. 공허한 말들이 존재하지 않는 단순한 공간 속에서 긴장이 조금씩 풀어지고 있었다. 오래간만에 느껴보는 피로였다. 어색함과 편안함이 교차하는 그런 상황을 나는 즐기고 있었다. 남자가 손가락에 낀 반지를 빼 상자 안에 다시 넣더니 시간을 봤다.
- 카레 해논 거 있는데 좀 먹을래? 어때요?
- 배 안 고파.
- 나도 뭐 좀 먹어야 되니까, 조금만 먹어.
남자는 더는 의사를 묻지 않고 주방을 향해 내려가더니 쟁반에 카레가 담긴 접시 세 개를 들고 왔다. 밥에 비해 카레의 양이 많았고 향이 진했다. 주인이 일본식 카레를 배워서 만들어 봤다고 말했다. 내가 먼저 한 입 먹어보고 맛있다고 말했다. 주인이 수줍은 표정으로 웃었다. 그는 몇 숟갈 뜨더니 입맛이 없는지 이내 수저를 내려놓고 맥주를 들었다. 그러다가 기침을 하기 시작했다. 힘없이 뱉어지는 기침이 길게 이어졌다. 어디 아프니? 주인 남자가 걱정스러운 표정으로 그를 쳐다봤다. 감기지 뭐. 선곡한 곡이 다 끝났는지 소리가 끊어졌다. 음악 소리마저 없어지자 그의 기침 소리가 홀 안에 더욱 도드라지게 퍼졌다. 주인이 카운터로 가서 다시 음악을 틀었다. 다행히 그의 기침이 조금씩 잦아들었다. 루 리드가 커트 코베인보다 더 건조한 목소리로 퍼펙 데이를 부르고 있었다. 카페 밖으로 나가고 싶지 않았다. 여기가 세상보다 완벽하게 느껴졌다. 담배 연기에 엉겨붙은 그들과 나의 시간이 타원을 그리며 공간 속을 부유하고 있었다.
음악만 계속했더라면 지금보다 행복했을 거예요. 고등학교 때부터 기타를 쳤어요. 아버지 몰래 전공을 음악으로 바꿨을 땐 해방된 기분이었죠. 대학 때 본격적으로 밴드도 결성하고 작곡도 했어요. 들킬까 봐 집에 거의 들어가지 않고 과방과 친구, 선배집을 전전했죠. 툭하면 굶고 지저분하고 피곤에 찌든 시간이었지만 고생인지도 몰랐어요. 그렇게라도 평생 음악만 하고 싶었는데, 결국 아버지한테 들켜서 쫓기듯 유학을 갔어요. 나 땜에 집안이 발칵 뒤집어지니까 도리가 없었어요. 유학 생활은 너무 힘들었어요. 적성에도 맞지 않는 경영학을 했으니 적응이 됐을 리 없죠. 사는 게 재미가 없으니까 혼자서 술담배를 많이 했어요. 1년 버티다 쓰러져서 한국으로 돌아왔죠. 그때 폐가 많이 상한 거 같아요. 돌아와서도 건강이 회복되질 않았거든요. 얼마 전에 다니던 직장을 그만뒀어요. 제과 회사 창고에서 근무했는데 나쁘지 않았어요. 혼자 있는 시간도 많았는데 그게 차라리 편하더라고요. 지금은 일도 안 하니까 막막하네요. 메인에 올려놓은 사진이 맘에 들었어요. 그거 바라나시 맞죠? 캐나다 있을 때부터 가고 싶었는데. 갠지스 강에 앉아서 석양을 바라보고 싶어요. 정확히 이유를 말하긴 곤란하지만 그게 살아서 제가 하고 싶은 마지막 일이란 생각이 들어요. 지금 폐암 말기예요. 반지는 바둑 무늬에 별자리로 알을 박아넣은 게 맘에 들어요. 그 사람도 이 반지 좋아할 거 같아요. 전 아주 마음에 들어요.
그가 내 블로그에서 봤다던 바라나시는 K의 블로그에서 몰래 가져온 사진이었다. 사진 안쪽 하늘엔 회색 일색의 구름들이 뭉쳐 있었고 바깥쪽 하늘에는 주황과 붉은 기운의 노을이 하늘 전체를 물들이고 있었다. 그 아래 고만고만한 크기의 벽돌집들로 된 가난한 마을이 있었다. 저녁 즈음에 찍은 사진이어서 그런지 전체적으로는 어두운 느낌이었다. 나는 K의 사진보다 이 사진을 찍었을 때 그가 누구와 있었는지가 더 궁금했다. K는 지금도 나를 완강히 거부하고 있다. 내가 남긴 어떤 글에도 답장을 보내지 않았다.
대학 졸업 후 K와 나는 지하에 공방을 차리고 액세서리를 만들어서 인터넷이나 오픈마켓에서 팔았다. 졸업 후 작업실을 크게 확장해 대공을 하는 친구나 대학원에 가는 친구들이 태반이었지만 K와 나는 세공을 택했다. 작업도 좋았고 파는 것도 쏠쏠했다. 우리는 돈을 벌어서 가게를 확장할 계획이었다. K는 손이 빨랐다. K의 손에서는 순식간에 링 은귀걸이가 몇 개씩 만들어지곤 했다. 곰팡내 지독한 지하 작업실이었지만 돈 버는 재미에 우린 시간 가는 줄 몰랐다. 그와 난 작업 파트너로도 잘 맞았다. K가 워낙 쾌활한 성격이기도 했고 그의 얘기에 내가 장단을 잘 맞추는 탓도 있었다. 과내 커플이었던 우린 학교 때도 대부분의 시간을 함께 지냈고, 동기들 역시 동거 중인 우리가 당연히 결혼까지 갈 거라 여기고 있었다.
그날 K는 하루를 꼬박 태장대에 앉아서 월계관 모양의 왕관을 만들었다. 은으로 만든 K의 왕관은 근사했다. 가는 은선으로 덩굴이 뻗어 나가는 모양을 냈고 은판을 넓게 펴서 잎 모양으로 잘라 양쪽으로 붙여서 운치를 냈다. 공들여 왕관을 만드는 K를 보면서 나는 그가 나를 위한 깜짝선물을 준비하는 거라 기대했다. 하지만 왕관은 나를 위한 게 아니었다. K는 과 친구 생일날 그걸 선물했다. 그것도 직접 머리에 씌워 줘 술자리에 모인 동기들로부터 찬사를 받았다. 자리가 파하고 집으로 오는 길에 K와 난 그 일로 조금은 격앙된 말다툼을 했다. 그뿐이었다. 그런데 며칠 후 K의 작업용 앞치마에서 우연히 콘돔을 발견했다. 지하철 화장실 옆에 붙은 자판기 같은 데서 구할 수 있는 일회용 상품이었다. K와 나는 섹스할 때 콘돔을 쓰지 않았다. 왕관이 떠올랐다. 머릿속에서는 이미 과 친구와 K의 정사 장면이 그려지고 있었다. 내가 그런 생각을 하고 있을 때 K가 유쾌한 표정으로 작업실에 들어왔다.
- 많이 만들었어?
- 아니.
- 점심은?
- 생각 없어.
- 근데 너 왜 뾰루퉁하냐? 혹시 그날?
- 신경 꺼.
- 왜 그래?
K가 내 옆에 와 장난을 칠 때 나는 신경질적으로 토치에 불을 붙이고 있었다.
- 왜 그러냐니까?
- 너 Y랑 잤냐?
- 뭐라고?
- 걔랑 잤냐고.
- 어.
K가 태연하게 웃으며 대답했다. 나는 K를 노려봤다. 멀쩡하게 웃으며 그런 말을 하는 K를 이해할 수 없었다. 너 진짜 걔랑 잤어? 어. K는 아무렇지 않다는 듯 장난끼 있는 표정으로 나를 감싸안으며 도가니 옆 집게를 잡으려 손을 뻗었고 그 순간 나는 그의 손을 향해 토치를 내뿜었다. K가 괴성을 지르며 뒤로 물러나 손을 움켜잡았다. K의 손은 흐물거리며 손가락이 모두 한 덩어리로 붙어 버린 것만 같았다. 불길의 온도는 삼천 도가 넘었다. 나는 토치를 끌 생각도 하지 못하고 작업실 바닥을 나뒹굴고 있는 그를 바라만 보고 있었다. 그의 손에서 고름 같은 액체가 바닥으로 떨어졌다. 다친 손과 그것을 움켜쥔 K의 나머지 손 전체가 심하게 떨리고 있었다. 나는 순간 무얼 어떻게 해야 할지 알지 못했다. 그러다가 소리를 질렀을 것이다. 공포에 휩싸여 내지르던 소름 끼치던 비명 소리는 지금도 선명히 기억난다. 그날 이후 나는 가끔 꿈속에서 비명을 질러댔다. 후벼 판 비명 속에선 진한 고름이 흘러 바닥을 흥건히 적시곤 했다.
화상을 입은 K는 더는 세공을 할 수 없었다. 다친 그의 손으로는 정밀한 어떤 작업도 불가능하다고 했다. 작업실이 학교 근처에 있었으므로 우리 사건은 어느새 과내 전체에 퍼져 있었다. 내가 홧김에 K를 죽이려 했다는 소문이 나돌았다. 몇 달 뒤 K는 떠났고 나만 남았다. 고문과 같은 시간이 지나갔다. 그가 없는 작업실에서 혼자 토치에 불을 붙일 때마다 나는 내 손에 불길을 내뿜는 상상을 했다.
3
이제 날개 차례다. 은선을 구부려 3자 모양으로 틀을 만든 후 은선에 대고 같은 모양으로 하나 더 만든다. 땜과 불을 이용해 멜레를 이어 만든 가운데 몸통에 조심스럽게 붙인다. 단련된 세공자들은 이 모든 과정이 몸에 숙련되어 있다. 몸이 기억하는 것이다. 몸은 거추장스러울 만큼 많은 기억들을 품고 있다. 다음 더 가는 은선을 만든다. 0.8밀리미터 정도쯤이면 될 거 같다. 불로 은선에 열을 가해 유연하게 한 다음 그것으로 덩굴처럼 뱅글뱅글 만다. 날개의 결을 만드는 것이다. 결을 붙이는 건 오히려 쉽다. 가늘기 때문에 저절로 조심하게 된다. 살짝 불길을 주고 붕사를 묻힌 뒤 80땜을 불에 넣어 둥글게 만들어 핀셋에 붙여놓고 틀과 가는 은선 사이에 살짝 열을 가한 후 땜이 녹아들기 시작하는 찰라 입김을 훅 불면 성공이다. 아직은 작업할 게 남아있다. 더듬이. 더듬이는 최대한 길게 뻗도록 한다. 닿을 수 있는 모든 것들을 향해 자신이 살아 있음을 증명할 수 있도록. 나비는 방향을 이탈했다고 걱정할 필요가 없다. 더듬이가 있으니까. 나에게 더듬이가 있다면 너를 찾아서, 내 손으로.
눈을 감고 있는 그의 마른 몸이 좌우로 휘청거렸다. 카페 주인과 마찬가지로 나 역시 그에게 술을 그만 마시라거나 담배를 그만 피라거나 말할 수 없었다. 어쩌면 오늘 이 시간이 그에게 마지막이 될지 모르니까. 마지막이라는 게 얼마나 끔직한 건지 나는 아직 가늠할 수 없다.
자정은 일찌감치 넘어간 것 같았다. 열어 놓은 문으로 새벽 공기가 들어왔다. 담배 냄새로 꽉 차 있던 실내가 환기되는 느낌이 나쁘지 않았다. 그동안 커피 손님이 한 테이블 있었을 뿐이었다. 그들은 앉기도 전에 커피를 주문했고 채 30분이 지나지 않아 서둘러 일어났다. 창밖으로 맞은편 호텔 홀리데이의 붉은 간판이 깜박이고 있었다. 커피를 마신 두 사람은 부둥켜 안고 육교를 건너 호텔 쪽으로 걸어가고 있었다. 커피 마시는 그 시간마저 참을 수 없었던 걸까. 호텔 주차장에서 검은 세단이 천천히 빠져나오더니 차도 속으로 돌진했다.
- 주말엔 장사를 안 하셔도 되겠어요.
- 원래 잘 안 열어요. 오늘은 얘가 온다기에…….
- 두 분은 친하신가 봐요.
- 친하죠. 알고 지낸 지 십 년도 넘었으니.
주인이 그를 쳐다보며 웃자 그도 따라서 희미하게 웃었다. 십 년 전 그의 모습은 지금과 많이 달랐을 것이다. 나는 무대에서 연주하는 남자와 그의 모습을 잠시 상상했다. 두 사람 모두 열정적이고 에너지 넘치는 음악을 발산했을 것이다. 그들의 연주를 들으며 나도 정신없이 머리를 흔들고 싶다. 십 년 전 나는 어땠을까, 아니 K가 떠나기 전 나는, 기억도 나지 않는다. 나의 시간은 그날 이후로 멈춰 버린 것 같다. 호텔 쪽을 다시 바라봤다. 로비로 들어가면 붉은 조명 아래 웨이터가 서 있을 것이다. 그는 매우 정중한 태도로 손님을 맞겠지. 웨이터들이란 언제나 친절하니까. 친절한 웨이터가 키를 건네주면 계단이나 엘리베이터를 타고 객실로 들어가서는 침대에 털석 주저앉고 싶다. 씻지 않은 채로 누군가와 섹스를 하고 지쳐서 곧바로 잠에 빠져들고 싶다. 주인이 맥주를 더 꺼내서 들고 왔다. 말이 없는 상대가 좋을 것이다. 보컬의 탁한 음성은 한껏 고조되고 있었다. 허스키한 음성이 안간힘을 다해 격정을 노래하고 있었다. 사는 건 이렇듯 안간힘을 쓰는 것이다.
- 형!
- 형.
- 응?
- 나 취한 거 같아. 기분이 좋아.
- 그래.
- 형, 나 비행기표 끊었어. 바라나시 가려고.
- 여행 좋지. 언제 가니?
- 다음 주에 가.
- 그렇게 빨리?
- 형.
- 응?
- 형……. 낯설어.
얼마 전에 차를 몰고 한강에 갔다 왔어요. 일할 시간에 혼자 강물을 바라보고 있다는 게 이상했어요. 다른 사람들이 나를 어떻게 생각할까 걱정도 되고 비참한 기분도 들었어요. 처음 내 블로그에 들어왔을 때 내가 실연당한 사람일 거라 생각했다고 했죠? 내가 올린 글이 절망적이고 외로워 보여서요. 그깟 실연 때문에 엄살떠는 거 같다는 생각도 들었겠지요? 죽어가는 사람일 거라곤 짐작조차 못했다고 했죠? 나라도 그랬을 거예요. 나도 실감이 나지 않아요. 끔찍하게 몸이 아플 때만 내가 죽어가고 있구나 싶으니까. 평소엔 정말 아무렇지도 않아요. 무섭죠. 버틸 만하다가도 곧 죽을 거란 생각이 들면 말할 수 없는 공포감이 엄습해요. 금방 죽든 더 살다 죽든 사람은 어차피 죽는 거니까 죽는 게 억울하진 않아요. 정말 두려운 건 잊혀지는 거 같아요. 죽은 뒤 누구도 나를 기억해주지 않으면 어떡하지, 나란 존재가 의미 없이 망각된다는 사실이 끔찍하게 싫은 거예요. 그 생각이 들면 참을 수 없이 외로워져요. 내가 한때 음악을 했다는 걸, 이 세상에 나란 사람이 존재했다는 걸 아무도 기억해 주지 못한다는 건 슬픈 일이니까. 그걸 놓아버릴 수 없으니까. 나를 평생 기억하길 바라는 사람. 그 사람에게 이 반지를 주려고요. 손에 낀 반지를 볼 때마다 나를 생각해 달라고요. 바보 같죠? 이기적이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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줄을 달 수 있는 고리를 달고 나면 기본적인 골격은 갖추어진 셈이다. 땜질로 시커매진 나비틀을 유산으로 세척한 다음 덤블링 기계에 넣어 돌리면 광을 내지 않아도 은빛이 살아난다. 다음은 큐빅을 선택하는 차례. 날갯짓을 하는 나비가 최대한 화사하려면 화려한 색의 큐빅을 골라야 할 거다. 아쿠아마린, 가넷, 자수정, 페리도트를 골랐다. 멜레로 만든 난집에 큐빅을 넣고 은선을 조여준 다음 조심스럽게 광을 낸다. 그리고 그것에 줄을 달면 나비 세공은 모두 끝이 난다. 은은 상온에서 광택이 오래가지 않는다. 도금은 하지 않기로 한다. 오랫동안 반짝거릴 필요가 없다. 이미 죽은 거니까. 작업실 한 켠에 매달린 거울을 통해 목에 걸린 나비 목걸이를 바라본다. 양손을 펼쳐 나비처럼 팔랑거리기도 하고 몸을 좌우로 비틀며 나비가 발산하는 은빛을 감상해 보기도 한다. 이미 죽은 거니까. 그 파닥거리는 목걸이를 어딘가로 내던진다. 그리고 작업실 문을 닫아 가둔다.
- 난 내가 싫어요.
나는 그를 향해 그렇게 말했다. 술에 취한 그가 고개를 들어 나를 바라보았다. 주인도 나를 쳐다봤다. 시간이 잠시 멈추었다가 다시 걸어가는 것 같이 단절감이 느껴졌다. 난 내가 너무 낯설어. 그의 말이 끝나자마자 나는 나도 모르게 이 말을 내뱉었다. 주인이 담배를 꺼내 피웠다. 그가 뱉은 희뿌연 연기가 어둠 속에 포물선을 그리며 사라졌다. 주인이 미소를 지으며 말했다.
- 자기 좋아하는 사람 별로 없어요.
위로가 되지 않았다. 할 수만 있다면 하나도 남김없이 모조리 지워 버리고 싶었다. K마저 나를 기억하지 못하도록. 아니 그를 향한 내 집착을 태워 버리고 싶었다. 하지만 나는 여전히 기억 속에서 버둥거리고 있었다. 그를 상하게 했다는 자책감이 무섭게 나를 망가뜨리고 있었다. 그날 무슨 일이 있었던 걸까. 나는 왜 그래야만 했을까.
K가 입원한 병실 문앞에는 그의 어머니가 버티고 서 있었다. 그녀는 한 발짝도 나를 들여보내지 않겠다는 듯 매섭게 나를 노려봤다. 죄송해요. 그녀가 나를 향해 욕설을 퍼부으며 달겨들었다. 아들이 하루아침에 불구가 되었으니 그럴 만했다. 침대 위에 앉아 있던 K가 달려와 한 손으로 어머니를 잡아 말렸지만 어머니는 억센 손으로 내 머리채를 휘어잡았다. 이년, 이 미친년이 내 새끼를 저렇게 만들어? 나는 그녀의 손에 여기저기 내처졌다. 처 죽일 년, 상종 못할 나쁜 년. K가 흥분하며 소리치는 어머니를 달랬다. 엄마, 그만 해. 한 차례 퍼부운 어머니를 K가 내보냈다. 분이 풀리지 않았는지 그녀가 퍼붓는 욕설로 복도가 쩌렁쩌렁 울렸다. 병원 사람들이 놀란 듯 병실 안을 힐끔거렸다. K가 병실 문을 닫았다. 나는 바닥에 주저앉아 한참을 울었다. K가 한 손으로 나를 일으켜 세워 의자에 앉힌 다음 음료수를 꺼내왔다. 따 주진 못하겠다. K가 아무렇지 않다는 듯 웃었다. 미안해.
- 괜찮아.
- 아니야, 내 잘못이야. 내가 미친 거야.
- 실수였을 뿐이야. 니 잘못 없어.
- 미안해.
- 괜찮대도.
- 진짜 미안해.
- 그러지 마.
- 너 경애랑 안 잤지?
- 뭐?
- 그치? 안 잔 거지?
- 지금 무슨 얘길 하는 거야?
- 그냥 장난이었지?
- 뭐가?
- 그날 말야. 경애랑 잔 거 아니지?
- 너 정말 무서운 애구나.
- 그 생각만 하면 미칠 것만 같아. 말해 줘. 아니지?
그만 해! K가 소리를 질렀다. 잤어. 나가. 이제 오지 마. 단지 말실수였을 뿐이라고, 그러니까 잘못은 나에게 있다기보다 그런 빌미를 제공한 너에게 있다고 나는 절규했다.
- 마지막으로 한 번만 말해 줘. 아닌 거지?
- 잤어 잤다구, 잘 거야. 됐니?
K의 눈빛은 이미 우리 관계가 끝났음을 말해주고 있었다. 몸에 남긴 상처보다 자신을 믿지 못하는 내 말에 그는 더 큰 상처를 받았다. 그를 위한 사랑은 없었다. 나에게 남아 있는 건 오직 이기적인 내 사랑뿐이었다. 화려하게 빛을 뿜어내는 길고 아름다운 더듬이를 가졌지만 죽어 있는 나비처럼. 진짜가 될 수 없는 허상뿐인 집착. 그것이 내 사랑의 실체였다.
저한테 말했죠? 사랑은 이기적인 거 같다고요. 사람은 누구나 자기 자신에게만 몰두하죠. 죽음도 마찬가지예요. 무서운 속도로 달려드는 죽음 앞에서 절망하는 내 모습을 볼 때마다 낯설고 또 낯설어요. 내가 지금까지 이렇게 살고 싶었던 적이 있었던가 싶어요. 한 시간이, 하루가 이렇게 절실하고 강렬했던가 싶어요. 하지만 죽음이 맹렬하게 달겨들면 들수록 삶은 더 또렷해져요. 어느 순간에는 하나인 것처럼 느껴지기도 해요. 남아있는 사람들을 위해서나 나를 위해서나 최대한 품위를 지키고 싶어요. 무너지고 싶지 않아요. 어쩌면 저는 바라나시에 못 가게 될지도 모르겠어요. 몸상태가 계속 안 좋아지고 있거든요. 그렇지만 죽어도 그곳에는 반드시 갈 거 같아요. 그땐 지금보다 더 홀가분하게 강 주변을 날아다닐 수도 있겠지요. 형이 나를 영원히 기억해 줬으면 좋겠어요.당신도 지금보다 가벼워졌으면 좋겠어요. 과거가 아닌 현재 안에서 살아가세요. 죽고 싶은 마음으로 살아가세요. 죽을 때까지만요.
테이블 위에는 빈 술병들과 먹다 만 안주들이 널려 있었다. 그는 아까보다는 말짱한 얼굴로 시선을 내리깐 채 앉아 있었다. 음악을 듣는 건지 생각에 잠긴 건지 알 수 없었다. 몇 시나 됐지? 주인이 다시 시간을 봤다. 세 시 넘었네. 그가 체념한 듯한 표정으로 웃었다. 이제 가야겠다. 그가 카운터 쪽으로 걸어가며 말했다. 얼마야? 됐어, 그냥 가. 아냐 형, 나 돈 많아. 그가 남자를 향해 지갑을 열어 보였다. 남자가 놀란 표정으로 웃었다.
- 너 무슨 돈을 이렇게 넣어 갖고 다녀?
- 돈 많으면 좋은 거지 뭐. 형 우리 이 돈 가지고 어디 갈까?
- 가겐 어떡하고?
- 가겐 제가 대신 봐드릴게요.
주인이 겸연쩍게 다시 웃었다. 카페 밖으로 나왔다. 새벽 공기가 찼다. 추운지 그가 남방 깃을 올리며 몸을 웅크렸다. 남자가 손에 들고 있던 검은색 목도리를 그의 목에 둘러주었다.
- 어디로 갈 거니?
- 집에 가야지.
- 데려다 줄까?
- 아니야, 여기서 그냥 택시 타고 갈게.
- 그래. 여행 가기 전에 또 올 거지?
- 그럼.
주인이 카페 옆 주차장에 세워 놓은 검은색 오토바이에 올라탔다. 그가 오토바이 가까이로 다가가더니 형을 부둥켜 안았다. 남자도 엉덩이를 걸쳐 놓은 상태로 그를 감싸안았다. 그가 더 세게 형을 안았다. 남자가 그의 등을 토닥여주었다. 잠시 후 그가 손을 풀자 남자가 시동을 걸었다. 헬멧을 쓴 주인이 그와 나를 향해 코를 찡긋거렸다. 이별 앞에 서 있는 그의 모습은 쓸쓸해 보였다. 그의 절실함을 위로해 줄 무엇도 존재하지 않는 것 같았다. 그러기엔 웃는 남자의 얼굴이 죽어가는 그와 비교될 만큼 넘치도록 건강해 보였다. 오토바이는 굉음을 내며 빠르게 사라졌다. 엔진 소리가 사그라들었지만 남자는 차도 쪽을 계속 바라보았다.
우리는 카페 앞 계단에 걸터앉았다. 그도 나도 서두를 필요가 없었다. 육교에 설치된 조명들이 거리의 풍경들을 희미하게 비치고 있었다. 조명을 받아 주황빛을 띠는 가로수 들이 바람에 흐느적거렸다. 열 맞춰 늘어서 있는 나무들이 바람 탓인지 유령처럼 느리게 움직이는 것처럼 보였다. 맞은편 호텔 간판이 여전히 붉게 깜빡거리고 있었다. 몇 안 되는 차들이 빠른 속도로 질주했다.
- 바람이 차네요.
내가 몸을 움추리자 그가 한 손을 뻗어 내 등을 감싸 안았다. 내 몸이 그의 몸 안으로 동그랗게 안겨졌다. 그 역시 떨고 있음을 느낄 수 있었다. 그렇게 잠시 있으니 온기가 느껴졌다. 용기가 났다. 가방에서 나는 그것을 꺼내 그에게 건넸다.
- 강에 던져 주세요.
그가 나비를 보며 미소를 지었다.
- 그럴게요.
- 힘껏 던져 주세요.
- 예, 힘껏 던질게요.
그가 나를 안은 팔에 힘을 줬다. 놀랍도록 고마운 위안이었다. 눈물이 나왔다. 우리는 차도 맞은편 호텔 쪽을 바라보았다. 오토바이 한 대가 빠르게 지나갔다. 풀냄새 섞인 바람이 불어왔다. 눈앞으로 바라나시 풍경이 펼쳐졌다. 희고 회색 일색의 구름들이 뭉쳐 있었고 바깥쪽 하늘에는 주황과 붉은 기운의 노을이 하늘 전체를 물들이고 있었다. 아래로 고만고만한 크기의 벽돌집들로 된 가난한 마을이 있고 그 앞으로 바라나시 강물이 출렁거리고 있었다. 저녁 햇빛은 물빛을 황금색으로 물들다 다시 회색으로 물들이고 있었다. 강 언저리에 그가 자리를 잡고 앉아 강의 출렁거림을 바라보고 있었다. 붉고 아름다운 펀자비를 입은 검은 피부의 여자가 강으로 걸어 들어갔다. 여인의 실루엣은 눈부시게 선명했다. 그는 황홀한 듯 반쯤 감은 눈으로 언제까지고 그 강을 바라보는 것이었다.
영혼의 껍질이 퍽퍽 깨지는 소리가 들리더니
영혼의 가장 깊은 알갱이들이 들썩거릴 만큼
경쾌해졌다. 네가 떠나간 후부터
날아갈 수 있을 것만 같다
아직 나는 날아가지 못한다
그 깊은 알갱이들과 함께 육중한 무게로
살짝 떠다니고 싶어진다
너는 누구일까?
어디로 떠나버린 걸까 혹시
내 속 알갱이의 일부로써 녹아든 것은 아닐까 만일 그렇다면
나는 껍질의 남겨진 지분(脂粉)까지 끊임없이 떨궈내면서
즐거워하며, 온몸으로 밀고 나가는, 움직이는 자의 이름으로,
지상을 살짝 버릴 수 있을 것 같구나
정말 그러하다면
가장 가까운 하늘에다 나의 감옥을 짓겠다
문을 잠그고서 살점을 갈라 죄다 풀어놓으면
각양각색의, 무한증식되어 감옥을 가득 채우는,
우여곡절 많은 오 아름다운 알갱이들
그들과 놀면서 나는 진정으로 행복할 수 있다.